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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본의 전사, 까삐딴 빠띠무라(Kapitan Pattimura) 본문

인도네시아 근대사

암본의 전사, 까삐딴 빠띠무라(Kapitan Pattimura)

beautician 2018. 3. 14. 10:00

암본의 전사, 까삐딴 빠띠무라(Kapitan Pattimura)

 



 빵에란 안타사리 도로를 달려 유서깊은 빠사라야(Pasaraya) 백화점 앞을 지나 수디르만 거리를 향해 달려가려면 빠띠무라 거리(Jl. Pattimura)를 지나게 됩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도로들이 인도네시아 전역에 여러 곳이 있습니다. 지폐에도 모델로 등장했던 빠띠무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까삐딴 빠띠무라로 널리 알려졌고 1973년 인도네시아의 국가영웅으로 지정된 이 암본의 용사는 원래 토마스 마뚤레시(Thomas Matulessy)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암본은 16세기부터 향료무역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말루꾸(Maluku) 또는 몰루까스(Molucas)라고 부르던 인도네시아 동북부 수많은 섬들의 중심지로 처음 포르투갈인들이 도래했었고 이후 네덜란드인들이 이 지역을 넘겨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대부분 기독교도인 암본인들 중엔 유럽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19세기 초의 국가영웅 빠띠무라가 토마스란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암본

 

그는 1783 6 8일 사빠루아(Saparua)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1810년 말루꾸가 네덜란드령에서 영국령으로 바뀐 것은 당시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에게 짓밟히는 동안 영국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인도를 침식했고 마뚤레시는 영국군에 입대해 하사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148 13일 영국와 네덜란드간 협정을 통해1816년 말루꾸는 다시 네덜란드로 이양되었는데 이권을 주고받는 영국과 네덜란드도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겠지만 말루꾸인들에게 그런 상황의 변화는 사뭇 재앙적인 것이었습니다. 1810년 영국이 들어올 때 가장 큰 혼란을 몰고 왔던 것은 화폐 교환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말루꾸인들이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지폐들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오직 동전들만 그 무게만큼의 가치를 발휘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말루꾸인들은 교회에 의연금을 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급료를 주지 못할 것은 물론 교회가 더 이상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없게 될 터였습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영국군에 배속되었던 말루꾸인 군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빠띠무라를 비롯한 군인들은 대대적인 이양식 행사에도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압제자 인 네덜란드의 군복을 입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대부분 제대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당초의 조건은 네덜란드 군이 되어 병영에 남거나 아니면 연금을 받고 귀향하는 것을 병사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 네덜란드는 군인들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군인들과 암본 민중들의 분노를 사 마침내 봉기로 연결된 것입니다.

 

빠띠무라는 사빠루아 사람들이 대장(까삐딴)으로 추대해  1817 5 14일 네덜란드와 격돌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일단의 무리를 이끈 지도자들도 합류했는데 그들 중엔 사이드 뻐린따(Said Perintah), 안토니 리복(Anthony Reebhok),  빠울루스 띠아하후(Paulus Tiahahu), 그리고 띠아하후의 딸 마르타 크리스티다 띠아하후(Martha Christina Tiahahu)등이 있었습니다. 5 15일 그들이 길을 열었고5 16일 그들은 두르스테데 요새(Fort Duurstede)를 함락시키면서 19명의 네덜란드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요새를 되찾기 위해5 20일 베에쩨스 소령과 E.S. 드하아스 중위가 이끄는 200명 규모의 지원군이 몰려왔으나 빠띠무라의 군대는 이들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고 달아난 네덜란드군의 생존자는 30명에 불과했습니다.

 


Fort Duurstede

 

5 29일 빠띠무라와 다른 말루꾸 지도자들이 모여 하리아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 정부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분명히 하고 빠띠무라를 말루꾸인들의 지도자로 천명했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반더차펠린(Van der Cappellen) 총독은 암본 주지사 야코부스 A 미델콥(Jacobus A. van Middelkoop)과 그의 심복 니콜라우스 엥겔하르트(Nicolaus Engelhar)를 현지주민 학대 혐의로 즉각 파면하여 암본 민중을 달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후로도 계속된 전투에서 6 1일 하루꾸의 젤란디아 요새에 대한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서 빠띠무라의 예봉이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육전과 해전에서 빠띠무라의 군대는 네덜란드군과 격돌했지만 두달 후인 8 3일 두르스테데 요새를 다시 네덜란드군에게 빼았겼습니다. 하지만 봉기는 더욱 확산되어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네덜란드군은 빠띠무라를 지원하는 암본 왕가와 귀족들을 이간질 시키는 데에 총력을 다했고 실제로 빠띠무라를 경원하는 목소리가 귀족들 중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빠띠 아꼬온(Pati Akoon) 뚜완나꼬타(Tuwanakotta)의 보오이 왕의 배신으로 빠띠무라는 1817 11 11일 시리 소리(Siri Sori)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를 네덜란드군이 그냥 둘 리 없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진행된 재판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1917 12 16일 전우였던 안토니 리복, 필립 라뚜마히나, 사이드 뻐린따 등과 함께 암본의 뉴빅토리아 요새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17세였던 마르타 크리스티나 티아하후도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혔지만 교수형을 면한 대신 자바섬으로 유배령을 받았습니다. 커피 농장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모욕적인 결정이었죠. 하지만 전장을 달리던 용맹스러운 티아하후는 자유가 속박된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했습니다. 자바로 가던 배에서 건강을 크게 해친 그녀는 1818 1 2 18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선상에서 세상을 떠났고 네덜란드 해군은 전사의 예를 갖춰 그녀의 시신을 반다해에 수장했습니다. 그렇게 스러져간 그녀는 빠띠무라보다 빠른 1969년 국가영웅으로 지정됩니다.

 


마르타 크리스티나 띠아하후 기념우표

 

빠띠무라와 그가 주도한 전쟁은 수까르노 정부와 대립하며 잠시 존재했던 남말루꾸 공화국은 물론 전체 인도네시아인의 애국심 양쪽 모두에서 말루꾸 독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수까르노는 빠띠무라를 위대한 애국자라고 평했고 수하르토는 1973년 그를 국가영웅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암본에는 그의 이름을 딴 빠띠무라 대학, 빠띠무라 공항 및 도로, 동상 등이 들어서 있으며 인도네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들이 존재합니다. 5 15일은 빠띠무라의 날로 기념되고 있으며 젊은 띠아하후의 기일도 작은 기념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빠띠무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천 루피아짜리 지폐에 모델로 출현 중이었습니다.

 


 

 

빠띠무라와 그의 동료들은 암본의 벌판을 달리며 오늘로부터 201년 전인 1817년을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2018.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