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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술탄가의 영웅 디포네고로 왕자

beautician 2018. 3. 3. 10:00


술탄가의 영웅 디포네고로 왕자





 

자카르타 최중심지인 호텔인도네시아 로터리로 진입하는 도로들 중 이맘본졸 도로(Jl. Imam Bonjol)와 연결되는 빵에란 디포네고로 도로(jl. Pangeran Diponegoro)는 족자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장자 디포네고로 왕자를 기념하는 도로입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걸쳐 살았던 인물인데 독립전쟁 당시와 그후 현대사에 등장하는 영웅들인 수디르만 장군, A 야니 장군, 정치가 MH 탐린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도네시아 전역 거의 모든 도시의 중심가에 자기 이름을 딴 도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모른다면 인도네시아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 하나를 놓치는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Pangeran Diponegoto 1785. 11. 11~1855.1.8) 디파느가라(Dipanegara) 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족자 술탄의 장자로서 궁전에서 보낸 유년기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해체와 영국의 자바침공, 그 뒤를 따른 네덜란드로의 반환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궁전에도 격변이 있었고 그의 할아버지인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는 1810년과 1812년 두 차례에 걸쳐 왕위에서 밀려나는 사건을 겪다가 두 번째엔 영국군에 의해 자바 바깥으로 유배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디포네고로 왕자는 아버지인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고문으로서 활동했고 영국군에게도 어느 정도 협력했으므로 래플스 총독이 그에게 술탄의 자리를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아직도 술탄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란에 휩싸여 있는 동안 잠시 동인도를 점령했던 영국은 현지 술탄 왕가들을 그토록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1814 승하하자 선대 술탄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왕위를 잇기를 강력히 원했지만 정작 디포네고로 자신은 이를 사양하고 이복동생에게 술탄의 자리를 잇게 했습니다. 그렇게 즉위한 하멩꾸부워노 4(재위기간 1814-1821)는 네덜란드 측이 선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디포네고로는 이복동생의 왕궁이 종교적 의무 지키기를 느슨하게 하고 네덜란드 측 이권을 위해 경도된 정책을 펴는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하멩꾸부워노 4세도 1821년 기근과 역병이 자바를 휩쓸 당시 젖먹이 아들 하나를 유일한 후계자로 남긴 채 1822년 정황이 수상한 죽음을 맞았고 그 젖먹이 아들이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로 즉위했습니다. 세상 모든 왕가들이 그렇듯 어린 술탄 뒤에서 실권을 쥐려는 왕족들과 정치가들 사이에 섭정 자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디포네고로는 이복동생 다음의 왕위계승자 자리를 약속 받은 바 있지만 그런 식의 왕위계승은 이슬람 율법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폴레옹 전란이 끝난 후 동인도로 돌아온 네덜란드가 자바의 왕가를 쉽게 쥐고 흔들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의 평판은 그후 점점 더 나빠져갔는데 농부들 중에서는 세금인상과 작황의 악화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는 네덜란드 식민당국이 그들이 토지임대권을 빼앗아 갔다는 이유가 컸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쁘라렘방 자야바야 예언서에서 도래할 것임을 예견한 공의의 여왕 라뚜 아딜(Ratu Adil) 이라고 믿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족이지만 훗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맞았을 때 네덜란드 베스털링이란 영악한 특수부대 대위 출신이 자신이 라뚜 아딜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며 수까르노의 신생정부를 상대로 APRA(Angkatan Perang Ratu Adil – 공의로운 여신의 군대)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자야바야 예언서는 세상이 혼란할 때에 공의의 여신이 강림해 세상을 평정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1822년 머라피 화산이 폭발하고 1824년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자바섬엔 더욱 큰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고 디포네고로는 더욱 큰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봉기가 임박해 그 소문이 파다했음에도 네덜란드 관리들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술탄 아겅 띠르타야사(Sultan Ageng Tirtayasa)의 무덤에서 보았다는 환상에서부터 디포네고로 왕자가 니롤로키둘 여신과 만났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예언과 이야기가 세간에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니롤로키둘은 15세기에 중부자바에서 일어난 마따람 술탄왕국의 시조 스노빠티와 영적 결혼을 한 자바 남쪽바다의 여신으로 역대 마따람 제왕들의 아내였다고 믿어지고 있었는데 민중들은 디포네고로 왕자야말로 마타람 술탄왕국의 적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터지자 네덜란드군은 심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일관성 있는 전략도 없었고 디포네고로 왕자의 게릴라전에 응할 결기도 없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매복 공격이 줄을 이었고 네덜란드 군에게 공급되는 식량의 병참로가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네덜란드는 봉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고 드콕(De Kock) 장군을 파견했습니다.

 


헨드릭스 머르쿠스 바론 드콕 장국 (Hendrik Merkus Baron de_Kock)



드콕 장군은 요새를 강화하고 병력의 기동성을 높이는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그리하여 강력하게 증강된 병력과 강화된 방어력을 토대로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여 공격을 막아내자 마침내 디포네고로 군대의 움직임을 제한 할 수 있었고 예봉이 꺾인 디포네고로 군은 수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웅아란(Ungaran)에서, 그리고 나서는 스마랑의 지방총독 궁에서 패전한 디포네고로군은 바타비아로 철수해 들어가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지휘관들이 희생되거나 낙오되고 말았습니다.

 

1830년 심각한 타격을 입은 디포네고로군은 네덜란드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디포네고로는 술탄이 지배하는 자유국가를 만들어 자신이 이슬람 지도자인 칼리파(Caliph)가 되어 자바를 통치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18303월 그는 휴전깃발 아래 협상테이블로 초청되었지만 네덜란드의 배신으로 328일 마글랑의 휴전협상장에서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통해서라도 꼭 제압해야 할 만큼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드높았고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협상하러 나온 상대편 대장을 사로잡은 파렴치한 행동에 동인도 인민들에게는 물론 군과 정부 등 안팎의 비난을 받게 된 드콕은 자바의 귀족들 여러 명을 통해 디포네고로가 요구사항들을 축소시키지 않으면 다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이미 수차례 경고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건 비난을 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 뿐이었죠. 하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후 다시는 자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디포네고로의 체포상황에 대해 디포네고르 측과 네덜란드 측이 바라보는 시각은 판이하게 다른 것은 자바의 미술가 라덴 살레와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피에너만(Nicolaas Nieneman)가 디포네고로 체포 장면을 각각 다르게 그린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디포네고로는 네덜란드가 휴전깃발을 내세우며 계획적으로 배신한 것이라 했고 네덜란드 측은 디포네고로가 자진해 항복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서도 라덴살레는 디포네고로를 용맹스러운 희생자로, 후자는 그가 굴종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라덴살레가 그린 디포네고로 왕자의 체포


니콜라스 피어네만이 그린 디포네고로의 항복

 

 

체포된 그는 스마랑으로 압송되었다가 바타비아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오늘날 파타힐라 박물관이 되어 있는 건물의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바타비아 구시가지의 파타힐라 박물관에 가보면 열악하기 그지없고 비만 오면 침수되는 지하감옥을 견학할 수 있습니다. 그는 1830년 술라웨시 마나도로 유배되어 몇 년을 보낸 후 다시 1833 7 마카사르로 옮겨져 포트 로테르담 요세에 감금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유배상태에선 그를 구출하러 올지도 모를 민중군에게 압도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감옥조차도 그를 가두기 충분치 못하다고 네덜란드 측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갇힌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동인도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의 부인 라트나닝시를 비롯한 몇몇 추종자들은 그의 유배지까지 동행했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수감 중에도 많은 유명인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들 중에는 1837년 당시 16세였던 네덜란드 헨리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는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도 자바의 역사에 대해 원고를 썼고 그의 자서전 바밧 디포네고로(Babad Diponegoro)라는 자서전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 각색되어 민중들의 연극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건강을 해친 그는 185518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을 깜뿡 멀라유에 묻어 달라 했는데 그곳은 중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사는 곳 근처였습니다. 점령자 네덜란드와 그 하수인들이었던 화교들을 자신이 죽은 후에도 끝내 저주하겠다는 마음이었을까요? 어쨌든 네덜란드는 그의 유언에 따라 1.5 헥타르의 땅을 내주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물론 태반은 힘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오늘날 550 sqm로 크게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내와 추종자들도 모두 같은 묘역에 안장되었고 오늘날에도 순례자들과 군 장교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그의 묘지를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며 정기를 받아가고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 당시에도 자바인들은 군사적 저항은 디포네고로의 정신을 따랐고 초기 인도네시아 이슬람정당이었던 마슈미당은 디포네고로를 인도네시아 국가적 저항사의 지하드 운동가이자 국가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디포네고로가 속한 하멩꾸부워노 왕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족자의 술탄이 족자 특별시의 현직 주지사가 되어 있습니다 .1969년에는 군의 후원을 받아 디포네고로의 궁이 있었다고 믿어지는 족자 외곽의 뜨갈레죠(Tegalrejo)에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그 궁에 대한 기사는 대체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1973년 중부 자바 출신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국가 영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4지방군 사령부 디포네고로 부대는 중부 자바를 방위하는 인도네시아 정규군 부대로 디포네고로의 이름을 땄고 인도네시아 해군도 그의 이름을 딴 군함을 두 대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한대는 KRI Diponegoro로 네덜란드로부터 사들인 시그마급 코르벳함입니다. 스마랑에는 디포네고로 대학이 있고 인도네시아 각 도시의 주요 도로가 그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결탁한 술탄들과 영주들이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던 시절, 디포네고로 왕자와 같이 자신의 지위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며 네덜란드에 저항한 왕족들이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018.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