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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사리 왕자와 반자르 전쟁
유서깊은 빠사라야 백회점을 오른쪽으로 끼고 남쪽으로 달리면 지나게 되는 잘란 쁘라빤쟈 라야(Jl. Prapanca Raya) 다음 바로 연결되는 자카르타의 잘란 빵에란 안타사리(Jalan Pangeran Antasari)는 예전에도 늘 붐비는 도로였는데 최근 고가도로가 놓여 복층화된 후에도 고가 밑 길은 여전히 막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엔 남부자카르타 시청지청(Kantor Walikota)도 있고 낀따마니 아파트, 브라위자야 아파트, 쁘라빤자 아파트 등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오래된 아파트들은 물론 최근엔 끄망 빌리지, 에센스 등 최고급 아파트들도 들어서 있습니다. 카페들이 즐비한 외국인들의 놀이터 끄망(Kemang)지역으로 들어가는 초입도 있고 SOS 병원과도 연결되니 차량통행이 많을 수 밖에 없죠. 이 길 남쪽 끝엔 한인교회 중 하나인 늘푸른 교회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길 이름의 주인공인 안타사리 왕자는 한때 2천 루피아 짜리 지폐에 얼굴을 싣고 우리 가까이에 온 적도 있습니다.
안타사리 왕자는 1797년 반자르 지역의 마르타뿌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반자르 술탄국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그보다 조금 더 옛날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사리 왕자의 증조부인 술탄 아미눌라(Sultan Aminullah)는1761년 사망할 때 세 아들을 남겼지만 아직 너무 어려 자신의 동생인 나타느가라 왕자 (Pangeran Natanegara)를 후견인으로 지명했습니다. 하지만 세 아들 중 두 명이 죽고 아미르 왕자 (Pangeran Amir) 만이 살아남는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동생은 다른 마음을 먹게 되죠. 자신이라고 왜 술탄이 될 수 없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왕가에 속한 사람이 품은 욕심은 개인적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국가차원에서 그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숙부의 야욕을 알아차린 아미르 왕자는 안전한 빠시르 지역으로 몸을 피했고 나타느가라 왕자는 스스로 대관식을 올리고 술탄 술라이만 사이둘라(Sultan Sulaiman Saidullah)로 즉위했습니다.
모진 풍파와 우여곡절을 겪은 아미르 왕자는 마침내 왕좌를 되찿기 위해 부기스족 3천명을 거느리고 돌아왔는데 술탄 술라이만은 아미르 왕자를 막고 왕위를 지키기 위해 네덜란드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세를 끌어들이는 순간 반자르 술탄국의 파국은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지 귀족들이 분열하여 자멸하길 원하던 네덜란드로서는 그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반군을 쉽게 격퇴했고 사로잡은 아미르 왕자를 실론섬에 유배시켰습니다. 지금의 스리랑카가 있는 곳이죠. 그 아미르 왕자의 아들 중 마수드 왕자(Mashud)가 안타사리 왕자의 아버지가 됩니다. 한편 네덜란드는 술탄 술라이만을 도운 댓가로 1787년 8월 13일 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내용은 반자르 술탄국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술탄 술라이만은 여전히 왕위에 앉아 있지만 그 왕위를 네덜란드로부터 빌려 앉은 격이 되었으니 반자르 술탄국은 술탄의 탐욕때문에 주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술탄 술라이만이 죽은 후 왕위는 술탄 아담 알와시쿠빌라(Sultan Adam Alwasyiqubillah)에게 갔다가 다시 그 아들인 술탄 무다 압두라흐만(Sultan Muda Abdurahman)에게 내려갔고 젊은 술탄은 안타사리 왕자의 여동생 라뚜 안타사리와 결혼했습니다. 어찌보면 원수사이였을 텐데 그런 식의 혼맥이 이어졌으니 이 과정을 잘 들여다 보면 재미진 소설이 하나 나올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들 사이에 히다야툴라 왕자(Pangeran Hidayatullah)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술탄이 냐이 아미나(Nyai Aminah)와도 결혼해 탐지딜라 왕자(Pangeran Tamjidillah)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술탄은 1852년 세상을 떠났고, 당연한 일이지만, 두 왕자는 왕위쟁탈전을 벌어기 시작했는데 죽은 술탄의 동생 쁘라부 아놈(Prabu Anom)도 이 싸움에 뛰어들어 혼전을 벌였습니다.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57년에 이르러 이를 보다못한 반자르의 민중들이 분개하여 바누아리마, 무닝, 바땅 하만딧, 따나라웃, 훌루 숭아이, 까뿌아스 까하얀 등에서 히다야툴라 왕자를 술탄으로 추대하자는 운동과 소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797년생인 안타사리 왕자는 이때 막 50세가 되었지만 아직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조카인 히다야툴라 왕자의 대리인으로서 앞에 나서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을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결집시켰습니다. 탐지딜라 왕자는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인물이었고 현지 식민정부는 그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보르네오를 쉽게 차지하려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사리 왕자는 민중과 접해 살면서 그들이 처한 어려움과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가장 큰 강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현지 민중과 귀족들 사이에 불안과 갈등을 심어 혼란을 조장했지만 안타사리 왕자는 반군의 기치 아래 모여든 모든 사람들과 함께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반자르 술탄왕국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목표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859년 탐지딜라 (Tamjidillah) 왕자의 술탄 대관식이 강행됩니다.
반자르는 깔리만탄섬의 제일 남쪽. 이 지역에 현재 깔리만탄 남부의 주도 반자르마신이 소재함.
안타사리 왕자의 영향력은 날로 커졌고 그의 이슬람 지식은 울라마 학자들에 못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품과 영도력을 믿고 군세는 6천명을 넘어섰는데 마르타뿌라(Martapura), 까뿌아스(Kapuas), 뻘라이하리(Pelaihari), 바리토(Barito) 및 까하얀(Kahayan)의 족장들이 힘을 합쳤고 히다야뚤라 왕자는 물론 르만 군수(Demang Lehman)도 합류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1859년 4월 28일 안타사리 연합군이 네덜란드군과 맡붙는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은 반자르 전쟁의 서곡이 됩니다. 안타사리군 300명이 뻥아론(Pengaron)의 네덜란드 요새와 탄광을 무력화시키고 탄광과 요새 외곽의 상황을 장악했습니다. 안타사리 왕자는 네덜란드군 지휘관 베이크만 대위(Kapten Beeckman)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그의 연합군은 네덜란드의 다른 거점들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1859년 12월 네덜란드 함선들도 공격했는데 반더벨데 함장과(Lieutenants Van der Velde)와 방에르트 중위(Bangert)를 살해하고 온러스트호(Onrust)를 침몰시킨 사건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투의 주역은 뚜먼궁 수라빠티(Tumenggung Surapati)라는 고위 귀족으로 안타사리 왕자를 거론하려면 뺴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온러스트호 격침사건을 포함한 바리토 전투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합니다.
그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1860년 6월 11일, 반자르 술탄국은 결국 네덜란드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787년 술탄 술라이만이 네덜란드에게 주권을 내어주는 조약을 맺은지 70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는 안타사리 왕자를 반역자로 지목해 죽이거나 생포해 오는 자에게 1,000길더의 현상금을 준다고 내걸었고 히다야툴라 왕자에게도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해 8월 9일, 링까우 까딴(Ringkau Katan)의 전투에서 안타사리군은 아문타이 (Amuntai) 로부터 온 네덜란드 지원군에게 밀려 패배를 겪었고 히다야툴라 왕자는 거기서 사로잡혀 자바로 유배당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조카를 뻇긴 안타사리 왕자는 하늘이 무너지듯 가슴이 아팠지만 미라디파(Miradipa) 왕자, 뚜먼궁 만짜느가라 (Tumenggung Mancanegara)와 함께 1861년 9월 24일 뚠다깐(Tundakan)을 방어했고 그해11월 8일에는 똥까산(Mount Tongka)의 요새에서 구스티 우마르(Gusti Umar), 뚜먼궁 수라빠티(Tumenggung Surapati)와 함께 방어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안타사리 왕자는 비탄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반자르 전쟁
1862년 3월 14일 라마단 금식월이 진행되는 동안 이슬람 지도자들과 민중 대표들, 족장들은 Panembahan Amiruddin Khalifatul Mukminin(권능왕 아미루딘 칼리파뚤 묵미닌)이라는 칭호를 안타사리 왕자에게 주었습니다. 반자르 술탄국이 이미 멸망했고 적통인 히다야툴라 왕자마저 자바로 유배된 상황에서 안타사리 왕자는 이 칭호로서 반자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술탄임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돈과 권력을 줄테니 항복하고 전쟁을 끝내자며 회유공작을 그치지 않았으나 안타사리 왕자는 오히려 반자르 술탄국의 복원을 요구하며 네덜란드가 할 일이란 이 땅에서 세금을 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선 용기와 높은 이상 뿐 아니라 ‘깡다구’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그가 1861년 7월 20일 반자르마신의 구스타프 버르스페익 중령(Letnan Kolonel Gustave Verspijck)에게 보낸 편지에도 똑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계속 돕지는 않았습니다. 대관식을 가진 지 7개월쯤 경과할 즈음 천연두가 창궐하기 시작해 수많은 희생자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862년 10월 안타사리 왕자는 대규모 공세를 기획했으나 창궐한 천연두로 인해 계획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해 10월 11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사리 왕자의 정신을 죽음을 앞두고서조차 전혀 꺾이지 않았습니다. ‘항복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니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 죽는 순간까지 투쟁을 멈추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는 반자르마신에 묻혔고 그후 여러 저항군 지도자들이 그곳에 묻혀 영웅묘지를 형성했습니다. 그곳이 훗날 안타사리의 영웅묘지라고 불리게 됩니다.
안타사리 왕자의 묘역
안타사리 왕자가 죽은 후에도 저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술탄 무하마드 세만이 저항군을 이끌었고 뚜먼궁 수라빠티의 자녀들과 여러 지휘관들이 그를 보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과 전쟁의 향방에 대해서는 다음에 뚜먼궁 수라빠티와 바리토 전투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루겠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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