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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하다하다 별걸 다] 창세기 강해-3

beautician 2017. 2. 28. 10:00

 

 

역사와 신화 사이

 

창세기의 초반부가 과연 유태인들의 고대역사냐 아니면 인근 수메르나 바벨로니아 등 인근지역의 설화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신화냐 하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음직한 해묵은 논란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서조차 익명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신화라는 쪽에 몰래 한 표를 던질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적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요?

 

그러나 아브람(아브라함의 본명)이 전면에 등장하는 창세기 12장 이전, 즉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로부터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까지는 신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중에서 창세기 5장 아담의 족보와 창세기 11장 셈의 족보 부분을 뺀다면 이 창세기의 전반부는 천지창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 카인의 살인, 노아의 대홍수, 바벨탑 사건의 다섯 가지 이야기가 연결되고 있어요. 노아의 장남 셈의 가계를 기록하는 그 마지막 부분에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 아브람이 등장하면서 성서는 비로소 역사시대로 들어섭니다. 그와 함께 모든 묘사들도 획기적으로 구체화되지요.

 

신앙이란 개별 편차가 심한 잣대를 버리고 객관적 이성으로 성서의 신빙성을 검증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창세기 11장까지의 얘기들은 좀처럼 100%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며 동시에 검증하기도 어려운 것들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발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몇몇 매체를 통해 알려진 바 있지만 실제로 에덴동산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해 내거나 이브를 유혹했던 뱀을 기어이 찾아 내어 인터뷰 해 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신앙심 깊은 목사님이나 바티칸의 교황성하조차도 그런 일은 기대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서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측면에서 우선 창조과학회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이란 성서와 충돌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서와 조화하며 궁극적으로는 성서의 모든 내용들이 진정한 사실임을, 그래서 야훼 하나님이 정말로 계심을 입증해 줄 성스러운 도구라는 것이 창조과학회의 기본적인 생각인 듯 합니다. 창조과학회의 창조론은 다아윈의 진화론과 오늘도 정면대결을 벌이고 있지요. 그들은 수많은 초청강연회를 해왔고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 교회에서 진화론을 질타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종의 내부적 진화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지만 어떤 한 종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다른 종으로 변화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속의 플랑크톤이 진화해 물고기가 되고 그 물고기가 뭍으로 기어 올라 육상 동물로 진화했다면 돌고래가 젖소로 진화하면서 그 중간 단계, 말하자면 인어꼬리를 가진 젖소 단계, 아니면 물고기 머리에 젖소 몸통을 가진 단계를 거쳐야 할 텐데 그 중간 단계 상태의 동물 화석은 아직까지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된 전례가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그런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노력과 지금까지 성취한 업적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www.kacr.or.kr)에 들어가 특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이슈들, 예컨데 노아의 대홍수 부분에 들어가 읽어 보면 조금 짜증이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 논리가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창조과학회는 노아의 홍수의 이유와 목적, 그 기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증거로서 성경적, 지질지형학적, 화석학적, 연구통계학적, 증거들을 들이 밀고 있습니다. 또한 파생되는 질문들, 예컨데 노아 홍수 때 식물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바닷물과 뒤섞여 버린 홍수의 대격랑 속에서 민물고기들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홍수 후에 자라난 식물들의 꽃가루를 옮길 곤충들은 어디서 출현한 것인지, 홍수 후 캥거루가 어떻게 호주대륙까지 건너 갔는지 등등 온갖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요.

 

짜증스러운 부분은 그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질문에 대한 과학적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저변을 이루는 마음가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닙니다. 성경말씀이 100% 사실인 이상 성경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백일하에 과학적으로 분명히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 놀라운 믿음이 때로는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은 왜일까요? 창조과학회의 게재물을 읽어 보다 보면 철책선에서 자신의 초소만큼은 절대로 적에게 뚫리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암구호의 대답이 신통치 않으면 그게 적 공비든, 야간순찰을 도는 소대장이든, 옆 초소에서 교대를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든 나발이든 무조건 방아쇠를 당기고야 말 초병의 마음같은 것을 읽게 됩니다.

 

우린 매일 밤 밤하늘을 바라 봅니다. 밤하늘에 달이 떠 있고 그 너머에 수많은 별들이 초롱거리지요. 그 너머엔 허블 천체망원경으로 봐야만 보일 수억 광년 너머의 성운들과 블랙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세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장비로도 볼 수 없는 더 먼 곳에도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고 그 너머, 다시 그 너머에 천체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우린 그 우주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끝이 있다면 그 끝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는 걸까요? 하나님이 매일 밤 그런 미스터리의 밤하늘을 우리 눈 앞에 펼쳐 놓은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이 과학적이든 이성적이든, 하다 못해 세상에서 가장 용하다는 무당을 데려다가 온갖 굿을 해 댄다 하더라도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진실을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씩도 아니고 매일 밤 상기시키려는 것일 텐데 모든 결론을 미리 다 내놓고 우린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창조과학회의 태도가 중세시대에 적군은 물론 아군까지 휩쓸어 버리곤 했던 십자군들처럼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은 성서만큼이나 항상 옳습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라는 대답.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위상이 안수집사님이든 장로님이든 목사님이든 심지어 교황성하시든, 창조과학회원 박사님이시든 어떤 신앙적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 한 마디를 하는 순간 하나님은 당장 사망하는 걸까요?  그런데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습니까? 창세기 초반의 얘기들은 100% 우리가 잘 모르는 얘기들이거든요. 창세기 전반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하는 일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제조성분을 알아 내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그래서 말도 안되는 것 같은데 더욱이 상당부분은 상상도 검증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난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나 역시 잘 모른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그렇지만 한번 노력해 보고 필요하다면 조금 억지를 부려 보겠다는 입장을 부전제로 깔아 둡니다.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남긴 모세는 붓을 들면서 작가적 역량을 발휘해 이 고대사의 사건들을 막 지어낸 것일까요? 야훼 하나님의 힘을 입어 지팡이 하나로 출렁이던 홍해를 갈라 수십 리 길을 냈던 그 모세가 후세들에게 픽션을 남겼다고요?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선대의 고대사들이 번개처럼 머리 속에 그려졌던 것일까요?

 

앞서 전제한 바와 같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애써 답안지를 적어 보자면 당시 시대배경과 모세의 성장배경을 미루어 그는 이런 천지창조에서 바벨탑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파라오의 궁전에서 보모로서 그를 키웠던 친어머니나 이집트를 도망쳐 나와 미디안 땅에서 만난 아내와 장인어른이신 제사장 이드로 등에게서 들어 알게 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얘기들은 비단 모세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었겠지요. 어쩌면 사람마다 부락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모세는 자신이 들어 알고 있던 이 창세의 사건들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장까지의 얘기는 실제로 발생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라기보다는 믿고 있던 사실에 대한 기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중 에덴에서의 사건이 전개되는 창세기 2장과 3장으로 들어가 봅니다.

 

창세기 2장의 중점은 인간의 제조법이 다른 동식물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고 그래서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인간이 붙일 정도로 인간의 위상이 남달랐다는 부분,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근간으로 제작되었다는 제조법을 강조하여 남자와 여자는 애당초 급이 다른 존재임을 부각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좀 특이한 것들이 엿보입니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의 발생과 전개를 비교적 부드럽게 조명하고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창세기 2장의 내용은 좀 산만하게 진행된다는 점이에요.

 

천지창조의 와중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 넣으시죠. 이 부분은 나중에 아담에게 네가 죽으리라,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선을 긋습니다.

 

또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해(마치 이 부분은 하나님이 지팡이를 짚고 내려와 매일 산책하시는하나님의 뒷동산처럼 들립니다) 사람을 거기 둡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뜬금없이 에덴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 다음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 경계의 말씀 직후에 하나님은 아담의 배필을 계획합니다. 선악과와 아담의 배필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부분을 암시를 위해 일부러 앞당겨 썼다고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아담의 배필을 계획한 하나님이 곧장 이브를 창조하지 않고 뜬금없이 각종 짐승들을 지어 아담에게 데려와 이름을 짓게 하기 때문이죠. 선악과에 대한 경고 후 아담의 배필을 지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기록된 후 뜬금없이 하나님은 만들고 아담은 이름을 짓는 하나님과 아담의 팀웍이 강조됩니다. 이 짧은 단락이 참 많은 얘기를 담고 있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야 한 문장 건너 뛴 후 하나님은 잠든 아담의 갈비뼈를 한 개 꺼내 그것으로 이브를 만듭니다. 말씀으로, 또는 흙으로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여자만은 왜 아담의 갈비뼈를 주소재로 사용하셨던 것일까요? 그 기록으로 인해 이후 수천 년 동안, 심지어 이슬람 일부 지역에서는 오늘까지도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학대 받고 천대받으리라는 것을 하나님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압권을 그 다음입니다. 아담은 이브를 보고 첫눈에 반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닭살 돋는 표현을 너무나 꺼리낌없이 얘기해 버리죠. 그 바로 다음 문장에 뜬금없이 하나님의 주례사가 등장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코미디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브를 만들어 주면서 그때 아담을 이미 떠나 보내신 것일까요?

 

창세기의 이 부분은 어쩌면 이집트 노예생활 당시 유태인들의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랍비가 인용하던 고사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내는 남자의 갈비뼈이니 남자에게 복종하고 여자는 쉽게 속아 선악과를 따먹은 족속이니 남편은 한시도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아내를 감시하며 다스리거라…. 이런 식으로 말이죠. 모세는 창세기 2장을 기록하면서 불현듯 자신이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던 당시 랍비의 주례사를 기억해 냈던 것일까요? 아무튼 모세를 감화한 성령님은 이 부분에서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모세는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3장에서 벌어지게 되는 선악과의 사건 전개를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포르노가 인터넷 컨텐츠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요즘엔 벌거벗은 여성 모습에 면역이 생길 정도이지만 모세 시대 유태인의 정서로서는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천벌을 받을 일이라 생각했을 듯 합니다. 실례로 노아의 대홍수에 대한 기록 마지막 부분에 노아의 아들 함은 아버지가 술 취해 벌거벗고 잠자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그 후손들이 처절한 저주를 받게 되지요.

 

이렇게 숨가쁘게 전개되는 창세기 2장은 일견 실제로는 여러 장이 되었어야 여러 개의 서로 다른 고사들이 짧은 기록 속에 축약되어 섞여 있는 듯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얘기하는 요점은 가장 처음 창조된 인간조차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다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뱀의 유혹에서 시작되었고 그 적극적 공범이 갈비뼈 여인 이브였다는 점과 함께 말이죠. 보는 관점에 따라 2장에서 시작된 여자를 남자보다 하위에 두는 유태인들의 남성중심적 역사관은 3장에서 그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 어디 갈비뼈?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이상한 생각을 중얼거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그런 후 아담과 이브(하와)를 에덴에서 축출하시지요.

사실 선악과 사건에 대한 재판과 그 판결이 그 바로 직전 나버린 상태인데 말이죠. 이 대목은 마치 아담과 이브의 에덴 퇴출이 그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나무에까지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하나님의 불안과 우려 때문인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고약하고 괴팍한 늙은이 같지요.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담이 돌아올 것을 우려해 이중 잠금장치를 에덴의 길목에 설치합니다. 천사 케루빔과 회전하는 화염검을 말이죠.

 

하나님의 이 생각은 창세기 3장의 대반전이기도 합니다.

망극한 일이지만 창세기 3장의 사건을 좀 더 풀어 써 보자면 뱀이 이브를 꼬시면서 이렇게 말하죠.

 

선악과를 먹는다고 너희가 절대 죽을 리 없어. 하나님이 뻥치신 거야.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할 능력을 가지게 되는 거라구. 하나님도 그걸 아시니까 너희가 먹지 못하도록 먹으면 죽는다고 겁을 주신 거야. 몰랐어? 아이구, 이 화상, 하나님은 너희가 똑똑해지길 원하지 않는 거야. 죽긴 개뿔  말 돼지? 그지? 너희들이 만약 선악과 먹고 죽는다면 내 꼬리에 장을 지진다.”

 

여기서 이브는 정말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답게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갑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선악과가 더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낼름 따먹고 맙니다. 그녀가 무슨 말로 남편을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결국 아담도 이브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받아 먹지요. 그랬더니 벌어진 일이 무엇인가요?

 

선악과가 서서히 소화되면서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벗고 있는 이브의 몸을 보면서 아담은 평생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느낌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건 이브도 마찬가지였고요. 바라보는 것만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서 제대로 남편을 쳐다 볼 수 없었던 거에요. 남녀가 서로 벗고서 가까이 있으면 이렇게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 말고도 뭔가 다른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거에요. 그 동안 한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어떤 행위를 말이죠.

 

그제야 비로서 모든 것의 앞뒤가 맞기 시작했습니다. 에덴의 경계에서 마주치는 경계 바깥의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모두 짐승가죽으로 옷을 지어 몸을 가리고 있는지, 에덴 서쪽 들판의 들개들이 왜 허구헌날 엉덩이를 맞대고 끙끙대며 붙어 있었던 것인지, 저 밑 강가 하마가족 새끼들이 왜 계속 늘어가고 있는지 등등을 말이죠. 시선이 배 밑으로 향하면서 두 사람은 이상해지는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급기야 아담과 이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 서둘러 나뭇잎을 역어 치마를 만들어 입는데 그걸 보고 있던 뱀은 너무 재미있어 깔깔 웃으며 좋아 죽습니다.

 

이게 눈이 밝아지는 거냐? 너 잡히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걸 믿었냐? 아무튼 안 죽었잖아?”

 

아담과 뱀이 쫓고 쫓기는 난장판을 벌일 무렵 바람과 함께 강림하신 하나님이 황급히 몸을 숨기던 아담과 이브, 뱀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했던, 그래서 별다른 의미도 두지 않았던 그 일에 하나님은 불같이 화를 내지요.

 

뱀의 말에 속아, 아내의 말에 넘어가, 내가 너에게 그토록 분명히 말했던 경고를 잊었단 말이냐?”

 

그리고는 과중하다 할 만한 벌을 내리시죠. 하나님은 떠나시고 뱀은 이미 어디론가 도망가 흔적도 없는데 땅에 주저앉은 아담과 이브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깨닫습니다. 비록 나무열매 한 조각을 받아 먹은 것뿐이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 되었고 그 결과가 그토록 참담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뱀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어. 하나님의 말을 버리고 뱀을 믿다니…,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질 거라는 거짓말에 속아서…, 결국 저 아래 동네 사람들이랑 똑같은 이런 거치적거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걸 깨달을 뿐인 것을…., 고작 그걸 알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주셨던 모든 축복을 걷어차 버린 셈이 되었다….”

 

아담과 이브는 그런 자괴감에 시달렸겠지요. 그리고는 그 날부터 아담은 힘겹게 땅을 갈아야만 했고 그들은 동침하기 시작하지만 그렇게 해서 임신한 아이를 낳으려면 이브는 엄청난 산고에 시달려야 했고 새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에덴에는 고통에 찬 이브의 비명소리가 메아리 쳐 울렸습니다….. 창세기 3장은 사실 이렇게 끝나야 했던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아담과 이브의 거역에 대한 판결문을 낭독한 하나님이 여전히 찜찜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사족처럼 붙습니다.

 

완전히 허를 찔렸어. , 고것이 우리 심중을 꿰뚫고 있었던 거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담과 그 아내는 아직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결국 이 일로 사람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고 말았다…, 저 놈들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하게 되면 앞으로 이 세상은 우리가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서스펜스 드릴러인가요?

뱀이 속인 게 아니란 말인지요. 뱀의 사기극으로 결말이 나면서 끝나는 듯 하던 창세기 3장은 이런 하나님의 독백으로 그 판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렇게 뱀에게 선제공격을 한 방 먹은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참혹한 심경이 되어 있을 아담과 이브를 추방하시고 케루빔과 화염검으로 에덴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모습이 창세기 3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지요.

 

생명나무를 지키는 화염검은 불현듯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서 황금사과를 지키던 용 라돈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일이지요?

성서 전체에서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 하나님의 모습은 오직 창세기 초반부에서만, 그것도 모세가기록한 고대의 이 다섯 가지 에피소드에서만 발견됩니다. 광대무변, 무소부재, 전지전능인데 말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노아의 홍수 직전 하나님이 후회와 한탄까지 하십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맘 먹은 대로 안되었다는 얘기죠. 창조주 하나님이 말입니다.

사족이지만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창세기 1~3장에서 등장하던 하나님 스스로의 호칭이 우리에서 로 바뀌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바벨탑을 건설하는 사람들을 보신 하나님의 걱정 근심하는 모습이 또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개미 같은 인간들이 좀 모여 겨우 탑 하나 쌓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이런 걱정을 합니다. 천지창조의 주관자이고 바로 직전엔 대홍수로 전세계를 쓸어 버리기도 했던 전능의 하나님이 말입니다.

 

좀 과한 얘기가 되겠지만 창세기 초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왠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듯 보입니다. 후회하고 걱정 근심하고 그래서 만의 하나를 대비해 에덴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그것도 안돼 나중엔 대홍수로 싸그리 쓸어버리고 그럼에도 인간정화에 실패해 이번엔 바벨탑에서 수많은 언어들을 파생시키고 뭘 해도 되는 게 없는….,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앞서 던진 질문으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남긴 모세는 작가적 역량을 발휘해 이 고대사의 사건들을 막 지어낸 것일까요? 아니면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전혀 모르고 있던 선대의 고대사들이 번개처럼 머리 속에 그려졌던 것일까요?

 

이 대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 기록을 남기던 모세의 입장에 서 봐야 할 것이고 그가 보여 주려, 읽어 주려 했던 엑소더스 당시의 유태인들의 입장에도 한 번 서 봐야 하겠죠.

 

모세가 이 기록을 남기던 시기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후로부터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눈을 감기 전까지의 사이 어느 시점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끌었던 유태인들은 수십만 내지 수백만명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러한 대규모의 민족이동은 그때까지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개의 나라가 통째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고 주변국가와 부족들이 그 위세에 위협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대규모 전쟁을 통해 그 땅을 빼앗기 전까지 광야에서 40년을 이동하면서 아말렉, 블레셋 같은 주변 민족들과 끝없는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비록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를 거의 괴멸상태, 패닉상태로 몰고갔던 하나님의 열 가지 이적을 목도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지만 그들이 노예생활을 하며 지냈던 이집트에서의 나날은 너무나 길었고 민족적 자긍심, 민족관, 유태인으로서의 종교관은 와해될 데로 와해되어 이집트의 종교와 문화에 충돌하면서 많은 변질을 일으켰을 것이고 당시의 유태인들은 그렇게 변질된 종교관과 민족관을 가진 채 광야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를 못참고 산 아래에서는 친형 아론까지 참여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온갖 우상을 만들어 절하며 난장판을 죽였던 것이죠. 바로 그 순간 시내산의 정상에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영광이 구름처럼 내려 앉아 있었고 이집트를 떠나던 날부터 가나안 땅에 첫발을 딛던 날까지 줄곧 그들을 호위하듯 안내하던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이 그들 눈 앞에 서있었는데도 말이죠.  방금 전까지도 숨이 막힐 듯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조아리고 있다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 광경에 눈이 뒤집힌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계명이 새겨진 석판이 깨지도록 힘껏 내팽개친 것까지도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의 이적이 매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금새 타락해 버리는 이 민족을 데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땅마저 타락시키고 마는 짓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이 민족이 먼저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된다아마도, 그것이 그가 붓을 들어 창세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광야에 나와 있던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고대의 얘기들로 창세기의 첫 부분을 적기 시작합니다.

 

그는 막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았지요. 이제 유태인들은 누구나 그 계명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약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도 말해야만 했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그들 앞에 들이밀며 강조하여 보여주었겠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리라. 에덴에서, 광야를 걷던 유태인 족속으로부터 쫒겨나리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라고요.

 

그는 함의 족보를 부각시키면서 지금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주변 족속들에 대한 적개심을 촉발시켰습니다. 너희를 둘러싼 저 대적들은 모두 하나님께 저주받은 민족들이다. 우리는 셈의 후손이지만 저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함의 자손들이다. 우리를 수백년간의 노예로 묶어 짓밟았던 저 이집트인들도 함의 아들 미스라임의 자손들이요, 그들과 동맹을 맺었던 에티오피아 역시 함의 아들 구스의 자손들이다. 저 가나안 족속들은 어떠하냐?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 아니냐?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될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저 땅의 족속들이 바로 그 가나안의 후손들이니 우리 종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라고요.



흑인들은 함의 자손 - 창세기가 쓰여지던 당시부터 이 기사가 본격적인 성서에 포함되던 바티칸 시기에 이르던 시기에 이미 흑인경시사상이 존재한 증거.

그래서 야벳이 자손을 섬겨야 할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인, 동남아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다. 나쁜 놈들.


 

그는 대홍수로 세상을 멸절시키던 하나님의 마음을 똑같이 가졌을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대는 절대로 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집트에서 타락한 마음과 변질된 신앙을 가지고 나왔던 너희들은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여 모두 멸절시킨 것과 같이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그 생명이 끝날 것이며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이 시대의 노아가 되어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를 이끌고 저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너무나 익숙한 이 고대의 이야기들을 그의 신앙으로, 그의 믿음으로 적어 내려갔던 것이고 그 신앙을 과학으로 입증해 줄 창조과학회도 주변에 없었던 모세로서는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도 충분히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내용과 언어로 기록을 다듬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쉬운 비유로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가르쳤던 것처럼요.

 

그래서 창세기의 첫 부분의 하나님은 이따금 괴상한 성격으로 등장하고 그것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실제 한 측면일 수도 있겠지만 성서의 전반적인 문맥상 모세가 교육적인 측면에서 각색한 모습이라는 데에 나는 한 표를 던집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그 나라, 그 민족의 우월감이 역사에 묻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한창 전쟁의 와중에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임을 기록을 통해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모세는 에덴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여 에덴이 존재했음을 강조했고 구전되어 내려오던 선조들의 나이와 연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역사적 정확성을 기하고 신빙성을 더욱 높이려 했겠죠. 그리고 이번에도 모세를 감화한 성령님은 그의 기록에 아무런 태클도 걸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어쩌면 그 이후에도 성서는 그 첫 장이 쓰여지고 수천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손을 타고 취사선택되며 편집되고 수정되지 않았을까요? 원본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모세의 자필 창세기가 정말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깜짝 놀랄 정도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신화처럼 보이는 이 창세기의 첫 부분이 오늘도 여전히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은 모세의 그런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성서의 그러한 수정과 변형, 내용의 첨삭에까지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 성서를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