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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낭까바우의 자존심, 뚜안꾸 이맘본졸 본문

인도네시아 근대사

미낭까바우의 자존심, 뚜안꾸 이맘본졸

beautician 2018. 3. 4. 10:00

미낭까바우의 자존심, 뚜안꾸 이맘본졸

 


 

5천 루피아 짜리 지폐에도 등장했던 뚜안꾸 이맘 본졸의 본명은 무하마드 샤합(Muhammad Shahab)입니다. 뚜안꾸(Tuanku)란 근대 인도네시아 지방정부 관원의 직함이고 이맘(Imam)이란 이슬람 지도자를 뜻하는 곳이죠. 본졸(Bonjol)은 지명입니다. 그래서 뚜안꾸 이맘 본졸이란 전직 관원이었던 본졸 지역 이슬람 지도자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는 177211일 서부 수마트라 빠사만(Pasaman)의 본졸에서 태어나 1864116일 미나하사(북부 술라웨시)의 삐네렝(Pinereng)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가족은 리마뿔루 꼬또, 술리끼의 림방 강 출신입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처음엔 아버지 마야누딘으로부터, 나중엔 여러 이슬람 성직자로부터 이슬람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빠져들었습니다.

 

본졸국을 세운 후 샤리프가 된 그는 파드리 계율에 대한 논쟁에 휩쓸렸습니다. 파드리 운동은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의 Ahlus Sunnah wal Jamaah 이슬람학파(수니파)와 비견되는데 도박, 닭싸움, 아편남용, 폭주, 흡연 등 현지에서 자행되는 잘못된 관행들을 제거하고 이 지역의 이슬람을 원래의 순수함으로 되돌리자는 운동이었습니다. 한편 전통주의자들들은 이슬람이 도래하기 전부터 이었던 지역의 전통은 존중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며 파드리 주의자들과 맞섰는데 그 대립은 언쟁으로 끝나지 않고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전통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파드리 주의자들과의 분쟁에 네덜란드가 개입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네덜란드는 당시 자바에서 벌어지고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와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자원이 분산되어 손쉬운 승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824년 네덜란드는 본졸국과 마상조약(Masang Agreement)을 체결해 일단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모양새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위장평화전술이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연결된 이맘본졸과 디포네고로 왕자의 관계를 후세는 잊지 않았고 그래서 자카르타 중심가 호텔인도네시아 로터리로 진입하는 도로들 중 하나는 디포네고로 왕자로를 지나 이맘본졸로를 지나야 바로 로터리의 슬라맛다땅 동상을 마주하도록 조정되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디포네고로 반란을 평정한 후 네덜란드는 빤다이시캇(Pandai Sikat)국을 공격하여 서부 수마트라의 패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은 네덜란드의 통치를 배격한다는 자각없이 파드리 운동을 따라 저항에 참여했던 것이었는데 용맹스러운 싸움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압도적 군사력 우세에 밀려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다. 샤리프는 1832년 체포되었다가 3개월 후 탈출하여 본졸의 작은 요새에서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독립투사들이 항상 그렇듯 이맘본졸 역시 남다른 굳건한 심지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3년간의 공성전 끝에 네덜란드는 1937816일 마침내 본졸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디포네고로 왕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는 협상을 하자며 샤리프를 불러내어 체포하는 파렴치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서부자바의 찌안주르로 유배되었다가 암본을 거쳐 술라웨시의 마나도로 최종 유배되고 1864116일 그곳에서 9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배지인 술라웨시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그의 묘지엔 지금 서부 수마트라 미낭까바우 식의 집이 지어져 그의 묘역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다른 민족의 독립투사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세기와 국가를 뛰어넘어 오늘도 우리들 가슴 속 피를 들끓게 합니다.

 

 

2018.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