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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라 왕자 뜨루노죠요 본문
마두라 왕자 뜨루노죠요
아망꾸랏 1세는 중부와 동부자바 대부분은 물론 수마트라와 보루네오 남부 일부까지 왕국의 지경을 확장한 술탄 아궁의 뒤를 이어1646년 마따람 왕국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 훌륭한 왕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치세 초반이 학살당한 정적들의 피로 흥건했으니 말입니다. 그의 형제인 알릿 왕자가 벌인 쿠데타가 실패하자 정작 알릿왕자는 쿠데타를 시도하던 중 일찌감치 목숨을 잃었지만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추정되는 이슬람 신도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1659년 이번엔 장인이자 수라바야 정복자의 아들이며 당시 마따람 왕궁에 함께 살고 있던 뻐끽 왕자(pangeran Pekik)가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고 의심하던 끝에 결국 뻐끽 왕자와 그 식솔들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결국 동부 자바에서 가장 유명한 왕가가 대규모 학살로 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처형당한 뻐끽 왕자를 어린 시절부터 모셨던 장라나(Jangrana)라는 인물을 잠시 기억해 둡시다.
아무튼 이토록 잔인한 제왕을 대신들이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국왕과 신하들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고 친아들인 태자와도 갈등을 빚으며 왕궁에는 정권다툼의 소용돌이가 몰아쳤습니다. 태자의 이름은 아디삐티 아놈(Adipati Anom)이었고 뻐끽 왕자의 손자로 훗날 아망꾸랏 2세가 되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눈을 벗어난 고위 귀족들을 무작정 처형하는 아망꾸랏 1세의 행태는 그 후로도 몇 번씩이나 되풀이 되었습니다.
1646년 아망꾸랏 1세가 왕좌에 앉기 직전 마타람 왕국의 위용
한편 라덴 뜨루나자야(앞서 한번 언급했던 자바의 발음방식에 따라 향후 ‘뜨루노죠요’로 이름을 통일합니다)는 마두라 지배자의 후손으로 1624년 전쟁에 진 마두라가 마따람 왕국에 합병된 후 강제로 마따람 왕궁에서 인질처럼 살고 있었지만 정변에 휘말린 그의 아버지가 1656년 아망꾸랏 1세에게 처형당하자 왕궁을 떠나 까조란(Kajoran)으로 피신했고 그곳 영주인 라덴 까조란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까조란 영주의 집안은 고대 성직자 집안이었고 마따람의 왕실과도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덴 까조란은 아망꾸랏 왕 치세의 잔혹함과 왕궁 귀족들이 무더기로 처형당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던 인사였습니다. 까조란은 1670년 벌어진 모종의 스캔들로 인해 추방당한 아놈 태자에게 자신의 사위 뜨루노죠요와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태자와 뜨루노죠요는 곧 절친이 되었고 아망꾸랏 왕에 대한 혐오감도 함께 공유했습니다. 두 사람은 출신 국가는 달랐지만 같은 왕자였고 쁠레레드의 궁에서는 아망꾸랏 1세의 폭정을 목도하며 함께 두려움에 떨던 경험도 같이 했었으니까요. 뜨루노죠요는 아놈 태자의 지원에 힘입어 1671년 마두라로 돌아가 그곳 영주를 제압하고 마두라의 제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이는 마두라가 마타람의 통치권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였습니다.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지만 이제 마타람 왕국의 아놈 태자와 마두라를 재패한 뜨루노죠요 사이에는 더 이상 절친으로 남을 수 없게 만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한편 술라웨시의 마카사르는 동부 인도네시아의 교역중심지였습니다. 물론 그 위상은 오늘날에도 현저히 남아 있습니다. 1669년 마카사르 전쟁을 통해 VOC가 술탄 하사누딘의 고와(Gowa) 술탄국을 멸망시킨 후 마카사르를 떠난 일단의 병사들이 자바섬으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반뜬 술탄국에 첫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674년 그곳에서 추방된 그들의 선택은 해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길과 전투에 능한 그들이 고국을 잃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가장 쉬운 선택이었죠. 그들은 자바섬과 누사 떵가라 지역을 누비며 해안도시들을 약탈했습니다. 아놈 태자는 그들에게 정착할 곳이 생기면 더 이상 해적질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자비를 베풀어 자바섬 동쪽 곷의 더뭉(Demung) 마을에 정착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어려움 속에서도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어요. 1675년 까랭 갈레송(Karaeng Galesong)이 이끄는 마카사르 전사들과 해적들이 추가로 유입되었고 그들은 나중에 뜨루노죠요 반군의 주력을 이룹니다. 까렝 갈레송은 마카사르 전쟁을 이끌었던 고와 술탄 하사누딘의 아들이었습니다.
까랭 갈레송
당시 마타람 왕국은 상설 군대를 두지 않고 예속된 영주들에게서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 전반을 공급받았습니다. 병사들 대부분은 지방 영주들에게 징집된 농부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는 궁정경비를 서던 기간병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화포를 사용했고 네덜란드의 snaphaens에서 유래되어 스나빤(Senapan)이라고 부르는 격발식 소총, 카빈 소총과 같은 화기를 다루었고 기병대와 요새전을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족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직도 소총을 스나빤이라 부릅니다.
역사가 M.C. 릭레프스(Ricklefs)가 유럽의 총기 기술이 자바에 이전된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할 만큼 자바인들은 1620년부터 화약과 화기들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자바의 영주들은 유럽인들을 고용해 무기취급법, 부대지휘기법, 축성술 등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기술이 늘어나는 것과 군기가 잡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었습니다. 자바군대의 징집된 농부들은 기강이 약해 전투중 곧잘 도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타람 왕국의 군대는 1676년 9월 그고독에 모인 뜨루노죠요 반군 9천명 보다 훨씬 더 큰 군세를 자랑했지만 1677년 6월 수도 쁠레레드가 함락되자 한 줌도 안되는 경호부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가 1678년 하반기 뜨루노죠요의 수도 끄디리로 진군할 때엔 다시 13,000명으로 크게 늘어났던 것입니다.
왕국군이 그 정도인 상태에서 반란은 더뭉(Demung)에 근거지를 둔 마카사르 해적들이 자바 북부해안의 무역도시들을 대상으로 일련의 약탈공격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공격은 1674년 그레식을 침공한 것인데 마타람 왕국은 이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뜨루노죠요는 1675년 마카사르 인들의 우두머리 까랭 갈레송과 조약에 서명하고 혼맥을 맺으며 더 많은 약탈을 계획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뜨루노죠요와 마타람의 아놈 태자가 다져왔던 우정도 깨지고 맙니다. 해적들을 더뭉에 정착시킨 것은 태자였는데 해적들은 그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마타람 왕국에 칼을 들이밀었고 거기에 뜨루노죠요가 힘을 보탰으니 말입니다.
같은 해 마카사르인들과 마두라인들로 이루어진 해적들이 빠자라깐에서부터 수라바야, 그레식에 이르기까지 북부 자바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거나 불살랐습니다. 왕국군이 반군을 격퇴하지 못하자 아망꾸랏 1세는 북부 해안의 주도인 즈빠라(Jepara)에 군 주지사를 임명하고 도시방어를 강화시키는 한편 더뭉 토벌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더뭉으로 행진해 들어간 마타람의 군대는 패배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반군들이 차지한 해안 지역에서 마따람 군대와 VOC 군대가 벌인 합동작전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해적들을 밀어붙였고 결국 까랭 갈레송은 그의 혈맹 뜨루노죠요의 영토인 마두라도 근거지를 옮겨 갔습니다. 나중에 VOC의 함대가 더뭉의 해적기지를 완전히 파괴했지만 마두라의 뜨루노죠요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1676년 뜨루노죠요는 스스로 ‘권능왕 마두렛나’(Panembahan Maduretna)라는 이름으로 대관식을 갖고 그레식 인근인 기리(Giri)의 수난(Sunan 영적 지도자)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그해 9월 까랑 갈레송이 이끄는 9천 명의 반군병력은 마두라에서 자바로 건너가 곧 동부 자바의 주도 수라바야를 탈취했습니다. 마타람 왕국은 아놈 태자에게 대규모 군대를 주어 반군과 맞서도록 해, 그해 10월, 뚜반의 동쪽 그고독(Gegodog)에서, 뜨루노죠요 반란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절친을 전장에서 적으로 마주한 아놈 태자와 뜨루노죠요는 서로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여기서 마타람 왕국군은 반군을 압도하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서도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기 참전했던 아망꾸랏 국왕의 숙부 뿌르바야 왕자가 전사하고 태자는 이를 갈며 마타람으로 급히 도주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뿌르바야 왕자는 당연히 반뜬 술탄 아겅 띠르따야사의 아들 뿌르바야 왕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마타람 왕국의 시조인 권능왕 스노빠티의 아들이자 가장 존경받는 제왕 중 한 명인 술탄 아궁(Sultan Agung – 재위기간 1613-1645)의 숙부였으니 그고독에서 전사할 당시 이미 70세가 족히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잠시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기로 하죠.
1917년 Rd. 란지 죠요수브로토(Rd. Pandji Djojosubroto)가 엮어 출간한 자바 땅의 역사서 초판,
자바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에서는 단번에 다 마시면 자바의 왕의 대를 잇게 된다는 전설을 지닌 기적의 끌라빠무다 (코코넛의 일종)를 끼 아긍 기링이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손님으로 온 끼 아긍 빠마나한이 목이 말라 어쩌다 단번에 마셔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 끼 아긍 뻐마나한은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아들 수따위자야(Sutawijaya)를 끼 아긍 기링의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박색인 것을 안 수따위자야는 임신한 아내를 버리고 마따람으로 돌아가 버렸죠. 마음의 빚을 덜려 했던 빠마나한의 배려가 기링과 그 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만 셈입니다.
마타람으로 돌아간 남편 수따위자야는 ‘권능왕 스노빠티’라는 유명한 제왕이 되었고 기링의 딸은 그후 아들을 낳아 자카 움바란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자바어로 ‘그냥 버려진’이라는 정도의 뜻입니다. 그는 장성해 마따람 왕국에 들어가 모든 노력을 다해 마침내 아버지 스노빠티로부터 아들임을 인정받아 뿌르바야 왕자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리스-로마 신화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스토리의 전개입니다.
자바 남쪽바다 영물들의 여왕 깐젱 라뚜 롤로끼둘(Kanjeng Ratu Roro Kidul)과 영적 결혼을 하고 자바를 통일했다는 등의 수많은 전설과 위업을 낳은 권능왕 스노빠티의 아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들이 둘 있었는데 그중 첫째 라덴 랑가는 안타깝게도 어려서 죽었고 둘째가 바로 이 뿌르바야 왕자였습니다. 그는 조카인 술탄 아궁의 재위기간(1613-1645) 내내 마타람 왕국의 든든한 후견인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직접 권력을 잡을 만도 한데 끝내 술탄 아궁의 뒤를 받쳐 주었던 것은 사실 술탄 아궁이 뿌르바야 왕자의 친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술탄 아궁이 아직 아기일 때 뿌르바야 왕자가 자기 아들과 태자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술탄 아궁이 마타람과 기링 사이에 태어난 순혈 왕족이며 기적의 끌라빠무다 예언이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물론 그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뿌르바야 왕자조차도 술탄 아궁의 아들 아망꾸랏 1세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고령의 대신들을 숙청할 때 거의 처형될 위기에 처하지만 술탄 아궁의 미망인 수리 부인(ibu Suri)의 도움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뜨루노조요 반란이 한창일 때, 앞서 언급한 그고독(Gogodog) 전투에서 마카사르인들과 마두라인들의 협공을 받아 처참하게 전사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 마타람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지내며 역사의 흥망성쇄를 모두 지켜본 셈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옵니다. 패전하고 돌아온 아놈 태자는 반군을 공격하기 전 너무 오래 망설인 이유를 추궁당했습니다. 그의 우유부단함이 그고독의 패전을 불러왔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적들과 내통하는 반역자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는 소문도 떠돌았는데 이는 예전 추방당했던 시절 까조란의 영지에서 뜨루노죠요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혐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연 왕국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전장에서 한때의 절친에게 칼을 겨누는 것조차 망설일 만큼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을까요?
그고독에서 승리를 거둔 반군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해 원래 수라바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교역을 찌레본 지역으로 확대했는데 이곳엔 꾸두스(Kudus)나 드막(demak) 같은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도시들은 약 50년 전 술탄 아궁의 정복 당시 파괴된 요새들이 대부분 보수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직 즈빠라만 뜨루노죠요군의 공격을 오래 버텼는데 이는 군출신 주지사의 노력은 물론 VOC 병력들이 제때 지원을 나와 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따람 왕국의 동쪽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뜨루노죠요의 장인 라덴 까조란이 강력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반군에 합류하자 이제 반군은 보다 내륙지방으로 그 영향력을 뻗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까조란과 뜨루노죠요의 군대의 수도 공격만은 왕국군 병력이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마타람 왕국 편으로 참전한 VOC군대는 당연히 직업군인들을 보유했는데 이들은 장검과 소형 무기들로 무장하고 탄약통, 휴대용 주머니들이 달린 탄띠, 연막탄, 수류탄 등을 소지했습니다. 구성원들 대부분은 인도네시아인들이었고 유럽인 병사들과 해병대도 약간 포함되어 있었는데 모두 유럽인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VOC 병사들이 기술적인 면에서 토착민 부대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훨씬 체계적인 훈련으로 기강이 바로서고 우수한 장비를 운용했으므로 전투력 면에서 인도네시아 토착군대들을 아득히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행진해 나가는 군대 뒤에 늘 긴 보급행렬이 줄을 이어 가는 식으로 그들은 병참 면에서도 체계가 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토지의 소출에 의지하다가 식량부족을 맞곤하던 자바의 부대들에 비해 전술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도록 했습니다. 뜨루노죠요의 반란군와 맞선 VOC의 병력은 1676년 1,500명에 불과했지만 나중에 아룽 빨라까(Arung Palakka)가 이끄는 부기스족 동맹군 6천명에 의해 크게 증강되었습니다.
빨라까 왕자가 이끄는 부기스족 부대들도 VOC 편에서 반군들을 압박했다.
다른 교전상대들과 마찬가지로 뜨루노죠요의 군대와 그의 연합군들도 화포와 기병대, 요새전을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바를 침공하던 1676년 당시 그들은 무려 9천 명의 병력으로 막강한 군세를 보였습니다. 병력 대부분은 뜨루노죠요의 추종자들과 마카사르의 전사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자바와 마두라의 귀족들이 거기 합류했는데 자바의 가장 유명한 영적 이슬람지도자인 기리(Giri)의 영주도 1676년 초 뜨루노죠요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뜨루노죠요의 친인척들은 반란이 승기를 잡고 나서야 뜨루노죠요에게 합류하는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라덴 까조란은 강대한 까조란 가문의 수장이었고 뜨루노죠요의 장인이었음에도 본격적으로 사위의 반란에 동참하는 것은 1676년 9월 뜨루노죠요가 그고독(Gegodog)에서 대승을 거둔 후였습니다. 마따람 왕실에 대한 환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왕실과 혼맥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망설이게 했던 것인지도모릅니다. 또한 뜨루노죠요의 숙부 삼빵(Sampang)의 왕자(나중에 짜그라닝랏 2세로 즉위)도 1677년 6월 마타람 수도 쁠레레드가 함락된 후에야 합류했습니다.
코넬리스 스페일만은 1677년 VOC군을 지휘했고 그후 VOC의 총독이 되었다.
마타람 왕국의 요청에 따라 VOC가 코넬리스 스페일만 제독을 지휘관으로 하여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참전했습니다. 그의 군대엔 인도네시아 병력은 물론 유럽인 병력들도 다수 포함된 정예부대였습니다. 그는 1677년 함대를 이끌고 뜨루노죠요의 근거지인 수라바야를 향했습니다. 최초 협상이 깨지자 그는 수라바야를 강습했고 치열한 격전 끝에 그해 5월 마침내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뜨루노죠요군은 철포 69문과 청동포 34문을 버리고 청동 화포 20문만 끌고 도망쳤습니다.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죠. 스페일만의 군대는 수라바야를 둘러싼 인근지역의 반군들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뜨루노요죠의 고향인 마두라도 함락시켜 그곳 뜨루노죠요의 생가를 허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뜨루노죠요는 VOC 군대의 압도적 군사력에 밀려 수라바야에서 끄디리(Kediri)로 몸을 피해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반군들은 비록 수라바야에서 패전했지만 중부와 동부 자바의 내륙에서 매우 선전했고 수라바야를 빼앗간 바로 다음 달인1677년 6월 마타람의 수도 쁠레레드(Plered)를 마침내 함락시키면서 그 절정을 맞았습니다. 당시 마타람의 국왕은 와병중이었고 아놈 태자는 뜨루노죠요와 내통했다고 의심받고 있었으므로 왕국군은 제대로 반군을 맞아 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국왕은 태자와 수행원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갔으므로 반군들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서 수도를 유린했고 왕궁을 노략질해 챙긴 전리품들을 가지고 다시 끄디리로 돌아갔습니다.
국왕 아망꾸랏 1세가 도피 중에 뜨갈(Tegal)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늘 그렇듯 폭군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리고 아놈 태자가 아망꾸랏 2세로 즉위했습니다. 쁠레레드의 화려한 왕국에서 호화롭게 진행되었어야 할 그의 대관식은 어둡고 조촐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단 할머니의 고향인 뜨갈 사람들과 VOC에게 마타람의 새 국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한때의 절친 뜨루노죠요를 부왕과 왕국의 원수로 여기며 더욱 증오를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뜨루노죠요를 쓰러뜨리기 위해 아망꾸랏 2세는 더욱 VOC의 군사적 도움을 얻으려고 애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왕국의 운명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을 때 찌레본의 영주는 그 틈을 타 반뜬 술탄국과 손잡고 마타람 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망꾸랏 2세의 동생 뿌거르 왕자(Pangeran Puger)는 옛 도성 쁠레레드로 들어가서 아망꾸랏 2세를 부정하고 스스로 잉알랑아 마따람 (Ingalannga Mataram)이라는 호칭으로 스스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그는 훗날 빠꾸부워노 1세가 됩니다.
돈도 군대도 없어 뜨루노죠요는 물론 뿌거르 왕자조차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아망꾸랏 2세가 VOC와 손을 잡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스페일만 제독은 수도의 함락 소식을 듣고 수라바야를 출발해 즈빠라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스마랑, 드막, 꾸두스, 빠티 같은 중부 자바의 중요한 해안도시들을 즉시 장악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구조된 아망꾸랏 2세와 일행들은 VOC의 배를 타고 1677년 9월 즈빠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VOC의 무리한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북부해안의 모든 항구도시에서의 수입을 VOC가 차지하도록 약속했고 쁘리앙안의 고지대와 스마랑도 VOC에게 조차해 주었습니다. 또한 역내에 사는 비자바인들에게 대한 VOC의 사법권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네덜란드 역사가 H.J.드그라아프(H.J.de Graaf)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VOC가 일개 기업답게 자신의 조력자가 마타람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면 훗날 자신들에게도 금전적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위험스러운 투기(hazardous speculation)에 돈을 대기 시작했다고 평했습니다.
VOC-마타람 왕국의 연합군은 반군을 향해 느릿느릿 행군해 가면서 1678년 초, 중북부 해안의 여러 도시들을 통제할 정도의 힘을 키웠습니다. 그해 VOC 총독으로 승진한 리크로프 반고엔스(Rijcklof van Goens)의 뒤를 이어 스페일만 제독이 VOC 총사령관이 되었고 즈빠라의 지휘권은 1678년 6월에 부임한 안토니오 허르트(Anthonio Hurdt)가 물려 받았습니다.
끄디리 협공
1678년 9월 VOC와 마타람 왕국의 연합군이 끄디리를 향해 행군해 갔습니다. 국왕의 제안에 다라 군대는 너무 직접적인 루트를 택하지 않고 세 개의 평행선으로 넓게 포진했는데 이는 보단 넓은 지역은 커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쪽 편에 서야 할지 망설이는 이들을 압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의 아이디어는 효과를 발해 전투가 진행되면서 지방 군사세력들이 전리품을 기대하며 진압군에 합류하기 시작했죠. 끄디리는 프랑소와 택 대위가 이끄는 공격부대에 의해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사기가 오른 마타람-VOC 연합군은 동부 자바의 가장 큰 도시이자 아망꾸랏 2세가 태자 시절 자기 궁전을 건설한 바 있던 수라바야로 진군해 나갔고 반군들은 여러 곳에서 연이은 패배를 겪어야 했습니다. 1679년 9월 신두레자(Sindu reja)와 얀 알베르트 슬로트(Jan Albert Sloot)가 이끄는 VOC와 자바인, 부기스인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믈람방의 전투에서 라덴 까조란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그해 11월 VOC와 아룽 빨라까가 이끄는 부기스족 연합군은 동부 자바 께뻬르(Keper)의 요새에서 마카사르인 반군들을 축출했습니다. 1680년 4월 VOC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전투 끝에 기리의 반군 영주가 패배했고 그의 가족 대부분이 처형당했습니다. VOC와 아망꾸랏 2세가 연이은 승리를 거둘수록 더욱 많은 자바인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복속해 왔습니다. 아망꾸랏 1세의 실정과 뜨루노죠요 반란의 와중에 밑바닥까지 실추되었던 마타람 왕국의 권위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끄디리의 요새가 함락된 후 뜨루노죠요는 동부 자바의 산악지대로 몸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VOC와 아망꾸랏 국왕의 군대가 그를 뒤쫒았고 홀로 남아 음식까지 바닥난 뜨루노죠요는 1679년 12월 26일 마침내 VOC에게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VOC 사령관의 포로로서 예의바른 대우를 받았으나 1680년 1월 2일 동부자바 빠약(Payak) 소재 왕가의 거소를 예방했을 때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뜨루노죠요의 죽음
10년전 까조란의 영지에서 뜨루노죠요와 형제처럼 지냈던,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된 아망꾸랏 2세를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망꾸랏 2세가 칼을 뽑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저 위협하려는 의도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뜨루노죠요는 비록 적군의 수괴였지만 이미 VOC 사령관의 포로가 된 만큼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가장 강력한 연합군인 VOC에게 반기를 드는 모양새가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친구여. 내 아버지가 전하는 안부다.”
그의 아버지 아망꾸랏 1세가 도피 중 세상을 떠난 것은 어쩌면 뜨루노죠요가 직접 죽인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습니다. 뜨로노요죠에게 다가간 아망꾸랏 2세는 서슴없이 그의 몸통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고 이어 그의 가신들이 달려들어 뜨루노죠요를 난도질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시각과 평가가 달라지지만 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하며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마타람 왕국에 반기를 들었던 마두라의 왕자 뜨루노죠요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아망꾸랏 2세는 이제 원수는 갚았지만 이 사건을 뒷처리해야 하는 골치아픈 일이 남았습니다. VOC의 포로를 마음대로 죽인 것은 아무리 동맹국의 국왕의 소행이라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망꾸랏2세는 뜨루노죠요가 자신을 죽이려 했으므로 정당방위로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고 물론 VOC는 그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나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법정에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결국 문제삼지 않기로 합니다. 18세기에 쓰여진 ‘자바인들의 이야기’에서는 보다 로맨택하기 각색된 뜨루노죠요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타람 왕국의 국토 대부분을 유린했던 뜨루노죠요의 반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뜨루노죠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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