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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신질서정권의 첫 폭동: 말라리 사태 (Malari Incident)

beautician 2019. 1. 4. 10:00


말라리 사태

Peristiwa Malari / Malari Incident

 



 

1. 개요

말라리 사태(Peristiwa Malari)는 말라쁘따까 리마블라스 자누아리(Malapetaka Lima Belas Januari-1 15일의 재난)를 줄인 말로 1974 1 15일부터 16일 사이에 벌어진 학생 데모와 폭동을 말한다. 일본 수상 타나카 카쿠에이의 방문에 기해 학생들은 해외 투자유치를 하며 벌어지는 부패과 고비용, 불평등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시위가 폭동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공작원들이 고의적으로 학생들을 도발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적잖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태로 11명의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고 수백 대의 차량과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이 폭동의 결과로서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부는 외국 투자자들들이 토착 인도네시아인과의 파트너쉽을 의무화하는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들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군 부사령관 수미트로 장군(General Sumitro) 장군을 해임하고 여러 강압적인 대응조치들을 취했다.

 

2. 배경

1966년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부 초창기만 해도 경제개발정책은 전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곧 불만도 표출되었다. 예전 실권을 쥐고 있던 민족주의자들과 마슈미당(Masyumi Party)은 지도부를 교체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민간인 정치가들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고 행정부를 제외한 정부의 모든 부처들의 중요성이 상실되어 가던 차였다. 수하르토의 골카르당(Partai Golkar)은 공무원들의 몰표를 강요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선거구에 금전적 지원을 약속하는 방법으로 197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정부에 대한 환멸은 더욱 깊어 갔다. 한때 신질서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부패척결은 전혀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부패의 제도화, 기정사실화가 진행되었다. 화교들과 결탁하여 부를 부풀려 금융전문 장군들이라 불린 군장성들에게 세간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들 중 한명인 수조노 후마르다니(Sujono Humardhani)는 가장 활동적으로 일본기업들에 접근해 인도네시아 투자를 종용한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렇게 받은 투자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개인적으로 획득하고, 토착 인도네시아인들 대신 화교들이나 군 고급장교들과 사업적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이런 상황을 가증스럽게 느낀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1973년 태국 학생시위의 성공에 자극받아 자신들도 정부 정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진: 수조노 후마르다니 소장)

 




3. 폭동

1974 114일 일본의 타나카 카쿠에이 수상이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했다. 일본이 현지 경제와 산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현실에 분노한 학생들은 알리 무르토포(Ali Murtopo)의 사무실 앞에서 타나카 수상과 후마르다니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군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군을 움직일 위치에 있던 수미트로 장군이 이를 방치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사진: 수미트로 장군(왼쪽))

다음날 아침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격인하와 부패종식, 그리고 수하르토 개인 비서관 집단인 아스쁘리(Aspri-Asisten Pribadi)의 해체를 요구하며 또다시 자카르타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오후에 들어서면서 특수부대 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군중을 도발하며 폭동으로 돌변했다. 수백 대의 차량이 불탔는데 대부분이 일본제 자동차들이었다. 많은 상점들이 약탈당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의 존재를 가장 시각적으로 보여주던 수디르만 거리의 토요타 브랜드 자동차 딜러 아스트라(Astra) 매장도 피해를 입었다. 

해가 저물면서 폭동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을 겨냥한 사냥으로 진화하여 화교 소유의 글로독(Glodok) 지역 상점들에서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고 스넨(Senen) 지역 상가에서 가장 철저한 파괴행위가 벌어졌다. 경비원들은 폭도를 막지 못했고 그 와중에 수미트로 장군이 폭도들에게 친근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그러나 일단의 부대들은 하달된 명령에 따라 실제로 약탈자들에게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가 시위를 방조하여 정권을 위협하려는 수미트로 장군과 시위를 폭력화, 불법화하여 시위대와 그 배후의 수미트로를 차제에 때려 잡으려는 정부측 알리 무르토포 장군이 물밑에서 격돌한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날 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학생회장 하리만 시레가르(Hariman Siregar)는 인도네시아 국영 텔레비젼(TVRI)를 통해 이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폭동의 종식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가 수미트로 측에게 협박을 당해 이런 방송을 했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다음날 KKO(해병대), RPKAD(공수부대), Kostrad(육군전략예비사령부)의 병력들이 총격을 가하며 폭도들을 해산시켰다. 이는 알리 무르토포가 수미트로를 결과적으로 샹황을 압도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타나카 일본수상은 폭동을 피해 이미 인도네시아를 떠난 상태였다. 사흘 간에 걸친 폭동으로 11명이 사망하고 17명 중상, 120명 경상에 770명이 연행되었다. 1,000대 정도의 차량들이 파손되고 144개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불탔다.

 

4. 후유증

전군 부사령관 수미트로 장군은 폭도들을 선동했다는 비난 속에 해임당했다. 그를 지지하던 사령관급 장성들은 대사로 먼 나라에 보내지거나 실권이 없는 참모직으로 내려 앉아야 했다. 이는 수미트로 장군의 라이벌인 알리 무르토포 장군(General Ali Murtopo)이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제출한 라마디 문건”(Ramadi Document)에 의한 것이었는데 'S' 이니셜을 가진 한 장군이 1974 4월에서 6월 사이에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수미트로 장군을 지목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말라리 사태 이후 군은 시민들이 시위나 매체 등을 통해 불만을 표출할 때다마 예전 한때 가졌던 미약한 연대감마저 완전히 저버리고 더욱 강압적,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열 두 개의 신문과 잡지들이 인쇄 및 출판허가를 취소당했는데 이들 중엔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 같은 매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타르 루비스(Mochtar Lubis)같은 언론인들은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비위를 거스르는 언론인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일터에서 쫒겨나면 다시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사진: 목타르 루비스)

말라리 사태가 벌어진 후 일주일도 안되어 신질서 정권은 토착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제고하는 일련의 규정들을 내놓았다. 해외 투자자와 토착 인도네시아인과의 파트너쉽 체결을 의무화하는 동시에 오픈 예정인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를 사용해야 하며, 투자하려는 이들에게 훗날 토착 인도네시아인에게 소유권 과반 이상을 준다는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등의 안을 내놓자 민중은 비로소 이를 받아들이며 비난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 규정들이 이후 실제로 강력하게 실행되지는 않았다.

신질서 정부는 타나카 수상의 방문기간 동안 폭동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제프리 윈터스는 당시 인도네시아 정치가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도시와 농촌 빈민들의 봉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스쁘리(Aspri)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아스쁘리의 일원이었던 알리 무르토포가 나중에 인도네시아 정보부 수장이 되면서 아스쁘리 구성원들은 모두 여전히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조언자/고문으로 남았다.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Malari_incident)

 

 

5. 아스쁘리(Aspri)

  말라리 사태의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본문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아스쁘리에 대해 짚고 가기로 한다

  개인 비서관(Asisten Pribadi)의 줄임말인 아스쁘리(Aspri)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조언자 집단으로 1968년에 결성되어 1974년까지 유지되었다.

아스쁘리는 개인참모 집단인 스쁘리(Spri-Staff Pribadi)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스쁘리는1966 8월 수하르토가 수카르노로부터 수뻐르스마르(Supersemar) 서한을 받아내 신질서 정권의 기초를 놓던 당시에 구성된 것이다. 스쁘리는 여섯 명의 육군장교와 12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8년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지명되자 그는 스쁘리를 해산하고 아스쁘리를 구성했다. 아스쁘리는 민간인들 없이 모두 육군장교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권한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알리 무르토포나 수조노 후마르다니 같은 이들은 누구나 떠받드는 유력한 인사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아스쁘리들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보좌하고 필요에 따라 대통령과 관료/관청 또는 민간기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원활한 국정운영과 정부가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될 정보를 수집하는 자리였다.

이와 같은 대통령 보좌 임무를 수행하는 개인 비서관들은 정부나 민간의 단체/책임자들과 늘 소통하되 명목상 정책수행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 행정권한이나 결정권한도 없고 관료들은 이들 개인비서관들이 행하는 어떠한 정부 행정조치에도 구속되지 않는 대신 임무 수행을 위해 일부 공무원들에게 특정 활동을 명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의 한계가 그어져 있었지만 사실상  그들 앞에서 고위 각료들조차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

-        특별 개인비서관 알리 무르토포

-        경제부문 개인비서관 수조노 후마르다니 소장

-        금융부문 개인비서관 수리요 중장 (Letjen Suryo)

-        대통령 경호부문 개인비서관: 쪼끄로쁘라놀로 소장 (Mayjen Tjokropranolo)

 

아스쁘리는 권력을 남용하는 이들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정권 비판자들은 1973년 후반의 몇 개월과 1974 1월까지 아스쁘리의 해산을 촉구했으므로 수하르토도 민중의 지적을 받아들여 말라리 사태 이후 아스쁘리를 해산했다.

 


 사진: 알리 무르토포



(참고자료: https://id.wikipedia.org/wiki/Aspri)

 

 

2019.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