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풍운아 수라빠티 본문
자. 이제 앞서 기술한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이야기를 배경지식으로 깔고 운뚱 수라빠티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운뚱 수라빠티는 1660년 발리에서 태어나 1706년 12월 5일 동부 자바 빠수루안 군의 방일(Bangil)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Babad Tanah Jawi(자바땅의 역사서)라는 문서에도 등장합니다. 그는 태어날 당시 운뚱도, 수라빠띠도 아닌 수라위로아지(Surawiroaji) 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평민의 이름이었지만 어쩌면 몰락한 왕가의 후손으로 영지를 가진 귀족 가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노예로 팔려다녔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인도에는 노예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농장의 잡일꾼이나 배의 노잡이같은 험한 일에 노예를 공급했습니다. 라트나와티 안하르(Ratnawati Anhar)가 쓴 '운뚱 수라빠티’(2012)에 따르면 수라위로아지 역시 VOC의 반바베르 대위가 마카사르의 노예상인에게서 돈을 주고 사 7세 때부터 집안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동인도회사가 보유한 군대의 장교인 반바베르는 공무로 자꾸 이사 다녀야 했기 때문에 운뚱은 3년 후 반바베르의 친구인 무어에게 팔려갔다가 그를 따라 바타비아까지 가게 됩니다. 그의 임무는 그 집안의 고명딸 수잔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집안일과 정원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새 몸종을 들인 후 무어는 VOC에서의 경력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고 계급도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을 뿐 아니라 총독자문기구인 라트판인디(Raad van Indie)라는 동인도 위원회의 멤버로 승격되기도 했으므로 수라위로아지가 행운을 가져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시운뚱’(si Untung = 행운아)이라 즐겨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운뚱 역시 군대 제복을 입은 주인의 위엄있는 모습에 늘 감탄하며 훗날 무어와 같은 멋진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훗날 그가 용감한 전사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행운을 몰고 다니는 청년이라 해도 결국 노예인데 자기 딸을 내줄 수는 없는 법이었어요. 무어의 딸 수잔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이제 20살 된 운뚱과 사랑에 빠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알위 사합(Alwo Shahab)이 쓴 ‘동방의 브따위 여왕’(Betawi Queen of the East -2004)에 따르면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무어는 당연히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는 당시 이미 식민정부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총독부 사람들을 풀어 운뚱을 체포했고 꽁꽁 묶인 운뚱은 오늘날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이 되어 있는 스타두이스(Stadhuis) 건물에 투옥되었습니다. 운뚱은 사랑을 위해 신분과 국경을 뛰어넘었지만 분수를 모르는 무례한이 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때까지 식민지 체제와 신분체계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운뚱의 마음 속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던 반골의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죄수들을 규합해 탈옥을 감행해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무려 그 죄수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의 옛 모습 (Stadhuis)
또 다른 버전에선 그가 수잔의 도움을 받아 몰래 풀려났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군에 대한 증오가 이떄 싹텄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후 운뚱은 끌어넘치는 혈기와 분을 참지 못하고 바타비아 근교에서 자주 사건을 일으켰는데 주로 VOC 경찰들이나 식민정부 관련 인사들을 공격하는 범행을 벌여 곧 식민정부에게 쫒기는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683년은 그가 23세가 되던 해였는데 반뜬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Sultan Ageng Tirtayasa)가 동인도군에게 사로잡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술탄은 나중에 바타비아에서 옥사하고 맙니다. 그의 아들 중 한명인 아리야 뿌르바야 왕자(Pangeran Arya Purbaya)는 거데산(Gunung Gede)로 피신했는데 호화로운 왕궁에 살던 그가 정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술탄이 이미 체포되었고 쿠데타에 성공한 형, 술탄 하지에게 홀로 대항할 결기도 이미 잃은 후였습니다. 그는 항복하기로 가닥을 잡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이 네덜란드인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지인 출신 장교를 보내준다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VOC 군대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그를 체포하러 온 VOC 장교가 뜬금없게도 바로 운뚱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한참 앞서 딴중뿌라 요새의 지휘관 루이스 대위(Kapten Ruys)는 우연히 운뚱의 무리와 조우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너 죽고 나 죽자 덤벼들기보다 그는 용케도 운뚱에게 수배자로 살기보다 모든 죄를 사면해 줄 테니 동인도군에 들어와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아직 세상 무서운 것 모르던 운뚱은 별로 심각한 숙고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서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네덜란드군의 소정 군사교육을 받았고 무리의 두령이었던 그는 장교로 임관해 중위계급장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덜컥 뿌르바야 왕자를 압송하는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임무를 파락호와 다름 없었던 운뚱에게 시킨 것은 그만큼 VOC 군대 안에 현지인 장교가 드물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랜 몸좀 생활을 통해 그는 귀족과 왕족들을 대하는 예의 정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정대로 뿌르바야 왕자를 만나 모든 예를 갖추어 딴중뿌라 요새로 모셔가던 중 한 네덜란드 부대와 마주쳤습니다. VOC 장교 판더릭 쿠펠러(Vaanderig Kuffeler)의 부대였는데 그들이 뿌르바야 왕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운뚱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쿠펠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운뚱마저도 비하했습니다. 사기문 물루스가 1988년 쓴 ‘자카르타, 변방에서 선언의 도시로’에 따르면 쿠펠러는 운뚱이 여전히 노예이자 도망자라며 이죽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운뚱이 VOC의 장교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장 체포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홀와니 미크롭(Halwany Michrob)과 A. 무자히드 쭈다리( A. Mudjahid Chudari)가 ‘반뜬의 과거에 대한 기록’(Catatan Masa Lalu Banten -1993출간)에 따르면 운뚱은 참을 만큼 참다가 결국 분노가 푹발했고 지금의 찌안주르에 있는 찌깔롱 강가에서 1684년 1월 28일 쿠펠러의 부대를 격파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충돌로 20명 전후의 네덜란드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운뚱은 또다시 VOC 군대에게 쫓기는 수배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반뜬의 과거에 대한 기록’(Catatan Masa Lalu Banten -1993출간)
그런데 대책없는 인물은 운뚱 뿐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군을 단번에 격파하는 인물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뿌르바야 왕자는 여전히 딴중뿌라 요새로 가 항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문제가 나중에 더 커질 것이라 우려한 뿌르바야 왕자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VOC 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자비 라덴 아유 구식 꾸수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현재의 솔로인 까르따수라로 데려가 달라고 운뚱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까르따수라는 당시 마타람왕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따람 왕국 고위대신의 여식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뿌르바야 왕자와 호송대원들은 딴중뿌라(지금의 까라왕)에 있는 VOC 요새를 향했고 운뚱과 몇몇 부하들만이 라덴 아유 구식 꾸수마와 함께 까르따수라로 향했습니다. 사실 쿠펠러의 부대를 박살낸 운뚱으로서는 더 이상 뿌르바야 왕자를 딴중뿌라로 호송해 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더욱이 왕자비는 분명 VOC에게 항복을 거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운뚱의 정의감은 왕자비에게 기울었습니다. 이 여행길에서 왕자비와 운뚱의 사랑이 모락모락 싹터 올랐습니다.
한편 뿌르바야 왕자는 그렇게 딴중뿌라의 루이스 대위에게 항복했지만 1716년 결국 유배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유배를 떠나기 직전 유서를 써 몇 채의 집과 쫀뎃(Condet)의 물소들을 뒤에 남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남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 등장하는 아내가 1683년 헤어진 그 왕자비일 리는 없습니다.
까르따수라를 향하던 중에도 운뚱은 자신을 뒤쫓던 VOC 야콥 쿠퍼의 부대와 조우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타식말라야의 라자뽈라에서 충돌했는데 R.P. 수요노가 쓴 ‘전란의 왕국들’ (Peperangan Kerajaan di Nusantara -2003)이란 책에서는 이 전투가 매우 맹렬해 운뚱의 몇몇 부하들도 죽고 상대편 역시 못지 않은 인명손실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볼 수 있었지만 운뚱은 왕자비의 안전을 위해 도주하기로 마음먹었고 마침 그곳 지리에 밝은 부하가 있어 마침내 추격을 따돌릴 수있었습니다. 하지만 야콥 쿠퍼도 여간 끈질긴 인물이 아니어서 운뚱 일행이 마타람 왕국의 국경을 넘기까지 계속 추격하며 거리를 좁혀 왔습니다.
중간에 또 다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운뚱은 어차피 지나는 길이었으므로 찌레본의 술탄을 만나보려 했습니다. 찌레본은 왕자비의 고향인 마타람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마타람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태자는 그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찌레본 술탄의 양자 라덴 수라빠티 왕자는 교만하고 백성들을 제멋대로 부리는 방약무인한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운뚱 일행을 가로 막고 찌레본 왕궁입성을 방해했으므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운뚱이 노예출신이며 VOC의 수배자라는 점까지 들추며 나섰다고 하며 찌레본의 술탄이 직접 나서 진화하자 비로소 전투가 멈추었습니다. 술탄은 라덴 수라빠티가 운뚱에게 행한 행동이 나라의 명예를 해친 것이라 보고 수라빠티에게 사형으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런 지나치다 싶은 판결의 배경에는 수라빠티 왕자가 못된 양자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까요? 아무튼 왕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술탄은 ‘수라빠티’라는 이름을 운뚱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운뚱은 운뚱 수라빠티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운뚱 수라빠티
또 다른 버전에서는 라덴 수라빠티가 운뚱 일행을 찌레본의 술탄에게 데려가는 조건으로 모든 무기를 버리라고 요구했는데 운뚱이 빠뜨렘을 닮은 무기만은 내놓지 않자 그것마저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수라빠티와 이를 끝내 수용하지 못한 운뚱의 기싸움이 결국 두 부대 사이에 전투로 번져 그 와중에 라덴 수라빠티가 운뚱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 후 끄라똔 궁에서 알현한 술탄에게 운뚱이 라덴 수라빠티를 살해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자 술탄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운뚱을 환대하고 그에게 수라빠티라는 이름을 선사했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경우에도 찌레본 술탄은 부자의 정보다 외교적 예를 더욱 중시한 대인배였던 것 같습니다.
찌레본 술탄의 축복에 힘입어 수라빠티는 동쪽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야콥 쿠퍼의 VOC 추격대가 따라붙어 1684년 10월 6일 서부 자바와 중부 자바의 경계에서 운뚱 쪽 병력 50여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네덜란드 측의 화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던 것입니다. 운뚱 수라빠티는 병력을 후퇴시킨 후 자신은 찌레본 술탄의 도움으로 마타람 왕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진입해 까르따수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 일행이 마침내 까르따수라에 도착했을 때 마타람 왕국은 술탄 아궁의 손자인 아망꾸랏 2세(1680-1702)가 재위중이었습니다. 라덴 아유 구식 꾸수마 왕자비의 아버지인 빠띠 느랑꾸수마(빠띠-patih는 총리대신의 의미)도 아망꾸랏 2세에게 동인도회사와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끈질기게 강권했을 정도로 극렬한 반 VOC 주의자였으므로 운뚱과는 대번에 뜻이 통했습니다. 그는 운뚱과 자기 딸의 결혼을 축복하며 뿌르바야 왕자와는 물론 반뜬 술탄국과의 인연을 끊었습니다. 빠띠 느랑꾸수마는 운뚱 수라빠티가 까르따수라에 들어오기까지 겪었던 일들은 마타람 왕국 휘하의 군수들에게 일일이 보고받으면서 더욱 그에게 큰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아망꾸랏 2세는 자신을 섬기겠다고 맹세하는 운뚱 수라빠티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당시 반유마스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란을 평정할 것을 명했습니다. 운뚱은 길게 생각지 않고 그 제안을 즉시 받아들여 자기 부대를 이끌고 출정해 반유마스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까르따수라에 돌아온 그에겐 그 공로로 마타람왕국의 군사령관이라는 중책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방이 알려지자 VOC는 운뚱 수라빠티를 내놓으라며 아망꾸랏 2세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VOC에게 약점을 잡혀 있던 아망꾸랏 2세는 그러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빠띠 느랑꾸수마, 운뚱 수라빠티와 함께 일련의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를 넘겨받기 위해 동인도회사가 까르따수라로 보낸 부대의 지휘관 프랑소와 택 대위는 동인도에서 잔뼈가 굵은 VOC 고위장교로 마타람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뜨루노죠요군(軍) 격파에도 일익을 담당했고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반뜬 술탄국을 무너뜨린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686년 2월 8일 200명이 넘는 병력을 거느리고 까르따수라 궁전에 들어서면서 운뚱이 그의 위세를 보고 겁을 집어 먹을 것이라 자신만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죠. 운뚱의 부하가 궁전에 불을 질렀고 세차게 번지는 불길에 놀란 VOC 군대는 허둥거리다가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운뚱 수라빠티는 끄라톤에도 불을 질러 아망꾸랏 2세도 공격 당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마타람 왕국의 국왕이 자신과 공모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용의주도한 고육책이었던 것입니다.
끄라똔의 궁정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양쪽 모두 심대한 인명손실이 발생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는 거기서 75명의 부하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VOC 군 역시 79명이 죽어 쓰러졌고 멀리 동인도로 넘어와 그 용맹을 뽐내며 식민지를 유린했던 프랑소와 택 대위 역시 시체가 되어 그들 중에 널브러지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군의 남은 병력은 간신히 목숨을 살려 인근 요새로 도주했습니다. 역사가 헤르마누스 요하네스 드그라프(Hermanus Johannes de Graaf)는 택 대위의 죽음: 17세기 까르따수라의 위기(Terbunuhnya Kapten Tack: Kemelut di Kartasura Abad XVII - 1989)라는 책에서 ‘프랑소와 택 대위의 죽음은 VOC 의 역사상 가장 뼈아픈 일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를 충격의 도가니탕에 빠뜨렸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버젼도 존재합니다. 그가 1686년 택 대위는 동인도회사의 대사로서 마따람 왕국을 방문했는데 까르따수라의 끄라돈 궁에서 아망꾸랏 2세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1678년 ‘마자빠힛 왕국의 금관’(金冠)이라고 불리는 유물을 발견해 아망꾸랏에게 내놓으며 1,000레알(스페인 은화는 당시 자와에서도 통용됨)을 요구했는데 훗날 아망꾸랏이 그때의 모멸감을 잊지 않고 처절하게 보복했다는 것이죠.
프랑소와 택 대위의 죽음
아무튼 그 어떤 경우에도 프랑소와 택을 잃은 네덜란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아망꾸랏 2세는 첩보원을 통해 네덜란드군이 진격해 오고 있음을 보고받고 운뚱에게 네덜란드군을 격퇴하라고 명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는 네덜란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아망꾸랏 2세가 보내온 뿌거르 왕자가 운뚱의 편에 가세하자 전세가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뿌거르 왕자는 깐젱 끼아이 쁠러레드(Kanjeng Kyai Plered)의 끄라똔궁에서 받은 유서깊은 끄리스검을 지녀 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운뚱 수라빠티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어 전장에는 마치 두 명의 운뚱 수라빠티가 종횡무진하는 것 같았습니다. 뿌거르 왕자가 그 끄리스 검으로 네덜란드군 지휘관 따르 대위를 쓰러뜨리자 나머지 네덜란드군은 수라빠티의 부대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망꾸랏 2세는 운뚱 수라빠티에게 동부 자바에 위치한 마타람 영토인 빠수루안을 공격하라고 명했습니다. 아망꾸랏 2세는 자신이 VOC를 배신한 것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다가 수라빠티와 느랑꾸수마를 수도에서 내보내기로 하고 빠루수안을 사실상 그들에게 내어 주면서도 운뚱 수라빠티가 마타람 왕국을 배신하고 공격해 오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만들어 자신은 네덜란드의 의심에서 벗어나겠다는 전술이었습니다. 결국 그간 있었던 VOC에 대한 마타람 왕국의 적대행위는 모두 운뚱 수라빠티의 개인적 일탈이라고 핑계를 댈 요량이었죠. 운뚱 수라빠티는 그 뜻을 알고서도 아무런 불평없이 빠수루안을 침공해 영주 앙가자야(Anggajaya)를 격퇴했습니다. 전투에 능한 운뚱에게 배부른 귀족 영주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앙가자야는 나중에 수라바야로 도망쳐 그곳의 영주 아디빠티 장라나(Adipati Jangrana)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는 까르타수라에서부터 운뚱을 알고 흠모했으므로 앙가자야의 요구를 듣지 않았습니다.
조코 다르마완이 쓴 “국토가 말을 한다면”(Ketika Nusantara Berbicara-2017)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빠수루안을 탈취한 운뚱 수라빠티는 스스로 아디빠티 아리아 위라느가라(Adipati Aria Wiranegara)라 칭하며 그 땅의 주인임을 자임했습니다. 노예 출신의 미천한 수라위로아지가 뚜먼궁 반열의 고위 귀족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는 동부 자바의 빠수루안에서 아내 라덴 아유 구식 꾸수마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빠수루안의 영주로 재임하던 20년간(1686~1706) 만중들의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았습니다. .
아망꾸랏 2세가 1690년 빠수루안의 운뚱과 느랑꾸수마를 평정하겠다며 군대를 보내는 시늉을 했는데 이것 역시 VOC를 기만하려는 전시행위였으므로 실제 전투에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간단히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702년 아망꾸랏 2세가 죽자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즉위한 아망꾸랏 3세는 왕위를 놓고 숙부인 뿌거르 왕자와 싸움을 벌이다가 빠수루안으로 도망쳐 운뚱 수라빠티의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왕위쟁탈전에 몰입한 뿌거르 왕자는 예전 운뚱 수라빠티와 함께 네덜란드군과 싸웠던 과거를 잊고 급기야 네덜란드군과 손잡아 그 도움으로 아망꾸랏 3세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수후난으로 즉위한 뿌거르 왕자가 바로 빠꾸부워노 1세(Pakubuwono I)입니다.
뿌거르 왕자 / 수수후난 빠꾸부워노 1세 (1700년대에 사진기가 있었다고??)
아망꾸랏 3세를 받아들인다면 VOC의 공격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것임을 잘 알면서도 운뚱 수라빠티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VOC는 1706년 대규모 군대를 움직여 빠스루안을 공격해 왔습니다.
1706년 10월 17일 빠수루안 소재 방일(Bangil)에서의 치열한 전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운뚱의 운도 다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뭔가 장엄한 에피소드를 지어내고 싶은 마음이 마구 끓어오르지만 소설이 아닌만큼 팩트와 자료에 충실해야겠죠. 하지만 드라마틱한 인생항로를 따라 치열하게 살면서 네덜란드 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던 영웅의 이러한 죽음이 너무나 간출하고 허무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다하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마음은 아마도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유언에 따라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자녀들이 수라빠티가 탄 것처럼 꾸민 가마를 들고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 하지만 절망적인 전세는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운뚱 수라빠티의 묘는 빠수루안의 쁘르워레죠 군에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방일에 있다거나 모조꺼르토(Mojokerto)에 있다는 이야기도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정설은 네덜란드군 장교 헤르만 반빌데가 그의 묘지를 파헤쳤다는 것입니다. 1707년 6월 18일 아망꾸랏 3세를 찾아 빠수루안 일대를 수색하던 VOC 군이 운뚱의 무덤을 발견해 그의 유해를 불태워 재를 바다에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운뚱 수라빠티를 따랐던 자들은 대부분 자바인와 발리인으로 VOC에게 끝내 저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1708년 아망꾸랏 3세와 함께 생포되어 스리랑카로 유배당했습니다. 남은 추종자들의 일부는 1717년 수라바야에서 벌어진 아르야 자야뿌스피타(Arya
Jayapuspita)의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고요. 이 반란은 1706년 전쟁 당시 몰래 수라빠티를 도운 것으로 밝혀진 아디빠티 장라나의 죽음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자야뿌스피타가 1718년 크게 패하고 모조꺼르토(Mojokerto)로 철수했지만 수라빠티의 부하들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1719년 VOC가 뒤를 받친 아망꾸랏 4세에 대항한 블리따르 왕자(Pangeran Blitar)의 반란에 가담하여 싸우기 헀습니다. 이 반란이 진압된 것은 1723년이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의 아들들 중 라덴 뻥안띤, 라덴 수라빠티, 라덴 수라딜라가 등도 1723년 VOC 군에게 붙잡혀 멀리 스리랑카로 유배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체면을 몇 번씩이나 구겨버린 용맹스러운 운뚱 수라빠티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남았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많은 도로들이 그의 이름을 따르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문학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자바땅의 역사(Babad tanah Jawi) 외에도 수라빠티의 이야기(Babad Surapati)같은 문서들이 많이 나왔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작가 멀라띠 반 자바(본명은 니콜리나 마리아 슬롯 Nicolina Maria Sloot)이 1887년 출간한 '반 스라프 똣 포르스트'(Van Slaaf Tot Vorst)라는 로맨스 소설의 소재로 운뚱 수라빠티의 이야기를 차용했고 1898년 FH 위거스(FH Wiggers)가 “노예가 왕이 되기까지”Dari Boedak Sampe Djadi Radja라는 제목으로 그 번역본을 출간했습니다.인도네시아 작가 중에서도 압둘 무이스(Abdul Muis)가 ‘수라빠티’(Surapati)라는 소설을 썼고요.
그는 수하르토 정권 들어 1975년 11월 3일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운뚱 수라빠티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냥 넘어가기엔 매우 비중있는이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마타람 왕국의 아망꾸랏 2세와 3세, 빠꾸부워노 1세, 수라바야의 영주 장라나, 마두라의 왕자 뜨루노죠요 같은 인물들 말입니다. 앞으로 계속될 이들의 이야기에서도 카메오로 출연하는 운뚱 수라빠티를 다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풍운아 수라빠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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