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적도에 부는 바람

적도에 부는 바람 (8)

beautician 2009. 11. 22. 00:02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제 어두운 회색이 되었습니다.

그 회색이 점점 짙어지면서 칠흑 같은 검정으로 변해가던 중이었고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무스티카 라투 건물 5층의 사무실은 결국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진 지 오래였고 비싼 돈을 주고 사왔던 가구와 집기들도 급히 팔아 치울 수 밖에 없었으므로 헐값에 다른 사람들 손에 넘어가고 말았지요. 가족들이 사용하기 위해 할부로 샀던 토요타 끼장 밴도 고교 동문선배에게 빌린 빚을 갚기 위해 팔아야만 했고 돈이 될 만한 모든 것을 팔아 치운 후 남은 것은 페로자 찝 한 대뿐이었습니다. 이 차마저 팔아 치우면 돈 벌러 다니는 일은 요원해지고 말 상황이었어요.

 

쓰리도어였고 뒷좌석이 몹시도 불편했던 이 차량은 이제 회사에서뿐 아니라 아이들을 등하교 시키는 데에도 사용되며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만 운전사마저 내보낸 후였으므로 그 차를 운전하던 나도 덩달아 더욱 바빠졌습니다.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사람들에게 세상의 이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그 즈음에 더욱 많이 배우고 있었어요.

 

파산하고 나면 더 바빠진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어요, 그러나 파산한 사람을 바쁘게 하는 일들은 대부분 전혀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가용한 방법들이 많이 있을 때에는 어떤 일처리를 위해 그 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 하나를 가동시키게 되므로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지요. 그러나 모든 가용한 방법들 대부분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한정된 방법으로 원하는 성과를 얻어 내려면 오로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너져 버린 사업을 회생시킬 방법이 없다면 다른 사업을 찾아 내야만 하지만 수많은 아이템들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검토해야 할 시간에 아침 5시반에 일어나 6시에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등교시켰다가 한창 일할 시간인 오후 2시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학교 앞에 차를 대고 아이들을 태워 하교시켜야만 했습니다.

 

결국 맨땅에 헤딩이지요. 그것이 지금도 변함없이 내 모토가 되어 있을 정도로 그 당시 엄청난 헤딩을 해 댔습니다. 가장 비효율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예전엔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다니면서 눈 앞에 문이 나타나면 맞는 열쇠를 찾아 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단 한 개의 열쇠도 없이 온갖 종류의 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게 나무문이든 철문이든 은행 금고 같은 장갑철문이든 먼저 박살나는 게 내 머리뼈냐 아니면 철문이냐를 놓고 이마에 피가 철철 흘러 내리도록 오로지 막무가내 헤딩만 해 대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물론 헤딩만으로 열리지 않는 문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 시기에 깨달은 또 다른 점은 이 세상이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을 정말 철저히 지키면서 돌아간다는 것이었어요.  사업이 잘 나가고 지갑이 두둑할 땐 별로 필요 없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얼쩡거리며 밥 먹으러 가자, 골프 치자고 종용하며 돈 빌리지 않겠냐는 제의도 곧잘 해 오지요. 그러나 이제 내 주머니에 먼지밖에 남은 것이 없고 더 이상 팔 것이라고는 혈액이나 콩팥 같은 신체의 일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나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정말로 신속하게 주변정리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내가 에이즈 보균자나 테러리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내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지요.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내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나를 경원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내가 사무실을 나누어 함께 쓰도록 했던 고교 후배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엔 우리가 도와 줄 차례네. 3층에 작은 사무실을 계약했으니 거길 함께 쓰면서 방법을 찾아 보면 조만간 좋은 길이 나타날 거야.”

 

고교 4년 후배인 봉후배와 동업하고 있던 학군 19기 김선배가 그런 얘기를 해주는 것이 가슴 저리게 고마웠지만 봉후배는 내 사업이 침몰하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뭔가 심사가 뒤틀린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내가 내 짐을 들고 3층에 따라 내려갈 당시에는 굳이 싫은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고교 동문회에서 처음 만났던 당시 그는 큰 덩치와 30대 중반에 들어서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애교를 부리는, 그러나 분명히 살가운 후배였습니다. 사실 동문회에서 선배들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지요. 평균적으로 빨라야 30대 중반에 인도네시아 지사에 부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 교민사회에서 40살이 넘어도 동문회의 막내 위치를 벗어나기 힘들었으므로 나 역시 40살이 되던 해에 형수들까지 모두 참석한 동문회에서 한 선배가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를 때 내 동기 두 명과 함께 백댄스를 추도록 강요당한 적도 있었어요. 성격상 별로 애교스럽지 못한 나로서는 그 이후 고교 동문회에 참석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봉후배는 그의 다른 동기 한 명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넘어 와 같은 쌍용건설 출신이었던 김선배와 제휴해 지문인식기 수입판매사업을 시작하던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몰라 볼 정도로 말쑥하고 건강해진 김선배는 사업도 궤도에 올랐고 신앙생활에도 진심과 열심을 다하고 있지만 당시엔 많은 불운이 겹쳐 돈과 건강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최근에 지어진 스나얀 씨티 몰(Senayan City) 인근 항르끼르(Hang Lekir)라는 이면도로의 현지인 사업파트너 집 2층을 사무실 겸 숙소로 쓰고 있었는데 그 상태가 너무 열악했으므로 함께 왔던 봉후배의 동기가 불과 2개월만에 먼저 짐을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 역시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불운했던 선배와 인도네시아에 첫 발을 디딘 후배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고 그래서 무스티카 라투의 내 사무실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겠다고 제의했던 것이죠. 뭔가를 새로 만들어 주는 것은 돈이 드는 일이지만 이미 있는 것을 나누어 쓰는 것은 추가비용이 드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의 에피소드들 중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안전거리의 문제가 여기서도 적용됩니다. 정말로 진실한 사람들, 산전수전을 함께 겪고 그 뱃속까지 거리낌없이 모두 드러내 보였던 사람들과는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은 일이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을 내 경계선 안쪽으로 들여 보내는 것은 대부분 위험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교동문이나 ROTC 동문이라는 신분은 경계선 안까지 들여 보내도 된다는 인증서나 통과증이 아닙니다. 자카르타 부임초기에 그토록 믿고 의지해 마지 않았던 시내 연락소장 학군 16기 선배에게 당시 회사의 비자금 문제로 인한 고충을 털어 놓으며 고민상담을 했던 것이 모조리 비수가 되어 내 등에 꽂혔었죠.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미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던 그 때 내가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이라는 게 더 이상은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봉후배는 내가 당연히 아끼고 돌봐 주어야 할 후배였지요.

그래서 사무실을 나누어 쓰기로 한 것 외에도 그의 가족이 인도네시아에 들어올 당시 기꺼운 마음으로 아파트를 알아봐 주고 별도의 비용이 들까봐 페인트를 사서 나 혼자 직접 집안 곳곳을 모두 페인트칠 해주었어요. 그 후 약 반년 가까이 매일 내 차로 출퇴근을 함께 했습니다. 운전사를 내보내고 페로자 한 대 밖에 남게 되지 않았을 때에는 내가 직접 차를 몰아 함께 출퇴근 했어요.

 

그러는 동안 정말 수도 없이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요. 내 아내도 봉후배의 아내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씨받이로 들어간 어머니에게 태어나 아버지의 본처와 자신의 어머니, 그렇게 두 명의 어머니를 모시고 커야 했던, 그래서 본처 어머니로선 자기 어머니와 형이,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 눈엣가시같이 여겼을 어린 시절이 당시엔 분명 감당키 어려웠을 텐데 이제 장성해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여 대기업을 거쳐 가족을 이루어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한 봉후배가 대견스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인 지문인식기 사업에 손을 대고 김선배의 열악한 하꼬방 환경을 마다치 않고 컴퓨터 수리 등 돈이 될 만한 다른 사업들을 돌리며 턱없이 부족한 수입을 채우려 애쓰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특히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면서 식품학과 출신답게 집에서 요쿠르트를 만들어 포장까지 해 무궁화수퍼 등 시내 한국 슈퍼마켓에 납품하며 남편을 돕는 그의 아내도 대견스러웠죠.

 

그러면서도 일말의 부담감을 느꼈던 것은 그가 쏟아 내는 예전 직장 쌍용에 대한 끝도 없는 불평 때문이었어요. 그의 말대로라면 쌍용에는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 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패하고 독직하며 여자에 환장한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직장과 상사에 대해 씹는 것은 현 직장, 옛 직장을 불문하고 온 국민의 스포츠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고 때로는 맞장구까지 쳐 주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언젠가부터 그가 김선배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씹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봉후배가 처음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젠 현지 한국 봉제업계의 거목 중 하나가 된 기도 자야(PT. Kido Jaya)의 까라왕 (Karawang) 공장 기숙사 공사를 할 때였다고 합니다. 같은 쌍용 출신이었던 김선배를 만난 것도 그때였고요. 김선배는 내가 99년도부터 ROTC를 통해 알고 지냈던 분으로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의 좋은 감정을 여전히 간직하며 서로의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고 서로 격려를 해주고 있어요. 예전에 비해 몰라보게 성장한 각자의 사업을 서로 자랑스러워 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당시엔 사업은 지지부진했고 거의 알코올중독 초기증상까지 보일 정도로 건강이 무척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는 이미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불러와 인도네시아에서 합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인간이 저러니 가족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지. 김선배, 이혼한 거나 같다는 거 아세요? 지난 번에 딸이 왔다 갔잖아요? 애 얼굴이 그렇게 어둡고 아빠랑도 서먹서먹하고…, 그게 뭐야? 가장 구실도 못하는 사람이랑 동업하러 온 나도 참….”

 

많은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을 거쳐 자카르타에서 가족들이 결합한 오늘의 김선배의 모습을 본다면 봉후배가 그때의 말을 어떻게 다시 주워 담아야 할 지 난감할 것입니다.

 

그때 그가 김선배와 동업하면서 한국에서 돈을 얼마나 투자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봉후배가 쌍용으로부터 받았을 퇴직금 규모나 그가 벌이려는 지문인식기 사업 규모로 미루어 1천만원을 많이 넘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김선배가 자기 돈을, 영업이익을 뺴돌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가 김선배와 결별하게 되는 것은 내가 그들과 함께 무스티카 라투 3층으로 내려간 후 반년쯤 더 지난 후의 일이지만 김선배의 험담을 풀어 놓을 당시 그는 이미 김선배와의 결별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토록 김선배를 경멸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돈이 없는 사람들을 경멸했어요. 그리고 그땐 나 역시 지독하게 돈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 사업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후엔 나와 그런 얘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아직 내 차를 타고 출퇴근하면서도 우린 서로 대화하는 말수가 현저히 줄어 들어 있었고 때로는 집을 출발해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그가 그토록 끊임없이 해대던 쌍용에 대한, 또 김선배에 대한 욕을 더 이상 내게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난 이제 그가 누군가에게 내 욕을 해대고 있을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얼마 후 김선배가 오랫동안 타고 다녔던 오펠 찝차를 가끔 집에 가져왔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 차를 자기 차처럼 쓰면서 나와 함께 출퇴근 하는 일도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어요.

 

무스티카 라투 3층 사무실은 너무나 비좁았으므로 김선배가 거기 내 책상을 만들어 끼워 넣어 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부담스러웠습니다. 릴리는 루벤의 빠사데니아 아파트에 방 하나를 자기 사무실로 만들었어요. 릴리를 사무실로 함께 데려 오기엔 공간도 없었을 뿐더러 봉후배는 물론 김선배 역시 릴리와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릴리로서도 무척 불편한 상황이 될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다른 장소에서 일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좁은 사무실에 릴리마저 끼어 앉으려 하는 것이 지나치게 절박하고 무모해 보였을 것처럼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시간에 사무실을 차려 놓은 릴리의 아파트로 내가 출근하는 것도 무척 모양이 좋지 않았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 사무실에 따라 들어갔던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 맞은 대실패, 해외에서의 파산을 당한 후 나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기 때문이었어요. 만약 어느 사무실이든 내 책상이 놓여 있지 않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백수라고 손가락질 할 것만 같았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더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을 등하교 시키고, 나중에 세어 보니 대충 200개 정도가 되는 아이템들을 연구하고 쌤플을 들여와 시장반응을 살피면서 수도 없는 미팅을 쫓아 다녔지요. 그러나 부자가 망하면 금방 먹고 살 길이 생기지만 워낙 없는 놈이 망하면 모든 길이 다 막혀 버리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그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연구해 보았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었어요. 전망이 분명 밝을 것 같은 아이템들이 물론 있었음에도 우린 그 쌤플을 들여오거나 판매 테스트를 할 만한 비용도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붐이 일었던 자동 세차기. 셀프 세차장 같은 것들이 그 중 하나였고 1~2년 후 대대적인 붐을 일으키는 자원개발도 그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런 덩치 큰 사업은 할 여력도 없었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빚에 짓눌려 숨이 깔딱깔딱하는데 그런 사업을 할 만한 자금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 이상이었어요.

 

가람님이 소개해 주셨던 그 사람, , 그 사람하고 뭐 문제 있어요? 가람님 얘기만 나오면 반응이 좀 삐딱~해요?”

 

당시 인터넷의 조선닷컴(조선일보)에는 통달인클럽이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미주통, 유럽통, 일본통 등 각 지역클럽을 비롯해 과학통, 뇌지식통 등등 수많은 분야가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엔 인도네시아통도 있었고 나도 그곳에 가람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올린 지 대충 1년쯤 되고 있었어요. 일반에 전면 개방되어 있던 통달인 클럽이 나중엔 회원제 카페로 바뀌고 다시 블로그화 되면서 찾아 들어가기도 어려워지고 실명확인 등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으므로 몇 년 뒤엔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지만 당시엔 인기 있는 글에는 수천이 넘는 조회수가 달릴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초 딴지일보에 처음 글을 올리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아시아 전역을 휩쓸며 1998년에 최고조에 이렀고 한화출신들이 만들었던 신진무역의 한국본사는 중국으로 생산처를 옮기면서 수출대금에서 엄청난 환차익을 보았지만 정작 인도네시아에 있던 나는 거의 일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고 있었지요. 절망을 느꼈고 결국 인도네시아에서 뭔가 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쩌면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긴긴 밤을 잠 못이루다가 딴지일보 독자투고란에 이런 저런 글을 올리면서 스트레스를 달랬습니다.

 

인도네시아통에 글을 올린 것도 사업이 기울기 시작한 2002년, 넘쳐 흐르는 스트레스를 푸는 한 방편이었던 것이죠. 1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200편 이상의 글을 올렸으니 거의 매일 쓴 셈이었어요. 나중에 오프라인 모임이 시작되면서 글로만 만나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후 매달 정모를 하게 되었는데 봉후배도 까라왕이라는 아이디로 한 두 번 글을 올린 적이 있어 함께 정모에 나가곤 했습니다.

 

나중엔 정모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인 교류도 이루어졌는데 그때의 지인 중 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 왔을 때 난 그냥 미소로 넘겨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3층 사무실에 합류한 상태였어요. 봉후배의 성향도 대충 알고 있었고 그가 이제 나를 더 이상 그의 사업에 힘을 실어 줄 조력자가 아니라 짐으로 여기고 있음도 모르는 바 아니었으므로 그가 쌍용이나 김선배에 대해 험담을 하던 것과 같이 그가 나를 씹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일 역시 분명 아니었죠. 그때까지 나는 나름대로 그의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었고 3층 사무실에 내려온 이후에도 그가 사업 아이템으로 가져오는 다른 제품들, 예컨데 프라모델 식으로 종이를 접어 만드는 페이퍼 모델, 한국에서 대인기를 끌었던 문신 스티커 등의 시장조사도 시간을 내어 돕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런 도움은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소개해 주어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 내 욕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인터넷에 글쓰는 것도 이제 사치 아니요?”

 

언젠가 있었던 인도네시아통 정모에서 봉후배는 그런 얘기를 불쑥 꺼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던 이유는 비록 글쓰기가 당시 돌파구가 전혀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종잡을 수 없었던 내 감정의 폭발을 절제하고 순화시키는 유일한 방편이었지만 그의 말 역시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사업이 망해가는 상황에 쓸데없는 글쓰기보다는 돈 벌 방법을 찾아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친 것이었고 그런 그의 말은 정모에 참석하고 있던 나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2003년 초 이후 2008년 말 이 블로그를 만들 때까지 오랫동안 펜을 꺾었던 이유가 되었어요. 나는 그 후 다시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사업이 완전히 망가진 후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져 더 이상 추락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던 그 때에 더욱 파괴적인 파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한국의 소박사라는 친구를 먼저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ROTC 과정을 마치고 광주 상무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에도 전투모를 쓰고 있으면 우리랑 똑 같은 신삥 소위지만 모자만 벗으면 조기 탈모로 훤해진 머리통 때문에 중령 정도로 보이던 동기가 몇몇 있었어요. 소박사 역시 총각이었고 아직 30대 초반에 선한 인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외모만으로 왠지 내가 먼저 형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 무언의 압박감을 주던 친구였습니다. 정확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세라믹 소재 계통을 연구해 학위를 받은 소박사는 도자기, 신소재, 선박 등 여러가지 분야를 섭렵하게 되지만 당시엔 학교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초년생의 입장에서 자카르타를 방문해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때 한 번 만난 후 나중에 많은 도움도 받게 되고 지금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지금도 틈틈이 이메일을 교환하며 근황을 전하곤 하지요.

 

당신 정도 능력이라면 이런 일 하고 있을 사람은 아닌데…”

 

그는 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당시 내가 처해 있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서로 생면부지의 관계였음에도 얼굴을 마주 대하기 전부터 무슨 수로든 한번 도와 보겠다고 맘 먹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젠가도 언급했던 것처럼 위와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 보다는 상대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오히려 한없이 얕잡아 보고 급기야 그 능력이라는 것조차 사실은 전혀 평가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난 이 말을 정말 듣기 싫어했고 누구에게 하지도 않지요. 소박사도 어쩌면 이런 얘기가 목까지 치밀었는지 모르지만 산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정담을 나눈 후 한국으로 돌아 갔어요.

 

그런 다음 내가 아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는 2002년 한국에서 대박이 났다는 아이디어 상품들을 수배해 내게 쌤플들을 보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엔 쌤플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을 보내준 것도 있었는데 그는 대금이나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가 보내준 쌤플들 중에는 끈 없이 여성 가슴에 직접 부착하게 되어 있는 누드 브라, 금으로 만든 작은 거북이가 달린 핸드폰 걸이, 건전지로 가동하는 손톱정리 키트, 다이어트용(식욕억제용) 지압 귀걸이, 제브라 무늬의 란제리형 원피스 등등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 그가 한국 문신스티커 업체들을 알아 봐 주기 시작한 것은 내가 봉후배의 문신스티커 시장조사를 돕고 있다는 얘기를 이메일에 적었기 때문이었죠. 당시 봉후배는 문구점 쪽으로 판로를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현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문구유통업체 중 하나인 구눙 아궁(Gunung Agung)의 스넨(Sene) 본점에 선을 대어 구매 담당자를 소개해 주고 마트라만(Matraman) 지역의 그라메디아(Gramedia) 본점과도 미팅 약속을 잡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200여가지의 아이템들을 연구하던 당시 검토했던 미용재료와 관련해서 당시 파악해 두었던 미용실 체인들 명단도 있었으므로 루디 하디수와르노(Rudy Hadisuwarno), 요피(Yopie) 등의 본점들과는 내가 직접 미팅해서 거래를 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봉후배는 미용실 체인 쪽엔 그다지 전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냉담으로 일관했어요.

 

그럼 미용실 쪽은 내가 따로 한 번 해 볼게. 잘 되면 나중에 네가 하는 거랑 합치면 되잖아? 잘 안되도 너한테 손해 안나게 할 테니까.”

, 그러시던가…”

 

자신이 직접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겠지만 미용실 쪽으로 가려는 내게 제품을 공급하는 것 역시 그에겐 내키지 않는 듯 했습니다. 나 역시 내가 가야 할 대세와는 관계없이 후배의 사업에 도움을 주는 것 이상은 되지 않을 미용스티커를 취급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어요. 봉후배가 내 처음 제의를 받아 들여 미용실 쪽 공급도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했다면 나로서는 사무실을 빌려 쓰는 대가로 그의 일을 도와 주었다는 것만으로 내 역할을 종료하고 내가 정작 가야 할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 원안이었지요. 수억원의 빚을 진 상태에서 제대로 된 사업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삼아야 할 상황에 문신스티커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들은 소박사가 한국에서 뛰어주기 시작하면서 문신스티커는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소박사가 한국에서 수배 가능한 거의 모든 종류의 문신스티커 쌤플들과 가격정보를 보내 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후배분은 따로 복안이 있으신 모양인데 이렇게까지 사업을 만들어서 후배한테 던져 줄 필요까지 있으세요? 형님이 하시겠다면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릴 텐데.”

얘긴 고맙지만 하더라도 같이 도와가며 해야죠. 봉후배 저 친구도 도와줘서 잘 되면 입씻을 사람 아니에요. 문구점이랑 미용실 양쪽으로 해 봐서 한쪽이 잘 안되더라도 다른 한 쪽이 잘 되면 성공하는 거죠. , 문신 가지고 큰 성공을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지만…”

 

소박사가 보내준 문신스티커 쌤플들을 보여줄 당시 봉후배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그 표정을 봤을 때 그만 두어야만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문인식기 수입판매를 주업으로 하면서 부업으로 해보려는 여러 아이템들 중 하나, 그의 아내가 한국 슈퍼마켓에 납품하던 가내수공업 요쿠르트보다도 못한 위상의 제품을, 그것도 정작 당사자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은데도 옆에서 돕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몸이 두 개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과를 보내면서도 정작 정말 할 일은 없었으므로 문신스티커 일마저 없으면 일하고 있다는 실감이나 보람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거라도 해야 내가 그의 사무실을 빌려 쓰고 있는 상황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 몫 한 것이고요. 거기에 소박사의 눈물겹도록 적극적인 조력이 더더욱 발을 뺄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진 것은 내가 3층에 합류한 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봉후배는 한국에 수없이 많던 문신 스티커 업체들 중 프로 아트라는 가게에서 물건을 가져왔었죠. 타 제품들에 비해 탁월하게 품질이 좋은 제품 중 하나였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제조사와 가게들을 돌아보고 있던 소박사도 그 가게를 들렀습니다. 시장조사를 하면서 쌤플들을 구매하는 과정이었는데 소박사가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는 그가 가지고 간 서류봉투를 그 가게에 놓고 은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부분이었어요. 소박사는 나와 교신했던 이메일 내용들을 모두 프린트해서 그렇게 봉투에 넣고 가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봉투를 발견한 가게 주인이 내용을 읽어 본 후 봉후배에게 연락을 해 왔고 그 내용을 우선 전화로 들은 봉후배는 노발대발 했지요. 프로아트만은 내가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이 최소한의 룰이었는데 내가 그 룰을 깨뜨린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충돌은 3층 사무실에서 벌어졌어요. 봉후배는 내가 자기 사업을 몰래 빼앗으려 했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프로아트에 소박사가 간 건 분명 잘못된 일이야. 미안해요. 소박사가 거기 간 건 나도 몰랐어. 하지만 이메일 교신내용을 모두 거기 두고 갔다면 그걸 다 읽어 봐도 내가 무슨 마음으로 소박사랑 일을 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제발 좀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봐. 잘못한 게 있다면 내가 사과할 테니 오해는 풀자구.”

 

그러나 봉후배는 막무가내였어요. 그는 아직 퇴근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지만 사무실 문을 부서져라 닫으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난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런 일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게 일어났던 모든 불행한 사건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행동에 의해 야기되어 내가 피해를 입은 것들뿐이었어요. 프로아트의 사건으로 실질적으로 재산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러나 내가 봉후배의 뒤통수를 친 것 같은 모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미 사업까지 망해버린 상태에서 아끼던 후배에게 파렴치한이라는 오해까지 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아파트를 찾아 간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어요. 그는 거실에서 아내와 함께 앉아 있었고 이미 맥주캔을 몇 개 째인가 따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마음 풀어. 이렇게 된 건 내 진심이 아니야. 문신스티커는 어차피 네 사업이야. 난 지금 손을 털고 나와도 아무 상관없어. 다 널 도와 주려다가 생긴 오해라구. 네가 원하는 데로 다 해 줄게. 그러니 화 풀어. 오해 풀자구.”

무릎 꿇어요!”

 

대뜸 그가 하는 소리가 심장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난 평생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도 학교 앞 양아치들에게 맞고 다니면서도 무릎 꿀라는 말을 듣지 않아 더 심하게 맞은 적도 많았지요. 후배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너무나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마음 상하고 화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결자해지난 그들 부부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그래. 내가 용서를 빌게. 이 일이 네 눈에 어떻게 비칠 지 잘 알아. 그러니 소박사가 프로아트에 갔다는 사실만 가지고 흥분하지 말고 그 서류를 입수해서 읽어 봐 줘. 일이 여기까지 온 건 절대 지금 봉후배가 생각하는 그런 과정이 아니야.”

, 기독교인이지? 하나님 믿지?”

그래.”

그 하나님한테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 그런 거 아니라고?”

그래. 맹세할 수 있어.”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치켜 뜹니다.

 

형 애들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애들?”

그래, 애들. 만약 형이 거짓말 하는 거면 형 애들 교통사고가 나든 병이 나든 천벌을 받아 다 죽어 버릴 거야. 그래도 맹세할 수 있어? 거짓말이면 애들이 다 죽는데도?”

 

비록 말로 하는 것이지만 그런 맹세의 요구는 너무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너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며 싸움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오해를 푸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우리 애들 걸고 맹세할게. 내가 한 말은 다 진심이야.”

 

그는 또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마치 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이 일은 어쩌면 며칠 후 아니면 당장 내일이라도 소박사가 놓고 간 서류를 팩스로라도 입수하게 된다면 오해가 곧 풀릴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 밤이라도 그가 나를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대의 경우, 결국 이 일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더라도 봉후배 한 명 안보고 살면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좋았던 관계를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어서도 안되는 일이었고요.

 

그러나 다시 부릅뜨는 그의 눈을 보며 이 일이 원만히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예감했습니다.

 

위선자!  거짓말쟁이!”

“……”

상황 모면해 보겠다고 하나님도 팔고 애들도 팔아?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갈 때까지 갔네. 형 왜 그렇게 됐어?”

….”

다 듣기 싫고, 형 보기도 싫어. 아니, 형이라고 부르기도 싫다. 당장 사무실 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듣기 싫다니까! 말하기도 싫으니까 내일 아침에 당장 사무실 빼라구! 형 짐 안 빼면 나도 사무실 안가. 내 사무실까지 빼앗아 먹어 보지? ?”

 

그날 그의 아파트를 나와 건물 앞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어요. 내가 얻어 주고 내가 페인트칠을 해 준 아파트 거실에서 내가 그렇게 아끼고 몇 개월 동안 내 차로 출퇴근을 함께 했던, 그 아이들의 학교입학수속과 학비감면까지 주선해 주었던 고교 후배 앞에, 그 처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우리 애들까지 걸고 맹세를 했음에도 그의  극도의 부정과 극도의 불신을 되돌리지 못했고 내게 남은 것은 극도의 자괴감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엎질러진 물은 되담을 수 없는 것이었고요.

좀 지나면 괜찮아 질 거고 오해도 풀릴 거야. 내가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다. 지금 내 입장 너도 알잖아…”

 

다음 날 아침 무스티카 라투 3층 사무실에서 내 짐정리를 돕던 김선배가 하던 말이었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요원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은 릴리가 3층까지 따라오지 않았기에 이 모멸감을 함께 느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었죠.

 

 

 

자카르타에서의 내 첫 길바닥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일할 사무실도, 일이라고 부를만한 일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것은 술라웨시에서의 사업이 망가질 때부터 이미 예견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리라는 것은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으므로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습니다.

 

소박사에게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이 일을 얘기해 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비록 봉후배와의 관계가 틀어져 버린 직접적인 원인이 그가 가게에 놓고 간 서류봉투 때문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그가 최선을 다해 선의를 베푸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작은 실수였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박사를 책망하는 것처럼 여겨질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서류를 두고 왔음을 깨달은 소박사가 먼저 연락해 왔고 상황을 알게 된 그 역시 며칠 동안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고 그 결과를 괴로워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리고 불과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소박사는 엄청난 양의 박스들을 한국에서 항공화물편으로 보내왔습니다. 당시 한국돈으로도 수백만원이 넘을 물량의 문신 스티커들이었어요. 20박스가 넘었으므로 그 양도 2만 장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내게 대금청구를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적지 않았을 항공운송비용까지 자신이 다 물었어요.

 

형님. 이게 형님이 바라는 방향이 아닐지 몰라도 일단 길을 다 알아 본 건 이거잖아요?  일단 이걸로 한 번 시작해 보세요. 제 실수를 이걸로 만회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아무쪼록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그러니 상심 마시고…, 한국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힘닿는 데로 도울게요. .”

 

작은 인연으로 단 한 번 만났던, 그리고 그 이전엔 아무런 이해관계도 동문동창관계도 없었던,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소박사가 베풀어 주는 배려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그가 보내준 박스 중에는 프로아트의 제품들도 몇 천 장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마치 봉후배에게 충성을 다하기라도 하는 듯 소박사의 서류 내용을 보고했던 프로아트도 소박사의 물건 구매는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프로아트의 제품박스들을 들고 무스티카 라투 3층의 봉후배를 찾아 갔어요. 나 역시 프로아트 제품은 쳐다 보기도 싫었어요. 봉후배가 자기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아트의 제품들은 그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 두고 가세요.”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물건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얘기는 내 차를 박고 날아간 여인 편으로 이어집니다.

자카르타에서 태껸전수관을 하겠다는 김사장 일행이 자카르타에 들어왔고 나는 한편으로 이미 연결된 미용실 체인들에 문신스티커를 공급하기 시작했어요. 때때로 그 문신스티커 박스들을 몽땅 불태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곤 했는데 봉후배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때마다 그랬습니다. 그는 이제 내게 손해배상을 요청하고 있었어요. 시작하지도 않은, 앞으로 전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를 문신스티커 사업에 대해 그는 액수는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집요하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전화를 해왔고 그때마다 후배로서 선배에게 해서는 안될 단어들이 무수히 포함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는 협박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인도네시아통 오프라인 모임에 나왔던, 그래서 봉후배와 안면을 텄던 사람들이 나와 봉후배와의 사건으로 인해 번거로움을 겪기 시작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봉후배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 다니며 내가 사기꾼이라고, 파렴치한이라고 욕을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우연히 거론이 될 때 나를 씹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개해 준 내 주변의 사람에게 미팅을 요청하고 방문해서 문신스티커 사건을 거론하며 나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강변했던 것입니다.

 

역시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였지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을 내 주변, 내가 속한 사회에 무턱대고 끌어 들여 내 지인들을 소개해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는데 봉후배는 이제 내가 소개해 주었던 사람들 모두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 그가  내게 돈을 빌려 주었던 선배를 통해 내가 파산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고교 동문회에서도 선배들에게 어떻게 얘기를 했는지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난 인도네시아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날 혐오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변을 통해 가해오는 압박이 분명 지나쳤지만 난 내 변호를 하지 않기로, 사람들 앞에서 어떤 변명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인니통의 사람들이 간혹 전화를 걸어오거나 식사에 초대하면서 들은 얘기를 전해 오며 호기심을 보였지만 대답을 하면서 변명을 늘어 놓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비참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봉후배는 끊임없이 전화를 해 욕설을 퍼부었고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메일을 보내 옵니다.

 

 

배 선배에게

 

지난 몇 개월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두 가지 일이 있읍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형님이 돌아가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형님을 대신해 친형처럼 믿었던 배선배에게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사실 지문인식기가 서울 본사의 문제로 난관에 봉착 후 살길이 막막해 여러 아이템을 찾던 중 그 중에 하나인 타투를 미쳐 시작도 하기 전에 선배가 가지고 왔을 때 사실 그 당시엔 너무도 기분이 안좋았지만 그래도 믿었기에 같이하자는 그 말에 일언 거절도 못하고 넘어간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습니다. 어차피 지금 지난일을 생각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은 선배에게 배신당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서 잠도 안 오는군요. 저번 통화 후에 계속 전화를 피하시는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겠지 하면 큰 오산입니다. 저도 형한테 입은 상처만큼 곱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타투를 팔아서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가족같이 지내던 후배 아이템을 그 현란한 영어, 인니어 실력과 몇 년간 다져진 사업경력으로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가는군요.

 

전 그 당시에 선배를 너무 좋아했기에 서로 얼굴 붉히기 싫어서 같이하자고 하길래 전 문구 쪽으로 하고 선배는 미용실 쪽으로 한다기에 그래도 설마 하면서 가만있었던 내 자신이 너무도 밉군요.선배의 논리라면 왜 지문인식기는 안하시는지요. 우리는 민간 쪽으로 하고 선배는 관 쪽으로 하겠다고 하시지요,그리고 인니통 방사장의 의료기기  아이템도 방사장은 민간병원 하고 선배는 관 병원 쪽으로 왜 영업하시지는 않습니까. 타투는 제가 만만해서 그런 건가요, 참 선배의 논리에 기가 막힙니다.

 

소박사한테 보낸 메일에 보면“어차피 제가 문신스티커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이 친구의 아이디어에서 필을 받은 것이었고 시장이 서로 틀리니 각각 시장을 열고 들어가면 상승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었습니다.”도대체 상승효과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TV광고라도 내서 확 팔리게라도 해 주겠다는 건지, 말이 좋아 상승효과지 저보다도 잘 아실 이 뻔한 인니시장에서 이게 시장을 빼앗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지 묻고 싶군요.

 

그리고 그간 소박사와 오고 간 메일을 살펴보면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는지 회의가 듭니다. 거짓말을 하시는 선배를 볼 때 인생에 대한 회의마저 듭니다. 이런 매일을 주고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웃음 속에 감추어진 그 무엇이 더 이상 사람을 더 믿을 수 없게 저를 만들었습니다.

 

선배님 하루 빨리 사업에서 손을 때시기 바랍니다. 선배는 자꾸 서울업체 거론하면서 선배 체면만 생각하는데 저도 프로아트에 이미 창피당한 거 인정하십시오. 그 쪽에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일을 하길래 시작도 안해서 이런 일이 생기고 참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군요. 더군다나 만약에 소박사가 메일봉투를 두고 가지 않아서 이런 일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저는 완전히 바보가 된 꼴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번 달 20일까지도 배상이 없으면 저도 형님한테 당한 배신의 고통만큼 갚아드리지요. 저도 이제 쌀 구입할 돈도 없고 거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참으로 지금의 이 현실을 생각하면 인니라는 나라가 너무도 싫고 사람이 무섭군요.

빠른 답변 바랍니다...

 

 

이제 이 이야기의 배경은 칠흙 같은 암흑이 되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재산을 날리는 것보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끼던 사람을 잃는 일이고 그것보다 더한 것은 그 잃은 사람이 적이 되어 내게 총칼을 겨누는 것이지요. 봉후배는 프로아트로부터 소박사가 놓고 간 서류봉투를 입수해 그 내용을 다 읽어 보았지만 그는 거기서 내 진심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건가 봅니다. 이 사건은 이래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나면 그 확신과 의지에 따라 그럴 듯 하게 맞는 내용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그가 그 서류를 찬찬히 읽어 보기만 한다면 분명히 화해하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더욱 나를 몰아 붙였고 고교동문들과 인니통 회원들을 찾아 다니며 그 서류를 돌려 읽게 하고 나를 성토했습니다.

 

이제 와서는 뭐라고 최소한 변명 한 마디라도 하고 유력한 고교 선배나 인니통 지인들을 찾아가 내 얘기와 배경설명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봉후배가 아무리 악랄하게 나를 매장시키려 들어도 사실상 그 사건의 원인은 내가 제공한 것이었고 내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진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그 사실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이는 사실만으로는 내가, 그리고 소박사가 잘못한 것이 맞고 진실은 좀 다를지언정 내가 봉후배에게 그 날 무릎을 꿇었던 이유처럼 그가 오해를 할 만한 충분한 정황을 만들었던 것을 인정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봉후배가 사실보다는 좀 더 처철한 피해자로 보이고 싶어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마치 잘나가던 기업을 내가 집어 삼킨 듯, 수억원대의 현금을 빼돌린 것 같은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수익구도조차 잡히지 않았던 문신스티커 사업에 대해서 말이죠. 그것도 문구점의 모든 문을 열어 놓아 언제라도 시작하면 될 그 일을 그는 시작도 하지 않았고 내가 다 가져가라고 돌려 주고 프로아트 제품까지 수천장을 무상으로 안겨주었음에도 그는 내게 사업을 빼앗겼다며 신문고를 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당시 한국에서 대유행 했던 문신스티커는 이미 중국산 이미테이션들이 넘쳐나기 시작해 인도네시아 시장에도 도배되다시피 깔리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일반 시장에서의 성패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와 김선배의 동업도 이듬해에 접어들면서 와해되고 맙니다.

그는 이번엔 김선배를 사기꾼, 무능력한 금치산자로 몰면서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면 김선배의 하나뿐인 재산이었던 오펠 찝을 팔아 돈을 챙기고 떠나 가지요. 그런 후 예전 등 뒤에 다가오는 칼 든 그림자 편에 잠시 언급했던,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던 김프로에게 렌트차량 지입을 유도해 사기를 쳤던 김사장과도 연이 닿아 잠시 협력하다가 종국에는 서로 경찰을 보내며 협박하는 난장판을 벌인 끝에 결별합니다. 그는 그와 어떤 식으로돈 사업상의 고리를 만들었던 모든 사람들을 종국에는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가능한 많은 주변사람들, 교민들, 친지들, 동문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매장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평판만 매장하는 결과가 되기 쉽지요.

 

그러던 중에 어렵사리 현지 미용업계에 발을 들여 미용기기 수입판매를 시작하던 나에게 뜬금없이 그는 또 전화를 걸어와 또 엄포를 놓습니다.

 

당신 지금 미용사업 하는 거 다 내 문신사업 빼앗아 가서 시작하게 된 거잖아? 그 사업에 나도 권리 있어. 그거 다 내 거라구.  당장 사업 정리해서 나한테 넘겨.”

 

그때 봉후배도 그만큼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 처하고 있었던 것이겠죠.

그러나 무궁화 수퍼에 요쿠르트를 공급하던 처의 노력에 힘입어 어느 날 무궁화 수퍼에 채용되어 들어간 그는 얼마 후 무궁화 계열 건설회사에 3천불 월급으로 5년 계약을 했다며 자카르타 교민들이 다 알게 되도록 자랑하며 떠벌이고 다녔지요. 그 얘기를 교민지에 광고를 내거나 고교동문회 전체메일로 광고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건설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무슨 아구선수가 프로팀에 입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계약하는 것이 현지 한국계 건설회사의 일반적인 문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와 김선배는 서로 얼굴을 보며 실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백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토록 알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당시 나는 그렇게 무스티카 라투 건물을 나와 수많은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그 중 적잖은 에피스도들을 많이도 썼고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갔고 상황도 환경도 많이 변했지만 난 그 당시에 빌렸다가 아직도 갚지 못한 빚들이 남아 있습니다. 반드시 모두 갚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변함없었지만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있을만한 환경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어쨋든 그런 여건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욱 잊을 수 없는 마음의 빚도 많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에이즈 보균자, 치명적인 테러리스트인 것처럼 안전거리를 확보하려 미친 듯이 애쓸 당시 오히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 영역 안으로 나를 끌어 들여 부둥켜 안아 주고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준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어려움을 겪고 함께 그 수렁에서 함께 온힘을 다해 기어 나온 릴리나, 당시 전력으로 나를 도우려 애썼던 소박사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일본인 친구 히데키와 오랜 친구 리나가 언제나처럼 늘 우리 곁을 지켜 주었어요. 합병된 현지 종금사의 채권을 정리하기 위해 장기 출장을 와 스스로도 감당키 힘든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에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고교 동기동창 기현이, 모든 요청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와 주고 돈까지 빌려 주면서도 그 돈을 갚기까지 몇 년이 걸리는 동안 단 한번도 빚 독촉은커녕 아예 돈 얘기를 입에도 담지 않았던 ROTC 동기 영길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최초로 빌렸던 적잖은 금액을 제일 마지막에 갚게 되었는데 영길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독촉도 하지 않은 채 응원해 주신 찌부부르(Cibubur)의 허사장님,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술친구가 되어 주었던 깐깐하기 그지없는 후배 동혁이, 망했을 때나 흥했을 때나 한결같음으로 나를 대해 주었던 수많은 ROTC 선후배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깊었던 파산의 나락에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봉후배와의 사건을 겪으면서 또 다시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내가 좀 더 독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수 십 번 다잡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독해지는 것은 악한 인간이 선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 동안 여러 번 깨닫곤 했습니다.

 

그러나 독해지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어려웠던 시절을 결코 잊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한없는 모멸감을 주었던 봉후배나 반둥의 윤회장, 빠룽의 박치기 대마왕 이사장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최악의 순간에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었던 사람들의 얼굴과 그 미소를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겠죠.  이제는 거꾸로 내가 그들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참 쓰기 어려웠고 괴롭기까지 했던 적도에 부는 바람마지막 얘기는....,여기까지입니다.

'적도에 부는 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락의 밑바닥  (0) 2013.12.02
적도에 부는 바람 (7)  (0) 2009.10.29
적도에 부는 바람 (6)  (0) 2009.10.19
적도에 부는 바람 (5)  (0) 2009.10.08
적도에 부는 바람 (4)  (0) 2009.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