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자바전쟁 (1) 본문
한 만화가에게 스토리를 써주기로 하고 디포네고로 왕자를 공부했습니다.
원래는 수까르노나 운뚱 수라빠티가 같은 인물이 더 극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 국내는 물론 피터 캐리 교수를 비롯한 서방세계의 교수들도 많은 논문과 연구기록을 남겨 보다 내실있는 자료를 모아 번역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콜라보 하기로 한 만화가는 아동용 교육만화를 그리는 사람이었고 내가 두 달 가까이 준비한 자료의 완성된 첫 모습은 조금은 딱딱할 듯한, 하지만 아이들이보기엔 더 이상딱딱할 수 없는 그런 문체와 전개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써야 하는 거죠. 난 이제 죽었습니다.
그래도 다 써놓은 거 어떻게 하겠어요.
게다가 내용은 19세기 초반의 자바 지역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일단 여기 올리기로 합니다.
A4로 40페이지 가까이 되는 물량이라 4~5차례 정도로 잘라 연재할까 합니다.
자바 전쟁 (1)
디포네고로 왕자(Pangeran Diponegoro)는 유명한 족자(족자카르타-Jogyakarta) 하멩꾸부워노(Hamengkubuwono) 술탄가의 인물입니다. 그는 1785년 11월 11일 새벽녁 아버지 라덴 마스 수로요(Raden Mas Surojo)와 어머니 라덴 아유 망꼬로와티(Raden Ayu Mangkorowati) 사이의 첫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라덴 아유 망꼬로와티는 빠찌딴(Pacitan) 지역 출신의 후궁이었어요. 정실을 어머니로 두지 않은 왕자들이 왕가에서 겪는 차별대우를 디포네고로 왕자도 겪었을 것임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왕족들과 귀족들은 누구나 그렇듯 평생을 살아가며 여러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디포네고로 왕자 역시 그랬습니다. 태어나면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Raden Mas Mustahar)였습니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름 앞에는 그의 신분을 뜻하는 다양한 호칭이 붙었는데 디포네고로의 가족들 이름 앞에 붙은 라덴(Raden)이란 단어는 귀족이나 왕족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었고 라덴 마스(Raden Mas)는 대개 왕자들의 이름 앞에 붙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
그의 아버지 라덴 마스 수로요는 족자 술탄국 하멩꾸부워노 2세의 왕자들 중 한 명으로 훗날 왕위를 이어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로 등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왕자로서도, 술탄으로서도 그리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국이 영고성쇄를 거듭하면서 복잡하게 얽인 혼맥과 이권, 탐욕과 권모술수들이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불러 일으키지만 이 시기에 족자 술탄국이 뿌리부터 흔들리던 근본적인 이유는 네덜란드 때문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기 위해 당시의 시대상을 잠깐 들여다 봅시다.
족자 술탄국은 마타람 왕국의 후신입니다. 마타람 왕국은 권능왕 스노빠티(Penembahan Senopati)가 1587년에 세운 이슬람 왕국입니다. 술탄이란 이슬람 국가의 제왕을 뜻하는 것입니다. 스노빠티가 자바섬 남쪽 바다의마물들의 여왕 니롤로키둘(Nyi Roro Kidul)의 힘을 빌어 마타람 왕국을 세웠다는 유명한 전설이 지금도 인도네시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지만 마타람은 공식적으로 이슬람을 숭상하는 나라였고, 그래서 스노빠티가 이슬람의 아홉 선지자, 즉 왈리송오(Wali Songo) 중 한 명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가 인도네시아 땅에 상륙한 것은 마타람 왕국이 세워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자바땅을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동인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지역사는 마타람 왕국이 건국한지 불과15년 후인 1602년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깐젱 라뚜 롤로끼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서는 2년 앞서 영국 상인들이 연합해 만든 영국 동인도 회사가 가장 강력한 경쟁사였습니다. 한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상인들이 주축이었고 의회도 참여하여 공신력을 높였지만 충분한 자본규모가 되지 않자 일반인들의 투자를 받아 1602년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동인도’라 불리던 인도네시아 지역의 식민지화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동시에 시작된 셈입니다.
VOC는 투자자들에게 투자내용을 증빙하는 증서(주식)를 내주었는데 그것이 근대 주식회사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주식회사란 회사의 소유권을 ‘주식’이라는 이름의 증서로 만들어 복수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팔아 모은 ‘자본금’을 밑천으로 사업을 하는 회사인데 VOC가 그 최초의 원형이었던 것입니다.
VOC는 후추 무역을 중심으로 동인도, 스리랑카 일본, 타이완, 페르시아, 아프리카 남단(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 상관을 설치했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1670년대에 이르러 상선 150여척, 군함 40여척, 직원 5만 명, 그리고 1만 명 규모의 군대까지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동인도에서의 무역독점권뿐만 아니라 조약체결권, 군사적 결정권 등을 쥐고 거의 국가에 준하는 권한을 휘둘렀습니다. 일개 기업인 VOC가 적도상의 왕국들을 무너뜨리고 현지에서 벌어지는 각종 저항과 반란들을 무력화시킬 만한 군사력까지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1629년 술탄 아궁 안요끄로꾸스모(Agung Hanyokrokusumo)의 바타비아 공격을 격퇴했고 1666년 고아(Goa)의 술탄 하사누딘이 일으킨 봉기를 진압했을 뿐 아니라 1680년 마타람 왕국을 도와 마두라의 왕자 뜨루노조요(Trunojoyo)의 반란도 진압했고1740년에는 바타비아에서 일어난 중국인 이주자들의 반란을 짓밟고 그 거주지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약 1만여 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화 (왼쪽 문양은 VOC 엠블렘)
동인도회사는 중부 자바의 군소 술탄국들을 무너뜨리며 쌀을 비롯한 각종 작물들을 착취하는 구도를 완성해 갔고 1755년 급기야 마따람 왕국마저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마따람 왕조의 후예들이 각각 나라를 세워 족자의 술탄과 수라까르타의 수수후난이 되었는데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족자 술탄국 하멩꾸부워노 왕가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디포네고로 왕자)는 서부 수마트라 출신인 끼아이 땁토자니(Kyai Taptojani)에게서 이슬람을 공부했습니다. 1805년 해당 지역 지방총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땁토자니는 자바어로 학문을 가르쳤고 당시 종교교육의 본산인 수라까르타에 학생들을 유학시키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디포네고로 왕자는 궁전을 떠나 머스짓과 쁘산트렌 이슬람 기숙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E땁토자니같은 높은 끼아이나 울라마 등을 선생으로 모실 기회가 많았으므로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 사회와 깊은 교분을 맺었습니다.
1830년대 마타람 지역 지도
이슬람 연구자들의 사회를 전전하며 역사를 연구하면서 신과 선지자, 그리고 민중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립한 그는 당시 자바의 상황이 이슬람의 가름침이 전파되기 전 아랍 민중들의 삶과 같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이슬람을 믿는 이들을 앞장서 이끌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데 훗날 이교도들과 맞서 싸우며 이슬람 왕국을 건설할 때 역설했던 그의 사상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입니다.
이슬람에 입각한 가치관과 확신을 갖게 된 그는 자바의 전통 복장을 버리고 온통 흰색인 긴 상의와 아랍식 터번을 쓰면서 자신의 사상을 생활 속에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압둘 하미드(Ngabdul Khamid)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나중에 그가 자바의 술탄으로 추대될 때 붙여진 긴 칭호 속에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디포네고로 왕자의 초상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가 궁전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있던 1799년 12월 31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과도한 식민지 관리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일개 회사가 식민지확장을 위한 정복전쟁 비용을 감담한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VOC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네덜란드 왕국이 직접 들어서 식민지들을 관리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예전 동인도의 네덜란드 총독부는 실제로는 동인도회사의 현지 지사 같은 성격도 있었지만 이젠 네덜란드 국왕이 파견한 정규직 관료들이 관리하면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지배는 오히려 더욱 강고해졌던 것입니다.
한편 19세기 초 전쟁이 유럽을 휩쓸면서 나폴레옹 군대에 짓밟힌 네덜란드도 프랑스에 병합되자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은 일대 공백상태를 맞습니다. 어쩌면 동인도 역시 독립할 후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811년 영국이 자바에 상륙하며 탐욕스러운 어금니를 드러냈습니다. 영국은 동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분명히 확보하기 위해 총독대리 래플스(Raffles)를 보냈습니다.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에 많은 족적을 남긴 래플스는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어 현지 문화를 숭상했고 화산재 속에 파뭍혀 있던 마글랑의 보로부드르 사원을 발굴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동인도의 왕국들에겐 그 역시 또 다른 침략자일 뿐이었습니다.
그 영국군은 유럽의 전쟁이 끝나면서 1816년 철수했는데 당시 30세를 막 지나고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에겐 다시 동인도로 돌아와 기득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총독부가 곱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그가 훗날 왕궁을 떠나 뜨갈레죠(Tegalejo)에서 살기로 한 것 역시 더 이상 유럽의 이교도들이 왕국을 쥐고 흔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805년에 이르러 할아버지인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에 의해 그는 번도로 라덴 마스 온또위료 (Bendoro Raden Mas ontowiryo)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됩니다. 고귀한 가문의 청년을 뜻하는 라덴 마스 앞에 고위 귀족임을 뜻하는 번도로(Bendoro)라는 호칭까지 붙은 것은 그의 지위가 더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자신은 후궁의 자식이라는 자의식에 빠져 있었지만 하멩꾸부워노 왕가는 그를 유력한 차기 술탄으로 대우하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디포네고로는 그것 역시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는 1810년에 네덜란드에 의해, 1812년에는 영국에 의해 두 차례나 걸쳐 왕위에서 밀려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1812년의 두 번째 사건에서는 자바 바깥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라덴 마스 온또위료가 디포네고로 왕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은 1812년 그의 아버지가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가 되어 왕좌에 오를 때의 일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왕족들은 물론 귀족들도 지위가 변할 때마다 칭호가 변했고 그 역시 훗날 또 다른 칭호를 갖게 되지만 후세들은 그를 디포네고로 왕자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한동안 아버지를 보좌하여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고문으로서 활동했고 영국군 점령시기엔 영국에게도 어느 정도 협력하는 편이었습니다. 1812년 네덜란드 측 존 크로프르트(john Crawfurd)의 추천을 받아 영국 레플스 총독이 그에게 태자의 지위를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왔지만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로서는 아버지가 여전히 술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술탄으로 지명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자바땅을 좀먹어 들어오던 네덜란드 못지 않게 술탄 왕가를 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영국이 무엇보다도 괘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불과 2년 후인 1814년 승하하고 말았습니다. 선대 술탄 역시 강단있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왕위를 이어 강력한 왕국의위엄을 되찾기 원했지만 정작 디포네고로 자신은 이를 사양하고 이복동생에게 술탄의 자리를 잇게 했습니다. 그는 후궁 소실이었음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가 술탄의 정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사람들 입에 새삼 거론되는 것을 그의 효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위를 포기한 그는 많은 시간 왕궁을 떠나 멀리 뜨갈레죠에서 목가적 삶을 즐겼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
디포네고로의 유년기엔 다누레잔 가문에서 오래 전 하멩꾸부워노 1세에게 시집왔던 왕비 라덴 아유 다누꾸수모(Raden Ayu Danukusumo)가 남편을 여윈 후 후 뜨갈레죠에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증손자인 디포네고로 왕자는 특별히 그녀의 사랑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라뚜 아긍(Ratu Ageng))이라 불렸고 생전 디포네고로 왕자 유년기의 체스 놀이의 상대였을 뿐 아니라 자바의 이슬람 문학과 악사라 뻬곤(자바어를 아랍어로 기재한 것) 등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1803년 10월 17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하멩꾸부워노 1세가 통치하던 족자 술탄국 초창기의 상황과 그녀가 평생 목도해야만 했던 네덜란드의 탐욕과 침탈을 증손자인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옛날 이야기처럼 수없이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디포네고로 왕자는 신앙심 깊고 종교의 예를 중시했으며 백성들의 삶에 공감하였던 것 역시 그가 뜨갈레죠(Tegalejo)에서 사는 것을 더욱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시부터 이미 출중한 영력을 가지고 있었고 모종의 신비한 체술(體術)을 익혀 그 초월적 능력을 사용해 네덜란드에 저항했다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귀족들간의 상호 비난을 유도하면서 서로 반목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렇게 귀족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헐뜯고 싸우는 데에 정신이 팔리도록 해놓고 그 사이 네덜란드는 양쪽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더 많은 땅과 이권을 빼앗아 플랜테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
디포네고로의 양보를 받아 즉위한 하멩꾸부워노 4세(재위기간 1814-1821)는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디포네고로는 이복동생의 왕궁이 종교적 의무 지키기를 느슨히 하고 네덜란드에게 휘둘려 그들 이권에 경도된 정책을 펴는 것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재위기간 동안 자바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 문물들이 자바의 토착문화와 이슬람의 신심을 훼손하는 것을 술탄은 손놓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하멩꾸부워노 4세도 1821년 기근과 역병이 자바를 휩쓸 당시 젖먹이 아들 하나를 유일한 후계자로 남긴 채 1822년 수상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급사한 것입니다. 독살이 의심되는 정황이었습니다. 형제의 죽음에 의구심으로 가득차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그해 네덜란드의 지방총독 드 살리스 남작(Residen Baron de Salis)이 술탄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회유했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를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술탄의 왕위를 외국인들이 거래하듯 쉽게 입에 올리는 것이 역겨웠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추대한 술탄을 뒤에서 꼭두각시처럼 부리겠다는 총독부의 의도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하멩꾸부워노 4세의 아들로 당시 세 살이던 라덴 마스 머놀(RM Menol)을 하멩꾸부워노 5세로 즉위시켰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
세상 모든 왕가들이 그렇듯 어린 술탄 뒤에서 실권을 쥐려는 왕족들과 정치가들이 섭정 자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이기 마련이죠. 뿐만 아니라 민심도 흉흉해지면서 하멩꾸부워노 5세의 즉위 직후인 1822년 왕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술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네덜란드 관리들의 전횡이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궁전을 함부로 드나들며 궁전 안 여인들과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왕족들과 귀족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스캔들이 터지고 부패와 독직이 만연하자 백성들의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왕족들의 비옥한 토지들이 유럽인들이나 중국인들에게 임대되었고 왕궁과 총독부는 민중들의 고통을 백안시했습니다. 세금과 각종 공과금들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피폐해 갔는데 도시와 성읍 관문들의 운명권마저 중국인들에게 넘어가 자바의 신민들은 길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통행세를 뜯겨야 했습니다.
보다 못한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때 잠시 술탄의 모시는 측근들인 대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해 술탄을 보위하며 왕정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왕궁의 실권은 네덜란드 총독부의 지방총독(주지사)과 손잡은 재상 다누레죠(Patih Danurejo)에게 넘어가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지 않고 또 이복동생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의 뒤를 잇지 않기로 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간신히 돌아온 네덜란드가 다시금 끝없는 탐욕을 활활 불태우며 자바의 왕가를 쥐고 흔들 빌미를 마련해 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후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네덜란드는 현금부족을 메우기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포함한 식민지 전역에서 강력한 조세정책을 시행했을 뿐 아니라 사업과 판매를 독점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바와 수마트라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세 살짜리 술탄이 다스리는 족자 왕국이 가장 만만한 대상 중 하나였음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더욱이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왕실의 왕자들마저 압도하며 실권을 휘두르던 재상 다누레죠(Patih Danuredjo)는 귀가 얇고 네덜란드의 비위를 맞춰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가혹한 조세정책과 독점행위가 왕실과 귀족들의 부패와 맞물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고 있던 인도네시아 민중들의 목을 더욱 졸라 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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