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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 - 줄타기의 귀재 본문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
마타람 왕국의 후신인 까르타수라 수난국(Kasunanan Kartasura) 아망꾸랏 4세(Amangkurat IV)와 후궁 라덴 아유 떼자와티(Raden Ayu tejawati)사이에서 태어난 족자 술탄국의 시조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에겐 탄생 당시 라덴 마스 수자나(raden Mas Sujana)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성인이 된 후엔 망꾸부미 왕자(Pangeran Mangkubumi)라고 불렸습니다.
1740년 10월 바타비아의 항구에서 중국인들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차이나타운 소요(Geger Pecinaan), 또는 앙케의 비극(Tragedi Angke) 또는 화교학살(Chinezenmoord)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정부의 탄압과 수입감소가 설탕가격 폭락으로 이어져 설탕공장에서 일하던 화교들이 들고 일어나 초창기에 네덜란드군 50명이 살해되고 그 반동으로 벌어진 본격적인 진압작전에서 1만명에 달하는 화교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에 휘말렸다가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조사 매체에 따라 불과 600명에서 3,00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낳아 전쟁으로 번지며 자바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망꾸부미 왕자의 형이자 당시 까르타수라 왕국의 술탄이었던 빠꾸부워노 2세도, 처음엔 기본적으로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운동인 이 반란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가 네덜란드가 승기를 잡고 상황을 진압해 나가자 나중엔 네덜란드 지지로 선회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줏대가 없다 말하지만 본인들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정치적 판단을 했다고 말하곤 하죠.
빠꾸부워노 1세(왼쪽)와 빠꾸부워노 2세(오른쪽)
하지만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습니다. 정부 관료들 중에서도 네덜란드를 혐오하던 사람들이 술탄의 생각이 바뀌자 왕에게 등을 돌리고 반란군에 합류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1742년 까르타수라의 궁전을 공격해 들어와 모두 파괴해 버렸고 꼬리에 불 붙은 여우처럼 빠꾸부워노 2세는 뽀노로고(Ponorogo)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VOC와 마두라의 짜끄라닝랏 4세(Cakraningrat IV)의 군대가 반란군을 격파한 후에야 까르타수라로 돌아온 빠꾸부워노 2세는 파괴된 궁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음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는 결국 수라카르타에 새 궁전을 건설해 1745년부터 그곳에 입주해 시작했습니다. 사족이지만 ‘까르타수라’나 ‘수라까르타’나 궁전과 도시의 이름은 말 순서만 바꾼 것이어서 빠꾸부워노 2세의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같은 게 살짝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패퇴한 반란군 중엔 라덴 마스 사이드(Raden Mas Said)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까르타수라 왕국 아망꾸랏 4세(빠꾸부워노 1세)의 큰 아들 망꾸느가라 왕자(Pangeran Mangkunegara)의 아들이었으니 형제인 빠꾸부워노 2세와 망꾸부미 왕자 두 사람 모두의 조카였던 겁니다. 권력을 앞에 놓고는 형제도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않는데 삼촌 조카 사이 정도야 오죽 했을까요? 그가 이끄는 반란 잔당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며 수꼬와티(Sukowati)를 점령하자 빠꾸부워노 2세는 누구든 수꼬와티를 탈환하는 자에게 3,000짜짜(Cacah)에 달하는 땅을 포상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망꾸부미 왕자가 돌연 두각을 나타냅니다. 1746년 망꾸부미 왕자의 부대가 라덴 마스 사이드를 수꼬와티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임호프 남작(Gustaaf Willem van Imhoff)
하지만 재상 쁘링갈라야(Patih Pringgalaya)는 술탄을 꼬드겨 애당초의 포상 약속을 철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권력의 암투는 왕조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린 상황에서도 그림자 속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을 세운 사람이 오히려 왕족들과 고위관료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으니 망꾸부미 왕자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거기에 VOC 총독 임호프 남작(Baron van Imhoff)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빠꾸부워노 2세가 해안지역을 네덜란드에 조차해 준다면 끄라톤 궁전이 네덜란드에 빚지고 있는 20,000 레알을 상쇄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국토를 돈에 팔아 넘기라는 제안에 망꾸부미 왕자는 격분했지만 술탄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임호프 남작이 망꾸부미 왕자를 대중 앞에서 모욕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사건건 VOC에게 반기를 드는 망꾸부미 왕자는 그래도 왕국에서 수난 밑에 가장 높은 사람이었는데 임호프 남작이 오만불손하게 군 것은 그만큼 까르타수라 왕국을 밑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칼을 뽑아 들며 기염을 토했지만 술탄과 왕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오히려 임호프 남작을 옹호하며 망꾸부미 왕자를 비난했습니다. 마음을 다친 망꾸부미 왕자는 1746년 5월 마침내 수라카르타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조카 라덴 마스 사이드의 반군 사령부를 찾아갑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이제 자신을 배신하고 영토를 이민족에게 팔아 넘기려는 형제를 적으로 삼고 어제의 반역자였던 조카의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라라 인텐(Rara Inten)이라는 이름의, 나중에 구스티 라투 번도로(Gusti Ratu Bendoro)라고 불리게 되는 그의 딸을 라덴 마스 사이드와 혼인시키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망꾸부미 왕자가 VOC를 등에 업은 빠꾸부워노 2세를 대항해 벌인 이 전쟁을 역사가들은 제3차 자바계승전쟁(Perang Suksesi Jawa III)이라 부릅니다. 1747년에 이르러 망꾸부미 왕자는 약 1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드막(Demak)과 그로보간(Grobogan) 등지의 전투에서 VOC와 카르타수라 왕국군을 상대로 모두 승승장구했습니다.
빠꾸부워노 3세
한편 수라카르타에서는 병이 깊은 빠꾸부워노 2세가 이제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그해 1749년 12월 11일 까르타수라 수난국의 전권을 그 섭정이자 보호자나 다름없던 VOC에게 이양했습니다. 주권국의 면모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결정을 접한 망꾸부미는 스스로 왕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12월 12일 자신의 부대 본진에서 빠꾸부워노 3세로 즉위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VOC 역시 이를 무시하고 12월 15일 빠꾸부워노 2세의 아들을 빠꾸부워노 3세로 즉위시켰습니다. 이제 수라카르타 수난국에 두 명의 빠꾸부워노 3세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망꾸부미는 끄바나란의 수수후난 (Susuhunan Kebanaran)이라 불렸는데 이는 그의 부대 본진이 마타람 지역 끄바나란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속개되면서 1751년 보고원토 강(Sungai Bogowonto) 유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망꾸부미 왕자는 다시 한번 강력한 군사지휘력을 발휘해 드 클럭(de Clerck) 대위가 이끄는 VOC 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런 망꾸부미 왕자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의 편에도 있었는데 다름아닌, 그의 조카이자 사위인 라덴 마스 사이드였습니다. 그는 마타람에 대한 지배권을 나누어가질 수 없다며 망꾸부미 왕자와 충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21세기에 들어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국가영웅으로 지정되는 사람들인데 당시에는 이렇게 반목과 협력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라덴 마스 사이드. 그는 매 전투마다 상대편의 가혹한 인명피해를 일으켰으므로
삼버르냐와 왕자(Pangeran Sambernyawa)라고도 불렸다. ‘목숨을 앗아가는 왕자’라는 뜻이다.
역사는 1752년 망꾸부미와 라덴 마스 사이드가 매우 큰 견해차이를 보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바의 귀족들 대부분이 라덴 마스 사이드야말로 수수후난의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했다는 것이 모든 불화의 불씨였습니다. 원래 라덴 마스 사이드가 구축한 조직에 늦게 합류했던 망꾸부미의 세력은 여지없이 열세에 몰렸으므로 망꾸부미는 조직력으로 상대할 수 없다면 무력으로 상황을 정면돌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말았어요. 무력 역시 라덴 마스 사이드가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망꾸부미는 자기 사위에게 온전히 항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만 외견상 고개를 숙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한편으론 VOC에게 몰래 손을 내밀어 함께 라덴 마스 사이드를 치자고 은밀히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토록 반목했던 VOC는 물론 빠꾸부워노 3세와도 협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VOC가 그 제안을 덥석 문 것이 1754년의 일입니다. 일전에 임호프 남작이 제안한 것처럼 자바 북부해안이 VOC에게 조차될 것을 전재로 그 북부해안 주지사로 내정되어 있던 니콜라스 하르팅(Nicolaas Hartingh)이 망꾸부미의 교섭상대였는데 두 사람의 서신을 품고서 그들 사이를 오간 중재자는 샤익 이브라힘(Syaikh Ibrahim)이라는 터키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간접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고 타결이 가까워지자 망꾸부미는 1754년 9월 직접 하르팅과의 회합에 나섰습니다. 거기서 이루어진 합의 내용이란 망꾸부미가 빠꾸부워노 3세의 왕국 반을 할양받는 대신 북쪽 해안을 VOC에 조차해 주고 그 대가로 20,000레알을 받는데 반은 망꾸부미가, 다른 반은 빠꾸부워노 3세에게 지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합의를 구체화시킨 기얀티 조약이 1755년 2월 13일 마침내 망꾸부미 왕자와 네덜란드 총독 야콥 모셀(Jacob Mossel) 사이에 서명되며 망꾸부미는 하멩꾸부워노 1세로 등극했고 빠꾸부워노 3세의 왕국은 둘로 나뉘어 그 반을 하멩꾸부워노 1세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기얀티 조약은 이 외에도 라덴 마스 사이드의 반군을 격멸시키기 위해 망꾸부미 왕자의 군대가 VOC 및 빠꾸부워노 3세의 군대와 손을 맞잡는다는 서약도 담고 있었습니다.
기얀티 조약의 결과물
이렇게 세 개의 세력이 합쳐지면서 마타람의 영토가 수라카르타와 족자, 두 나라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사실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마타람의 주권을 망꾸부미와 라덴 마스 사이드가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갈등이었는데 이제 라덴 마스 사이드를 대적하기 위해 왕국을 둘로 나누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햇던 것일까요? 물론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VOC 측에서 끊임없이 유도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VOC로서는 왕국이 분열되어야 그 사이에서 서로를 이간질하며 보다 손쉽게 그 지역의 근거지를 유지하고 이권을 취할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까르타수라 왕국 분열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VOC였습니다.
이 기얀티 조약을 통해, 빠꾸부워노 3세는 여전히 수라카르타의 왕이란 사실을 재확인했고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는 족자의 왕으로 등극했지만 왕국을 다스릴 자신의 왕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끄라톤 궁전을 짓기 위해 VOC에게 북쪽해안 조차금을 선금으로 요구했는데 VOC는 그 돈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족자 술탄국과 VOC의 관계는 또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세력간의 관계란 그렇게나 쉽게 틀어지는 것이고 그 배경엔 늘 경제적 이권과 돈의 문제가 숨어있기 마련인 것이죠.
1755년 4월 하멩꾸부워노 1세는 빠브링안 숲(Hutan Panbringan)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왕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원래 이 숲에는 수라카르타에서 이모기리(Imogiri)로 망자의 유해를 운반하던 중 쉬어갈 목적으로 지어진 응아욕갸(Ngayogya)라는 국영여관이 있었는데 하멩꾸부워노 1세가 다스리게 된 마타람의 영토 반쪽의 국가도 그 여관의 이름에서 착안해 응아욕갸라트타 하디닝랏(Ngayogyakarta Hadiningrat)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을 줄여 욕야카르타(Yogyakarta)라 불렀고 오늘날 그걸 더 줄여 ‘족자’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멩꾸부워노 1세는 1756년 10월 7일 끄바나란에서 족자로 이사했습니다. 족자라는 이름은 그후 왕국의 수도로 더욱 많이 알려졌고 왕국의 이름도 흔히 족자 술탄국(Kasultanan Yogyakarta)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로서 하멩꾸부워노 1세는 VOC 및 수라카르타와 평화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술탄 아궁이 호령하던 마타람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은밀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허약한 빠꾸부워노 3세가 다스리는 수라카르타라도 네덜란드가 그 뒷배를 봐주고 있었으므로 영토회복은 만만찮은 과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여전히 건재한 위력을 자랑하던 망꾸네고로 1세도 왕국이 나뉘어진 것을 탐탁찮게 여기며 코웃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 이 망꾸네고로 1세는 라덴 마스 사이드가 대관식을 올린 후 받게 된 호칭입니다. 그 역시 마타람의 제왕이 되어 영토를 재통일할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1788년 빠꾸부워노 4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부왕보다 훨씬 능력있는 인물이었고 하멩꾸부워노 1세 못지 않은 노력가이기도 했다. 그 역시 마타람 왕국의 재통일을 꿈꾸었습니다. 결국 당대의 모든 지도자들이 마타람 왕국의 영광과 영토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족자를 무시하고 자기 형제를 망꾸부미 왕자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하멩꾸부워노 1세와의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망꾸부미는 하멩꾸부워노 1세여야 했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빠꾸부워노 4세는 족자의 왕위 역시 부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VOC 역시 새 수수후난의 행보에 초조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으며 자바 왕족들의 분열과 반목은 언제나 환영해마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만약 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는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던 VOC의 재정상태를 더욱 파탄내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빠꾸부워노 4세
빠꾸부워노 4세는 자신의 형제에게 붙인 ‘망꾸부미’라는 이름을 폐기하라는 족자의 요구를 듣지 않고 강경일변도로 대결태세를 밀어붙였습니다. 사실상 기얀티 조약에는 족자 술탄국의 영속적 승계에 대한 내용이 없었고 수라카르타가 그 이전까지 줄곧 전체 영토에 대한 책임을 져왔다는 측면에서 족자 술탄국을 잠정적 반란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던 빠꾸부워노 4세의 공격적 모습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빠꾸부워노 4세의 대결적 성격뿐 아니라 극단적 종교성향을 다분히 가진 영적 지도자들이 등장했는데 이것 역시 VOC와 두 경쟁자들을 긴장시키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슬람뿐 아니라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자칫 극단으로 치달리는 종교지도자들은 역시 극단적인 가르침을 설파해 국가를 엉뚱한 방형으로 끌고가곤 했죠. 이들 영적지도자들은 빠꾸부워노 4세의 고문관이 되어 예전 자바를 분열시켰던 전쟁을 다시 재현시킬 우려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1790년에 이르러 하멩꾸부워노 1세와 망꾸네고로 1세(라덴 마스 사이드)가 반란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시 손을 맞잡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몇번 쨉니까? 이번엔 그들이 VOC를 업고 수라카르타의 빠꾸부워노 4세를 포위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빠꾸부워노 4세를 둘러싼 영적 지도자들을 VOC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네덜란드 측을 이교도로 지목하며 반드시 축출해야 할 대상이라며 목청을 높였던 것입니다. 연합군의 물리적 압박이 주효해 결국 빠꾸부워노 4세는 손을 들었고 VOC는 그의 주변에 모여든 영적 지도자들을 모두 쫓아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닝랏’이라는 이름을 단 왕족들이 영적 지도자들과 손잡아 민중을 호도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측면에서 하멩구부워노 1세와 망꾸네고로 1세는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군사적 합작이 가능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1세는 마타람 왕국을 재통일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빠꾸부워노 3세의 딸과 결혼시키려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만약 성공했다면 애당초 빠꾸부워노 4세가 부친의 왕좌를 물려받는 일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멩꾸부워노 1세는 족자 술탄국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 마타람 왕가에서 술탄 아궁 이후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힙니다. 족자 술탄국은 막 건국된 나라였지만 그 영토는 이미 수라카르타의 규모를 넘어서고 있었고 군대 역시 자바 전역에 주둔하고 있던 VOC 군대를 숫적으로 압도할 정도였으니까요. 또한 그는 전쟁전술에 능할 뿐 아니라 심미적 감각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족자의 따만사리 끄라톤 궁전의 건축에서 그런 일면이 엿보입니다. 따만사리는 원래 남쪽 해안에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이 기획했는데 드망 뜨기스(Demang Tegis)라는 자바식 이름으로 불리는, 술탄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따만사리 끄라톤 궁전의 일부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이 나중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며 사뭇 평화롭게 변질되어 갔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좋아하거나 동경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1세는 네덜란드가 족자 끄라톤궁 인근에 요새를 짓는 것을 지연시키기도 했고 네덜란드가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 역시 망꾸부미 왕자의 반란군과의 전쟁이 VOC가 자바에 존속하던 기간 중(1619~1799) 가장 힘겨운 전쟁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정치적 세력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마침내 족자 술탄국과 새로운 하멩꾸부워노 왕조를 열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침략자들에 대한 그의 증오는 그의 아들인 하멩꾸부워노 2세와 이후 술탄들에게도 계승되었고 그리하여 2006년 11월 10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하멩꾸부워노 1세의 업적과 기상을 기려 국가영웅으로 지정하기에 이릅니다.
사족이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개월 후 강력한 지진이 족자를 뒤흔들었습니다.
망꾸부미 왕자에 대한 스크립트 : “충직한 친구도, 영원한 원수도 없다”
하멩꾸부워노 1세 초상
2018.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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