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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하다 별걸 다] 창세기 강해-1

beautician 2017. 2. 25. 10:00

 

  

창세기 1

 

이런 얘기를 쓰거나 말하게 되면 당장 이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랬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의구심을 품어 왔더라도 그것을 입에 담기라도 하면 당장 하늘에서 참람하다!’는 호통과 함께 벼락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고 기어이 불지옥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믿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신앙이었을까요?

 

그러나 적잖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무슨 교주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기독교관을 한번 뒤흔들어 보려는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질문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보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쓰려는 것뿐입니다.

 

물론 일천한 성경지식과 얄팍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주제에 넘치는 글을 쓰고자 자판을 두드리려는 스스로의 모습이 좀 우습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고도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나 환자급 기독교인들의 돌팔매질이 우려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평생 입을 굳게 다문 채 모르는 것을 아는 척, 믿을 수 없는 것들을 굳게 믿고 있는 척 하는 것보다는 자기 생각을 얘기해 보고 갈릴레이처럼 종교재판을 받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는 설교를 많이도 들어 왔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많은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라는 것이 교계의 정설입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단 한 개의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것, 또는 오류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 교계의 기본적 입장인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묘사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 있다면 광대무변(廣大無邊), ‘무소부재(無所不在)’, ‘전지전능(全知全能)’ 이라는 세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글의 저변에 깔아 두고자 합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어 낯과 밤을 창조하십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지으시지요. 물 가운데 궁창을 두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십니다. 궁창을 하늘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둘째 날 하늘을 지으셨습니다.

 

셋째 날 대륙과 바다를 나누시고 대륙에 식물들을 번성케 하십니다.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 낮과 밤, 그리고 변화하는 계절을 가져옵니다.

 

다섯째 날에는 식물을 제외한 모든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창조하십니다. 오늘 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이 이 날 모두 창조된 것이죠.

 

여섯째 날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대로드디어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함께 부여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즉 제 7일에 이르러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어 안식일의 기원을 이룹니다.

 

이 창조의 순간을 참관할 수만 있었다면 그 장관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었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을 상상하려 노력합니다. 칡흙 같은 무()의 암흑 속에 한 줄기 광명이 섬광처럼 비치며 빛이 어둠을 밀쳐 내기 시작하며 벼락이 때리고 굉음이 울리며 하늘과 땅이 모습을 갖추고 구름이 솟아나며 지구의 대기권을 뒤덮은 궁창 위의 물이 햇살을 투과시키는 찬란한 모습. 황량했던 대륙들이 푸른 색 각종 식물로 뒤덮이며 얼마 있지 않아 코끼리떼 기린떼 사슴 떼들이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기 시작하는….



 

사람마다 생각이 모두 다르듯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혼돈의 한 가운데에 질끈 묶은 긴 흰머리와 긴 수염을 나부끼는 옥황상제 내기 도사 필의 하나님이 나타나 빛이 있어라!’ 하는 순간 뿅!하며 빛줄기가 쏟아지고 땅에 기는 것들…!” 하는 순간 거북이며 악어들이 땅을 뚫고 나와 해안과 강변에 가득 차는 장면들을 연상하는 식으로요.

 

성경은 이 6일 창조의 천지 기원을 믿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에 기록된 바이니까요. 그래서 기록된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요.

 

창세기의 저자는, 물론 성경의 일부이니 성령님이겠지만, 붓을 들어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모세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와 함께 창세기는 모세 5경을 이루는 첫 번 째 책인 것이죠.

 

그럼에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 창조의 기록은 정말로 하나님이 첫째 날 둘째 날 순서를 정해 이런 저런 것을 창조한 역사적 기록일까요?  그것이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던 것은 오래 전 지동설을 주창했던 갈릴레이 할아버지 역시 모르긴 몰라도 이 창세기에 기록된 넷째 날의 기록 때문에, 즉 우리가 사는 이 땅과 하늘이 둘째 날, 셋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어떻게 줏대도 없이 넷째 날 창조된 태양 주변을 돌 수 있냐는 교단의 엄중한 질책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갈릴레이 할아버지는 남들이 상상도 못한 사실을 과학적 이론으로 증명하여 세계사에 뚜렷이 이름을 남기기라도 했지만 나는 남들이 다 한 번쯤은 품어 봤던 의구심을 새삼 또 한 번 글로 쓴다는 것만으로 가열찬 비판을 받고 그러면서도 역사는커녕 9시 뉴스에도 나오지 않을 판이니까요.

 

그래도…., 이 천지창조의 기사는 출애굽 당시의 모세와 유대민족들이 믿고 있던 그 시대, 그들 민족이 믿어 의심치 않던 보편적인 창조신화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6일간의 하나님의 일과표를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인지, 당시 모세와 그들 민족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지의 문제인 것이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6일만에 장조를 마치시고 훗날 유태인들의 인식일 의례에 맞추어 주려고, 아니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요일이라는 휴일을 제공해 주기 위해, 또는 천지창조가 너무 힘에 겨워서 제 7일 안식을 취하셨든 6천만년에 걸쳐 더욱 더 세밀히 창조를 하셨든 그게 과연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도저히 하루 만에는 창조할 능력이나 스케줄이 되지 않아 6일씩이나 걸린 것일까요? 일단 만들어 놓고 하루쯤 놓고 봐야만 정말 잘 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실력이었다는 얘기일까요? 실제로는 1 2일이나 3~4, 아니면 좀 더 길게 잡아 8일 이상 걸렸다고 해서 그게 오늘 날 기독교인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걸까요?

 

창세기 1장의 포커스는 천지창조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그 6일이라는 날짜와 창조 순서에 있는 것은 아닌 게 아닐까요? 7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일이라는 규례 때문에 유태민족의 천지창조 설화는 굳이 6일 창조설이어야만 했고 모세 역시 그렇게 믿고 그렇게 기술했다고 믿는다면 천벌 받을 일일까요?

 

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라는 부분을 부각하려 하는 의도 역시 굳이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창조했는데 첫째 날 무슨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느냐?’ 라는 사뭇 과학적인 접근을 해보려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 시절 이 부분을 읽으면 하나님이 열심히 하늘도 만들고 물도 궁창 위랑 궁창 밑으로 잘 나누었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져서 땅거미가 드리우고 이것 저것 창조하느라 힘들었던 하나님이 간만에 허리를 펴고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좀 쉬러 갈까?’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더 돌아보며 씩 웃는 거죠. 거 참, 내가 만들었지만…, 참 보기 좋구먼….’  완전 백발도사 필의 할아버지 모습으로요.

 

광대무변, 무소부재, 전지전능이라는 단어들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저녁을 맞고 아침을 맞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대로라면 그날의 저녁이 하나님을 맞았고 그날의 아침이 하나님을 맞았어야 하지요.

 

천지창조를 하시던 순간의 하나님은 고대의 하나님인가요?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이 오랜 시간의 격차를 두고 이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건가요? 하나님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분이신가요? 그건 오직 언젠가 인간들이 만들게 될지도 모를 타임머신으로만 가능한 일인가요?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라면 오늘날 우리가 기도를 올리는 그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창조의 첫 날, 빛과 어둠을 나누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에덴동산 상공에서 천지를 짓고 계셨다면 아무튼 그곳에는 저녁이 오고 아침이 왔겠지요. 그러나 우주를 짓고 있는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데 도대체 어느 태양이 져서 저녁이 오고 어느 태양이 떠서 아침이 왔던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이란 어쩌면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에 붙잡아 묶어 놓고 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부분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요? 성서는 계시와 상징과 비유, 때로는 유머로 가득 차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 어느새 지구가 한 바퀴 돌았네. 창조 하는라 바빠서 몰랐는데…., 벌써 하루 지났구먼.’

 

하나님이 이렇게 중얼거렸다면 성서는 농담이 되고 맙니다.

 

 

6일 창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언젠가 한 목사님은 이 지구의 역사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이 탄소연대측정법 등으로 지구의 나이를 수백억년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는 와중에서요. 그것은 성서가 친절하게도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그들의 나이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토대로 오늘날로부터 역산한 총합에 천지창조에 소요된 6일을 더 한 것입니다. 그래서 6천년….

 

사실 그 목사님의 그런 믿음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하루가 인간의 하루와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얘기인 것이죠.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의 하루를 24시간이라고 못박아 버릴 정도로 대가리가 커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리가 전혀 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더욱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신앙의 깊이에 따른 자유이지만 우리들의 해석은 왜 항상 하나님을 규정하고 재단하고 한정 짓는 쪽으로만 가는 것일까요?

 

모든 신들이 그 형상을 동상과 미술품으로 남기고 카톨릭의 마리아상, 심지어 개신교 역시 십자가와 잡다한 성화, 성물로 신과 신앙을 형상화하려 하는 것도 그렇게 형상화하지 않으면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신을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목사님들이 말씀하시는 이런 분도 저런 분도 아닐 지 모릅니다.

그런 부분을 분명 보여주셨던 분이지요.

광대무변,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처음 창조한 아담과 이브, 인류의 첫 조상들부터도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도 물려받은 것 같지 않은데 그 후손인 오늘 날의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광대무변,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심을 시종 입에 담으면서도 이런 분 또는 저런 분으로 재댠하고 한정하려 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을 저녁과 아침의 시간 속에 묶어 두려는 것 이상으로 무모하고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일 것이고 그래서 경외하고 두려워 해 마지않는 신입니다.  그러니 백발도사 필의 할아버지로 둔갑시켜 상상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고 팔과 다리를 붙여 섯불리 형상화하여 그 형상 속에 담아 버리려는 무모한 시도도 버려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