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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다룰이슬람] 426대대 반란사건

beautician 2018. 12. 31. 22:43



426대대 반란사건

 

1. 사건의 배경

독립전쟁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는 비대해진 군을 평시체제로 전환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신생국가가 언제까지나 대규모 군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첫 단계로서 군은 전국을 7개 군사지역(Tentara­Teritorium-TT)으로 나누고 제1지역군(TT-l)은 메단, 2지역군(TT-II)은 빨렘방, 3지역군(TT-III)은 반둥, 4지역군(TT-IV)은 스마랑, 5지역군(TT-V)은 말랑, 6지역군(TT-VI)은 반자르마신, 7지역군(TT-VII)은 마카사르에 그 사령부를 두었다.

5사단장시절의 가똣수브로토 대령과 제8여단장 모하마드 바크룬 중령


그중 제4지역군 사령관 가똣 수브로토 대령은 종전 8개 여단을 5개 여단으로 개편했다. 그리하여 슬라위(Slawi)N여단은 M 바크룬 중령(M. Bachrun)에게, 7대 대대로 이루어진 족자의 O 여단은 수하르토(Soeharto) 중령에게, 솔로의 P여단은 수하르토 소령(동명이인 Suharto로 표기), 살라띠가의 Q여단은 A.야니 중령, 빠티(Pati)의 여단은 M. 사르비니 중령(Letkol. M. Sarbini)에게 각각 지휘권이 주어졌다.

수하르토 중령은 족자 주둔 O여단을 1950년부터 1956년까지 5년간 지휘했는데 그 기간동안 주요 임무는 다룰이슬람 반군들과 426대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O여단은 이후 망꾸부미 왕자 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까르또수위르요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19498월에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Negara Islam Indoensia-NII)라는 것을 만들었다. 렌빌조약의 결과로 네덜란드군 점령지에 남아있던 35,000명 전후의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인도네시아 지역으로 넘어가는 히즈라작전 당시 다룰이슬람군은 서부 자바에 그대로 남아 맹위를 떨쳤다. 그들은 네덜란드군과 싸우면서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부군도 적으로 돌렸다. 아미르 파타는 뜨갈(Tegal)-브레베스(Brebes) 사이의 지역에서 병력을 재편성했고 네덜란드의 2차 공세 당시 원래의 주둔지로 돌아가려던 히즈라부대들은 공격하기도 했다.

그런 후 살라띠가로 이동해 A.야니 중령이 지휘하는 쁘라골라 I 여단에 합류했고 다시 사르비니 중령이 지휘하는 쁘라골라 II 여단과 합쳐져 나중엔 쁘라골라 여단이라 불리게 된다. 이 여단은 9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3개대대는 인도네시아 정규군, 다른 3개 대대는 과거 KNIL 부대들이었고 다른 3개 대대는 히스블라 민병대와 과거 뻬신도(Pesindo) 소속이었던 말라디 유숩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하르토 중령은 이들 9개 대대를 4개 대대로 재편성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장교들을 전역시켰다. 무나와르 소령(Mayor Munawar) 휘하의 소피안 대위가 이끄는 426대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426대대의 반란으로 인해 부대 재편성은 잡음없이 더욱 손쉽게 진행되었다.

 

 

2. 인도네시아 육군 426대대와 다룰이슬람


19501월의 넷째 주, 반둥에서 APRA반란이 벌어졌다. 한편 중부자바에서는 GBN (Gerakan Banteng National – 국가황소운동)이 구성되며 본격적인 다룰이슬람 반군에 대한 진압이 시도되고 있었다. 사르비니 중령이 처음 GBN 작전사령부를 만든 후 이 작전이 진행되는 지역을 GBN 지역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M. 바크룬 중령이 후임으로 부임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제4지역군 사령관은 아미르 파타의 다룰이슬람군을 까르토수위르요의 본대와 격리시킨 후 각 지역에 남은 세포조직들마저 완전히 섬멸할 것을 강력히 명령했다. 그러나 이 잔당소탕작전은 매우 긴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 (왼쪽그림: 다룰이슬람 작전회의. 맨 오른쪽이 아미르 파타)

426대대 반란사건에 앞서 꺼부멘 지역에서는 주권이양 이전부터 로모 뿌삿”(Romo Pusat), 또는 끼아이 소마랑우(Kyai Somalangu)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끼아이 모 마흐푸즈 압두라흐만(Kyai Moh. Mahfudz Abdurachman)이 이끈 이슬람 성도들의 부대”(Angkatan Umat Islam-AUI)의 반란도 벌어졌다. 이 반란은 3개월만에 진압되었지만 잔당들은 GBN 지역으로 이동해 다룰이슬람군과 합류했다.

426대대의 반란사건은 중부자바에서 그 세력을 키우던 다룰이슬람/인도네시아 이슬람군(DI/TII)과 무관하지 않다. 426대대는 1945년에 조직되었는데 처음엔 욘 수난 빈또로(yon sunan bintoro-빈또로 술탄의 대대)라는 부대명을 가졌고 끌라뗀(Klaten) 지역에 주둔했다. 대대장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426대대는 기본적으로 히즈불라 민병대를 모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어 구성원들 모두 이슬람 용사들이었고 이들은 신비주의와 광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중부자바의 아미르 파타(Amir Fatah)가 이끄는 다룰이슬람 반군에 합류했고 그 후엔 서부자바의 까르토수위르요(Kartosuwiryo) 휘하에 편입되었다. 참고로 아미르 파타는 다룰이슬람의 소장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다룰이슬람에 동참하기 위해 426대대는 독립전쟁의 11번째 전투에 참여하면서 중부자바에서 까르토수위르요가 구상한 이슬람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굳게 결의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426대대는 공군(AUI)의 르마라낭 대대(batalyon lemah lanang), 423대대(수난 무리오 Sunan Murio 부대), 아미르 파따가 이끄는 다룰이슬람군 ()5대대와 합병하는데 이는 그들 사이에 비밀 회합이 자주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왼쪽그림: 다룰이슬람의 수장, 까르토수위르요)

11번째 전투때까지만 해도 426대대는 끌라텐에 있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정부군 명령계통에 대한 불복종의 기미를 보였다. 그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무리아산(Gunung Muria) 지역 훈련에서도 소피안 대위는 상관에게 허락도 받지도, 보고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 학교 선생을 병원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구타한 일도 있을 정도로 막무가내의 인물이었으므로 상관 수니띠요소 소령(mayor sunitiyoso)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휴전협정이 발효된 후 426대대는 제6여단에 배속되었고 1950 10M 사르티니 중령이 이끄는 ‘R’여단(쁘라골라 11여단)에 배속되어 꾸두스(Kudus)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무나와르 소령(Mayor Munawar) 420대대는 D 여단의 제5대대가 되었다. 반란이 벌어졌을 때 426대대는 아직 꾸두스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다시 끌라텐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426대대에게 솔로-족자를 중심으로 한 중부자바의 위수지역 수호의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것은 다룰이슬람이 공작한 결과였다.

 

426대대의 지위관들은 다음과 같았다

• 426대대장(수난 빈또로 부대장): 무나와르 소령(mayor Munawar)

참모장: 무히딘 대위(Kapten Muhyidin)

1중대장: 소피안 대위(Kapten Sofyan)

2 중대장: 손하지 중위(Lettu Sonhaji)

3중대장: 유슬란 중위(Lettu Yuslan)

4중대장: F. 뿌르노모 소위(Letda F. Purnomo)

지원중대장: 유미코 중위(Lettu Jumiko)

 

426대대 내에 다룰이슬람이 파고 들어와 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반란조짐의 배후에는 중부 자바, 특히 GBN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룰이슬람의 아미르 파타(Amir Fattah)가 있었다는 증거가 곳곳에 보인다.

 

3. 반란의 전개과정

이 반란 직전에 또 다른 423대대가 반란을 벌일 것이라는 계획이 미리 드러난 바 있었다. 다룰이슬람이423대대를 움직여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는 사실이 사전에 드러나 반란은 좌절되었는데 이는 다룰이슬람에게 포섭된 무그니 소령(Mayor Mughny)에게 가는 두 개의 서류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묵흐니 소령은 브레베스(Brebes)에서 사살당했다.  그의 죽음을 통해 423대대와 426대대의 몇몇 장교들이 다룰이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쁘라골라 여단장(Brigade Pragolala), 망꾸부미 여단장, 빠넘바한 스노빠티 여단장, GBN 지휘관 등 모든 여단장들은 각각의 주둔지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반란을 예방하라는 지시를 일찌감치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5112426대대의 반란이 터졌다. 4지역군 사령관은 423대대 지휘관 바수노 소령을 비롯한 몇몇 장교들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그 과정에서 바수노 소령이 스마랑의 자띵알레(Jatingaleh) 자택에서 다룰이슬람에게 포섭된 수하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다. 그런 후 426대대의 무나와르 소령, 소피안 대위 그리도 또 다른 장교 한 명이 지역사령관에게 소환되었다. 그러나 소피안 대위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항명했다. (왼쪽그림: 426대대장 소피안 대위)

수하르토 중령은 소피안 대위의 명령불복종을 재차 확인한 후 424 대대에게 꾸두스에서 426대대 3개 중대의 무장을 해제시키도록 명했다. 1951128424대대가 자띠꾸두스의 주둔지를 포위하고 소피안 대위에게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소피안 대위는 10분간의 말미를 요청하고 그 사이 부하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유예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426대대는 항복 대신 자신을 포위한 3개 대대 모두에게 박격포를 쏘아대며 치열하게 저항했다.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오후에 폭우가 쏟어지자 426 대대는 시계가 나빠진 상황을 틈타 424대대의 포위망을 뚫고 숙소 뒷편의 도랑을 타고 도주했다. 진압군은 반란군이 재집결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맹렬히 추격했다.

그러나 426대대는 마침내 추격을 따돌리고 스마랑-빠티(Pati) 경계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나 수라카르타를 지나 끌라텐 지역으로 향했는데 그곳은 반군 추종자들이 반군본부로 준비해 놓은 곳이었다. 디포네고로 사단장은 1951 12 19일 명령번호 No.12/D/KII/DIII/51를 통해 그들을 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지역에 활동하던 정부군 3개 중대가 기동했는데 이들 중 모 알리에프(Moh Alief) 중대를 408 대대가 가로막았다. 모 알리에프는 426 대대의 중대장으로서 408 대대장 앞에서 병사들과 함께 그와 그의 부대는 기동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서만 싸울 것이라고 맹세해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맹세였다. 상태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책이 분명했는데도 408대대는 독립전쟁 내내 동료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네덜란드군과 맞섰던 426대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대신 그들의 맹세를 믿으려 했지만 그 맹세는 불과 6시간만에 깨졌다. 19511210일 새벽 1시 모 알리에프의 부대는 작은 규모로 잘게 나누어 기동하면서 순식간에 수라카르타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1952 1 7일 꾸두스에서 온 다른 중대들과 합류했고 곰봉(Gombong)에 주둔 중인 아미르 파타의 다룰이슬람군과 합류하려 했다.



이 시기에 제4지역군 사령관은 머르데까 띠무르 제5작전특임대(satuan tugas Operasi Merdeka Timur V: OMT-V)라는 것을 구성했다. 이 진압작전을 디포네고로 사단은 삽타 마르가 머르데카 띠무르 작전(oprasi Sapta Marga Merdeka Timur)이라 명명했다. 당시 디포네고로 사단장은 모하마드 바크룬 중령(Letnan Colonel Moch. Machrun)이었다. 여기엔 쁘라골라 여단장, 망꾸부미 여단장, 빠넘바한 스노파띠 여단장 및 황소작전 부대장(Komandan Gerakan Banteng) 등이 포함되었다. 첫 작전사령관은 제4지역군 참모장 M. 바크룬 중령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크룬 중령이 가똣 수브로토 대령 후임으로 제4지역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자 해당 작전사령관에 수하르토 중령이 선임되었다. 부사령관은 뻐늠바한 스노빠티 여단장 수하르토 소령이었고 참모장은 수로노 소령(Mayor Surono)가 선임되었다. (왼쪽사진: 수하르토 중령)

 

OMT V(OMT는 삽타 마르가 머르테카 띠무르 작전의 약어)의 병력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 OMT V/3: 육군 8개 대대(412, 415, 416, 417, 418, 419, 422, 428)

• OMT V/2: 육군 3개 대대(413, 408, 420 대대)

• OMT V/4: 육군보병 2개 대대 (424, 425 대대)

 

그리하여 반란진압작전은 보다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공화국 공군에게도 우리는 도움을 청했다. 426대대는 이번에도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면서 몇몇 부대들을 기만하며 능란한 회피기동을 선보였다. 소피안 대위와 그 수하들은 끌라텐 지역으로 들어가려고 전력을 다했다.

 

4. 진압

반란군은 시모와 보요왈리 지역 일대에서 역량을 결집시키자 정부군은1952125일 시모왈렌(Simowalen) 지역에서 공격전을 벌였는데 OMT 측이 요청한 공군과의 합작은 매우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낳았다. 이는 인도네시아 건국 후 첫 육군과 공군의 합동작전이었다. 반군 40명을 사살하고 23명 부상, 32명을 포로로 잡은 반면 정부군 사상자는 달랑 2명뿐이었다. 이날 전투로 꾸두스 지역의 426대대 반란은 사실상 진압된 셈이었다.

R.I.13/ST/13 지역(족자-꺼두 방면)에서 알립 대위 휘하의 426대대 반군 부대는 살라(Sala)의 부대들과 합류하려 했다.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 중엔 문띨란(Muntilan)에 잡혀 있던 죄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라에서 무장을 갖춘 후 과감하게도 기동여단을 한 개를 무장해제시키고 감독관을 비롯한 1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런 후 반군은 꺼뿌룬의 쩨뽀고(Cepogo-보요랄리 Boyolali 지역)로 진출하여 마침대 응우삣(Ngupit)에 다달았다. 거기서 415, 412, 416 대대는 1952118일 반군들을 동시에 공격했고 모 알리에프 대위의 부대 200여명은 본대로부터 분리되어 문띨란과 건돌(Gendol) 지역으로 들어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반군들은 동부자바와의 경계지역까지 도주해 갔다가 따왕망우(Tawangmangu), 까랑빤단(Karangpandan), 우리얀또로(Wuryantoro), 마냐란(Manyaran) 등을 거쳐 끌라뗀으로 돌아갔다. 반군 지휘관 소피안 대위는 마냐란 지역에서 바르죠 상사(Sarsan Bardjo)와의 격투 끝에 살해당했다. 바르죠는 그후 친구들에게 우마르 모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M사르비니 중령이 이끄는 망꾸부미 여단은 반군 잔당을 집요하게 추격했다. 깔리위로(Kaliwiro)지역의 워노소보(Wonosobo)에서는 사르요노 소령(Mayor Sarjono)이 이끄는 408대대가 여러 명을 사살 하면서 한 명을 포로로 잡고 47정의 소총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정부군은 전투에서 반군보다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손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1952130일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라는 통첩을 받고 도주하던 모 알리에프 대위도 반둥안(Bandungan) 지역에서 마침내 사살되고 말았다.

이들 반군들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지만 한편 미히딘 대위(Kapten Mihyidin)가 이끄는 반군들은 문띨란을 지나 도주하면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413, 408, 414 대대의 추격을 받았다. 소피안 대위의 남은 부하들은 끌라텐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정부군에게 사살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서쪽으로 도주해 GBN 지역인 부미아유(Bumiayu)에서 기어이 다룰이슬람군과 합류했다. 결국 426대대 반란은 거기서 종료되고 이제부터는 아미르 파타의 다룰이슬람군을 상대로 전투가 속개되었다. 정부군은 이 진압작전을 GBN 작전이라 칭하고 다룰이슬람 격파에 총력을 기울였다.

 

5. 정리

정부군은 마침내 426대대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적잖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사망한 장병들 중에는 제15연대장 꾸스만토 소령(Mayor Kusmanto), 417대대장에서 수나리오 소령(Mayor Sunarjo) 등도 포함되었다.

한편 이 426대대의 반란진압 과정에서 쁘라골라 여단의 재편성은 별다른 혼란없이 진행되었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탄탄한 네 개의 대대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쁘라골라 여단은 이후 제14연대로 이름을 바꿨다.

한편 제4지역군의 편성과 각 부대의 이름들도 바뀌었는데 육군사령부의 195215일 지령에 따라 수하르토 중령이 한때 지휘했던 쁘라골라 여단은 제14보병연대가 되어 살라띠가에 주둔하게 되었다. 유도느고로 여단은 제12 보병연대가 되어 쁘르워꺼르토에, 망꾸부미 왕자 여단은 제13 보병연대가 되어 족자에, 뻐늠바한 스노빠티 여단은 제15연대가 되어 솔로에 주둔하게 되었다.

 

426대대 반란사건의 결과 중 하나로서, 중부자바에서 다룰이슬람 활동은 사실 이전엔 미미한 편이었으나 195112월 반란을 일으킨 426대대가 꾸두스와 마글랑에서 다룰이슬람과 합류한 후 그 기세를 더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들 수 있다. 디포네고로 사단은 즉시 쁘라골라 여단장 수하르토 중령에게 명해 동부해방작전-Operasi Merdeka Timur)라는 진압작전을 명했다. 426대대 반란은 1952년 초에 거의 분쇄되었고 잔당들이 서부자바와 GBN 지역으로 도주했다. 동부해방작전 말미에 살라(Sala)에서 육군의 요청으로 최초의 공군과의 합동작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편 머라삐화산과 머르바부 산을 잇는 축선 상의 지역에서 머라삐-머르바두 콤플렉스(MMC) 운동이라는 조직에 의해 폭동과 소요가 발생했다. 이들은 19524월에 진압되었는데 그 잔당들 역시 서부자바와 GBN 지역으로 도주해 들어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GBN 지역의 다룰이슬람군은 거의 와해되던 중이었으나 이슬람성도의 부대(AUI) 잔당과 426반란대대 잔당, MMC 부대의 잔당들이 모두 모여들면서 그 위력을 크게 키웠다. GBN 지역의 다룰이슬람군을 분쇄하기 위해 특별히 편성된 정부군 부대에 반뗑 레이더스(Banteng Riaders) 즉 황소유격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부대가 몰아붙인 끝에 다룰이슬람군의 주력을 19546월 뻐깔롱안과 반유마스의 경계에서 완전히 격파할 수 있었다.

 

6. 수하르토 중령

수하르토는 195331일 솔로로 옮겨가 제15보병연대장이 되었다. 4지역군 사령관은 19529월 가똣 수브로토 대령에서 M 바크룬 대령으로 바뀌었다. 다룰이슬람에 대한 진압작접은 군뚜르 작전(Operasi Guntur)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었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4개 대대와 각 연대에서 교대로 배속시킨 또 하나의 대대를 휘하에 둔 A. 야니 중령이었다. 반뗑 레이더스는 그의 휘하에 만들어졌다. 이 부대는 어떠한 전투환경에서도 높은 기동성을 가질 수있도록 뿌르워레조의 훈련소에서 강력하게 조련되었다.


GBN 작전을 수행하여 다룰이슬람과 싸우면서 정부군은 지역주민들을 선무해 시민저항조직(OPR)을 구성했고 이들은 각 시골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정부군으로부터 협조와 훈련을 받았다. (왼쪽 그림: 반뗑 레이더스)

다룰이슬람군은 군뚜르 작전과 GBN 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수메도(Sumedo)와 찌뻴렘(Cipelem)에서 1952 12월에 벌어진 전투를 통해 정부군은 반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많은 다룰이슬람 병사들이 목숨을 잃자 잔당들은 횃대전략이란 명칭의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이에 따라 정부군도 전술을 바꿔 군뚜르 작전을 종료하고 지역별 작전을 벌여 다룰이슬람 잔당들을 토벌했다.

수하르토는 426대대 반란을 진압한 후 전 쁘라골라 여단이었던 제14연대를 결성했고 이후 살라띠가에서 잠시 보직을 소화한 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솔로로 자리를 옮겼다,

솔로의 제15연대는 빠늠바한 스노빠티 사단의 부대들을 묶어 구성한 것으로 전 사령관이었던 수따르토 대령이 정치격변기에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된 바 있다. 당시 솔로에선 이념전선이 형성되어 많은 정부군 부대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

끌레쪼(Kleco)에 주둔한 딕도 대대는 유명한 공산주의자 알리민에게도 정치교육을 받았는데 그들 중엔 1965 9 30일 쿠테타를 이끈 운뚱(Untung)과 수라디(Suradi)도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운뚱이 쿠테타를 이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수하르토는 쿠데타의 배후가 누구인지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디 아지스 반란진압을 위해 술라웨시 마카사르에 도착한 수하르토 중령 (가운데




* 참고자료 

http://young-empresario.blogspot.com/2011/03/desember-1951pemberontakan-batalyon-426.html

http://military18.blogspot.com/2012/09/pertempuran-eks-batalyon-426-melawan.html

https://www.kaskus.co.id/thread/50e1befde374b4df55000042/brigade-infantri-4-dewa-ratna-dan-pengabdiannya/ 

http://soeharto.co/semasa-menguber-ditii

http://novriadisitompul.blogspot.com/2010/01/pemberontakaan-batalyon-4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