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근대사

[인도네시아 근대사]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 - 디포네고로의 아버지

beautician 2018. 7. 12. 10:00

술탄 하멩꾸부워노 3디포네고로의 아버지 (1810 - 1814)

 


술탄 하멩꾸부워노 3

 

라덴 마스 수로요는 하멩꾸부워노 2세와 구스티 깐젱 라투 끄다톤(Gusti Kanjeng Ratu (GKR) Kedhaton)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중국인 딴진싱(Tan Jin Sing)의 전기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라덴 마스 수로요는 조용하고 늘 양보하는 성품을 가졌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41세 때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2세는 덴덜스의 네덜란드군에 의해 폐위되고 라덴 마스 수로요가 하멩꾸부워노 3세로 즉위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모든 권한을 잃고 술탄 세뿌(노술탄)이라 불리며 그대로 끄라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 본국이 나폴레옹 군대에 항복하자 총독부가 힘을 잃은 사이 하멩꾸부워노 2세가 다시 족자의 왕좌를 되찾습니다. 하멩꾸부워노 3세는 아무런 저항없이 태자로 내려앉았는데 그것이 1811115일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해 1228일 영국군이 자바섬에 진출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와 영국군 사이의 소통은 술탄의 동생인 노토꾸수모 왕자가 맡았습니다. 노토꾸수모 왕자는 나중에 래플스 총독대행과 뜻이 맞아 절친이 되는데 일각에서는 자바문학과 문화에 정통한 총독이 노토꾸수모 왕자의 마음을 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광할한 동인도의 식민지를 두고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지배권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이권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총독도 하멩꾸부워노 2세를 족자 술탄국의 지배자로, 라덴 마스 수로요를 아디빠티 아놈으로 인정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래플스와 술탄은 서로 대면하던 첫 날부터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고 결국 영국은 또 다시 하멩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키고 아디삐티 아놈을 왕위에 앉히려 무력을 동원합니다. 

 

이 사건을 스뻐히 전투(게게르 스뻐히- Geger Sepehi)라 부르는데 1812619일부터 20일 사이에 영국군이 족자 끄라톤궁을 공격해 벌인 전투를 말합니다. 스뻐히(Sepehi)란 말은 당시 영국군이 운용했던 세포이(Sepoy)부대의 인도네시아식 표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1810년대 동인도의 세포이 부대 병사들

 

전통적으로 서로 반목해왔던 족자와 수라카르타의 왕실은 영국군 진출을 맞아 함께 저항하자는 밀약을 몰래 맺기에 이릅니다. 물론 정황을 보면 수라카르타가 족자를 등떠밀어 영국과 충돌시킨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영국측 족자 주지사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가 은밀히 태자와 접촉한 것입니다. 영국은 강경한 하멩꾸부워노 2세보다 훨씬 성품이 온유한 태자를 왕좌에 앉히려 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가 그랬던 것처럼 영국도 태자를 더욱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죠. 한편 하멩꾸부워노 2세 측은 영국을 설득해 태자의 자리를, 보다 심지가 굳은 망꾸디닝릿 왕자(Mangkudinigrat)에게 넘기려 했습니다. 번도로 하리야 빠눌라 왕자(Bendara Pangeran Harya Panular)가 쓴 족자 베다힝 이야기(Babad Bedhahing Ngayogyakarta) 또는 엥렝 야사(Babad Ngengreng)에 등장하는 태자의 모습이나 당시 지방총독 발크(Valck)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태자는 아버지에 의해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나서 왕좌를 되찾아야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1812613일 세포이 부대가 병력의 반쯤을 차지하는 영국군이 야음을 틈타 브레더부르크 요새(Benteng Vrederburg)에 은밀히 입성했고 래플스 총독대행은 며칠 후인 617일 족자에 도착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5시경 영국과 손잡은 노또꾸수모 왕자의 가족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요새로 피신했고 그 추종자들은 영국군과 약속된 표시인 하연 천을 왼쪽 팔에 묶고 영국군과 합류했습니다. 영국 기병대를 급습한 라덴 하리야 시두레자(Raden Harya Sindureja)의 부대만이 이날 시작된 영국군의 기습공격에서 끄라톤 궁전 측의 유일한 승전사례를 만들었습니다. 그외의 모든 방어선은 철저히 열세에 몰렸습니다.

 

이날 레플스 총독이 술탄에게 왕위를 태자에게 양위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술탄이 이를 거절하자 619일 영국군을 끄라톤 궁전에 경고포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강경한 술탄을 이를 무시하고 저항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되자 끄라톤 동쪽 방어선에 설치된 끼아이 나가룬띵(Kyai Nagarunting)의 포대가 폭발을 일으켜 끄라톤 경비대의 스타벨 포병여단(Brigade Setabel) 병사들이 불덩어리가 되어 지리멸렬했고 부기스 부대가 지키던 무기고도 영국군 포격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치열한 전투는 620일 절정에 이르러 결국 영국군의 승리로 굳어져 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영국군은 중국인 사회 우두머리인 딴진싱이 준비한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끄라톤 궁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따루나수라(Tarunasura), 빤짜수라(Pancasura)같은 경내 관문들이 파괴되면서 영국군의 공격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족자 끄라톤의 많은 왕족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엔 술탄의 세 명의 사위 중 왕궁경비 총사령관이던 깐젱 라덴 뚜먼궁 수마디닝랏(KRT Sumadiningrat), 그리고 태자의 어머니인 끄다톤 왕후(Ratu Kedaton)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끄라톤 중심부인 끄다톤(kedhaton)을 포위하자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도 더 이상 저항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입관을 앞둔 시체처럼 온통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나온 그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했고 왕과 그를 보위한 일단의 왕족들이 걸치고 있던 귀금속과 패물들을 영국군에게 압수당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영국군은 끄라톤 궁전 안의 중요 문서들도 마구잡이로 압수하여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때 약탈당한 문서들은 7,000 점에 달합니다. 이 외에도 궁전의 패물들과 아름다운 끄리스 단검들, 악기들이 짐꾼들 등에 지거나 수레에 산더미처럼 담겨 주지사 저택으로 옮겨졌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태자는 다시 하멩꾸부워노 3세로 즉위했지만 하멩꾸부워노 2세와 그의 다른 두 아들 망꾸디닝랏 왕자(Pangeran Mangkudiningrat)와 머르타사나 왕자(Pangeran Mertasana)는 스마랑에 압송되었다가 머나먼 뻬낭섬의 유배지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622일 래플스는 빠꾸알라만(Pakulaman) 지역을 노토꾸수모 왕자에게 떼어주고 그곳을 대대손손 지배할 고위 영주로서 그를 빠꾸알람 1(Paku Alam I)에 봉했습니다.

 

아디빠티 아놈이 처음 왕위에 오를 떄 그의 아들도 번도로 아리오 디포네로고 왕자(Bendara Pangeran Ario Diponegoro)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가 디포네고로 왕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에 심취해 이슬람 공부를 위해 할머니와 함께 뜨갈레죠에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민족에게 고개숙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므로 그가 끄라톤 궁을 떠나있으려 한 것은 이민족들이 지배하고 반역한 왕족들, 재상들이 날뛰는 궁전을 혐오했기 때문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디포네고로 왕자는 나중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대규모 저항전쟁을 벌이는데 그 전쟁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모든 역량과 경비를 바닥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이 끄라톤을 무릎 꿀린 후 족자 술탄국의 정치지형은 드라마틱하게 변했습니다. 우선 북쪽 해안의 여러 지역을 매년 불과 100,000 레알을 받고 조차해 주어야 했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영국군을 도운 노토꾸수모 왕자에게 아디까르토(Adikarto) 지역 (꿀론쁘로고)4,000짜짜(cacah)에 이르는 땅을 넘겨주어야 했는데 노토꾸수모 왕자는 머르디카 왕자(Pangeran Merdika)라는 이름을 받았다가 깐젱 구스티 빵에란 아디빠티 아리야 빠꾸 알람 1(Kanjeng Gusti Pangeran Adipati Arya Paku Alam I)라는 자치구의 수장으로 즉위합니다. 그의 이름 앞엔 분명 왕보다 아랫단계인 빵에란, 아디빠티 등의 호칭이 붙지만 사실상 그 자치구의 배타적인 절대 영주가 된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술탄은 중국인 영주 딴진싱(Tan Jin Sing)에게도 영국군을 도와 세운 공의 보상으로 1,000짜짜의 땅을 하사해야만 했습니다. 딴진싱은 1760-1831년 사이에 살았던 인물로 꺼두(Kedu 1793-1803)와 족자(1803-1813)에서 화교집단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노술탄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하멩꾸부워노 3세를 즉위하도록 하던 과정에서 상당한 공을 세워 1813년 래플스에 의해 깐젱 라덴 뚜먼궁 쓰짜디닝랏(Kanjeng Raden Tumenggung Secadiningrat)이란 귀족의 칭호를 받으며 나요꼬의 군수(Bupati Nayoko)가 됩니다. 이로서 그는 뜨라 홍고드로노(Trah Honggodrono), 뜨라 까르또디르요(Trah Kartodirjo)와 함께 족자 끄라톤 궁전에서 목소리를 내던 3개의 중국계 가문 중 하나인 뜨라 스쪼디닝랏(Trah Secodiningrat)의 시조가 되죠. 하지만 그가 영국군이 족자 끄라톤궁을 공격한 사건에서 했던 역할은 논란의 대상이었고 끄라톤궁 역시 그가 하멩꾸부워노 2세를 몰아내는 데에 일조했다는 사실로 인해 내심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자바 전쟁이 벌어졌을 때 디포네고로군이 화교들을 적으로 인식해 공격했던 것 역시 딴진싱이 했던 일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딴진싱 전기

 

족자 시내 말리오보로 거리(jl. Malioboro) 가까이의 끄딴단 마을(Kampung Ketandan)은 하멩꾸부워도 3세 시절에 건설된 족자의 화교문화 중심지였습니다. 처음 이 마을은 화교들로 이루어진 세무수금원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술탄의 개인 고문격이었던 딴진싱의 2층 집도 여기 지어졌습니다.

 

한편 영국의 입김이 닿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끄라톤의 병사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끄라톤을 공격하며 강력한 저항을 경험했던 영국은 식민정부가 허락하는 것 이상의 군대를 술탄이 보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영국군과 세포이 부대로 궁전 경비대의 주축을 구성했으므로 당초 왕궁경비를 담당했던 부기스족, 발리 출신 들을 비롯한 9,000명의 끄라톤 경비대 병사들은 일자리를 잃고 길바닥에 나앉아야만 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군복을 벗고 자바섬 바깥, 식민정부가 소유한 외곽의 플랜테이션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두 차례나 왕위에 올랐던 하멩꾸워노 3세의 치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재즉위한 지 2년 만인 1814113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가 술탄으로 재위한 기간은 두 번을 모두 합쳐 865일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모기리 빠지마딴(Pajimatan) 지역의 아스타나 까수와르간(Astana Kasuwargan)이라는 곳에 묻혔습니다. 그가 라투 이부(Ratu bu)라 부르며 어머니처럼 모셨던 구스티 깐젱 라투 끈쪼노(GKR Kencono)1816년에, 라두 하긍(Ratu Hageng)1820년에 차례로 눈을 감습니다. 한 시대가 그렇게 빨리 저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아들 디포네고로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기 원했지만 다른 아들 구스티 라덴 마스 입누 자롯(Gusti Raden Mas (GRM) Ibnu Jarot) 태자가 네덜란드 총독부의 입김에 의해 10세의 나이로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로 즉위합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4

 

조용하기만 했던 하멩꾸부워노 3세는 뭔가 업적을 남기기에 그의 재위기간이 물리적으로 너무 짧았는데 영국에서 방탄처리가 된 마차를 가져와 끼아이 몬드로 주월로(Kyai Mondro Juwolo)라고 이름붙였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인상적입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가 재위하던 시절 사람들은 짧지만 여느때보다 안정된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2018.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