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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자바 전쟁 (7)

beautician 2018. 6. 25. 01:38

자바 전쟁 (7)



디포네고로의 체포상황에 대해 디포네고르 측과 네덜란드 측이 바라보는 시각은 판이하게 다른 것은 자바의 미술가 라덴 살레와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피에너만(Nicolaas Pieneman)이 디포네고로 체포 장면을 각각 다르게 그린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디포네고로는 네덜란드가 휴전깃발을 내세우며 계획적으로 배신한 것이라 했고 네덜란드 측은 디포네고로가 자진해 항복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서도 라덴살레는 디포네고로를 용맹스러운 희생자로, 후자는 그가 굴종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라덴살레가 그린 디포네고로 왕자의 체포

 

물론 디포네고로가 자신해 항복했다는 말은 네덜란드군이 지어낸 말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입니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군이 벤뗑 스텔셀 전략으로 디포네고로군을 옥죄어 올 때 그는 휘하 부대의 동기를 강화해 적에게 쉽사리 항복하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 배신당해 체포당하게 되었을 때 항복하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굳건히 견지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날 방도가 없다면 나는 처형당하는 편을 선택하겠다. 내게 항복이란 선택지는 없다.”

 

그는 이러한 결기로 자신의 생사를 운명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다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의 패배가 예감되는 순간에도 자신의 이상을 쫒길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두 말할 나위 없는 큰 성공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과정을 꾸준히 헤쳐나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피어네만이 그린 디포네고로의 항복

 

체포된 그는 즉시 웅아란(Ungaran)에 유폐되었다가 스마랑의 지방총독 청사를 거쳐 4 4일 폴룩스호(Kapal Pollux)를 타고 바타비아로 압송되었습니다.  1830411일 바타비아에 도착한 디포네고로 왕자는 스타두이스(Stadhuis – 지금의 자카르타 구시가지 꼬타 지역의 파타힐라 박물관)에 갇힌 채 주지사 반덴보쉬(Van den Bosch)의 판결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바타비아 구시가지의 파타힐라 박물관에 가보면 열악하기 그지없고 비만 오면 침수되는 지하감옥을 견학할 수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430일에 나온 판결이 나올 때까지 그 열악한 지하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반덴보쉬의 판결에 따라 그는 아내인 라덴 아유 렛나닝시, 뚜먼궁 디포소노와 그의 부인, 그리고 머르또렉소노(Mertoleksono), 반뗑 웨렝(Banteng Wereng), 냐이 소따루노(Nyai Sotaruno) 모든 추종자들과 함께 마나도로 유배되었습니다. 1830 5 3 그들을 태운 폴룩스 호가 마나도로 향해 바타비아를 출발했고 마나도의 암스테르담 요새에 갇혀 년을 보낸 후 다시 1834년 다시 술라웨시 남부 마카사르의 로테르담 요새로 이감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측은 일반적인 유배상태에선 그를 구출하러 올지도 모를 민중군에게 압도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감옥조차도 그를 가두기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갇힌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네덜란드에겐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고 동인도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수감 중에도 많은 유명인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들 중에는 1837년 당시 16세였던 네덜란드의 헨리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는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도 자바의 역사에 대해 원고와 자서전 바밧 디포네고로(Babad Diponegoro)라는 자서전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 각색되어 지금도 민중들의 연극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21년동안 영어의 몸으로 지내다가 18551870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자바땅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카사르의 깜뿡 자바에 묻혔습니다. 네덜란드 당국은 디포네고로 왕자의 시신이 자바로 귀환할 경우 민중들을 자극해 소요를 일으키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마카사르 시내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쯤 떨어진 와조면(Kecamatan Wajo), 멀라유 마을(Kelurahan Melayu), 지금은 디포네고로 거리라고 불리는 곳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 중 바구스 싱론(Bagus Singlon)은 앞서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끼 소데워라고도 불렸는데 디포네고로 왕자가 체포된 후에도 꿀론쁘로고(Kulon Progo)와 바글런(Bagelen)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끼 소데워라고도 불리던 바구스 싱론(Bagus Singlon)은 디포네고로가 마디운의 영주 라덴 롱고(Raden Ronggo)의 여식 라덴 아유 찌뜨로와티(Raden Ayu Citrowati)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라덴 아유 찌뜨로와티는 센똣 쁘라위로디르죠(Sentot Prawiro Dirjo)의 이복자매였습니다. 라덴 마스 싱론, 바구스 싱론, 끼 소데워는 모두 동일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족자 왕실의 족보에서도 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끼 소데워가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 나선 것은 할아버지(롱고)와 어머니가 마디운(Madiun)의 폭동에서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폭동의 배후로 지목받아 네덜란드군에게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재상 다누레죠에게 놀아나던 왕실에서 다른 왕자들의 공격을 받은 라덴 롱고가 마침내 투항하자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린 끼 소데워와 센똣은 마디운 영주의 가족들과 함께 이 습격 성공의 증거로서 왕실에 전리품처럼 인계되었죠. 훗날 센똣은 16살이 되었을 때 디포네고로군에 합류해 소년장군으로서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아직 어린 끼소데워를 왕실에서 데리고 나온 디포네고로 왕자는 절친 끼뗌삐(Ki Tempi)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군은 끈질기게 저항해 온 라덴 롱고 가문의 후손들마저 모두 숙청하려 하였으므로 끼뗌비는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늘 장소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아직 아기였던 끼소데워에게 싱론이란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은 도피’, ‘은신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디포네고로 왕자의 처연함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훗날 끼 소데워의 후손들은 여러 직함을 가지고 저항의 역사 곳곳에 등장하는데 디포네고로 왕자의 7대손 라덴 로니 무르얀토(Raden Roni Muryanto)는 집안 어른들의 축복을 받으며 뜨라 소데워 가문(Paguyuban Trah Sodewo)을 세운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죽기 전 자신을 깜뿡 멀라유에 묻어 달라 했는데 그곳은 중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사는 곳 근처였습니다. 점령자 네덜란드와 그 하수인들이었던 화교들을 자신이 죽은 후에도 끝내 저주하겠다는 마음이었을까요? 어쨌든 네덜란드는 그의 유언에 따라 1.5 헥타르의 땅을 내주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물론 태반은 힘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오늘날 550 평방미터로 크게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내와, 함께 추방당했던 추종자들도 모두 같은 묘역에 안장되었고 오늘날에도 순례자들과 군 장교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그의 묘지를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며 정기를 받아가고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 당시에도 자바인들의 군사적 저항은 디포네고로의 정신을 따랐고 초기 인도네시아 이슬람정당이었던 마슈미당은 디포네고로를 인도네시아 저항사의 지하드 운동가이자 국가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디포네고로가 속한 하멩꾸부워노 왕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족자의 술탄이 족자 특별시의 현직 주지사가 되어 있습니다. 1969년에는 군의 후원을 받아 디포네고로의 궁이 있었다고 믿어지는 족자 외곽의 뜨갈레죠(Tegalrejo)에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그 궁에 대한 기사는 대체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중부 자바 출신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97311 6일 대통령령 No.87/TK/1973으로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는 디포네고로의 전기(Babad Diponegoro)2013 6 21일 세계기억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KRI Diponegoro 전함

 

4지방군 사령부 디포네고로 부대는 중부 자바를 방위하는 인도네시아 정규군 부대로 디포네고로의 이름을 따왔 인도네시아 해군도 그의 이름을 딴 군함 두 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한대는 KRI Diponegoro로 네덜란드로부터 사들인 시그마급 코르벳함입니다. 스마랑에는 디포네고로 대학이 있고 인도네시아 각 도시의 주요 도로가 그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있습니다. 자카르타 최중심지인 호텔인도네시아 로터리로 진입하는 도로들 중 이맘본졸 도로(Jl. Imam Bonjol)와 연결되는 빵에란 디포네고로 도로(jl. Pangeran Diponegoro)는 디포네고로 왕자를 기념하는 도로입니다. 후세들은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국가영웅의 칭호를 부여했고 불타 없어진 뜨갈레죠의 저택을 다시 세워 디포네고로 왕자의 기념관으로 삼은 것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와 결탁한 술탄들과 영주들이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던 시절, 디포네고로 왕자와 같이 자신의 지위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며 네덜란드에 저항한 왕족들은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

 

 


디포네고로 왕자의 다양한 초상


디포네고로 병원


디포네고로 이슬람 재단

디포네고로 지역군 사령부


스마랑 디포네고로 대학


수라카르타 디포네고로 이슬람 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