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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반뜬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치세

beautician 2018. 4. 6. 18:00

반뜬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치세

 

 

 

자카르타 도심엔 따만 수로빠티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원래 부르거메이스터 비쇼플레인(Burgemeester Bisschopplein)이라는 매우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 붙었던 곳인데 이는 초대 바타비아 시장을 지냈던 G.J 비숍(1916-1920) 이름을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멘뗑 지역 중심으로 개의 주요도로가 합쳐지는 곳인데 멘뗑 가도(현재의 뜨구 우마르로 Jl. Teuku Umar), 오렌지 가도(현재의 디포네고로로) 그리고 나쏘 가도(현재의 이맘본졸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 후에 이름을 그대로 두었을 없습니다. 그래서 따만 수로빠티 바뀐 이름은 17세기를 영웅 운뚱 수라빠티(Untung Surapati) 이름을 따랐습니다.

 

수라빠티를 수로빠티라고 표기한 것은 자바인들의 발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족자 하멩꾸부워노 왕가의 디파느가라 왕자(Pangeran Dipanegara) 디포네고로(Diponegoro) 왕자라 불리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멩꾸부워노조차 원래는 하멩꾸부와나라고 써야 합니다. 그러니 발음과 표기에 대해 룰을 정할 필요가 있는데 일단 사람의 이름은 수라빠티라고 표기하기로 합니다.

 

 


운뚱 수라빠티

 

남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운뚱 수라빠티의 초상으로 알려진 그림이 그의 실체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짙은 눈썹과 그윽하고 넓은 쌍꺼풀 , 말끔한 얼굴과 다듬어진 콧수염. 이것만으로는17세기를 풍미한 전사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딘가 느끼해 보이는 얼굴로 인도네시아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는 그의 유명한 로맨스가 특히 부각되는 모양이지만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낭만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천상 반골에, 전투에 능한 자존심 높은 무골이었던 같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는 그림 눈두덩이 위에 반창고라도  붙여 주는 식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의 제목을 풍운아 수라빠티라고 잡고 스토리를 전개하려 하는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부터 먼저 소개해야 합니다. 반뜬의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Sultan Ageng Tirtayasa)라는 인물입니다. 갈길이 바쁘니 대충 줄로 정리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분은 훗날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는 중량감 있는 술탄이시라 제대로 브리핑이 필요할 합니다.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

 

술탄 아겅 띠르타야사(Sultan Ageng Tirtayasa) 압둘파따 아궁(Abulfatah Agung)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술탄 아부 알마알리 아흐맛(재위기간1640-1650) 아들로 어린 시절 수리아 왕자(Pangeran Surya) 불렸고 아버지가 죽은 디빠티 왕자(Pangeran Dipati)라는호칭으로 젊은 술탄(Sultan Muda) 되었습니다. 1651 3 10 할아버지가 죽자 그는 반뜬 술탄국의 여섯 번째 술탄으로 등극했고 술탄 아부 알파쓰 압둘파따(Sultan Abu al-Fath Abdulfattah)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습니다. 근대 인도네시아의 위인들, 특히 왕족들과 귀족들은 사람이 가진 이름이 너무 많아 외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저 그려려니 합시다. 아무튼 그의 재위기간 반뜬 술탄국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1651년에서 1683까지 32년간의 장기 재위기간 동안 그는 네덜란드에게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VOC 거래를 독점하는 조약을 맺어 반뜬 술탄국에 손실을 입히고 있었는데 술탄은 조약을 파기하고 반뜬을 자유무역지역으로 개항했습니다. 이익을 빼앗긴 VOC 이를 갈지 않았을 없습니다.  이때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는 반뜬 술탄국을 가장 위대한 이슬람왕국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식 모델을 따라 강력한 해군을 조직해 역내 해상무역을 주도했는데 영국인, 데인사람들, 중국인 등의 도움을 받아 페르시아, 인디아, 태국, 중국, 필리핀, 일본 아시아의 국가들은 물론 네덜란드를 제외한 유럽국가들, 영국, 덴마크, 프랑스 등과도 교역관계를 맺었습니다. 스페인령 마닐라와도 은을 교역했고 코코넛과 야자 플랜테이션을 위해 운하를 만드는 여러가지 개발사업을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국제교역과 국책사업을 통해 반뜬 왕국은 부를 쌓아 강성해져 갔습니다. 외교적으로 마까사르와 터키, 영국, 아랍 대부분의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섰습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민중의 복지를 위해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였고 관개시설 확충에 노력했으며 종교적으로는 유숩(Syekh Yusuf) 왕국의 이슬람 대법관이자 술탄의 고문으로 중용하는 등 이슬람을 더욱 숭상했습니다.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는 정치적으로도 기민한 행보를 걸어1661 보르네오의 란닥(Landak) 지역까지 통치력을 미쳤고 1676년엔 마따람 왕국 내전을 틈타 찌레본과 쁘리앙안의 고지대를 손에 넣고 바타비아의 VOC 자신의 군대로 포위하는 형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찌레본이 다시 VOC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168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반뜬 술탄국은 예전부터 네덜란드와의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1645 반뜬과 네덜란드가 맺었던 조약이 1656 깨지면서 전쟁이 일어나 반뜬인들이 바타바아의 일부 지역과 동인도회사의 선박들을 공격했고VOC 반뜬의 모든 항구들을 봉쇄하는 것으로 응수했습니다. 1659년에서야 평화조약이 체결되지만 보다 강력하고 유리한 해결책을 원한 VOC 반뜬의 현실정치에 끼어들어 내부로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목적한 바를 달성하려 했습니다. 술탄 아겅 띠르타야사는 동인도의 이권에 혈안이 VOC 극렬히 혐오했으므로 반뜬에서 불과 7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타비아의 VOC 본부와 마찰을 빚지 않을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1671 수로소완 궁전을 떠나 반뜬 내륙의 처소인 띠르따야사 끄라똔으로 옮겼는데 이는 아들이 궁전에서 일으키려는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는 1677년경 마따람 왕국에 반기를 뜨루노죠요와도 손을 잡았고 마카사르, 방카, 찌레본, 인드라뿌라 등과도 우호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마타람의 아망꾸랏 2세가 VOC 극진한 관계를 맺은 것을 그가 누구보다도 비난한 것은 그의 성향에 미루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네덜란드에 정식 선전포고를 것은 1680년의 일입니다. VOC 자기 지역의 반뜬 상인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명분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매우 좋지 못했던 것이 네덜란드군은 끄디리에서 뜨루노죠요 반군들을 소탕한 군세가 매우 강력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탄 하지 뒤에 VOC 격퇴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두었던 서구의 다른 열강들과의 관계를 활용해야 타이밍이었습니다. 사실 반뜬 술탄국은 프랑스와 영국에 군사적 협조를 요구할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1671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함대와 함께 프랑소와 카론(François Caron) 단장으로 하는 프랑스의 아시아 무역사절단을동인도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반뜬 항구에서 화교 무슬림 쌰반다르 까이추(Syahbandar Kaytsu)라는 사람의 영접을 받고 중국인 거류지에 들어가 상업활동을 시작했는데1671 7 16 그곳을 술탄과 대신들이 방문했습니다. 카론은 공식적으로 반뜬에 대표부 설치를 요구했는데 VOC출신인 카론은 이때 상관 설치를 통해 프랑스 무역사절단을 VOC같이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페인과 달리 프랑스는 자체 동인도회사를 만들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당장 거래를 시작해 프랑스 측이 가져온 물건들 중 반뜬에서 유통이 금지된 아편 외의 모든 물품들은 팔 수 있었습니다. 다시 술탄을 방문했을 카론은 특정나무에서 채취한 다마르 수액과 인디아 수랏에서 가져온 대형 책상 , 소총 12, 박격포 2, 개의 수류탄 등을 포함한 신문물들을 선물로 선사했습니다.  카론과 반뜬 주지사는 10 조항의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영국과 같은 정도의 혜택을 프랑스에게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600년대의 번영하던 반뜬 술탄국

 

영국은 이보다 앞서 반뜬과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술탄 압둘 마파키르 시절에 1602 영국 찰스 1세에게 친서를 보냈고 영국 상관 설치를 허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 재위 말년인 1682년까지 반뜬은 영국인들의 교역 중심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술탄 하지가 네덜란드의 힘을 빌어 것처럼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는 영국의 힘을 빌려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1681 술탄 하지가 영국왕 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 소총 400정과 탄약 5천발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하면서 우호의 증표로 다이아몬든 1,757개를 함께 보내는 통을 자랑하며 선수를 쳤습니다. 술탄 아겅 띠르다야사가 영국에 무기와 화약 원조를 요청했을 영국은 손이라 여기게 술탄 하지로 이미 갈아탄 후였습니다.  

 

그렇게 벌어진 술탄과 왕자와의 전쟁은 이랬습니다.

 

술탄 하지라고 알려진 술탄 아부 나스르 압둘 까하르 태자는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대쪽 같은 띠르따야사와 달리 술탄 하지가 우유부단하면서도 권력욕만 강하다는 것이 모든 문제의 화근이었습니다. 외교에 대한 문제를 아버지 술탄이 직접 담당하며 다른 왕자인 아리야 뿌르바야 왕자(Pangeran Arya Purbaya) 보조를 받은 것이 상황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VOC 반뜬 지부장 빌렘 까에프(Willem Caeff) 술탄 하지에게 접근해 달콤한 귓속말을 속삭이며 이간질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술탄 하지는 왕국의 권한 일부를 뿌르바야 왕자가 나누어 가진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속셈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왕권이 아리야 뿌르바야 왕자에게 넘어가게 될까봐 두려워 술탄 하지는 VOC 결탁해 차제에 왕권을 찬탈하려 마음먹게 됩니다.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가 내륙의 띠르따야사 끄라똔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지내면서부터 술탄 하지는 이러한 계획을 더욱 구체화시켰습니다.

 

반뜬의 이권을 노리고 있던 VOC 술탄 하지가 왕권을 잡을 있도록 돕는 대신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1. 반뜬은 찌레본을 VOC에게 양도할 ,

2. VOC에게 반뜬에서의 후추무역 독점권을 허가하고 경쟁자들인 모든 페르시아인, 인디아인, 중국 상인들을 반뜬에서 추방할 ,

3. 만약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반뜬 술탄국은 VOC에게 60 링깃을 지급할 ,

4. 해안과 쁘리앙안 내륙지역에 파견된 반뜬 군대를 즉시 철수시킬 .

 

왕권에 눈이 어두웠던 술탄 하지는 이러한 조건들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1681 술탄 하지는 아버지가 띠르따야사 끄라똔에 가있는 동안 VOC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수로소완 궁전(Istana Surowowan) 점령했습니다. 이때부터 수로소완 궁전은 술탄 하지의 근거지가 되었고 여기 진입한 VOC 반뜬에 위력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가만히 두고 없었던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는 1682 2 27 술탄 하지와 VOC 들어앉은 수로소완 궁전을 완전히 포위해 압박했습니다. 결국 수로소완 궁을 빼앗긴 술탄 하지는 VOC 요새로 들어가 야콥 드로이(Jacob de Roy) 보호를 받게 됩니다.

 


오늘날 남은 수로소완 궁전의 잔해

 

이를 알게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부대는 VOC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진군했습니다. 술탄 하지의 군대는 슬롯 대위(Kapten Sloot) W.까에프가 지휘하는 네덜란드군과 함께 요새 방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군세는 사뭇 강대했고 바타비아에서 보낸 VOC 지원군은 감히 반뜬에 상륙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술탄 하지가  VOC 반뜬 상거래 독점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며 VOC 즉각적인 지원을 구걸하듯 요청했죠. 이에 VOC 기다렸다는 듯이 대위와 상마르탱 대위가 이끄는 바타비아의 부대를 기어이 반뜬에 진입시켜 요새에 갇힌 술탄 하지와 네덜란드군을 구원했을 아니라 수로소완 끄라똔 궁과 띠르따야사 끄라똔 궁까지 짓쳐 들어갔습니다. 상륙을 머뭇거리며 해안에서 고전했던 것은 사실 VOC 교활한 작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가 이처럼 네덜란드에 저항하는 동안 마카사르, 발리, 멀라유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지원했습니다. 그들의 본대가 있는 마르가사마(Margasama)에 수리아왕사 왕자(Pangeran Suriawangsa)가 지위하는 600-800명이 주둔했고 족자 왕자(Pangeran Yogya) 400명 병력이 끄나리(Kenari) 지역을 방어했으며 까르타사나 지역에는 끼아이 아리야 중빠티가 이끄는 병력 120명이, 세랑엔 400, 장방안엔 400-500, 띠르따야사 방어엔 약 500여명이, 그리고 보종로빵(Bojonglopang) 100여명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VOC 공력이 맹렬해 반뜬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마르가사나, 찌레본 일대 그리고 땅어랑이 VOC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VOC는 신무기를 가지고 압도적인 화력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술탄 아겅은 띠르따야사까지 후퇴해 그곳을 방어거점으로 삼고 따나라(Tanara)와 뽄땅(Pontang) 전선의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까드망안(Kademangan)의 전선은 아리야 왕사디라자 왕자(Pangeran Arya Wangsadiraja)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치열한 전투를 끈질기게 막아내며 오래 버텼지만 결국 1682 12 2일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1682년의 반뜬 전쟁

 

전투로 양쪽은 심대한 인명손실을 입었고 반뜬 병력 일부는 찌아뿌스, 빠구딴, 자싱아 같은 지역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까드망안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제 남은 것은 띠르따야사의 끄라똔 궁 뿐이었습니다. 최초의 공격은 해안에서 시작되어 따나라와 땅꾸룩으로 쇄도했습니다. 용커(Jonker), , 미키엘즈(miichielsz)가 이끄는 VOC군이 1682 12 28일 뽄땅과 따나라, 띠르따야사를 공격해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방화와 폭발로 띠르따야사 끄라똔 궁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죠. 그러나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는 간신히 몸을 피해 내륙으로 도주했고 아리야 뿌르바야 왕자도 이보다 한발 앞서 스스로 끄라똔과 요새에 불을 질러 초토화시키며 피신에 성공했습니다.

 

VOC 군대는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를 잡기 위해 수색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저항을 멈추고 반뜬으로 돌아오라는 회유책을 병행했다. 그는 술탄 하지를 시켜 아버지를 모셔 오라고까지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 52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끄또스(ketos)로 보내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했고 결국1683 3 14일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가 수행원들과 함께 수로소완 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술탄 하지와 VOC는 안전보장 약속을 어기고 술탄 아겅을 즉시 붙잡아 바타비아의 감옥에 넣고 말았다. 이런 기만전술을 네덜란드군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습니다. 이로서 반뜬에서의 전쟁은 대체로 막을 내렸고 VOC 반뜬에 대한 지배력을 크게 강화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라뚜 바구스 보앙(Ratu Bagus Boang) 끼아이 따빠(Kyai Tapa) 지휘권을 물려받아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술탄은 반뜬에 잠시 머물렀으나 나중에 바타비아의 감옥으로 옮겨져 1692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반뜬 라마의 아궁반뜬 회교사원 북쪽의 반뜬 왕가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훗날 공적과 희생을 기려 수하르토 정권은 1970 8 1 대통령령으로 술탄 아겅 띠르타야사를 국가영웅으로 지정했고 그의 이름을 설립된 반뜬 국립대학인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 대학이 있습니다.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 대학 엠블렘

 

운뚱 수라빠티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를 도와 술탄 하지와 맞섰던 아리야 뿌르바야 왕자와 VOC 군의 프랑소와 대위를 일단 마음 속에 기억해 두기로 합시다.



2018.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