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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전쟁 (6) 본문
자바 전쟁 (6)
우여곡절
끝에 수라카르타 가웍(Gawok) 전투에서 입은 중상에서 회복한 디포네고로 왕자는1826년 11월 17일
족자 서쪽의 뻥아시(Pengasih)로 향하며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속개했습니다. 지리한 접전 끝에 약 1년 후인 1827년
10월 10일 이후 휴전이 발효되어 양쪽의 전투가 일단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양측 대표들의 종전협상은 매번 결렬되곤 했습니다. 휴전이
유지되던 사이에 디포네고로 왕자는 새 왕국의 수도를 쁠레레드에서 뻥아시 인근 삼비라타(Sambirata)로
옮겨 그곳에 끄라톤 왕궁을 세웠습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1828년 내내 스텔셀 벤뗑 전략에 따라 체계적으로 요새들을 세워 디포네고로군의 운신의 폭을 좁혀오더니 삼비라타 끄라톤 궁전의 완공식이 성대하게 열리던 순간을 기해 휴전을 깨고 삼비라타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디포네고로를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순간에 일방적으로 휴전을 깨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네덜란드군의 행태는 비단 디포네고로 왕자를 상대한 자바전쟁에서뿐 아니라 훗날 1945년 이후 5년간 벌어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도 질리지도 않고 몇 번씩이나 똑같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디포네고로 왕자는 뻥아시로 피신했고 전쟁은 또다시 불붙었습니다. 하지만 그 양상은 전쟁 초반과 사뭇 달랐습니다.
끄로야(Kroya)에서 소년 장군 센똣이 수백 명의 네덜란드군을 생포하고 400정의 소총과 화포들을 노획하는 승전보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1829년의 전황은 디포네고로군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머리피산 기슭에서의 전투에서 끼아이 모조가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는 사건이 디포네고로군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의 군사 및 종교고문이자 디포네고로군 전체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전쟁 초창기부터 디포네고로를 크게 도왔던 망꾸부미 왕자와 당시 디포네고로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있던 센똣 알리바샤(Sentot Alibasya)가 네덜란드에게 항복하는 사건마저 벌어졌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센똣은 전장에서 사자와 같이 용맹을 떨쳤지만 군대를 유지할 비용에 쪼들리자 네덜란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를 따르는 많은 귀족들 역시 남기고 온 가족들에게 네덜란드가 가한 가혹한 처우로 인해 고민하다가 속속 투항하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큰 타격을 입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더 이상 길어진다면 그것은 디포네고로에게 절대 유리하지만은 않을 터였습니다. 그러던 중 1829년 10월 14일 디포네고로 왕자의 아내 라덴 아유 랏나닝시와 자녀들이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는 사건마저 벌어졌습니다. 이제 네덜란드군과의 협상은 거의 불가피한 듯 보엿습니다.
여기서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는 끼아이 모조의 생애를 잠시 요약해 봅니다 그의 본명은 무슬림 무하마드(Muslim Mochammad)로179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족자 끄라톤의 왕족이었지만 그는 왕궁 밖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군에 합류해 활약하다가1828년 11월 17일 끔방아룬에서 체포되어 바타비아에 끌려갔다가 북부 술라웨시 미나하사의 똔다노에 유폐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바인 마을을 세웠는데 그곳은 미나하사 전역으로 이슬람이 전파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똔다노에서 추종자들에게 호신술로서 까누가란(Kanugaran)이라는 체술(體術)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배워 익힌 것이기도 했습니다. 끼아아 모조는 네덜란드군에게 생포된 후 죽는 날까지 디포네고로 왕자와 끝내 재회하지 못했고 유배지에서 1849년 12월 20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반면 센똣 쁘라위로디르죠는 네덜란드에게 항복한 후 매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디포네고로를 회유하는 데에 앞장섰고 자바 전쟁이 끝나자 서부 수마트라에 파견되어 네덜란드 편에 서서 이슬람 파드리 분파(Paderi)의 반란 진압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네덜란드에게 놀아난 끝에 1855년 4월 17일 유배지에서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한때 모셨던 디포네고로 왕자가 마카사르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지 3개월 후의 일이었죠. 센똣은 한때 세상을 전율케 한 영웅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지 못했습니다.
센똣 쁘라위로디르죠
네덜란드 역시 전쟁을 빨리 끝내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엄청난 전쟁비용을 치르며 경제적 출혈로 식민지 운영 자체가 파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군은 디포네고로를 사로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중상모략과 감언이설도 사용했는데 디포네고로의 목엔 5만 굴덴의 현상금도 나붙었습니다. 하지만 자바 민중들은 누구도 디포네고로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1829년 초, 네덜란드군은 그 위세가 크게 축소된 디포네고로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었지만 드콕 장군은 굳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아직도 자바 땅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에 걸린 엄청난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이에 응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콕 장군은 군인으로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디포네고로 왕자를 죽여 영웅적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죽는다면 자바 민중들은 더욱 더 적개심을 불태우며 네덜란드에게 악에 받쳐 달려들 터였습니다. 그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드콕 장군은 디포네고로를 회유해 철통같은 방어선 밖으로 끌어내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자바의 귀족들이 일단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드콕 장군은 클레이런스 대령(Kolonel Cleerens)를 독려해 디포네고로 왕자가 스스로 협상에 나서겠다는 약조를 맺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러한 네덜란드 측 꼼수의 일환으로 이미 투항한 센똣 알리바사나 다누레죠 재상 같은 이들이 디포네고로 왕자 회유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30년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와 자신의 군대가 입은 심각한 내상을 숨긴 채 네덜란드의 협상요청에 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휴전협상이 최초 시도된 것은 1827년 중반부터였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군 총사령관으로 막 부임한 드콕 장군은 영국인 상인 윌리엄 스타버스(William Starvers)와 아랍계 출신인 알리 칼리프(Ali Chalif)를 통해 디포네고로 왕자와 비공식적인 소통경로를 만들어 놓고 전쟁을 멈춰준다면 어디든 원하는 땅을 떼어 주겠다는 의사를 비쳤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디포네고로가 제시한 전쟁종식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모든 네덜란드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
둘째, 북부 해안지역의 네덜란드 점령지를 술탄국에 돌려줄 것,
셋째, 네덜란드인들의 자바섬 거주를 허용하나 상업행위를 해서는 안됨.
이중 첫 번째 조건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이슬람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드콕 장군 측이 이후에도 전쟁이 진행되던 5년 내내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자 디포네고로는 “자바섬에서 이슬람 지도자가 다스리는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이 전쟁의 목표”라는 대답을 분명히 했습니다. 드콕 장군을 곤란하게 한 것은 이슬람 개종문제보다는 영토문제, 상업행위와 같은 보다 경제적인 측면이었으므로 요구가 지나치다며 거절의 답신을 보냈지만 디포네고로가 생각하는 전쟁의 목적은 이로서 자명해졌습니다. 그는 드콕 장군에게 보낸 자바어 서한에서도 자신의 뜻을 분명히 비쳤는데 그 번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친애하는 드콕 장군에게
내가 가진 진의가 무엇이냐는 장군의 질문에
난 이 자바땅 전역에 이슬람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라 답하겠소.
당신이 진실로 이 자바 땅의 이슬람을 훼손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면
나 역시 당신과 기꺼이 강화할 용의가 있소.
하지만 당신은 그 의지를 먼저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오.
그는 이슬람을 바로 세울 뿐 아니라 자바땅에 이슬람국가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궁극적인 책임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당시 막 메카 순례를 떠나려던 끼아이 뻥훌루(Kyai Penghulu)에게도 서한을 통해 완곡하게 밝힌 바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약속을 해주시오. 당신이 정말 메카에 닿는다면
그래서 거기서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말이요.
혹시 거기서 당신이 노력하여 무언가 깨닫게 된다면 부디 내게도 알려 주시고,
모든 이맘들에게 기도를 부탁해 내 희망이 선지자 무하마드에게 전해지게 해 주오.
알라의 힘을 입어 더욱 강해지도록 전력을 다해 기도해주오.
알라의 발앞에 입맞추고 자바땅이 알라의 나라가 되도록 빌어 주오.
정녕 신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뻥훌루여, 속히 다시 돌아와 주시오.
이상의 두 편지에서 본 바와 같이 디포네고로 왕자는 자바섬에 평화로운 이슬람국가를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마글랑의 네덜란드군 본진에서 회담을 갖자고 요구했고 설령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디포네고로 왕자의 무사귀환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리하여 1830년 2월 16일 지금은 뿌르워레조(Purworejo) 지역으로 분류되는 레모 까말(Remo Kamal)이라는 곳에서 디포네고로 왕자와 클레이렌스 대령이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회담이 진전을 보지 못한 이유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자신과 같은 지위의 상대방이 나설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디포네고로 왕자에 비해 그 클라스가 한참 낮은 클레이렌스 대령을 내보낸 것은 네덜란드측이 큰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입니다. 최소한 드콕 장군이 직접 나서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드콕 장군은 그때 바타비아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회담을 즈음해 양측엔 휴전이 발효되고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와 그의 군대는 레모 까말에서 클레이렌스 대령과의 만남을 마친 후 드콕 장군을 기다리기 위해 사카 마을(desa Saka) 북쪽의 끄짜왕(Kecawang)에 머물러야 했는데 드콕 장군은 끄짜왕이 회담을 갖기에 너무 멀다는 이유로 머노레(Menoreh)라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달라 하였습니다. 그곳은 네덜란드군 본진이 있는 마글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엔 분명 드콕 장군의 꿍꿍이가 있었지만 디포네고로는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고 곧장 부대를 이끌고 머노레로 이동했습니다.
1830년 2월 21일 디포네고로 일행이 머노레에 도착하고, 그러나 드콕 장군은 아직 마글랑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에서 그해의 라마단 금식월이 1830년 3월 5일 시작되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술탄으로서 금식월을 지키며 또한 주관해야 했으므로 라마단 동안엔 더 이상 회담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드콕 장군이 뒤늦게 도착함에 따라 부득이 1830년 3월 8일에 첫 접촉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서로 수인사만 나누었을 뿐 구체적인 종전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회담은 라마단이 끝난 후 속개하기로 했습니다.
금식월이 끝나고 추수감사절 축제 격인 이둘피트리 기간을 지나면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훌륭한 말 한 마리와 10,000 굴덴의 돈을 선물로 받았고 스마랑에 잡혀 있던 아들과 아내 라덴 아유 렛나닝시도 풀려나 마글랑의 회담장 숙소에서 디포네고로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드콕 장군은 두페론 중령(Letnan Kolonel Du Perron)의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마글랑의 경계강화를 지시하고 중부 자바 다른 지역의 몇몇 부대들을 비밀리에 끌어 모았습니다. 만약 회담이 결렬될 경우 디포네고로와 그 일행을 신속히 제압해 체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드콕 장군은 본격적인 회담을 시작하기도 전 배신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회담이 그 다음날까지 계속될 경우 디포네고로와 그의 군대가 의심을 품고 다른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게 될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결국 회담은 뭔가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만남이 아니라 디포네고로와 그 참모들을 체포하기 위한 빌미로 이미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라마단 금식월 휴식을 마친 후 이둘피트리 바로 다음날인 1830년 3월 28일 협의된 바에 따라 수행원들과 함께 마글랑에 들어가 드콕 장군과의 회담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당초 충분히 예상되었던 바와 같이 회담은 곧 벽에 부딪혔습니다. 드콕 장군은 디포네고로에게 전쟁을 중지하라며 밀어 부쳤고 디포네고로는 술탄이 지배하는 자유국가에서 칼리파(Caliph)가 되어 자바를 통치할 것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절충이 이루어지지 않고 회담이 결렬되자 드콕 장군은 당초의 안전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고 디포네고로 왕자가 회담장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디노네고로군에게 세밀하게 준비된 네덜란드군의 기습공격이 펼쳐졌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네덜란드의 약속을 믿었던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이름은 깐젱 술탄 압둘하미드(Kanjeng Sultan Ngabdulkhamid)! 나는 자바땅의 이슬람 제왕으로서 신에게 불충한 자들을 처분할 의무를 지녔다!”
체포될 당시 디포네고로 왕자는 의연한 모습으로 드콕 장군에게 이렇게 외첬다고 전해집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네덜란드가 회담을 빌미로 반군의 수장을 불러들였다가 간단히 배신하고 생포한 것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네덜란드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통해서라도 꼭 제압해야 할 만큼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드높았고 그가 건재한 이상 그의 군대는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협상하러 나온 상대편 대장을 사로잡은 파렴치한 행동에 동인도 인민들에게는 물론 군과 정부 등 안팎의 비난을 받게 된 드콕은 자바의 귀족들 여러 명을 통해 디포네고로가 요구사항들을 축소시키지 않으면 다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상대방에게 이미 수차례 경고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건 비난을 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었죠.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후 다시는 자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좀 더 후의 일이지만 드콕 장군은 자바 전쟁을 평정한 공로로 1835년 본국에서 남작(Baron)의 작위를 하사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남작의 반열에 오른 그는 1836년부터 1841년가지 네덜란드 왕국의 내무장관을, 1841년부터 1845년까지 국무장관을 역임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1845년 4월 12일까지 국회 최고위원회 회원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를 쓰러뜨린 것이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명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디포네고로 왕자의 고통은 10년 동안 더 이어졌는데 말입니다. (계속)
자신의 말과 이별하는 디포네고로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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