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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전쟁 (4) 본문
자바 전쟁 (4)
다시 장면은 디포네고로 왕자 일행이 뜨갈레죠에서 부지사 쉐발리에가 몰고 온 기병대를 따돌리고 몸을 피신하는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뜨갈레죠를 공격하여 디포네고로의 저택을 불사른 네덜란드군의 행위는 그 후 5년간 지속되는 자바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이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칠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훗날 디포네고로는 자바어로 “Sadumuk bathuk, sanyari bumi ditohi tekan pati”는 말을 모토로 삼았는데 이는 ‘머리를 한번 건드리는 손가락에도, 단 한치의 땅을 뺏으려는 누군가의 시도에도 목숨을 다해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거든요. 네덜란드의 어떤 도발이나 공격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절절히 넘쳐 흐르는 대목입니다.
네덜란드의 포위망을 벗어난 디포네고로 왕자 일행은 먼저 깔리사카(Kalisaka)에 도착했는데 네덜란드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왕자의 행동은 민중들의 연민과 응원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곳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망꾸부미 왕자 외에도 빠꾸부워노 6세, 가가딴(Gagartan)군의 영주 라덴 뚜먼궁 쁘라위로디자야(Raden Tumenggung Prawirodijaya), 아디네고로 왕자(pangeran Adinegoro), 빠눌라르 왕자(Pangeran Panular), 아디위노토 수리요디뿌로(Adiwinoto Suryodipuro), 롱고 왕자(Pangeran Ronggo), 수렝로고 왕자(Pangeran Surenglogo) 등 내로라하는 왕족들과 귀족들도 디포네고로 왕자 편에 섰고 수라카르타 (솔로)에서 온 저명한 울라마 끼아이 모조(Kyai Mojo)가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디포네고로군에 합류한 것도 이때쯤의 일입니다. 그는 나중에 디포네고로군의 이슬람 큰 선생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끼아이 모죠
족자의 귀족들과 일반 만중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 디포네고로의 휘하에 들었으므로 깔리사카에서는 그들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 왕자는 더 넓은 곳을 찾아 족자에서 약 9킬로미터쯤 떨어진 고아 슬라롱 (Goa Selarong)으로 옮겨갔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곳에 소리소문 없이 군대의 본진을 준비해 놓고 거기서 죠요멍골로 (Joyomenggolo), 바후유다(Bahuyuda), 항고위끄로모(Hanggowikromo) 같은 이들을 시켜 지지자들을 편성해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족자 남쪽 게게르 마을(Desa Geger)과 끼둘(Kidul)산 지역, 빠라깐 마을(Desa Parakan), 끄두(Kedu) 지역의 끔방아룸 마을(desa Kembangarum) 등 여러 지역에 잘 은폐된 화약공장들을 비밀리에 세우는 일로 자바 전쟁의 본격적인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디포네고로 자신은 전반적인 전략과 단계별 전술을 수립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전략적 목적은 한마디로 족자 술탄국 전역을 되찾아 지배하고 네덜란드인들과 중국인들을 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러면 국가를 상징하는 족자의 끄라톤 궁전을 우선적으로 탈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지엽적인 반란을 일으켜 적들과, 그 적들을 돕는 세력들 사이에 균열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단계로서 족자의 끄라톤을 공격하면서 외부 지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족자를 즉시 고립시켰습니다. 그런 후 유럽인들과 중국인들을 공격하라는 전쟁명령을 공표하는 것이었죠. 이 명령은 꺼두(Kedu), 바글런(Bagelen), 반유마스(Banyumas), 세랑(Serang), 몬쪼네고로(Monconegoro) 동부지역 등 술탄국 전역의 지휘관들은 물론 술탄국과 수난국(솔로) 경계의 영주들에게도 전달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명령서와 함께 그들을 디포네고로군의 지휘관으로 삼는다는 임명장을 함께 보내는 방식으로 부대와 장수들을 확보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확보된 조직을 토대로 술탄국 전체를 몇 개의 전역(戰域)으로 나누고 각 지역사령관과 부대장들을 선정하고 몇몇 수석보좌관들도 정식으로 임명하는 등 보다 조직다운 조직을 만드는 일도 병행했습니다.
자바전쟁 삽화
또한 그는 적대세력의 귀족들과 자신을 돕는 귀족들의 명단을 각각 작성했습니다.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든 것이죠. 이제 누구와 손잡고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 분명해 진 것입니다.
족자를 점령한 그는 끄라톤 궁전을 보위할 여섯 개의 부대를 선정했는데 만띠레죠 부대(Pasukan Mantirejo), 댕 부대(Pasukan Daeng), 뉴트로 부대(pasukan Nyutro), 만둥 부대(Pasukan Mandung), 끄땅궁 부대(Pasukan Ketanggung), 까노만 부대(Pasukan Kanoman)가 그들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부대조직과 계급체계는 서구의 모델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자바의 상황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던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칼리파 부대인 자니사리(Janissari) 조직을 본딴 것이었습니다. 사단장 급인 알리 파샤(Ali Pasha)가 디포네고로 군에서는 알리바사(Alibasah)로, 여단장 급인 파샤(Pasha)는 바사(Basah)로 불렸습니다. 한편 대대장급은 아가둘라(Agadulah)를 본따 둘라(dulah)라 했고 중대장은 세(Seh)라 칭했습니다.
그리하여 디포네고로군의 상부 지휘구조는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습니다
- 군통수권자인 쁘라무뎅 쁘랑(Pramudeng Prang): 디포네고로 왕자
- 군대의 총사령관 일라바사: 압둘 무스타파 센똣 쁘라위로디르죠(Ngabdul Mustapa Sentot Prawirodirjo)
- 빠장 지역사령관 알리바사: 까산 바사리(Kasan Besari),
- 족자 지역사령관 알리바사: 수모네고로(Sumonegoro)
- 바글렌의 지역사령관: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
이 구조로 보면 디포네고로 왕자는 바글렌에서 해당 지역을 방어하며 전체 군대를 지휘한다는 계획이었겠죠 이외에도 각각의 부대는 오스만 투르크의 군편제에 따라 뚜르끼야(Turkiya), 아르끼야(Arkiya) 같은 터키식 명칭이 붙었고 오스만 투르크 정예부대인 불키요(Bulkiyo)라는 명칭이 붙은 부대도 있었습니다. 한편 병사들에게는 총포를 비롯한 무기 일체는 물론 숲속 화약공장에서 직접 만든 탄약들도 지급되었습니다.
한편 드콕 장군은 사령관직에 오르기 전부터 일찌감치 반란진압계획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수라카르타의 수난(술탄) 망꾸나고로와 동맹을 맺어 디포네고로와 협상을 시작한다.
2. 빼앗긴 족자의 주권을 반군에게서 네덜란드 총독부와 술탄에게로 되찾아 온다.
3. 수라카르타와 끌라텐(Kelaten), 끌라텐과 족자를 잇는 전략도로를 확보한다
4. 스마랑과 살라띠가(Saslatiga), 살라띠가와 수라카르타를 잇는 육상도로를 확보한다
5. 뻐깔롱안(Pekalongan)과 스마랑을 잇는 육상 연락도로를 확보한다.
6. 세랑(Serang), 응아위(Ngawi), 마디운(Madiun) 등 반란군이 점령한 술탄국 영토를 되찾는다.
7. 드막(Demak), 렘방(Rembang), 자바랑까(Jabarangkah–뻐깔롱안 지방총독 관할지역 내), 반유마스, 꺼두, 바글렌 및 보로원토 강(sungai Bogowonto)에 이르는 네덜란드 식민지를 되찾는다.
8. 자바섬 밖에서 운용 중인 부대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북부해안의 몇몇 상륙용 항구에 경계를 강화한다.
9. 적 정보에 정통한 인물 또는 정보원들을 확보한다.
그리하여 자바전쟁 초반인1825년에서 1827년까지 드콕은 몇몇 전략적 거점들에서 다음 다섯가지 단계를 통해 군사작전을 감행했습니다.
1. 수라카르타의 수난 망꾸나고로와 동맹을 통해 디포네고로를 고립시킨다.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반란이 나쁜 짓이라는 인상을 민중들에게 각인 시킨다.
2. 디포네고로의 적들을 하나의 연대로 묶는다. 그리하여 족자 술탄국의 모든 왕자들이 디포네고로를 지원하지 않거나 최소한 피동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다.
3. 디포네고로군이 점령한 족자 지역을 탈환해 세금이 다시 걷히도록 만든다.
4. 반군들을 ‘섬멸지’인 쁘로고 강(Sungai Progo)과 보고원토(Bogowonto) 사이의 지역으로 몰아 넣는다.
5. 반군의 최고지도자 디포네고로를 생포한다.
이외에도 드콕 장군은 디포네고로를 따르는 반군들 중 자발적으로 항복해 오는 자들을 사면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아 슬라롱에 있던 디포네고로와 망꾸부미에게도 강화를 요구하는 서한을 써 보냈지만 이를 열어 본 디포네고로 왕자, 망꾸부미 왕자, 끼아이 모조 등은 조요꾸수모 왕자(Pangeran Joyokusumo)와 수르옝로고 왕자(Pangeran Suryenglogo)를 시켜 강경한 거절답신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드콕 장군이 군대를 보내 고아 슬라롱를 공격하려 했으나 그의 공격부대가 도착했을 때 슬라롱은 이미 소개된 상태였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지휘관들이 부대를 이끌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스며든 후였습니다. 네덜란드군에 맞서 디포네고로군이 사용한 것은 게릴라전술이었습니다. 그 게릴라 전술은 우리가 훗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나 베트남전에서 보게 되는 게릴라 전술과 달리 일정 지역에서 순간적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후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게릴라 전술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였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