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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하다 별걸 다] 창세기 강해-2 본문

일반 칼럼

[하다하다 별걸 다] 창세기 강해-2

beautician 2017. 2. 27. 10:00

 

  

두 인류

 

창세기 5장의 기록에 따르면 장남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세상을 유리하기 시작한 후 아담은 130세에 이르러 또 다시 아들을 얻어 셋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셋은 ‘3’ 이 아니라 ‘Seth’ 입니다.

 

여기서 질문….

아담의 130세라는 나이는 그가 창조된 날로부터일까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날로부터 카운트한 것일까요?

 

정답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성서에는 이에 대한 부연설명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에덴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땅이었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영토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에덴에 있는 동안 아담에게 세월과 나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겠지요. 게다가 그는 성인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입니다. 창조된 날의 성인을 한 살로 간주하는 것만큼이나 에덴에서 보낸 아담의 시간을 인간들의 보편적 나이로 환산하는 것은 매우 무리한 얘기지요. 에덴에서 처참하게 추방당한 후 아담은 비로소 세월을 느끼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덴에서 쫓겨 난 게 벌써 50년 전이야. 이브 당신이 뱀 만나가 며칠 전 내가 거기서 심었던 콩나물이 지금쯤 아름드리 거목이 되어 있겠지…”

 

아담은 이런 회상을 하곤 했겠지요.

그로부터 아담에게도 인간들의 보편적 시간이 작용하기 시작했고 매년 하나 둘 주름살도 늘어가기 시작했겠지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하루를 인간의 24시간이라고 감히 멋대로 정의하지 말자는 얘기를 여기서는 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에덴에서 보냈는지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아담이 100만년쯤 에덴의 청지기이자 수호자로 혼자 사는 동안 급기야 에덴 전체에 홀아비 냄새가 폴폴 풍기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그의 배필로 이브를 만들어 주셨고 그래서 둘이 깨가 쏟아지도록 알콩달콩 또 100만년쯤 함께 살다가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와 뱀과 이브가 선악과 나무 밑에서 조우하게 되었다고 해도 성서에 크게 위배되는 얘기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타락의 사과잔치

 

창세기 1장에서 5장까지의 얘기를 상징적으로만 받아 들여 조금 각색한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이 지상에 내려와 통치를 시작했을 때 호랑이와 곰이 나타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요? 그래서 환인은 두 짐승을 동굴 속에서 마늘만 먹으면서 오랜 세월을 고행하도록 했고 인내심이 바닥난 호랑이는 포기하고 돌아가 버리지만 곰은 고행을 완성하여 인간 여인으로 화합니다. 환인과 결혼해 환웅을 낳지요.

 

이 설화의 내용을 당시 부족간의 갈등과 경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호랑이로 상징되는 부족과 곰으로 상징되는 부족이 충돌하여 결국 곰 부족이 호랑이 부족을 몰아내고 그 지역 일대를 장악해 세력을 확장해 갔다는 해석이지요. 예전 송일국이 주연을 맡았던 주몽이라는 드라마도 그런 비슷한 해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을 그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해석법을 창세기에 들이밀자면 아담족이 살던 지역에 이브족이 들어와 동맹을 맺고 평화를 유지하지만 뱀부족의 술책에 말려 대대적인 전쟁 끝에 둘 다 원래의 영토를 잃고 외곽지역으로 밀려 났다는 식으로 얘기가 전개됩니다. 그들은 나중에 카인 부족과 아벨 부족으로 나뉘어 권력다툼을 하다가 카인 부족이 아벨 부족을 와해시키지만 어렵게 장악한 그 지역에 천재지변이 찾아 오고 카인 부족이 포기하고 떠난 그 땅에 셋 부족이 찾아와 정착하게 되는….대하 서사 드리마 한 편이 완성되고 동시에 오버의 극치, 오바질의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보편적 교리에 입각해 좀 더 성서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해지자면 창세기 1장은 뒤의 2, 3, 4장의 내용과 여기저기서 자꾸 어긋나며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서두의 셋이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아담이 130세가 되기 전 어느 시점에서 그는 카인과 아벨 두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장성한 어느 날 들녘에서 카인이 아벨을 무참히 살해합니다. 그러자 현신한 하나님이 카인을 질책하지요.



아벨에 대한 카인의 시기

 

카인아. 좋게 말할 때 대답해라. 네 동생 아벨…., 어디 있느냐?”

하나님, 난 농부지 동생이나 돌보는 보모가 아니랍니다.”

네가 동생 죽인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넌 이제 동생의 핏값을 치러야 한다. 네 동생의 흘린 피가 스며 든 이 땅은 이제 네가 아무리 밭을 갈아도 더 이상 아무런 소출은 내 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너는 도망자가 되어 이 땅을 떠나 유랑하게 될 것이야. 그게 네가 받을 벌이다.”

하나님…., 역시 아셨군요…, 제가 정말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 벌은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무거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쫓아 내시면 다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볼 수도 없는 놈이 되어 유랑하게 될 텐데 사람들은 유랑자를 절대 가만 두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분명히 절 죽이려 할 거라고요. 동생을 죽이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하나님께 가소로운 일이겠지만 정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발 벌을 감해 주세요.”

 

뭐라구? 다른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냐? 네가 달랑 너희 아버지랑 엄마만 창조했는데도대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다는 얘기냐? 현재 스코어 이 지구상의 인류는 달랑 너희 네 명뿐이야. 아벨이 죽었으니 이젠 세 명 뿐이라구! 너 뭐냐? 너도 심신미약이냐?”

 

하나님의 반응이 이랬다면 인류 최초의 코미디 한 판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너를 죽이는 자는 칠족을 멸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증표를 만들어 줄 테니 감히 너에게 손 대려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야.”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카인도, 아담 가족 외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아담도 이브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요.

 

이게 어린 시절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머리에 쥐나도록 혼란스럽게 하던 장면이었습니다. 천지창조의 엿새째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 그 남자가 아담, 그 여자가 갈비뼈 여인 이브였다고 배워 왔는데 말이죠. 그런데 에덴의 바깥 세상에 살고 있던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다윈의 진화론이 정말로 진실이어서 아담이 에덴에서 사는 동안 원숭이들이 그 사이 진화를 거듭해 마침내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일까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한다면 이 사건을 기록한 모세나 그를 감화한 성령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입니다. 신이 천사들에게 해주는 선문답 같은 얘기도 아니고 이해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를 그렇게 앞뒤도 맞지 않게 해주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도 안되는 설화집이라면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 같은 뜬금없고 앞뒤 안맞는 얘기가 나오더라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수 있겠죠. 그러나 현존 인류를 지배하는 중요한 사상,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의 공식적인 경전, 그래서 수억명이 오늘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고 읽고 있는 성서가 자가당착적 내용, 뭔가 억지로 짜맞추는 듯한 전개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었고 당시 오직 아담과 이브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류였다는 고전적 교리를 이 카인의 이야기에 갖다 데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이성적인 결론의 폭은 매우 좁아집니다. 성서의 저자들을 감화한 성령은 말도 안되는 얘기를 지어내는 이상한 영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사실은 성령의 감화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그리고 사실 모세는 이런 짧은 이야기조차 앞뒤를 맞추지 못하는 작가적 역량이 한참 떨어지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죠.

 

이 대목에서 목사님들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핵심을 그런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건 우리의 신앙상 별로 중요하지도 않거니와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적 구원에 있는 것이고 상징으로 가득 찬 성서의 내용은 일견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어도 성령님이 임하시면 모든 것이 자연히 이해된다고요. 언제는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말했던 입에 침도 마르지 않았는데 말이죠. 아무튼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수십번 읽어 보면 앞서 언급한 충돌과 어긋남에서 살짝살짝 엿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뜬금없는 부분도 좀 있다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 23-24절에서 카인의 5대손인 라멕이 아내들과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상처를 입어 소년을 죽였다. 그래서 어쩔 건데? 우리 조상 카인을 죽이는 자는 칠족을 멸한다고 했지만 날 죽이는 자는 그 열 한 배의 벌을 받고야 말 것이다!!”

 

이 대책 없는 인간이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자기 아내들과 아이들에게 이렇게 엄포를 놓았는지는, 그가 죽인 소년이 도대체 누구이며, 라멕이 입은 상처와 소년을 죽인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성서에 기술된 내용만 봐서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구전되어 내려오는 과정에서 혹은 모세의 기록을 관리하고 필사하는 과정에서 기록의 일부가 유실되거나 변형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성경은 앞뒤에 아무런 부연설명도 해주지 않고 있으니까요. 말하는 싸가지가 좀 독하다는 것과 77배로 보복할 만한 충분히 악독한 성깔과 그에 상응하는 세력이나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라는 게 이 구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전부이지요.

 

그러나 모세가 이 기록을 남기던 당시 유대인들의 지식배경이 지금의 우리와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모세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해 아담과 이브의 탄생, 그들에 대한 뱀의 유혹과 타락, 에덴에서의 추방, 카인의 살인,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바벨탑 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구전되어 내려오던 민족의 고대사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진 실제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기록으로 정리했던 것이고 당시 모세와 동시대를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그 고대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겠지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기나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거치면서 비록 지금은 노예로 전락해 있지만 그들의 직계조상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조상이었고 언제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자긍심이자 그들의 힘든 나날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밤 돼지우리같은 노예들의 숙소에서 할아버지가 들킬 새라 작은 목소리로 젊은이들에게 소근소근 에덴동산의 얘기와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사건들을 옛날 얘기처럼 해주었고 가나안을 향해 시나이 반도의 광야를 걷던 시절에도 유태인들은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둘러 앉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 얘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었던 것이죠.

 

위에 언급했던 라멕의 엄포 역시 우리로서는 앞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유태인들은 누구나 다 그에 대한 고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왜 그가 그런 말을 했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모세가 기록한 저 내용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의 얘기 역시 당시 유태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었을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카인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이스라엘 고대사에 대한 기본지식이라는 면에서 오늘날의 우리와 모세 시대 당시 유대인들의 수준은 천양지차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2 3절까지의 천지창조사건과 2장 나머지의 인간창조사건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과 바벨탑의 사건이 서로 다른 얘기인 것처럼요. 왜 성경의 첫 장을 그렇게 나누어 놓았는지는 그렇게 나누어 놓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지요. 모세가 그렇게 매 단락에 번호를 붙여 나누어 놓은 것이 아님은 분명할진대 중세의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채프터를 나눈 작업 마저 성령의 감화였다고 한다면 역시 할 말은 없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두 이야기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기록인지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겠지만 창세기가 유태인들의 말이 되는 역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천지창조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두 종류의 인간을 창조하신 모양입니다.

 

6일에 창조되어 세상 모든 동물들을 지배하는 지위를 얻는 사람, 한 쌍의 남녀가 그 한 종류이고 들에 초목이 없던 시절 흙으로부터 지어져 에덴동산에 이끌려 간 아담이 그 또 다른 종류의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두 번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단 내가 처음이 아니지만 대부분 그 창조의 시점과 순서에서 이런 이론을 도출해 냅니다. 모세는 바로 앞의 1장에서 창조의 순서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모세는 2장의 인간창조를 기술하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들에 초목이 없고 밭에 채소가 없던 시점에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그 흙인형이 사람이 되어 숨쉬고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는 전지창조 셋째날에 초목이 우거지기 시작했다고 하며 하필이면 채소도 그날 창조된 목록에 특별히 언급됩니다. 이 채소가 문젭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채소가 나기 전에 창조된 것이고 그럼 제 6일이 아니라 계산상, 순서상, 3일에 창조되었다고 보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모세는 독자들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써내려 갑니다.

 

모든 동물들이 어떻게 각각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 하나님이 짐승들을 창조해서 아담 앞에 데려 와 아담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본 거야. 그래서 아담이 그 놈들을 부르는 말이 그 짐승들의 호칭이 된 것이지.”

 

1장에서는 이 땅의 모든 동물들이 천지창조 엿새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입니다.만물의 영장, 인간이 창조되기 직전에 말이죠. 그러니 계산상, 순서상 창세기 1장 천지창조 마지막날에 창조된 인간들과 창세기 2, 3일에 창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담이 동일인물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죠.

 

이건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영적 기록물인 성서에 지나치게 인간의 이성적 계산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 이 기록을 남긴 모세나, 이 기록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 들였던 당시의 유태인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강신굿을 하지 않고서야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 와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출애굽 이후 수천년이 지나면서, 그리고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공인되어 교황청이 출범한 이후 중구난방된 수많은 아전인수격 교리가 난발되고 결과적으로 객관적 사실과 종교적 이해에 분명한 괴리가 생기고 만 오늘날 이 부분은 영영 미스터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엑스파일을 열어 보는 것조차 종교적 타부가 되어 버렸고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리가 우선이 되는 세상에서 이단으로 몰리는 것은 5공 시절 재야인사들 빨갱이로 몰리는 것만큼 쉬워지고 말았습니다.



성서

 

그래도 또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창조의 순간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를 평면이라고 상상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은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지구상에 생명들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 생명들이 출현은 창조의 순간 중동과 소아시아 반도에만 생겨난 것이 아니고 지구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겠지요. 오직 중동에만 동식물들이 번성하고 지구의 나머지 지역은 화성처럼 황량하기만 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식물들이 이동해 퍼져 나갔다고 한다면 야훼 하나님의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기도 하거니와 불신자들이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유태인의 민족신, 중동 한 지역의 지방신으로 격하시키는 생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동시에 초목이 우거졌고 호랑이, 사자, 기린, 아나콘다 같은 동물들이 아프리카와 아마존의 정글에서 동시에 출현했을 것이고 생명은 전 세계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순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는 버펄로 들소들이 떼를 지어 질주했을 것이고 바다 속에는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거대한 띠를 이루며 이동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오직 사람만은 남자 여자 달랑 한 쌍 만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한 쌍이 나은 자녀들이 서로 근친상간하여 오늘날 지구상의 수십억 인구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인류의 시작은 근친상간이었다? 성경은 그런 근친상간을 합리화시키는 경전일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하나님은 천지에 동식물들을 부지기수로 창조하신 것처럼 지구상이 전역에 부지기수의 남녀를 창조하였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6일에 창조된 사람들이고 살인을 저지른 카인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이자 창세기 7장에 기록된 것처럼 땅에 번성하여 아름다운 딸들을 낳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누구인가요?

성경대로라면 그는 제 3일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이었고 하나님이 지정한 에덴의 관리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경계하신 것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덴이라는 곳을 동산이라 지칭하여 어떤 한정된 작은 지역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광대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 그곳에는 선악과의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고 그 외에도 지상에 번성하고 있는 인간들로부터 특별히 관리자를 두어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신성한 것들로 가득찬 그런 곳이었지요.

 

그 때의 상황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만 또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시대로 들어가 봅니다.

 

궁창 위의 물은 대기권을 따라 돌며 막을 이루어 넘실거렸고 그 물을 투과한 태양빛은 지구를 따뜻하고 높은 습도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 수증기가 다시 궁창의 물과 합류하고 또 한편으로는 궁창의 물이 수킬로미터 상공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며 굉음과 함께 엄청난 물안개를 일으키는 경이로운 폭포들도 있었겠지요. 궁창 위의 물이 온실효과를 주던 당시의 지구는 평화로운 조화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미이-슙니까?

 

에덴의 경계를 가까이 하고 있는 인근 부락들에는 벌거벗은 성자에 대한 얘기가 전설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에덴의 경계를 넘으려 하면 어디선가 틀림없이 나타나던 그 남자는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지만 그가 저지하는 경계를 사람들은 감히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칡흙 같은 밤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고 산길에 낙상하여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감쪽같이 치료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법이 없었지만 때로는 곰을 타고 나타나기도 했고 때로는 거대한 뱀의 등을 타고 나타나기도 해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절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그는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올랐던 산등성에서 만났던 그 남자는 이제 나이 먹어 손자의 손을 잡고 갔을 때에도 전혀 나이를 먹지 않은 모습이었고 그런 똑 같은 얘기가 그의 조상들로부터도 전해 내려오고 있었죠.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는 이런 거였습니다.

그가 처음 나타난 것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선대의 조상들도 그에 대한 얘기를 남겼다고 하지요. 오랜 옛날 그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었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쓰는 이 말도 사실은 그가 가르쳐 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밭은 가는 법, 농사를 짓는 법, 가축을 치는 법을 알려 주었어요. 술을 만드는 법, 병을 고치고 상처를 낫게 하는 것도 그가 가르쳐 주었고요. 지금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 에덴의 경계로 가곤 합니다. 에덴이 경계에서 천막을 치고 며칠을 기다리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타나 모든 궁금증을 풀어 주고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책을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이거나 사람과 신을 연결해 주는 가장 높은 제사장일 거라고요.

 

그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이 찾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곤 했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수십, 수백 세대가 흐르는 동안 면면히 후세들에게 전해 내려갔고 사람들은 그 후에도 에덴의 경계에서 그를 종종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가 벌거벗은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얘기도 들려오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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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 아니었을까요?

아담은 에덴을 지키면서 경계 밖의 사람들과도 어떤 교류를 했던 것이고 그랬기에 성서는 그가 에덴 바깥의 인간들과는 달리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이브에 대한 기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 배필을 주어야겠다고 했을까요? 6일에 창조한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로 지었으나 아담은 달랑 그 한 명만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반쪽만 지은 것은 반드시 어떤 의미나 이유가 있었겠지요. 아무튼 에덴 밖의 사람들은 남녀가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는데 에덴에서 홀로 독거하는 아담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한편 이브도 에덴 바깥의 여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아담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이 뼈라고 부를 만큼 아담의 사랑을 받았지만 에덴에 있는 한 절대 임신을 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첫 번 째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브가 첫 번 째 여자는 아닌 것이죠. 성서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도 그러하거니와 만약 첫 여자였다면 그 호칭은 여자가 아니라 뼈 중 뼈, 살 중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 피조물의 이름 짓는 것이 아담의 기본 업무내용이었던 것…, 잊지 않았죠?

 

그 이브에게 뱀이 찾아 오고 급기야 선악과를 따먹으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건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벌을 내리지요. 그 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브는 산고의 고통을 더해 수고해서 아이를 낳으리라.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리라, 뱀과 원수가 되어 뱀이 네 발꿈치를 상하리라.

아담은 농사일로 수고한 후에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반드시 죽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뱀과 원수부분을 제외한 이 모든 사항들은 사실 우리가 항상 겪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인류가 아이를 낳는 산고를 시작하고 농경을 시작했던 것일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이 상황은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이등병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가장 큰 형벌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특별할 수 있었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했던 순수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에덴 밖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럽다고 느끼기 시작했지요. 이에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지위를 차제에 에덴 밖의 사람들과 똑같이 강등해 버렸던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던 이브에게 산고의 고통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경작에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아담에게 홍수와 가뭄을 겪게 하셨던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히 살 수 있었던 두 사람에게 에덴 밖의 사람들과 똑같이 언젠가는 마침내 죽음을 경험할 것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압권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에덴을 지키는 동안 에덴의 경계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에덴 바깥 사람들과 똑 같은 복장이었지요. 아담과 이브는 완전히 보통사람이 되어 에덴에서 쫓겨 나게 된 것입니다. 완전한 강등, 아무런 특별할 것이 없는 인간…., 그것이 수십년, 아니 수천년, 아니 어쩌면 수천만년의 유구한 시간을 에덴에서 지냈던 아담과 이브가 맞닥뜨려야 했던 새로운 운명이었고 그래서 에덴을 떠나던 그들은 한없는 모멸감과 자괴감에 눈물을 떨궈야 했을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

 

대충 말이 되는 것 같나요?

상상의 나래는 계속 펼쳐집니다.

 

에덴 밖의 사람들도 이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조상 대대로 경외했던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과 똑 같은 옷을 입고 에덴에서 걸어 내려왔고 사람들은 초췌한 몰골의 그들을 마을로 모셔 왔겠지요. 아담과 이브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신적인 존재였겠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 있어서의 오늘은 절대로 어제와 같을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에덴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담이 지키던 그 곳에 한 치의 용서도,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천사 케루빔이 강림하여 에덴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그 에덴의 동쪽에는 무시무시한 화염검이 선회하며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아 그 길에 들어서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불태워 버리기 시작했던 것이죠. 신에 대한 인간들의 공포는 거기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 놋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에덴의 동쪽 외곽인 그곳에서 카인과 그 후손들은 평생을 불타는 화염검이 에덴의 길목을 지키는 것을 먼 발치에서 훔쳐 보고 밤마다 그 무시무시한 굉음을 들으며 살았을 테니까요.

 

겨우 일곱 배??? 우리 조상 카인에겐 일곱 배일지 몰라도 날 건드리면 일흔일곱배야!! 웃기지 말라고!!”

 

앞서 언급했던 라멕은 카인이 세운 에녹성에서 에덴의 동쪽 상공을 날며 울부짖는 화염검을 바라보며 사실은 자신의 조상을 버린 하나님에게 그렇게 소리지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아담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었을 아담은 누구보다도 강성한 대가족을 이루었을 것이고, 아담과 그의 가족들은 아마도 당시 지상에 살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긴 수명을 누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성경은 다른 가족들, 심지어 카인과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살았던 날의 햇수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니 평균 900여세를 살았던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아담 후손들과 에덴 바깥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억지로 짜맞추자면 창세기 6 3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과 혼인하여 육신화됨에 따라 하나님이 정해 주는 120세의 수명이 당시 인간들의 평균 연령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게 되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본 종손은 므두셀라가 낳은 라멕입니다. 공교롭게도 위에 못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카인 후손 라멕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 라멕이 성장하는 것을 65년간 지켜 본 후에 인류의 첫 인간 아담은 눈을 감습니다.

 

그 라멕은 바로 대홍수의 격랑 위에 방주를 띄운 노아의 아버지이지요. 노아는 아담이 죽은 후 117년 후에 태어나 그로부터 600년 후 할아버지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터진 대홍수를 겪게 됩니다.

 

천지의 창조를, 최소한 그 일부를 직접 보았던 아담이 지상의 모든 생명을 멸절시키는 대홍수를 보지 않고 그 717년 전 눈을 감게 된 것은 하나님의 배려였을까요?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올 것이 온다라고 합니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그 이름을 지어 주었을 아담은 지상을 쓸어버릴 대홍수에 대한 전조를 읽었던 것일까요?



노아의 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