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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전쟁 (2)
네덜란드의 평판은 그후 점점 더 나빠져갔는데 농부들 중에서는 세금인상과 작황의 악화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는 네덜란드 식민당국이 그들의 토지임대권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이 큰 반감을 샀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쁘라렘방 자야바야 예언서에서 예언한 공의의 여왕 라뚜아딜(Ratu Adil)의 현신이라고 믿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예언서는 세상이 혼란할 때에 공의의 여신이 강림해 세상을 평정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사족이지만 훗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맞았을 때 네덜란드 특수부대 대위 출신의 영악한 베스털링이란 자가 스스로 라뚜아딜이라 자처하며 수까르노의 신생정부를 상대로 APRA(Angkatan Perang Ratu Adil – 공의로운 여신의 군대)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822년 머라피 화산이 폭발하고 1824년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자바섬엔 더욱 큰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고 민중들은 물밑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던 디포네고로에게 더욱 큰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봉기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음에도 동인도인들의 역량을 얕잡아 본 네덜란드 관리들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마타람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술탄 아궁(Sultan Agung)의 무덤에서 사람들이 보았다는 모종의 환상에서부터 디포네고로 왕자가 그 옛날 마타람 왕국의 시조 권능왕 스노빠티가 그랬던 것처럼 니롤로키둘 여신과 만났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문들이 당시 세간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스노빠티와 만났던 니롤로키둘은 그후 역대 마따람 제왕들의 영적 아내였다고 믿어지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디포네고로 왕자야말로 진정한 마타람의 후예이자 족자 술탄왕국의 적통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평판이 들려올 때마다 후궁의 아들이었던 디포네고로 왕자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술탄국을 바로 잡겠다는 열망에 타오르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제국주의와 싸워 자바땅의 독립과 정의를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 귀족들이 사업가들이 플랜테이션을 만들도록 임의로 자기 땅을 임대하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네덜란드 플랜테이션 업자들에게만 유리한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민중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빼앗긴 이권 때문에 네덜란드에게 이를 갈았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대의를 위해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국토와 주권의 문제였는데 뻐깔롱안과 스마랑 사이의 족자 술탄국 영토를 네덜란드가 점령한 상태였고 중앙과 지방 공히 술탄국의 주권이 네덜란드에 의해 훼손되고 있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은 가혹한 조세와 다양한 강제노역으로 수탈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울라마 집단은 이슬람의 가르침에 반하는 서구의 일반관습이 날로 퍼져나가는 상황에 불만이 높았습니다. 울라마들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통해 민중들에게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면서 날로 더해가는 도덕적 타락의 근원이 네덜란드의 세속적 탐욕에 있다고 믿었고 속히 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비교적 손쉽게 민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해 민중들이 크게 반발했고 디포네고로 왕자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이란,
첫째 끄라톤 궁전을 네덜란드가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둘째 세금 수수를 화교들에게 맡겼으며,
셋째 자바인들에게 공정한 처우를 해주지 않았고,
넷째, 궁전에서는 온갖 권모술수와 비도덕적 행위들이 횡행했으며,
다섯째 대규모 토지를 네덜란드인들에게만 임대해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되었고,
여섯째, 민중들은 족자 귀족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네덜란드인들을 위해서도 강제노역에 동원되어여 했던 것들을 말합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의 사상과 결기가 모든 울라마들, 이슬람학자와 지도자들을 저항전쟁의 선봉에 서게 했습니다. 마타람 왕국 초창기인 1647년 아망꾸랏 1세가 울라마들과 이슬람학자들을 무더기로 학살하면서 이슬람학자들과 왕가 사이엔 불신과 증오의 앙금이 쌓인 상태였는데 스스로 왕족이자 울라마이기도 한 디포네고로 왕자가 200년만에 이를 극복하며 양측을 모두 아우렀기에 자바전쟁에 있어 이슬람 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었습니다.
바밧 디포네고로(디포네고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바전쟁 삽화
그러던 중 발생한 디포네고로 전쟁은 1825년부터 1830년까지 5년간 자바를 휩쓴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네덜란드로서는 동인도에서 이전에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었던 치열한 전투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면서 엄청난 물적, 인적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네덜란드 역사가들이 기록한 문헌에 따르면 동인도인들은20만명 가량의 사상자를 냈고 네덜란드인들은 약 8천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중부 자바 전부와 동부 자바 일부, 그리고 자바 북부해안지역 대부분이 전쟁에 휩쓸렸으므로 이 전쟁을 통칭 자바 전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자바전쟁은 일반적으로 자바의 구시대와 근대, 자바 역사와 인도네시아 역사를 나누는 경계선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유럽의 식민정권으로서도 자바섬 거의 전체가 이러한 대규모 항전의 무대가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 초반 네덜란드군이 심대한 피해를 입었던 이유는 디포네고로군의 매복 공격이 줄을 이었고 네덜란드 군의 병참로가 속속 차단되는 가운데 네덜란드군의 일관성 있는 전략부재, 디포네고로군의 게릴라전에 적극적으로 응전할 결기의 부재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네덜란드는 봉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면서 1827년 마르쿠스 드콕(Markus De Kock) 장군에게 네덜란드군을 총지휘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1807년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821년에는 빨렘방 반란집압을 지휘했던 인물로 1826년부터 네덜란드 총독부의 부총독 겸 족자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정부 감사를 겸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드콕 장군
이 전쟁 본질이 마타람 왕조와 수라카르타 사이의 전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인도에서 네덜란드 제국주의를 거의 궤멸로 몰고갈 정도까지 밀어붙였던 이 전쟁이 고작 디포네고로 왕자의 조상 묘지를 파헤치려는 네덜란드와의 말뚝 분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관점이라 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네덜란드의 전비를 완전히 바닥낼 정도로 전개된 이 치명적인 전쟁은 훨씬 더 깊고 은밀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터입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가 승하한 후 네덜란드가 마타람왕국을 더욱 공고히 지배하려 하는데 주권을 지켜내야 할 차기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는 즉위했을 때 겨우 세 살이었고 그 뒤에서 네덜란드를 등에 업고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무르고 있던 었고 재상 다누레죠의 전횡이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끄라톤 왕궁에 부는 네덜란드의 입김을 극도로 역겨워했던 디포네고로 왕자를 다누레죠 재상이 네덜란드의 예의 도로건설 계획을 승인하면서 도발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825년 5월 중순, 네덜란드는 족자에서 마글랑을 잇는 도로가 문띨란(Muntilan)을 통과하는 당초 계획에서 뜨갈레죠(Tegalejo)를 통과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그 공사구간이 하멩꾸부워노 왕가 외가의 조상 묘소들을 지나고 있었으므로 당시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의 숙부이자 중요한 후견인들 중 한 명이었던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사전 허락정도는 받았어야 마땅했지만 네덜란드측은 그런 절체를 깡그리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도로 건설을 진행하려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격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네덜란드가 실제로 그 땅에 경계표시 말뚝을 박으며 공사를 강행하자 디포네고로 왕자는 부하들을 시켜 그 말뚝들을 모두 뽑아버리도록 했습니다. 그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내심 자바땅을 되찾아 이슬람국가를 세우기 위해 그동안 준비한 전투부대들을 동원할 결정적 시기가 온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자바전쟁은 훨씬 이전부터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뜨갈레죠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사상과 정치, 국가, 문화, 군사전략과 세부 행동에 대한 기초를 완성한 곳이고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가 승하한 후 세 살짜리 술탄 외에 실질적 지도자가 없을 때 민중들과 귀족들이 진정한 지도자를 찾아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당시 디포네고로 왕자의 이슬람 학자사회 전반과 지역사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 국가와 신성한 전쟁, 즉 성전에 대한 사상과 민중들을 위한 마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쁘산트랜 이슬람학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슬람 연구자들은 공부를 마치면 이곳저곳 세상을 떠돌며 가르치고 포교하는 것을 그 중요한 의무로 삼았는데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들을 통해 각지에서 성전에 참전하려는 지지자들과 자연스럽게 연대하고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뜨갈레죠에 앉아서도 이슬람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온 자바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역사회 역시 디포네고로의 중요한 지지기반이었는데 디포네고로 왕자는 각 지역사람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앞으로 구성할 군대의 전투능력을 고양시키는 데이터로 삼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죠.
“마디운 사람들을 첫 번째 공세를 막아내는 데에 훌륭한 능력은 발휘하지만 그 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소. 빠장 사람들은 용맹스럽기 그지없지만 역시 오래 버티기엔 능하지 않아요. 바글렌(bagelen)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가장 요긴한 전력이 될 것이요. 하지만 타 지역 전투에 투입된다면 쉽게 전열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마타람 사람들은 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오. 그들은 강고히 적과 맞설 수 있고 전투의 우선순위를 알뿐 아니라 전쟁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파국조차 초연히 견뎌낼 수 있소.”
그는 네덜란드 측은 물론 그들과 손잡은 끄라톤 왕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궁전뿐만 아니라 다누레죠 재상, 지방총독(주지사), 지방총독의 비서, 각 지방의 지방총독 보좌관(부지사), 네덜란드 식민정부 관료들 및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귀족들, 이슬람국가 건설에 대한 반대입장에 있는 사람들 집안에 하인이나 마구간지기 등으로 첩자들을 들여보내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민중을 동원해 1825년 중반까지 쌀을 대량으로 구매해 군량미로 비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하멩구부워노 3세가 1814년 승하한 이후 1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동안 디포네고로 왕자가 지역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며 용의주도하게 사회적, 군사적 역량을 키워오던 중 마침 말뚝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총독부 측 명령을 수행하던 스미사르트 지방총독(Resident Smissaert)은 디포네고로 왕자의 삼촌 망꾸부미 왕자(Pangeran Mangkubumi)에게 노발대발하며 디포네고로 왕자를 잡아들이라고 악을 써댔습니다. 그러나 조카를 만나러 온 망꾸부미 왕자는 그를 데려가긴커녕 디포네고로 왕자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네덜란드와 맞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말뚝 사건으로 족자에서 뜨갈레죠로 들어가는 길이 폐쇄되었을 때 디포네고로의 저택에는 1,500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곧 네덜란드군에게 체포될 것이란 소문에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1825년 7월 20일 네덜란드는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부미 왕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고 부지사 쉐발리에(Chevallier)를 시켜 기병대로 하여금 왕자의 저택을 포위하는 과정에서 디포네고로의 지지자들과 충돌했습니다. 얼마간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네덜란드군은 일방적으로 짓쳐 들어가 저택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부미 왕자는 대부분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그곳을 탈출한 후였습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쉐발리에 부지사는 군대를 시켜 디포네고로 왕자의 저택을 완전히 불살라 버렸습니다.
원래 망꾸부미 왕자란 그의 이름이 아니라 왕가에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주로 정부의 수반을 담당한 왕족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당시 술탄의 둘째 왕자 즉 태자의 동생이 이 직책을 맞곤 했습니다. 하지만 술탄이 둘째 아들이 없을 경우엔 후궁의 아들이나 술탄의 형제가 이 직함을 맞기도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사실상 하멩꾸부워노 3세의 장남이었으므로 여기 등장하는 망꾸부미 왕자는 바로 밑의 동생이거나 숙부이기 쉬운데 여기서는 정황상 그 후자라고 이해됩니다. 이 칭호는 자바뿐 아니라 깔리만탄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가족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피신한 디포네고로는 꿀론쁘로고군(Kabupaten Kulonprogo)의 닥사 마을(Desa Dekso)까지 갔다가 거기서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반뚤시(Kota Bantul)로부터 서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고아 슬라롱 (Goa Selarong-슬라롱 동굴) 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곳을 구워사리 빠장안 반뚤(Guwosari Pajangan Bantul) 이라 칭했고 자신은 그 서쪽에 있는 고아 까꿍(Goa Kakung-까꿍 동굴) 지역을 은신처로 삼았습니다.
고아 슬라롱
한편 라덴 아유 렛나닝시와 하녀들은 서쪽의 고아 뿌뜨리(Goa Putri-뿌뜨리 동굴)지역에 묵었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하필 그녀는 디포네고로의 후궁이었습니다. 왕자의 다른 부인들이 일찍 죽거나 전장에 따라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라덴 아유 렛나닝시 만은 끝까지 디포네고로의 곁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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