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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수라바야 영주 장라나 2세

beautician 2018. 7. 15. 10:00


5. 수라바야의 영주 장라나 2


일전에 마타람 왕국과 뜨루노죠요 반란을 다룰 때 그 배경을 이루는 여러가지 일들 중 피치 못하게 누락된  몇 가지 내용들이 있는데 빠꾸부워노 왕조의 출현 같은 굵직한 이야기도 있고 운뚱 수라빠티가 몰아낸 빠수루안 영주의 동생 장라나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선 장라나를 간단히 소개해 보려 합니다.




이 장나라가 아닙니다.


장라나 2(Jangrana II)의 본명은 앙가왕사(Anggawangsa - 옹고웡소라고 읽기도 함)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라바야에서 뻐끽 왕자(Pangeran Pekik)를 섬겼죠. 아망꾸랏 1세에게 온가족이 처형당한 그 수라바야 제일의 귀족집안에서 말입니다.

 

자바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에 따르면 장라나는 1709년 까르따수라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라바야 영주들의 역사(Sedjarah Regent Soerabaja)라는 서적에는 권능왕 빠나따가마(Penembahan Panatagama)라 불리다가 죽음을 맞는 인물은 장라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도 앙가왕사가 사실은 장라나 1세이고 빠나다가마가 장라나 2세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이들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버지와 아들로 두 사람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이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런 식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으니 좀 헷갈리는 걸 감수해야만 합니다.

 

1677년 앙가왕사와 형인 앙가자야는 뻐끽 왕자의 손자인 아망꾸랏 2세를 돕기 위해 뚜르노조요 반란의 진압군 편에서 참전했습니다. 앙가왕사는 그레식에서 냐이 스또미(Nyai Setomi)의 유물인 화포를 반란군들의 손에서 노획했고 수라바야에서 반란군들을 몰아낸 후 그 공을 인정받아 뚜먼궁 장라나라는 칭호를 받아 수라바야의 영주로 등극했습니다. 장라나는 뜨루노죠요에 의해 로다야 숲으로 밀려난 마두라의 영주 짜끄라닝랏 2세를 복권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뜨루노죠요 반란의 한 가운데에서 적극적으로 마타람 왕국 편에서 반란 진압에 앞장 섰던 인물인 것이죠.

 

뜨루노죠요의 반란이 평정된 후 장라나는 블람방안(Blmabangan)에서 벌어진 따왕알룬(Tawangalun)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여러 기록에서 장라나는 자존감 높은 인물로 묘사되는데 구눙끼둘에서 와나꾸수마(Wanakusuma)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수라바야로 돌아갈 때 수라바야의 네덜란드 부지사에게 살보(Salvo)포로 축포를 쏘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나한테 전투를 시켰으니 너희들은 최소한 박수라도 치라는 거였을까요? 그는 분명 네덜란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VOC의 속을 벅벅 긁어 놓는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지 싶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에도 운뚱 수라빠티가 등장합니다. 그는 VOC가 수배한 도망자로 마타람 왕국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가 아망꾸랏 2세의 명령을 받아 빠수루안을 공격해 점령했다는 이야기를 '풍운아 운뚱 수라빠티'편에서 이미 기술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빠수루안의 영주가 장라나의 형인 앙가자야였습니다. 빠수루안에서 패한 앙가자야는 수라바야로 피신했으나 장라나는 맞고 온 형의 편을 들어 운뚱 수라빠티를 공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간접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VOC에 저항해 오던 그는 운뚱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690년 아망꾸랏 2세가 장라나와 마두라 영주 짜끄라닝랏 2세에게 운뚱 수라빠티에게서 빠수루안을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건 아망꾸랏 2세가 여전히 네덜란드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전쟁시늉이었을 뿐입니다. 장라나는 빠수루안에서 싸우는 흉내만 낸 후 공식적으로 패전하고 수라바야로 돌아갔습니다. 실수인듯 또는 본의가 아닌 듯 네덜란드에게 역시 어깃장을 놓고 있던 아망꾸랏 2세는 그런 장라나에게 몰래 엄지를 척 세워 보여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1703년 아망꾸랏 2세가 죽자 까르따수라에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장라나는 이때 빠꾸부워노 1, 즉 뿌거르 왕자 편에 서서 아망꾸랏3세와 싸웠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시류를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탁월했던 모양입니다. 한번도 지는 편에 서서 싸움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1705년 마침내 투쟁에 승리한 빠꾸부워노 1세가 까르따수라의 궁전을 차지했고 쫒겨난 아망꾸랏 3세는 하필이면 빠수루안의 운뚱 수라빠티를 찾아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170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군대, 까르따수라, 마두라 수라바야 등의 연합군이 빠수루안을 공격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이 전쟁에서도 운뚱 수라빠티의 절친이었던 장라나는 그 전쟁이 썩 내키지않았으므로 어떻게든 사보타지를 벌여 네덜란드군의 발목을 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저의가 너무 눈에 띄었던 모양입니다.

 

1706년 운뚱 수라빠티가 전사하고 아망꾸랏 3세도 1708년 생포되자 동인도회사(VOC)는 1709년 빠꾸부워노 1세 앞에 장라나를 반역자로 고발했습니다. 장라나가 1706년 빠수루안 정벌 당시 길안내를 하며 일부러 끝도 없는 논길을 가로지르거나 험난한 산길을 선택해 네덜란드 병사들 중 병에 걸리거나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을 일부러 초래했다는 증거가 나온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장라나는 빠수루안에서의 전투에서도 싸우는 시늉만 한 결과 그가 이끈 수라바야 군대에서는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빠꾸부워노 1세는 스스로 전혀 원치 않았지만 동인도회사의 강권에 밀려 장라나의 처형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혼신을 다한 부하 귀족을 VOC 이민족의 손에 내어주는 것이 흔쾌한 마음이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장라나는 죽음을 앞두고 대인배의 면모를 보입니다. 수라바먀 민중들이 그의 혐의에 휩쓸리지 않도록 충분하 배려와 조치를 한 후 스스로 까르따수라에서 처형인의 창에 꿰뚤려 죽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장라나는 예수와 같이 민중을 위해 스스로 깔끔한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고 빠꾸부워노 1세는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사형명령을 내리고 손을 씻는 본디오 빌라도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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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꾸부워노 1세 

 

수라바야 영주들의 역사서에서는 이때 죽은 이가 1705년부터 영주가 된 장라나 2, 즉 장라나 앙가왕사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 아들과 아버지는 역사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혼선을 안겨줍니다.

 

그가 죽은 후 수라바야는 까스뿌한(Kasepuhan)의 영지(Kadiaten)를 다스리는 장라나의 동생 자야뿌스삐타를 따르는 사람들과 까노만(Kanoman)의 영지를 다스리는 장라나 3세를 따르는 사람들이 1718년 각각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자바땅의 역사서에서는 아리야 자야뿌스삐따(Arya Jayapuspita)의 반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자야뿌스삐따는 형인 장라나와 마찬가지로 용맹스럽고, 민중을 사랑하며 신앙심 두터운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1714년 자야뿌스삐따는 까르따수라로 나오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장라나의 죽음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레식, 뚜반, 라몽안 등의 지역이 그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1717년 동인도회사와 까르다수라의 연합군이 수라바야를 침공해 왔습니다. 그들은 스빤장 지역에 본부를 두고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자야뿌스삐따는 운뚱 수라빠티를 추종했던 발리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1718년 이 전쟁에서 자야뿌스삐따의 동생이자 장라나 3세라 불리던 응아베히(Ngabehi)가 전사했고 자야뿌스삐타는 살아남은 동생들 수렝라나(Surengrana), 까르따유다(Kartayuda)와 함께 현재 모조꺼르토 지역인 야빤(Japan)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자야뿌스삐따는 빠꾸부워노 1세의 뒤를 이은 아망꾸랏 4세에 항거해 일어난 1719년 블리따르 왕자(Pangeran Blitar)의 반란에도 힘을 합쳤으나 불과 몇년 후인 1723년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