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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 - 롤러코스터 인생 본문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
하멩꾸부워노 2세의 본명은 구스티 라덴 마스 순다라(Gusti Raden Mas Sundara)로 하멩꾸부워노 1세가 구스티 깐젱 라투 하긍(Gusti Kangjeng Ratu Hageng)에게서 낳은 다섯번 째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아직 망꾸부미 왕자란 이름으로 수라카르타와 VOC에게 저항하던 시절인 1750년 3월 7일 태어났습니다. 1755년 기얀티 조약을 통해 아버지가 하멩꾸부워노 1세로 등극하자 당시 다섯 살이던 라덴 마스 순다라 역시 아디빠티 아놈(Adipati Anom- 젊은 왕이란 뜻으로 마타람 왕국 이후 사용된 호칭)이란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자바력 1700년이었던 1774년 한 왕조가 멸망할 것이라는 세기말에 대한 전설로 족자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에서 여러가지 갈등과 혼란이 벌어지자 이제 막 24세가 된 라덴 마스 순다라는 수리야라자(Suryaraja)라는 경전을 썼는데 그 내용은 수라카르타와 족자가 한 개의 정부로 통일될 것이므로 세기말 전설은 폐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그런 계시를 받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 젊은 나이에 자바의 신비주의를 이용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를 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이 문서는 ‘깐젱 끼아이 수리야라쟈’ (Kangjeng Kyai Suryaraja)라는 이름으로 족자 끄라톤의 유물 중 하나가 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792년, 하멩꾸부워노 2세라는 호칭을 받고 술탄의 왕위에 오르던 그는 이제 막 42세가 된, 이상에 가득 찬 술탄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투쟁을 일삼는 귀족들과 이권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네덜란드 앞에서 그의 찬란한 이상이 잔혹한 현실에 침식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선대 술탄의 가장 가까운 인물이자 첫 번 째 재상으로서 하멩꾸부워노 2세의 재위 초창기를 그림자처럼 보좌했던 다누레조 1세 재상이 1799년 8월 19일 세상을 떠나자 술탄은 그의 손자 라덴 뚜먼궁 마르타느가라(Raden Tumenggung Mertanegara)에게 조부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하고 다누레조 2세라는 호칭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재상의 자리에 오른 다누레조 2세는 조부와는 달리 네덜란드와 결탁해 그들의 이권을 지키는 일에만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술탄의 정치적 입장도 불리해졌으므로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다누레죠 재상을 폐직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사필귀정이었지만 다누레조는 이를 갈았고 VOC 역시 심기가 편할 리 없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는 애당초 네덜란드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비록 대놓고 그리 말하진 않았지만 행동과 결정에 그러한 그의 생각이 늘 묻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VOC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음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VOC는 1799년 말 마침내 파산하여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가 직접 틀어쥔 식민정책은 더욱 자바의 왕국들을 옥죄어 왔습니다. 1808년 반봉건적 기치를 따르던 헤르만 덴덜스(Herman Daendels)가 총독으로 부임해 온 것은 동인도로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열일을 하며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네덜란드 총독 중 한 명으로 역사에 남게 되지만 본국에 충성을 다했다고 해서 동인도 입장에서도 꼭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자바의 왕들이 장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는데 ‘장관’이란 네덜란드 총독부가 파견한 주지사(resident)를 뜻하는 말로 댄덜스가 만들어낸 용어였죠. 군 출신 강경파인 그는 모든 술탄들조차 자신이 정한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니 동인도의 열국들을 대하는 그의 오만함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댄덜스 네덜란드 총독
네덜란드를 싸고도는 다누레조 2세 재상을 해임한 하멩꾸부워노 2세가 그대신 나타디닝랏 왕자(Pangeran Natadiningrat)와 나타꾸수마 왕자(Pangeran Natakusuma- 하멩꾸부워노 2세의 동생)를 재상으로 세웠는데 네덜란드는 이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술탄국의 숲에 대한 관리권한을 내놓으라는 덴덜스의 막무가내 강요도 어쩌면 그런 불만표현의 일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불붙은 귀족들의 반발은 응으벨(Ngebel)과 스끄독(Sekedok)에서 네덜란드를 상대한 폭동으로 번졌고 네덜란드는 그 책임을 술탄의 사위인 라덴 롱고 쁘라위라디르죠 3세(Raden Ronggo Prawiradirjo III)에게 물었습니다. 라덴 롱고는 보고르로 출두하라는 네덜란드 총독부의 소환에 불북하여 마디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하멩꾸부워노 2세는 공개적으로 이 반란을 축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네달란드에 대한 혐오를 더 이상 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귀족들은 물론 민중들도 그러한 술탄의 언행에 통쾌함을 느꼈겠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치적 자해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덴덜스는 라덴 롱고의 반란 배후에 하멩꾸부워노 2세의 역할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 의심했는데 네덜란드가 중심이 된 수라카르타, 족자, 네덜란드 연합군이 마침내 라덴 롱고의 반란을 평정했을 때 라덴 롱고의 시신에서 발견된 한 장의 편지에 술탄국 문장이 찍혀 있는 것을 증거라고 내밀며 하멩꾸부워노 2세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혐의로 왕궁을 크게 술렁이며 양측의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지만 술탄은 모든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일반업무에 사용되던 그 술탄국 문장은 술탄이 쓰는 것이 아니라 재상의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조작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었죠. 하지만 댄덜스는 이를 기어이 문제삼았고 결국 군대를 동원해 1810년 12월 족자를 공격해 들어와 하멩꾸부워노 2세를 끌어내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댄덜스는 하멩구부워노 2세의 아들 구스티 라덴 마스 수라자(GRM Suraja)를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로 등극시키는 한편 나타꾸스마 왕자와 나타디닝랏 왕자도 체포하고 그들이 맡고 있던 재상의 지위를 다누레죠 2세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다누레죠 2세의 세상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가 그로부터 어떤 전횡을 저질렀을지는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
그러다가 1811년 자바와 동인도 전역의 네덜란드 정부가 영국에게 이양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네덜란드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에 합병되는 바람에 더 이상 해외 식민지를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덴덜스도, 네덜란드 본국도 그런 상황을 계획하거나 상정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한 네덜란드의 혼란을 기회로 삼아 영국이 동인도를 차지하려 달려든 것입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족자로 돌아와 술탄의 왕좌를 되찾았습니다. 그는 1810년 성급한 대관식을 올리며 하멩꾸부워노 3세가 되어 술탄의 왕좌에 올랐던 아들 마스 수라자를 스스로 끌어내렸던 것입니다. 그가 다시 태자의 자리로 내려 앉은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술탄은 그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벌였는데 자칫 태자조차도 목숨 보전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숙청작업의 완성은 당연히 술탄과 댄덜스 사이에서 끝없이 불화의 불씨를 제공했던 다누레조 2세를 끌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오만방자함은 실각시키는 것만으로는 상쇄하기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리하여 1811년 9월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끄라톤 궁전에 들어서던 다누레죠 2세는 술탄의 명에 의해 포박되었다가 시티힝길 건물 앞, 술탄국의 신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맙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는 그 정도로 강단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영국으로서도 매우 껄끄러운 부분이었습니다.
래플스 영국 총독대행
그 역시 네덜란드 못지않게 영국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영국 래플스 총독대행의 일행이 1811년 12월 족자를 방문했을 때 의전상의 문제로 끄라톤궁전에서 칼부림이 벌어질 뻔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래플스는 예전 네덜란드 덴덜스 총독이 세운 ‘장관에 대한 예우’를 영국 총독에게도 해 줄 것을 요구했고 술탄과 귀족들은 이를 전쟁만 아는 유럽 야만민족의 더할 수 없는 무례함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죠. 결국 래플스의 의자를 술탄의 의자보더 조금 더 낮춤으로서 그날 위기를 살짝 비켜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수라카르타의 용의주도한 빠꾸부워노 4세는 짐짓 하멩꾸부워노 2세를 지지하는 척하며 영국과 대대적으로 한판 붙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적으로 적을 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법이었죠. 그러다가 그들 술탄과 수난간에 오고간 편지가 영국 총독부 손에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게 과연 우연이나 사고였을까요? 빌미를 잡은 래플스는 1812년 6월 19일 영국군대와, 라덴 마스 사이드가 세운 나라인 망꾸느라가(Mangunegara)의 연합군으로 족자를 처들어 갔습니다. 화력에서 크게 밀린 족자 술탄국의 군대가 결국 패배하며 끄라톤이 함락되자 총독부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된 하멩꾸부워노 2세는 수마트라의 뻬낭섬(pulau Penang)으로 유배되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빠꾸부워노 4세도 수라카르타의 영토 일부를 잃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시간이 흘러 1825년 하멩꾸부워노 3세의 아들 디포네고로 왕자가 네덜란드를 상대로 흔히 ‘자바 전쟁’ 또는 ‘디포네고로 전쟁’이라 불리는 반란전쟁을 벌일 때 족자의 술탄은 1823년 하멩꾸부워노 4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하멩꾸부워노 5세였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의 반란은 민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므로 네덜란드 총독부는 민중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영국에 의해 유배당했던 하멩꾸부워노 2세를 다시 족자로 불러들였습니다. 민중과 귀족들의 향수와 연민을 불러 일으키려는 전략이었죠. 하멩꾸부워노 2세는 1826년 8월 18일 다시 왕좌에 앉았고 하멩꾸부워노 5세는 네덜란드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1812년 유배당한 후 14년 만에 돌아오는 그는 술탄으로서 세 번째 재위기간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의 귀환과 함께 디포네고로군의 몇몇 중요인사들이 투항해 족자로 돌아오며 디포네고로군을 일부 약화시켰지만 그뿐이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 자신 역시 디포네고로 왕자나 그와 힘을 합친 자신의 아들 망꾸부미 왕자가 저항을 그치는 것을 내심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예전과 달리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므로 네덜란드는 술탄이 디포네고로의 저항을 오히려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물증이 없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는 비록 디포네고로군을 약화시키기 위한 네덜란드의 꼼수로 족자에 복귀했지만 그 시기에 정권을 안정시키고 이 지역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 돌아온 그를 민중들은 술탄 세뿌(Sultan Sepuh), 즉 ‘노(老) 술탄’이란 별명으로 부르며 아꼈습니다.
1828년 1월 3일 디포네고로 전쟁이 아직도 한창이던 시절, 그는 편도선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끝에 78세를 일기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노환이었습니다. 그리고 끄라톤 술탄의 왕좌는 얼마 전 폐위되었던 그의 증손자 하멩꾸부워노 5세에게 다시 돌아갔습니다.
2018.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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