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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먼궁 수라빠티와 바리토 전투
뚜먼궁 수라빠티는 지금은 중부 깔리만탄에 속하는 까하얀 강(Sungai Kahayan) 인근 지역에 사는 다약 바꿈빠이 시앙족(suku Dayak Bakumpai-Siang)의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타고난 운명에 따라 일족의 수장이 되었고 ‘끼아이 뚜먼궁 빠티 자야 라자’(Kiai Tumenggung Pati Jaya Raja)라는 호칭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뚜먼궁이란 인도네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고위 귀족에 대한 존칭으로 대략 왕자 다음 자리쯤 됩니다. ‘빠티’란 아디빠티(Adipati) 처럼 고위 귀족의 직위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자야(Jaya)란 ‘거대하다’는 의미, ‘라자’란 ‘왕’이란 뜻이니 이분이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무지하게 높은 신분이라는 것이 호칭에서부터 우러납니다. 거기다가 맨 앞의 끼아이(Kiai)란 이슬람의 높은 선생을 뜻하니 이분이 가진 종교적 영향력도 사뭇 드러납니다. 뚜먼궁 수라빠티와 그의 다약시앙족 부하들은 이미 이슬람을 받아들인 상태였습니다.
반자르 전쟁은 마르타뿌라를 포함한 그 일대의 바누아 리마(훌루 숭아이-강기슭)와 바리토강 전역(따나 두순)에서 벌어졌습니다. 뚜먼궁 수라빠티는 전쟁 내내 히다야툴라 왕자와 안타사리 왕자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뚜먼궁 수라빠티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안타사리는 네덜란드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낼 때까지 함께 싸울 것이며 서로에게 어떠한 저의도 숨기지 않고 어떠한 욕망과도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래서Haram Manyarah Waja Sampai Kaputing라는 모토를 세웠는데 이는 ‘시종일관 무쇠처럼 맹렬하고 굳건하게!’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의미는 나중에 안타사리 왕자의 유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수라빠티가 안타사리 왕자와 함께 네덜란드와 싸울 때 뚜먼궁 싱아빠티, 뚜먼궁 까르타빠티, 뚜먼궁 망꾸사리 등 여러 귀족들이 힘을 합쳤는데 이들이야말로1865-1905년까지 이어진 반자르 전쟁에서 민중들을 이끈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자르 전투는 바리토강 전역에서 벌어졌는데 꾸알라 까뿌아스(Kuala Kapuas) 인접한 뻬딱섬(Pulau Petak)의 네덜란드 소금창고를 습격하는 것으로 그 서막이 올랐습니다. 인근 마을보다 지대가 높은 뻬딱섬의 창고는 강변에 위치했고 비촌 중위와 60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에는 네덜란드 전함 몬테라도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주위를 경계하던 가운데1859년 8월 24일 한밤중에 뚜먼궁 수라빠티와 뻠바깔 술릴이 뻬딱섬을 공격했고 비촌 중위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1859년 9월 안타사리 왕자, 히다야툴라 왕자, 끼아이 드망 르만(Kiai Demang Lehman – 르만 군수) 및 또 다른 독립투사들이 깐당안(kandangan)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 회합의 결론은 안타사리 왕자가 두순 아따스(Dusun Atas)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고 뚜먼궁 자릴(Tumenggung Jalil)은 히다야툴라 왕자와 함께 바누아리마(Banua Lima) 지역의 방어를 강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드망 르만과 다른 족장들은 마르따뿌라(Martapura) 지역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힌 드망 르만(Demang Lehman)
네덜란드는 뚜먼궁 수라빠티와 안타사리 왕자를 이간질 해 안타사리 왕자를 생포하려 했는데 수라빠티와 다약 부족들은 한번 입밖에 낸 맹세에 충실했고 결코 이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네덜란드의 비열한 방식엔 역시 비열한 방식으로 대응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죠. 네덜란드는1859년 12월 전함 온러스트 호를 랄루똥 뚜우르(Lalutong Tuwur)의 무아레떼웨(Muara Teweh)에서 불과 3km 떨어진 곳까지 보내왔습니다. 거기 정박한 온러스트호는 뚜먼궁 수라빠티에게 초청장을 보냅니다. 우세한 화력을 과시하며 수라빠티를 회유하겠다는 그들의 목적은 너무나 명백했죠. 네덜란드는 그동안에도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을 멈추도록 뚜먼궁 수라빠티를 수없이 회유했는데 이는 예전에 수라빠티가 네덜란드인들과 가깝게 지낸 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뚜먼궁 수라빠티는 반자르 전쟁이 벌어지기 2년 전인 1857년 씨피엘 그자거버(Civiel Gezaghebber)와 마라바한 병사들의 지휘관 방에르트 중위 그리고 전함 찌빠나스의 선원들로 이루어진 방문단을 맞아 성대히 환영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자르 전쟁이 벌어지자 자신이 호의를 베풀었던 그 네덜란드군이 아무 잘못도 없는 민중들의 집과 논밭을 불사르는 것을 보고 마음 속에 증오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가 최초에 보여주었던 선의는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한낱 기만전술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뚜먼궁 수라빠티는 안타사리 왕자를 배신하라는 네덜란드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역이용하여 네덜란드 전함 온러스트(Onrust)호를 공격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전함 온러스트(Onrust)호
1859년 12월 26일 뚜먼궁 수라빠티는가족들과 수행원들 15명과 함께 큰 배에 타고서 온러스트호를 향했고 그의 부하들이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을 타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이 온러스트호 측면에 배를 붙이고 승선하자 1857년에 이미 한 차례 만난 적 있던 방에르트 중위는 뚜먼궁 수라빠티에게 아는 척 인사를 건넸습니다. 뚜먼궁 수라빠티는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들과 사위 등 4명과 함께 선실에 들어갔고 다른 열명의 수행원들은 갑판 위에서 다른 장교들과 친근하게 어울렸습니다. 이 회합에서 네덜란드 측은 뚜먼궁이 협조해 준다면 그의 지위가 빵에란(왕자)으로 승격되도록 돕겠다고 했고 여러 선물들을 내놓으며 호의를 보였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해 방에르트 중위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간다며 만족해 했습니다.
한편 방에르트 중위의 옆에 앉은 하지 무하마드 탈립(Haji Muhammad Thalib)은 그 자리를 주선한 사람이었는데 뚜먼궁이 타고온 배와 수행한 다른 배들이 지붕덮개를 씌우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보통 배의 지붕을 씌우는 다약족의 관습을 알 리 없었고 그들은 오직 뚜먼궁 일행의 살가움에만 주목했을 뿐입니다. 배에 지붕을 씌우지 않았다는 것은 전투준비의 표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네덜란드에 저항하는 반자르 민중들은 그 모습을 모고 내심 매우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온러스트호의 함장 반델벨데(Van del Velde)는 수라빠티에서 화포들을 보여주고 수라빠티의 부하들에게도 함선을 견학시켰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수라빠티 일행을 전혀 의심하지 않아 비무장상태로 있었고 방에르트(Bangert) 중위 역시 무장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반델벨데 함장만 허리에 칼을 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반자르의 또 다른 귀족 구스띠 리아스(Gusti Lias)의 배가 온러스트 옆에 붙자 수라빠티의 아들 이본(Ibon)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칼을 뽑아들고 “전쟁이다!”라며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수라빠티의 부하들은 언제라도 전투를 시작할 태세였으므로 그 고함소리에 맞춰 400-500명이 온러스트호의 갑판 위로 뛰어 올라 아연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근접전이 벌어지자 화포나 소총이 불을 뿜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뚜먼궁 아리빠티, 뚜먼궁 마스 아놈, 뚜먼궁 꺼르따빠티 같은 다른 지휘관들도 배에 올라 전투에 가담했고 이 싸움은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네덜란드군 방에르트 중위가 이본의 칼에 맞아 고꾸라졌고 뚜먼궁 수라빠티도 칼을 뽑아 들고 결투 끝에 반델벨데 함장을 쓰러뜨렸습니다. 네덜란드군 장교들과 병사들 90여명이 모두 전사했고 온러스트호는 강바닥에 수장되었습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하지 무하마드 탈립은 12월 31일 반자르마신에 도착해 이 전투 소식을 전했습니다. 배를 가라앉히기 전 노획한 소총과 크고 작은 화포들을 이용해 뚜먼궁 수라빠티와 안타사라 왕자는 지나는 네덜란드 함선들을 포격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측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동인도에서 겪은 가장 큰 손실이 이 반자르 전쟁에서 무기와 병력을 가득 실은 전함을 바리토 강에 수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함 온러스트가 격침되었다는 소식에 네덜란드는 크게 동요했고 뚜먼궁 측의 사기는 당연히 하늘을 찔렀습니다.
구스타프 베르스페익(Gustave Verspijck) 중령
매우 치욕적인 패배를 겪은 네덜란드는 군대를 급파해 전함 온러스트호 격침에 공조한 다약족과 멀라유족(반자르 족)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구스타프 베르스페익(Gustave Verspijck) 중령이 1860년 1월 27일 자신의 전함 수리남(Suriname) 호, 보니(Boni)호 및 다른 여러 척의 배들을 출격시켰습니다. 이들 함선들은 300명의 병사들과 완벽한 무장을 갖추었는데 유럽인 장교 10여명이 포함되었고 여러 정의 함포와 박격포도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 파견부대의 지휘관 해군중위 드하에스(De Haes)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명령을 수행하며 지나치는 모든 부락들을 불태웠고 마주치는 모든 주민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랄루똥 뚜우르(Lalutong Tuwur) 부락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받은 수리남호와 보니호는 강변을 따라 의심스러운 곳에 무작정 사격을 퍼부으며 저지대에 위치한 레오공(Leogong) 부락을 지나치는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30 파운드짜리 포탄이 수리남호의 선체를 향해 날아 들었습니다. 온러스트에서 노획한 화포를 안타사리군이 발사했던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의외의 공격을 받아 네덜란드 측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기관실 두 개의 보일러가 파손되고 엔진이 멈춰 배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침몰을 면한 수리남호의 예인이 밤이 깊어서야 시작되었고 파병부대는 더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 전투를 레오공 전투라 부르며 1860년 2월 11일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1860년 2월 22일 이번엔 전함 셀레베스호와 몬테라도호가 레오공의 반군들을 공격하기 위해 급파되었습니다. 반군을 몰아넣은 두 척의 전함은 강기슭과 강 지류에 200여명의 병사들을 상륙시켰습니다. 피비릿내 나는 전투가 이내 바리토강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포위되었음을 깨달은 안타사리 왕자와 뚜먼궁 수라빠티는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후퇴하기 시작했으므로 네덜란드 역시 만족할 만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편 두 척의 네덜란드 전함을 상대하기 위해 뚜먼궁 수라빠티와 안타사리 왕자는 수백 척의 작은 배들과 대형 사령선을 동원했고 사령선에는 장대 위에 노란 깃발을 매달았습니다. 이 함대에는 해상 장갑차와도 같은 장거리 투척용 카타마란(Katamaran)보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카타마란 보트는 대나무를 덧대어 만든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 마치 해상 요새처럼 보였고 실제로 몇 문의 화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수라빠티는 온러스트호 외에도 1859년 7월에도 까나밋 섬 가까이에서 네덜란드 전함 찌빠나스도 격침시킨 바 있었는데 찌빠나스와 온러스트에서 노획한 장비들이 여기 사용되었습니다.
카다마란 보트
1860년 8월 히다야툴라 왕자가 생포되어 자바섬의 찌안주르로 유배되고 1862년 10월 안타사리 왕자가 공격준비를 하던 중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안타사리 왕자의 아들 술탄 무하마드 세만이 저항군을 이끌었고 뚜먼궁 수라빠티와 그 자녀들, 그리고 여러 지휘관들이 그를 보좌했습니다. 그들은 본당산(Gunung Bondang) 라웅강(Sungai Lawung)의 상류인 뿌룩 짜후(Puruk Cahu)에서 빠구스띠안(Pagustian)이라 부르는, 반자르의 귀족들로 구성된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여기에 구스띠 맛 사이드, 라덴 마스 나따위자야, 무하마드 나시르 등이 참여해 이름을 올렸습니다.
1864년과 1865년 뚜먼궁 수라빠티는 무아라떼웨(Muawa Teweh)의 네덜란드 요새를 연거푸 공격했습니다. 1864년 9월 25일 뚜먼궁 수라빠띠와 그의 군대는 무아라떼웨 요새를 공격했고 무아라 몬딸랏의 요새에도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일로 인해 무아라떼웨에 방어가 강화되어 4명의 네덜란드 장교와 75명의 병사들이 충원되고 2대의 화포와 2대의 박격포가 설치되면서 1865년 말 수라빠띠의 두 번 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수라빠티는 그후 까와딴 강을 향해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전황은 이후 점차 불리해져 갔습니다. 1865년 11월 1일 네덜란드의 부대 하나가 꾸알라바루에 진출해 저항군들이 사용하는 이동로들을 끊으려 했습니다. 까와딴 요새에서 수세에 돌아선 수라빠티의 군대는 요새에서 접근하는 네덜란드 함선을 향해 포를 쏘며 항거했지만 다음날 네덜란드군의 또 다른 부대가 까와딴의 성벽을 기어 올라 요새 안으로 진입함에 따라 결국 쓰라린 패배를 겪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항군을 이끄는 동안 뚜먼궁 수라빠티는 늘 숙소를 옮겨 다니며 바리토강 전역에서 몇년간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간혹 바리토강 기슭의 바꿈빠이 지역에 나타나곤 했지만 이후엔 줄곧 마나윙 지역에 출몰하며 네덜란드측을 교란시켰습니다. 네덜란드는 수라빠티에게도 현상금을 걸었지만 그를 잡는 데에는 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랜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나이 든 그는 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지만 그의 굳은 결의는 결코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1875년 뚜먼궁 수라빠티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뚜먼궁 아지단이 뒤를 이었고 안타사리 왕자의 아들 술탄 무하마드 세만도 그와 함께 했습니다. 뚜먼궁 아지단은 나중에 민중으로부터 라덴 디빠티 망꾸 느라가(Raden Dipati Mangku Negara)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항상 민중들의 도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타사리 왕자는 물론 그의 추종자들과 후손들은 네덜란드 편에 붙은 반자르족, 다약족, 부기스족 꾸따이족의 형제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술탄 꾸따이는 네덜란드를 도와 뻐르바타사리 왕자(Pangeran Perbatasari)을 사로잡도록 도와 자바의 똔다노(Tondano)로 유배당하게 했고 뚜먼궁 수라빠티의 후손들도 벙꿀루로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반자르 주민들과 다약족들 역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 중엔 네덜란드를 등에 업은 술탄 탐지둘라 2세(Tamijidullah II)를 통해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해 일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그들의 이름 역시 잊지 않고 모두 기록해 두었습니다. 끼아이 라덴 아디빠티 다누 라자(Kiai Raden Adipati Danu Raja)는 네덜란드와 술탄 탐지둘라 2세 밑에서 바누아 리마(Banua Lima)의 주지사로 있었고 따나붐부국(Negeri Tanah Bumbu)과 술탄 꾸따이 정부의 우두머리들도 모두 네덜란드의 주구들이었습니다. 다약마아냔족(Suku Dayak Maanyan)의 수장 수따오노(Suta ono), 다약응아주족(Suku Dayak Ngaju)의 수장 뚜먼궁 니코데무스 자야 느가라(Temanggung Nikodemus Jaya Negara) 등도 대표적인 네덜란드 편에 선 귀족들이었습니다. 그 공으로 수따 오노는 오베르스테(중령) 계급과 네덜란드의 별사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용맹을 기리는 네덜란드군의 최고 훈장이었죠. 사실 다약시홍족은 용맹하기로 유명했고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까하링안(Kaharingan) 이라는 미신을 믿는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이 네덜란드 편에 붙은 것은 무하마드 세만과 수라빠티에게는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뚜먼궁 니코데무스 자야 느가라
네덜란드로서는 안타사리 왕자의 집안사람들과 뚜먼궁 수라빠티의 집안사람들을 함께 두면 또 어떤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르므로 매우 위험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하마드 세만의 가족들을 잡으면 주로 서부 자바의 보고르 지방으로 유배했고 뚜먼궁 수라빠티의 가족들을 잡으면 수마트라의 벙꿀루로 유배했습니다. 그들 집안의 많은 지사들, 투사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 타향에 뼈를 묻어야 했습니다.
안타사리 왕자의 아들 술탄 무하마드 세만(Muhammad Seman)이 1905년 죽음을 맞으면서 네덜란드에 대한 반자르 민중의 저항도 결국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반자르 전쟁이 끝난 후 네덜란드는 대대적인 사면을 행해 많은 귀족들을 복권시켰지만 끝내 사면 받지 못한 인물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안타사리 왕자와 그 자녀들
- 드망 르만
- 아밀 울라
- 뚜먼궁 수라빠티와 그 자녀들
- 끼아이 자야 라라나
- 구스띠 까산과 그 자녀들
이들 자신은 물론 그 후손들 역시 당시 사면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오늘날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이들 중 안타사리 왕자는 1968년 3월 27일 수하르토 정권에 의해 국가영웅으로 지정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장기간 네덜란드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뚜먼궁들과 반자르 민중들 역시 모두 동인도의 영웅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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