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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족자 술탄국 건국과정 본문
족자 술탄국 건국과 발전
인도네시아에는 아직도 많은 술탄과 왕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신민들을 통치하는 곳은 족자(Jogja = 욕야카르타 Yogyakarta)가 유일합니다. 현재 술탄 하멩꾸부워노 10세가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족자 주지사로서 재임 중입니다. 실제로 족자에서 술탄 외에 다른 사람이 주지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현 족자 주지사인 술탄 하멩꾸부워노 10세와
족자 술탄국의 문장
물론 족자가 인도네시아의 특별자치주(D.I = Daerah Istimewa)가 된 것은 선대 술탄인 하멩꾸부워노 9세가 독립전쟁과 인도네시아 건국 초창기에 세운 혁혁한 공로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200년을 훌쩍 넘긴 하멩꾸부워노 왕가의 유구한 역사 역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흥망성쇄를 거듭한 족자 술탄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우린 많은 영웅들과 술탄들 그리고 배신자들과 침략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바전쟁을 이끌었던 디포네고로 왕자 역시 하멩꾸부워노 왕가의 인물이었죠.
이제 그 건국과정을 살펴보고 시조 하멩꾸부워노 1세의 생애를 되짚어 보는 것으로 족자 술탄국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술탄 아궁의 시대 이후 마타람 술탄국은 왕가의 권력투쟁으로 그 힘이 기울고 있었는데 여기 편승해 이권을 얻으려는 VOC의 개입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러한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을 결과, 1755년 2월 13일 기안티 조약(Treaty of Giyanti)를 통해 마타람 왕국은 족자 술탄국(Yogyakarta Sultanese)과 수라카르타 수난국(Surakarta Sunanate)로 분열되었고 마타람의 망꾸부미 왕자(Pangeran Mangkubumi)가 족자 술탄국의 초대 술탄으로 등극했습니다.
마타람 왕국에서 분열된 족자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지도
일전 자바 전쟁을 기술하면서 잠깐 언급했지만 ‘망꾸부미’란 왕자의 본명이 아니라 그가 술탄의 동생이자 왕국의 재상이라는 위상을 말해주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자바의 역사 속에 망꾸부미 왕자란 호칭을 가진 이들이 여럿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한 망꾸부미 왕자의 본명은 라덴 마스 수자나(raden Mas Sujana)입니다.
한편 나중에 설명하게 되겠지만 네덜란드 강점기간 내내 이 지역에는 족자 술탄국과 빠꾸알라만 까디빠텐(Kadipaten Pakualaman)이라는 지역이 공존했고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이들과 맺은 정치적 계약을 통해 이 지역에 자치통치를 허용했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러다가 인도네시아가 독립하게 되었을 때 족자의 술탄과 빠꾸알라만의 왕자는 기꺼이 인도네시아에 편입하겠다는 선언을 하며 수카르노 정부에 힘을 더하게 되는 거죠.
족자의 원래 표기인 요그야카르타(Yogyakarta)는 당초 요드야카르타(Yodyakarta)에서 변형되어 온 것인데 이 말은 아요댜(Ayodya)와 까르타(Karta)를 합친 말입니다. 아요다는 라마야나의 신회에 등장하는 왕국의 이름이고 까르타는 평화라는 뜻이니 요그야카르타란 ‘평화로운 전설의 나라’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1755년 2월 13일 체결된 기얀티 조약은 마타람 왕국의 망꾸부미 왕자와 VOC 총독 야콥 모셀(Jacob Mossel)이 서명한 것으로 이는 마타람 왕국을 둘로 나누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이 조약을 통해 망꾸부미 왕자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Sultan Hamengkubuwono I)가 되어 마타람 왕국의 반쪽인 족자 술탄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다른 반쪽과 해안지역은 수라카르타 수난국(Kasunanan Surakarta)의 수수후난 빠꾸부워노 3세(Susuhunan Pakubuwono III)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빠꾸부워노 3세의 왕국을 쪼개 하멩꾸부워노 1세의 왕국이 새로 세워진 것입니다.
족자 끄라톤 궁전 입구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는 그런 후 위농오 강(Sungai Winongo)와 쪼데강(Sungai Code) 유역의 빠버링안 숲(Hutan Paberingan)을 개발해 수도로 삼았다. 그는 이곳을 응아욕야까르타 하디닝랏(Ngayogyakarta Hadiningrat)이라 이름지었고 1768년 10월 7일 첫 완공을 보았다. 보통 국가가 세워지거나 수도가 천도하면 술탄이나 관련된 왕족들의 호칭이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술탄은 하멩꾸부워노라는 명칭을 바꾸지 않는 대신 앞서 다른 술탄들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호칭에 " ingkang jumeneng kaping...ing Ngayogyakarta Hadiningrat "라는 부분을 덧붙였습니다. ‘족자의 왕좌에 앉은....’ 정도의 의미가 추가되는 것이었죠.
족자의 술탄들은 공식 명칭 외에 몇 개의 다름 호칭을 갖기도 했는데 인생의 롤로코스터를 탔던 하멩꾸부워노 2세는 술탄 세뿌(Sultan Sepuh – 노(老) 술탄)으로, 하멩꾸부워노 6세는 술탄 망꾸부미(Sultan Mangkubumi)로, 하멩꾸부워노 7세는 술탄 베히(Sultan Behi) 또는 술탄 항아(Sultan Hanga)라고 불렸습니다. 왜 그리 불렸는지는 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뒤에 자연스레 설명될 것입니다.
최소한 1792년까지 족자 술탄국은 독립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인 VOC는 우방으로서 술탄국과 동등한 위치를 점했습니다. 이 포지션을 지키고 술탄국을
계속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VOC는 주지사(Resident)를 파견했는데 초창기 주지사의 위치는 술탄 바로 밑의 재상(승지?)과 동급이었다가 그후 덴덜스
총독이 부임해 주지사의 위상을 네덜란드 국왕과 바타비아 총독을 대리하는 총리급 장관의 위치까지 격상시켜 술탄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에 술탄은 물론 족자의 신민들이
눈쌀을 찌푸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국이 짓밟히고 있던 네덜란드가 동인도의 통제권을 잃은 시기에 영국의 레플스 총독대행이 들어와 총독부와 술탄 왕궁의 관계를 다시 바꾸었는데 술탄이 타국과 관계를 맺을 수 없도록 외교권을 빼앗아 영국이 독점하는 식으로 더욱 악화시키며 식민주의 종주국의 악독함을 여실히 과시했습니다. 왕궁의 재상인 뻐빠티 달럼(Pepatih Dalem)은 영국 정부의 입맛에 맞추었고 모든 진행상황을 영국 주지사에게 보고면서 술탄은 국정에서 배제되고 재상과 영국 주지사가 국정을 농단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영국 총독부는 하멩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켜 뻬낭섬(Pulau Penang)으로 유배보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영국이 물러나고 다시 돌아온 네덜란드는 1830년 디포네고로 전쟁이 끝난 후 재상이 쥐고 있던 나가리 정부(Pemerintah Nagari)를 강력하게 틀어쥐고 통제하며 향후 일어날지도 모를 또 다른 반란을 예방하려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족자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보호를 받는 완전한 속국의 모양새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후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술탄이 되려는 족자 술탄국의 태자들과 정치적 계약을 맺어 이권을 보장받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부터 하멩꾸부워노 9세의 시기까지 이어지다가 1940년 3월 18일 네덜란드의 족자 주지사 루시엔 아담(Lucien Adam)과 하멩꾸부워노 9세 사이에서 그 종언을 고했고 족자 술탄국과 동인도는 이제 본격적인 현대사로 접어들며 네덜란드에 더욱 강력한 저항을 합니다.
젊은 날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
술탄 하멩꾸부워노 8세와 동석한 네덜란드 총독부 족자 주지사 루시엔 아담
2018.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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