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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전쟁 (5) 본문
자바 전쟁 (5)
드콕 장군은 전투를 통해 적군을 섬멸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지속적인 전투를 벌여 적의 병참을 소진하도록 하려 했던 것인데 디포네고로군이 정면대결을 피하니 계획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밥과 소금만으로 장기간 버티며 전쟁을 할 수 있는 디포네고로군 병사들의 인내심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고아 셀라롱의 디포네고로군 본거지를 여러차레 기습했지만 매번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슬라롱 공격을 위해 처음엔 솔로에서 병력을 차출하다가 스마랑에서도 쿠미시우스 대위(Kapten Kumisius)의 지휘 아래 3명의 장교와 120명의 병사를 차출하고 3만 굴덴의 전비(戰費)를 준비해 공격해 왔지만 디포네고로군은 이들을 무찌르고 전비마저 모두 탈취해 갔습니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대규모 부대를 편성해 슬라롱으로 공격해 들어간 네덜란드군은 이번에도 슬라롱이 텅텅 비어 있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은 공격계획을 귀신같이 알아내 네덜란드군이 도착하기 전, 자취를 감추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디포네고로군은 기습에 실패하고 철수하는 네덜란드군의 뒤를 따라잡아 중도에서 격파해 버리기도 했으므로 전쟁은 장기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825년-1827년 사이 드콕 장군이 밀어붙인 추격작전(진군, 전투, 주둔)으로는 결국 디포네고로를 사로잡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네덜란드와 그 동맹들을 대항해 벌이는 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성전인 지하드(Jihad)였습니다. 그 지하드의 적은 이교도들과 변절자들이었습니다. 이교도란 이슬람 성도들을 공격하고 지배하려는 비무슬림, 즉 네덜란드인들이었고 변절자들이란 네덜란드군을 도와 디포네고로군과 대적하는 무슬림들, 민중들을 억압하는 영주들을 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디포네고로의 전기에 등장하는 시들 중 하나입니다.
슬라미라(Selamira)를 출발해
쁘라기(Pragi) 동편에 도착해서
슨자티(Senjati)를 지나
적들이 쳐 올라온다.
저 많은 수의 이교도들과 변절자들이
세 패로 나뉘어져 달려드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구나
디포네고로군의 위세에 위기를 느낀 네덜란드군은 수마트라, 술라웨시, 스마랑, 수라바야 등에 전개되어 있던 네덜란드군 전력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이를 위해 네덜란드는 수마트라 본졸지역의 뚜안꾸 이맘본졸(Tuanku Imam Bonjol)같은 동인도 전역의 반란세력들과 잠시 휴전협정을 맺어야 했습니다. 자바전쟁 초기인 1825-1827년 기간에 네덜란드 측이 겪어야 했던 많은 어려움 중 하나는 당시 보유 병력이 정규군 3개 연대와 (보병 1개 연대, 포병 1개 연대 등) 수라카르타의 수난 망꾸나고로로부터 얻어낸 1,800명 규모의 부대(Legiun Mangunagoro)뿐이었다는 병력부족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비용면에서도 디포네고로 전쟁을 통틀어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정부가 지출해야 했던 전쟁비용은 모두 2,500만 굴덴(약 1,270억 루피아)으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더욱이 나중에 스텔셀 벤뗑(요새 시스템) 전략을 수행하면서 더욱 촘촘한 요새건설과 부대의 기민한 기동력을 담보하기 위해 과중한 비용이 소모되었으므로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디포네고로 전쟁을 식민정부의 그루트 온헤일렌(groote onheilen – 대재앙)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재정적자는 1,800만 굴덴(약 920억 루피아)에 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1827년 한 해 동안 유럽인 병사 3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디포네고로군의 사상자 수에 못지 않은 수치였습니다.
한편 디포네고로 왕자와 그의 부대는 계속되는 네덜란드군의 습격을 피해 족자에서 서쪽으로 23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가까이 꿀론뿌로고의 닥사마을에 새로운 본부를 세웠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자바의 거점들을 하나씩 점령해 가다가 마침내 마타람 왕국의 옛 수도 쁠레레드를 손에 넣은 후 본부를 다시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디포네고로군의 활동반경은 반유왕이, 꺼두 수라카르타, 스마랑, 드막과 마디운까지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민들과 귀족들, 이슬람 울라마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디포네고로 왕자는 쁠레레드에서 ‘자바 땅의 술탄 압둘하미드 헤루짜끄라 아미룰묵미닌 사이딘 빠나따가마 까리파뚤라’("Sultan Abdulhamid Herucakra Amirulmukminin Sayidin Panatagama Kalifatullah Tanah Jawa)라는 긴 칭호를 받아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족자 술탄국의 국왕이 아니라 그가 추구해온, 자바 전체를 아우르는 이슬람 왕국의 술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쁠레레드(Plered)를 수도로 정했습니다. 쁠레레드는 1677년 뜨루노죠요 반란군에게 함락되기 전까지 마타람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그만큼 견고한 방어가 용이했으므로 꺼르타 뻥알라산(Kerta Pengalasan)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선이 구축되었습니다.
꺼르따 뻥알라산은 1795~1866의 인물로 전쟁 전엔 끄로모위조요(Kromowijoyo) 라는 이름이었고 요새지역인 꿀론 쁘로고의 낭굴란 지역 딴중 마을(Desa Tanjung, Nanggulan, Kulon Progo)의 관리였으며 훗날 왕실 담당관이 되어 왕실의 법도를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멩꾸부워노 3세(1814년 11월 3-4일)와 하멩꾸부워노 4세(1822년 12월 6-7일)의 임종을 지켰고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의 아들 중 한명인 블리따르 1세 왕자(Pangeran Blitar I)의 명을 받아 자바 전쟁 중 디포네고로 왕자를 지원했습니다.
1826년 6월 9일 예상했던 대로 네덜란드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쁠레레드를 침공해 왔습니다. 하지만 쁠레레드의 강고한 방어력에 네덜란드의 공격은 무위에 그쳤습니다. 쁠레레드의 방어에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젊은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나중에 총사령관이 되어 ‘알리 바사 쁘라위라디르자(Ali Basah Prawiradirja)라고 불리게 되는 센똣 쁘라위라꾸수마(Sentot Prawirakusuma)였습니다. 그는 당시 19살이었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다섯 번째 부인 라덴 아유 렛나닝시의 이복동생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버지이자 디포네고로 왕자의 장인어른인 롱고 쁘라위라디르죠(Ronggo Prawirodirdjo)는 반 네덜란드 성향의 인물로 결국 반역자로 몰려 덴덜스 장군(General Daendels)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센똣은 네덜란드를 극도로 미워했고 결국 자연스럽게 디포네고로군과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센똣 알리바사
1826년 7월초, 네덜란드가 이번에는 닥사를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디포네고로 왕자가 이번에도 먼저 군대를 소개시킨 후였습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네덜란드군이 다시 족자로 돌아가던 길에 매복해 있던 디포네고로군의 기습공격이 주효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 후 디포네고로군은 또다시 순식간에 닥사에서 철수해 네덜란드군의 감시망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게릴라 전술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닥사에서 대승을 거둔지 몇 개월 후, 이제 왕자의 고문이 되어 있던 끼아이 모조의 제안에 따라 디포네고로 왕자는 수라카르타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조직했습니다. 네덜란드측에 가담한 수라카르타 수난 망꾸나고로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26년 10월 디포네고로군은 사전 수립된 전술에 따라 수라카르타 서쪽의 가웍(Gawok)에서 네덜란드군을 쳐서 큰 전과를 올렸지만 예기치 않은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디포네고로 왕자가 전투 중 중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는 가마에 실려 머라삐산 기슭으로 급히 후송되어야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의 게릴라 전술이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지만 정작 디포네고로 왕자의 생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통상의 전략으로서는 디포네로고 왕자의 군세를 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예전과 다른 전략을 채용하기로 합니다.
우선 네덜란드가 암본으로 쫒아보낸 술탄 세뿌(Sultan Sepuh – 하멩꾸부워노 1세의 다섯째 아들인 하멩꾸부워노 2세)를 1826년 9월 21일 다시 족자로 불러들여 복권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조부였으므로 그렇게 하면 반란의 열기가 좀 가라앉거나 디포네고로 왕자가 찾아와 조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조치는 디포네고로 편에 서 있던 여러 귀족들을 동요시켜 삼비로조 (Sambirojo)의 부대를 지휘하던 망꾸디닝랏 왕자(Pangeran Mangkudiningrat)가 디포네고로를 등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는 꺼두(Kedu)의 총독부 부지사 반발크(van Valck)에게 전향의사를 표하면서 그 대가로 깔리아부(Kaliabu)의 영지를 요구했는데 그 요구가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26년 12월 1일 항복을 강행했습니다. 이 사건에 고양된 네덜란드군은 디포네고로군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전향을 권하는 서한을 보냈고 노또쁘로조 왕자(Pangeran Notoprojo)와 세랑 왕자(Pangeran Serang)도 그 회유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1827년 마르쿠스 드콕(Markus De Kock) 이 네덜란드 동인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네덜란드군의 전략은 예전과 사뭇 다른 변칙적 요새전을 벌이는 것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벤뗑 스텔셀(Benteng Stelsell) 전술입니다. 네덜란드군이 디포네고로군 지역을 탈취하면 즉시 그곳에 요새를 세우고 가시철조망을 둘러쳐 방어력을 높였는데 그 간이 요새들끼리의 간격을 비교적 촘촘하게 유지하고 그 사이에서 기동력 높은 병력을 운용하여 신속한 연락과 연계를 강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어느 한 지점에 한정된 지역적 개념이었던 ‘요새’는 이로써 보다 역동적인 측면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일단 한 지역을 점령하면 적군과 최대한 근접한 지점에 요새를 세움으로써 적병력이 집중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공격적인 지역순찰을 통해 요새간의 연락과 경계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궁극적으로 디포네고로군을 ‘섬멸지역’으로 밀어 넣으려 했는데 이 섬멸지역은 프로조 강(Sungai Projo)와 보고원토(Bogowonto) 사이의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촘촘한 요새망은 강력한 포위망 역할을 하여 적군 주력의 이탈을 방지하면서 재건이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섬멸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점령지의 요새는 방어 구심점이 되고 통신로를 긴밀하게 운용해 디포네고로군 지역에 틈을 만들고 그들의 유기적인 연락망 차단을 도모해 결과적으로 디포네고로군의 활동반경을 축소시키는 것이 벤뗑 스텔셀 전술의 목표였습니다.
벤뗑스텔셀 전략
이 요새전에는 민중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적군을 돕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꼭 필요했으므로 네덜란드군은 평소에 하던대로 마을의 집이나 창고, 사원들을 불사르지 않고 소, 물소, 염소 같은 가축들을 빼앗지 않으며 추수한 곡물들이나 음식물들을 망치거나 숲속 창고들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모든 병사들을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결과적으로 민중의 증오와 저항만 불러와 디포네고로군을 이롭게 할 터였습니다. 군대 역시 지역사회와 직접 소통하여 민중들이 네덜란드군에게 보호받는다는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주민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 선무작업들이 수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텔셀 벤뗑 전략을 통해 네덜란드는 지역적 내지 전면적인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지역적 주도권이 당장의 목표였는데 그렇게 되면 해당 지역에서 다시 세금을 걷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촘촘한 요새망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것이었으므로 네덜란드군은 그 비용을 충당할 환경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군대가 주민들과 소통하는 행위는 군이 해당 지역의 문화와 우선권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비쳐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저항심리를 누그러뜨리는 것이엇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민중들의 마음을 얻고 유대를 쌓아 반군의 운신의 폭을 위축시키려 했던 것이죠.
한편 네덜란드는 대민공작 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쟁지역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을 압박해 해당지역 민중들이 ‘불법행위’를 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이들을 ‘거역자’라 불렀습니다. 민중들 사이에선 ‘거역자’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네덜란드는 ‘거역자’ 시스템을 통해 민중들을 설득하기도 했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네덜란드군이 이 전쟁을 통해 자바인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디포네고로와 끼아이 모조 그리고 그 지지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며 설득하는 한편 정보제공 협조를 거부한 사람이 나오면 그 마을사람 전체를 ‘거역자’로 간주해 마을을 불살랐고 짐꾼들과 말을 위해 건초를 모아오는 이들에게도 급료조차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작전이 상당한 효과를 보여 디포네고로군의 저항이 현저히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술면에서도 요새를 건설하고 그 사이로 기동성 높은 병력을 이동시키며 그와 동시에 정치적 봉쇄전략, 정치적 이간질 등이 적절히 혼합된 벤뗑 스텔셀 전략전술은 큰 족적을 남겨 훗날 동인도 전역에서 벌어지는 다른 사건들을 진화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는데 훗날 아쩨 민중의 저항을 진압할 때에도 이 작전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드콕 장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평정하지 못하는 것이 그동안 오로지 수괴만 잡으려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디포네고로 휘하의 뚜먼궁 레벨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접촉하여 회유하는 데에 더욱 공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디포네고로군의 주요 지휘관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그들을 위협하고 달래며 적대행위를 멈출 것을 종용했습니다. 자바인들의 성격은 예측하기 힘들었고 적군과의 회담에 임한다고 해서 명예나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딱히 약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느릿느릿하고 게을러 보였지만 실제로는 강고한 게랄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콕 장군의 회유작전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벤뎅 스텔셀 작전이 주효해 예봉이 꺾인 디포네고로군은 움직임이 제한되면서 수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웅아란(Ungaran)을 시작으로 스마랑의 지방총독청에서도 패전을 겪은 디포네고로군은 후방으로 급히 후퇴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지휘관들이 희생되거나 낙오되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