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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워 에디 위보워 (Sarwo Edhie Wibowo) - 수하르토의 오른팔, 유도요도의 장인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사르워 에디 위보워 (Sarwo Edhie Wibowo) - 수하르토의 오른팔, 유도요도의 장인

beautician 2019. 1. 14. 10:00

사르워 에디 위보워 (Sarwo Edhie Wibowo)

수하르토의 오른팔, 유도요도의 장인, 1965년 공산당 숙청와 서파푸아 합병의 핵심인물

 



 

1. 개요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 1925725에디는 중부자바 뿌르워레조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 가정에 태어나 1989129일 자카르타에서 6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인이었고 그의 딸 크리스티아니 헤라와티(Kristiani Herrawati)는 훗날 제 6대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의 영부인이 되어 아니 유도요노(ibu Ani Yudhoyon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의 아들 쁘라모노 에디 위보워(Pramono Edhie Wibowo)도 군요직을 거쳐 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그는 1965930일 쿠데타 진압 당시 대령계급장을 단 RPKAD(현재 특전사Kopassus이 전신) 사령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1965-1966년 사이 백만 명 전후의 인도네시아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학살사건에서도 눈에 띄는 군사활동을 하여 학살의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이후 BP-7센터의 회장, 주한 대사, AKABRI(인도네시아 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2. 930일 쿠데타

사르워 에디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방어를 위해 무술을 익혔다. 그는 성장기에 태평양과 아시아에서 연합군을 무찔러 승리를 거두는 일본군의 모습에 동경을 품어1942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인으로 구성된 보조부대인 조국수호단(PETA)을 창설하자 수라바야로 가서 여기 입대했다.

1945817일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사르워 에디는 훗날 인도네시아 정규군의 모체가 되는, 그러나 당시엔 아직 민병대 수준이었던 국민치안단(BKR)에 다시 입대했고 대대병력을 구성했다. 그러나 독립 초창기 혼란상황에서 그가 만든 대대가 해체되자 실망한 그를 게속 군인으로 남도록 설득하고 격려한 것은 동향 출신의 아흐맛 야니였다. 야니는 사르워 에디를 중부자바 마글랑으로 불러들여 그곳 대대에 합류시켰다.

사르워 에디는 1945년부터 1951년까지 디포네고로 사단의 대대장으로 근무했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는 국립사관학교의 부연대장,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육군특수전연대(RPKAD-Regimen Parakomando Angkatan Darat) 사령관을 역임했다.

 


RPKAD(육군특수전연대)와 오늘날 KOPASSUS(특전사)의 부대 로고

 

RPKAD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특수부대로 육성하기 위해 창설한 부대로 훗날 Kopassus(특전사)로 발전했다. 사르워 에디가 이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엔 야니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1964년 야니가 육군사령관이 되면서 RPKAD를 이끌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르워 에디가 930일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반란군에게 그 야니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눈이 뒤집혔을 것임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930일 사태가 벌어진 것은 사르워 에디가 RPKAD 사령관으로 있던 시기였다. 1965101일 아침, 야니를 포함한 여섯 명의 육군 장성들이 자택에서 살해되거나 납치되어 할림 공군기지로 끌려갔다. 이러한 납치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신원미상의 부대들이 국립기념탑(MONAS)광장, 대통령궁, 인도네시아 국영 라디오 방송국(RRI)과 통신건물을 점령했다.

사르워 에디와 그의 RPKAD부대는 자카르타 찌잔뚱(Cijantung) 소재 RPKAD 본부에 있었는데(지금도 Kopassus 특전사 사령부가 같은 곳에 있음) 헤르만 사렌스 수디로 대령(Colonel Herman Sarens Sudiro)이 그곳을 찾아왔다. 수디로는 육군전략예비사령부(Kostrad)로부터 메시지를 가져왔다며 자카르타에서 벌어지고 있던 급박한 상황을 사르워 에디에서 설명했다. 사르워 에디는 이제 육군전략예비사령관 수하르토 소장이 육군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수디로 대령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사르워 에디는 명령을 따르겠다는 메시지를 수디로 대령 편에 수하르토 소장에게 보냈다.

수디로가 떠난 후 이번에 930일 사태의 주역 운뚱 중령이 속해 있던 짜그라비라와 (Cakrabirawa) 대통령 경호부대의 사부르(Sabur) 준장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사르워 에디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사르워 에디는 자신은 이미 수하르토의 편에 서기로 했으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부르 준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날 오전 11, 사르워 에디는 Kostrad 본부에 도착했고 오후 6시를 기해 RRI 국영 라디오 방송국과 통신국 건물들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오후 6시는 신원미상의 부대들에게 최후통첩한 항복 마감시간이었다. 사르워 에디는 오후 6시에 예정대로 공격명령을 내렸으나 건물 안의 반군들은 대부분 할림공군기지로 철수한 후였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30분 만에 목표건물들을 모두 접수할 수 있었다.

 

자카르타 시내 상황이 정리되자 수하르토는 이제 할림공군기지로 눈을 돌렸다. 그곳은 납치된 장성들이 끌려간 곳이었고 G30S 쿠데타를 지지하는 공군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수하르토는 사르워 에디에게 그 공군기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전투는 102일 새벽 2시에 시작되었다. 사르워 에디와 그의 RPKAD는 오전 6시까지 공군기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3. 신질서 정권의 행동대장

할림 공군기지를 점령한 사르워 에디가 다시 수하르토를 만났을 때엔 수카르노 대통령이 그들을 보고르 궁으로 소환한 상태였다. 수카르노는 수하르토가 자신의 명령을 무시했다며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는데 거기서 사르워 에디는 수카르노가 살해당한 여섯 명의 장성들의 죽음에 대해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장군들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수카르노는 혁명 중에 그 정도 일은 보통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니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살해된 장성들 중엔 사르워 에디의 은인 아흐맛 야니도 있었는데 말이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1965104일 루방 부아야의 폐우물에서 장성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작업도 그의 부대 몫이었다. 19651016일 수카르노는 수하르토를 육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때 인도네시아 공산당(PKI)G30S 쿠데타의 몸통으로 지목되어 전국적으로 반공 정서가 들끓고 있던 중이었고 사르워 에디는 중부자바의 공산당 근거지에서 PKI 당원들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 몇 개월동안 죽은 희생자들의 숫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치가 언급되고 있다. 최초 예측은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 정도였다. 196512월에 수카르노는 78,000명이라는 숫자를 보고받았고 그가 탄핵된 후 이 수치는 78만 명으로 수정되었다. 78,000명이란 희생자 숫자를 적게 보이도록 하려는 수카르노의 협잡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수년동안 다양한 예상 숫자가 거론되었는데 6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의 매우 큰 오차범위를 보이는 추정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최소한 4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1989년 사르워 에디는 자신의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국민대표의회(DPR) 의원에게 당시 학살이 자행되던 시절 3백만 명가량이 죽었음을 시인한 바 있다.

1966년 초 높은 인플레이션과 맞물린 반공정서는 인도네시아 국민들 앞에서 수카르노의 남은 인기마저 갉어 먹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학생행동전선(KAMI)같은 청년단체들이 반수카르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1966110일 반둥에서 KAMI는 수카르노와 PPCA 앞에 국민의 3대 명령이라는 것을 주창했다. 그들은 공산당 금지, 내각 내 PKI 동조자들의 체포 구금, 그리고 물가인하를 요구했다.

수하르토는 군과 시위대를 여하히 잘 조율하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1966년의 첫 달 동안 사르워 에디는 Kostrad 참모장 께말 이드리스(Kemal Idris)와 함께 KAMI의 데모를 조직하고 지원했다. 1966226일 수카르노는 공식적으로 KAMI를 금지했으나 사르워 에디와 께말이드리스는 그들이 시위를 계속하도록 부추겼다. 사르워 에디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UI)에서 학생들과 교류하며 연대를 과시했다.

자바의 전통주의자인 수하르토는 수카르노의 강력한 정적으로 성장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수카르노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늘 조심스러운 행보를 했다. 그러나 19663월에 이르러 그는 이제 수카르노를 힘으로 압도할 준비가 되었다. 그는 RPKAD를 동원해 수카르노의 드위꼬라 수정내각에서 PKI 동조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가 수카르노의 안전에 위험이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지막 순간 명령을 취소했지만 이미 되돌리기 늦은 상황이 되어 있었다.

1966311일 아침에 열린 내각회의에 수하르토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사르워 에디와 그의 부대가 정체를 밝히지 않고 회의장소인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수카르노는 보고르로 탈출했지만 그날 오후에 전권을 수뻐르스마르(Supersemar) 문건을 통해 수하르토에게 넘기게 된다.

물론 이 스토리 전개는 마치 수하르토가 정권찬탈을 의도하지 않았는데 군사작전이 취소되지 않아 어찌어찌하다 보니 본의아니게 정권을 쥐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수뻐르스마르를 받아낸 것이 정말 수하르토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을까?

1967년 사르워 에디는 수마트라로 발령을 받아 RPKAD 사령관직을 마감하고 코담 II 부낏바리산(Bukit Barisan) 부대장이 되었다. 그는 수마트라 전역에서 인도네시아 국민당(PNI)을 금지하여 수카르노의 권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4. 신질서 급진파 (New Order Radical)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사르워 에디의 지지는 굳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피벌로 따지자면 그는 훗날 학자들이 신질서 급진파라 일컫는 파벌로 분류된다. 사르워 에디는 께말이드리스, 코담 VI 실리왕이 사단장 하르토노 렉소 다르소노(Hartono Rekso Dharsono) 등과 함께 정당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개발과 현대화에 방점을 둔 비이념적 집단들이 나서길 원했다.

 


신질서 급진파: 사르워 에디 위보워, 하르토노 렉소 다르소노, 께말이드리스

 

그는 이후 사르워 에디는 서부 이리안(지금의 서파푸아)으로 발령을 받아 코담 XVII 쩬드라와시(Cendrawasih)부대장이 되어 서부 이리안의 인도네시아 합병 여부를 결정하는 서부 대의원 간접투표안 자유선택행동’(Act of Free Choice)에 간여하여 합병을 성사시켰고 이후 파푸아 저항군/반군들을 격퇴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수하르토가 권좌에 오르는 것을 도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사르워 에디 역시 점차 새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다. 해가 지나면서 수하르토는 사르워 에디 같은 지지자들을 국정 운영에서 제외시키고 그 대신 알리 무르토포 같이 이제 사르워 에디의 계급에 다다른 그의 동료들 조언에 더욱 귀을 기울였다. 께말이나 다르소노의 경우와 같이 신질서 급진파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수하르토의 의심도 날로 커갔다.

그가 1970년 정부 부패상황에 대해 말한 것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때부터 사르워 에디에겐 외양은 그럴 듯하지만 자카르타의 중앙 정치무대와는 동떨어진 직책들만 주어졌다. 1970년에서 1973년까지 사관학교 교장, 1973년부터 1978년까지는 주한 대사,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외무부 감찰총장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1984년 수하르토가 빤짜실라를 국가이념으로 삼자 사르워 에디는 빤짜실라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지침 안착 감독기구’(BP-7)라는 것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87년엔 국민대표의회(DPR)의 의원으로 선출되지만 1988년 수다르모노(Sudharmono) 부통령으로 지명되자 이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출하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5. 말년와 유산

그는 인도네시아 태권도연맹 총재이기도 했다.

그는 1989119일 사망해 중부자바 뿌르워레조의 고향인 응우빠산, 빵엔주루뜽아 (Ngupasan, Pangenjurutengah )에 묻혔다. 2015년에 이르러 그는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발표는 1965년 쿠데타 당시 그의 역할과 맞물려 논란을 빚었다.

사르워 에디는 수나르띠 스리 하디야(Sunarti Sri Hadiyah)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의 딸 크리스띠아니 아니헤라와티(Kristiani "Ani" Herawati)는 훗날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와 결혼했다,

그의 자녀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1. 위지아시 짜히야사시(Wijiasih Cahyasasi)
2.
위라하스티 쩬드라와시(Wrahasti Cendrawasih)
3. 
끄리스띠아니 헤라와티(
Kristiani Herrawati)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대통령과 끄리스띠아니 헤라와티 영부인 부부

 

4. 마스뚜티 라하유(Mastuti Rahayu)

5. 쁘라모노 에디 위보워(Pramono Edhie Wibowo)


쁘라모노 에디 위보워


6. 하르딴토 에디 위보워(Hartanto Edhie Wibowo)

 

 끄리스띠아니 헤라와티는 인도네시아 6대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의 청년장교 시절 결혼하여 훗날 영부인이 되었고 쁘라모노 에디 위보워는 얼마 전까지 인도네시아군 총참모총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