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적도에 부는 바람

적도에 부는 바람 (7)

beautician 2009. 10. 29. 05:20

 

 

사업이 망가져도, 파산을 해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일찍 귀가한 나는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는 중이었습니다. 이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돌봐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일을 하는 이유도, 자카르타에 혼자 떨어져 5년을 보내야 했던 이유도, 죽어가는 사업을 아둥바둥 어떻게든 살려 보려 발버둥 치는 이유도 다 이 사람들 때문이죠.

 

그러나 그 날 식탁에서 난 사업상황이 매우 나빠졌다는 것과 그래서 이제부터 부득이 더욱 긴축하며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이제 자카르타 생활 2년차에 들어간 아이들이 이번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 하고 있었지만 그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줄 돈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사실은 비행기 티켓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한 주일, 한 달을 살아갈 돈을 구하는 것도 막막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가장은 아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상황이 나빠졌더라도 반드시 돌파구를 마련해서 가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수준을 지켜주어야만 하는 것이죠. 최소한이라는 것은 내가 일으킨 문제로 인해 우리 가족 모두가 불법체류자라는 범법자의 신분이 되지 않도록 비자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길바닥에 나앉지 않기 위해 세간을 줄여 옮기더라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굶지 않도록 매 끼니를 공급하는 것 등입니다. 아니,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항들이 그 목록 위에 올라 있지만 그 중 또 하나 빼 놓은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의 교육을 보장하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아이들의 교육마저 포기할 정도로 궁지에 내몰린 사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브랜드 재고의류의 수출사업을 하던 어떤 사람의 일에 한 발 걸치고 있던 당시 초등학교 4~5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미팅을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시간에 어른들의 상담 테이블에 앉아 쭈뼛거리고 있던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라 학교에선 별로 배울 것도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사업공부 하라고 내가 데리고 다니는 중이지요.”

 

그의 강한 부산억양이 오히려 서글프게 들렸던 이유는 그가 아이의 학업을 더 이상 지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일을 하는 시간에 아이를 돌봐 주어야 할 부인도 떠나 버린 것이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파푸아(Papua), 깔리만탄(Kalimatan) 등지의 간선도로 수주를 따냈다며 국내외 한인들로부터 대대적으로 투자를 끌어 모았던 건설투자 사기팀의 일원이었던 한 사람은 그 사기팀의 핵심인물들이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팀원들에게까지 사기를 치고 돈을 함께 몰래 해외로 떠버리자 졸지에 집도 절도 없는 빈털터리로 전락하여 도주할 비행기표조차 사지 못해 가족들 전체가 불법 체류자가 되어 자카르타에 눌러 앉게 되었고 그와 그의 팀에게 피해를 입은 교민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게 된 일이 있었지요. 그는 아들의 입학금을 마련할 돈이 없어 중학교에 입학해야 했던 아들을 집에서 빈둥거리게 했고 입학금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나섰을 때에도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입학서류를 만들 수 없어 아들의 진학은 그의 부인이 취업하게 될 때까지 5년 가까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장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아이들을 그런 지경으로 내 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상황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하려면 지금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모든 비용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도 아이들에게 심어 주어야만 했습니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진실을 아내에게만은 얘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복잡한 상황,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그 결과로 인한 후유증을 아직도 어린 우리 아이들이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을지 우려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리더라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 당시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의 회사가 첫 부도를 냈고 중역이었던 아버지는 지방으로 도피해야만 했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당시 집달리들이 쳐들어와 집안 가재도구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었는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져야 했는지, 왜 우리가 이대입구의 큰 한옥집을 떠나 북가좌동으로 이사해야 했는지, 왜 아버지가 몇 달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 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국민학교 2학년 시절이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이제 각각 중학교 1, 2학년이 되어 있었으므로 아이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왜곡하는 것보다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극복하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리라 생각했고 그럴 만한 나이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단지 내가 겪었던 어린 시절의 그 경험을 아이들에게 반복시켜야 한다는 사실만은 견딜 수 없는 부분이었어요.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서 각각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을 마치고 자카르타에 들어 왔지요. 다른 국제학교에 비해 비교적 학비가 저렴한 한국학교 JIKS(Jakarta International Korean School)가 있었지만 당시 한국에는 조기유학 붐이 불어 아이들을 엄마와 함께 외국에 보내고 그 뒷바라지를 하며 기러기 아빠로 지내는 사람들이 넘쳐 나던 시기에 가족이 모두 함께 인도네시아까지 나와 한국의 해당 학교에 비해 자격증을 가진 선생님들의 숫자나 교육의 질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 뻔한 현지 한국학교는 내가 선택할 학교 목록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현지인들을 비롯해 각국 외국인 학생들이 함께 섞여 영어로 공부하고 있는 다른 국제학교에 비해 100% 한국학생들인 JIKS가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석연치 않게 여겨졌고요.

 

물론 아이들의 학교를 선택할 때에 부모의 지나친 사심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지사원으로 나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예정이라든가 애당초 본국의 대학으로 진학시킬 계획이라면 굳이 외국계 국제학교에 보내 남의 나라 역사를 배우며 한국말이 점점 어눌해지도록 만들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한국학교를 보내는 것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자카르타에서 일을 하는 한 아이들은 꼭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건 '사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렇게 지나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밀려 4년 장학금 조건을 받아 대학을 하향조정하고 역시 같은 이유로 좀 더 높은 학위를 딴다거나 해보고자 했던 다른 소망들을 모두 포기하고 취직해야만 했던 내 경험마저 내 아이들에게는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내가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보고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경험하면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좀 더 멀리 내다보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비록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아이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한 튼튼한 뿌리가 되어 줄 학교 뒷바라지만큼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철저히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했던 것이 인디아계 간디스쿨(Gandhi Memorial International School = GMIS) 이었죠. 누군들 내로라 하는 JIS (Jakarta International School – 미국계), BIS (British International School – 영국계)에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당시의 경제형편으로서는 1년에 2만불이 넘는 학비를 내야 하는 이들 정통 국제학교들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간디스쿨은 나름대로 10학년까지는 공부를 많이 시키는 학교로 정평이 나 있기도 했습니다. 공교육 비용이 거의 무료나 다름없어 사교육에 전력을 다하는 한국의 부모님들이나 회사에서 나오는 학비 보조금으로 가장 비싼 학교를 선택해 보내는 현지법인의 지사장, 지사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심지어 이해하기도 어려운 부분이겠지만 한국에 비해 몇 배가 들어가는 정규 교육비를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현지 독립군 사업가로서는 비용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죠.

 

하반기에 새 학년을 시작하는 간디스쿨에서, 한국에서 5학년까지 마치고 온 큰 아들은 갑자기 6학년 2학기로 편입되어 그 해에 중학교 과정인 7학년이 되었고 작은 딸로 마찬가지로 6학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개 언어 문제로 아이들을 반 학기 꿀리는 것에 비해 교장 선생님과의 면접에서 빠른 영어를 나름대로 유려하게 구사했던 나와 내 아내 덕택에 아이들은 언어 장벽을 쉽게 극복할 수 있으라는 학교측의 판단에 따라 반 학기씩을 오히려 건너 뛰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기도 했습니다. 초창기에 빵점 받아온 아들 수학 시험지와 D 학점 F 학점으로 총천연색 화려하게 나온 딸 성적표를 한번씩 표구해서 벽에 걸어 놓기도 했어요.  6 x 8 = ? 같은 질문은 당연히 48이라는 답을 적을 수 있는 것이지만 ‘David의 아버지는 토요타 자동차 딜러입니다. 그가 가진 6개의 매장에서 이번 달에 Land Cruiser 찦을 8대씩 팔았는데 그렇다면 이번 달에 David 아버지가 판 Land Cruiser는 총 몇 대일까요?’ 라는 질문이 영어로 나온 것을 이제 막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던 단계의 아이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언어만 이해한다면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간단히 풀 수 있었던 문제들이었죠. 그런 비슷한 문제들이 다른 과목에서도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첫 2년 정도는 아이들 교과서를 일일이 해석해 주어야만 했어요.

 

아이들은 자기보다 한 두 살 많은 같은 학년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때로는 자신들의 인지력 이상을 발휘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혼란을 더욱 야기시켰던 부분은 학교에서 그렇게 학년이 정해진 상태에서 한국학교와 국제학교 아이들이 혼합되어 있던 교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아이들을 그룹핑해 반을 짜는 바람에 학교에서는 후배인 아이들과 같은 학년으로 취급되어 친구, 선후배 관계가 애매해지기도 했던 일입니다.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자연스럽게 극복되는 것들이지만 학교를 다니던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좀 곤혹스러운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든 학교가 그렇듯 간디스쿨 역시 많은 장점과 함께 또 한편 많은 단점도 가진 학교입니다. 서구의 학교들이 토론식 교육을 하는 데 반해 한국식 주입식 교육과 방임형 토론식 교육의 중간 정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부분이 우선 한국인 부모로서 입맛에 맞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많은 교내 행사와 서클 활동도 있고 정기적으로 학부모들과의 공개 간담회, 미팅 등을 갖는 것이 장점들 이었어요.

 

그 반면 인디아 학생들이 태반인 상태에서 두각을 보이는 화교 학생들이나 한국계 학생들이 물론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주관이 많이 작용하는 과목에서 인디아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많아 외국인 학생들이 불리한 내신 성적을 받기 쉽다는 부분이나 너무 잦은 선생님들의 결근과 태만으로 학생들이 수업을 빼먹게 되거나 급기야 주니어 칼리지(Junior College) 과정인 11, 12 학년에 이르러서는 등교해 봐야 거의 수업이 없을 정도로 교과과정이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은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11, 12학년 과정에서는 SAT, IELTS, Toefl 등 영어시첨과 미대, 음대 등 실기시험을 필요로 하는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공부에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 공부를 위해 학교의 정식 허락을 받으면 등교하지 않더라도 결석으로 처리하지 않는 부분도 장점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독립군으로서, 그것도 사업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학부모로서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특별한 요청과 심사를 통해 학비의 일부 감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끄마요란(Kemayoran) 지역으로 학교를 옮긴 후 입학금이나 학비가 대폭적으로 올랐지만 우리 아이들이 간디 스쿨에 편입할 당시만 해도 입학금은 일인당 미화 3천불, 등록금은 한 학기에 2천불이 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도 학비가 연 2만불이 넘던 JIS BIS 등 저명한 국제학교들에 비해서는 6~7분의 1 수준이었지만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한 학기에 2백만원 선인 학비를 각각 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업으로부터의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래서 학교에 청원서를 제출해 입학금 2,500, 학비는 한 학기에 1,500불로 각각 감면 받아 아이들을 편입시켰고 얼마 후 또 한번의 청원서를 내 한국학교 수준인 한 학기 1,200불 수준까지 학비를 감면 받아 몇 년 후 아이들이 모두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학비를 적용 받게 되었지요. 지금은 시스템이 바뀌어 학비가 오르면 그렇게 청원을 통해 학비 일부 감면을 받은 학생들도 학비 인상에 상응하는 조정을 받게 된다고 들었지만 당시엔 그렇게 조정된 학비를 졸업할 때까지 적용 받을 수 있었어요. 그것이 어렵고 빈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간디 정신이었고 우린 그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간디스쿨은 그렇게 정해진 학비를 학기 중 분할로 납부하는 것도 가능했어요. 그런 시스템은 자카르타의 국제학교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혜택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선교사 자녀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학비 감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 아이들이 받았던 수준의 감면까지 이르지 못했으므로 그 얘기를 들은 한국인 부모들이 내가 감면 요청서를 어떻게 써서 냈는지 매우 궁금해 했고 그 사본을 요청하거나 작성을 부탁해 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무스티카 라투의 사무실을 나누어 쓰고 있던 고교 후배 역시 큰 아들을 간디스쿨에 입학시키면서 학비 감면 요청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애 왔는데 아래와 같이 만들어 보낸 후 우리 아이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 감면을 받게 됩니다.

 

 

Messrs. Gandhi Memorial International School

Attn ; Mr. Chairman.

 

How are you?

I am father of ………………. who is going to join GMIS as 1st grader from this semester.

I am very much glad that my son is admitted by the esteemed GMIS. I believe it also brings us a sense of great honour as well as responsibility.   I am expecting excellent guidance from GMIS teachers in order for my son to become a competent member of international society.

 

Actually I have hesitated a lot when making choice of my child’s school between JIKS(Korean School) and GMIS in the meantime.  But many friends here recommended GMIS as the best choice and I myself believe now that GMIS is the one that will make my child a real internationally-educated person.  That realization makes me and my wife even happier for my child’s potential bright future with GMIS background.

 

Personally, however, I hope you understand that my family is now experiencing financial difficulties in this foreign country.  I started my career in Indonesia as a construction engineer since 1999 and opened my own business here in Fingerprint Recognition System field since last year.   Currently, my principal in Korea had to temporarily stop their production due to severe financial problems which have resulted in major troubles in my Jakarta operations. In fact, Fingerprint Recognition System is one of the most potential items in Indonesian market but stagnation in Korea and financial deterioration on my principal’s side stopped my overall sales here for several months now.   Fortunately, re-start of production is being scheduled and I have hopes to resume my operation here soon as well.

 

My dilemma is that I have to send my child to school when my financial status is in its worst condition. , Nevertheless, my child’s education is one thing which cannot be postponed.  I really hope that my child is to be educated under best environments and also promise that I will do all my best to finance his education at your esteemed GMIS. If possible, however, I also hope your kind attention and understandings to my financial difficulties.  A certain reduction of entrance fee and education expenses would be very much helpful and appreciated.

 

Looking forward to your kind attention and favorable reply.

 

Yours Sincerely.

Jakarta, 14 July, 2003

 

 

…………………………..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게 남의 청원서나 대필해 주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술라웨시에서의 사업이 망가진 후 난 감면 받아 남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 되어 있던 학비마저 제 때 내기가 어려운 형편까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 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아이들에게 첫 말문을 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의 학업보장이 절대 차선책이 있을 수 없는 절대과제임에는 변함이 없었고 어떤 방법으로든 무조건 가능케 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 역시 분명한 일이었지만 스스로 그 약속을 도대체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한국 가면 뭐할 거야? 난 롯데월드에서 애들 만나기로 했다~.”

난 한국가면 스케줄 빡빡해. 개학 전에 돌아 올 수 있을지나 몰라.”

 

애들이 이렇게 재잘거리며 즐거워하고 있으니 말 꺼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며칠 후면 코 앞에 닥칠 현실을 마치 거짓말 하듯 입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얘들아. 요즘 아빠가 인상 박박 쓰고 다녀서 분위기 안좋았지?”

 

그렇게 간신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 이제 어려운 일들 잘 풀렸어요?””

에이, 그런 걸 물어보고 있어? 아빠가 하는 일인데 절대로 잘 될 수 밖에 없지.”

 

딸의 말에 아들이 그렇게 토를 다니 하려던 말이 다시 목구멍 속으로 꼴깍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모여 1년 반을 지낸 아이들은 이번 방학을 마치면 7월부터 각각 9학년과 8학년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큰 애는 그 사이 키가 훌쩍 자라 나와 키를 비교해 볼 때마다 조금씩 나를 추월하는 중이었고 작은 애도 이제 여자 티가 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철부지 어린 아이들이었지요. 사실을 얘기하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난 해에도 학년을 진급할 때, 그리고 연말 방학 때 한국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을 이번 방학 때 꼭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보류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 번 더 한국행 계획을 미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 날 대회의 핵심이었어요.

 

, 그래. 한 가지 문제는 이제 완전히 끝난 셈이지만 그래서 또 다른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당분간 더 허리띠를 졸라 매고 절약하며 살아야 할 거야. 아빠가 모든 일을 잘 해결하겠지만 너희들 도움 없이는 아빠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 잘 알지? 자카르타에 와서부터 적응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고 아빠를 많이 이해해 줘서 고마운데…., 이번에도 아빠를 좀 많이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너무 돌려서 얘기했다 싶었습니다. 이래서는 아이들이 상황을 이해할 리 없지요.

 

아빠, 걱정 마세요. 한국 갔다 와서 본격적으로 도와 줄게요.”

아빠, 나도!”

 

아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에 가게 되는 것을 기정사실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6개월 전 내가 철썩같이 약속했던 것도 사실이었거든요. 아이들을 그렇게 약속을 믿었고 나를 믿었습니다.

 

그게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갈라졌습니다.

 

아빠가 이번 한번만 더 너희들 양해를 구해야겠어. 한국 가는 거…, 1년 만 더 뒤로 미루자.”

 

어렵게 꺼낸 그 얘기가 아이들 귓전엔 날벼락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딸은 금방 시무룩해지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요.

 

그러나 아들의 반응은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식탁 한 가운데에 놓인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대려고 하다가 내 말이 입에서 떠난 순간 아들은 마치 얼어버린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너무 실망하지 마. 다음 번엔 꼭…”

 

아들은 그 자세로 1분 이상 굳어 있었으므로 난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들은 늘 풍요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언제나 밝은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어요. 한국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모두 크게 실망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딸이 투정을 부리면 아들이 오히려 나를 대신해 동생을 달래 줄 거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아들이 느꼈던 실망과 충격은 내가 예상했던 것을 훨씬 넘어섰던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아들은 그 자세 그대로 한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여자들의 눈물이란 어찌 보면 생활의 일부이고 그 존재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눈물은 언제나 예사롭지 않은 것이죠. 특히 아버지에게 있어 아들의 눈물은 더욱 그렇습니다. 더욱이 잘못한 것을 야단칠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니까요. 그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당장 한 시간 후, 한 달 후, 아니 1년 후에라도 정확히 날짜를 박을 수 있는 시점에 도래한다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내 죄책감과 자괴감이 그나마 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입으로는 1년 후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지게 된 엄청난 빚을 그 안에 청산하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들은 아무런 불평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탓하지도 않았고요. 그저 식탁 위에서 온 몸이 굳어 버린 듯 그렇게 한 팔을 뻗친 자세로 마치 가슴을 총알에 꿰 뚫린 것처럼 소리 내어 울고 있었고 그 애의 시린 가슴을 느끼며 내 가슴은 마치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하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에요. 첫 날은 어디서 누굴 만나고 둘째 날은 누구누구랑 모여 어딜 가기로 하고…, 그런 식으로요…”

 

아무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저녁식탁에서 큰 애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후 베란다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내게 아내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친구들과 그렇게 철썩 같이 맺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드높았던 자존심이 꺾였던 것입니다.

 

파산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 잘못으로 인해 모든 가족을 경제적 절박함이라는 벼랑 끝 낭떠러지로 밀어 넣고 내 실수로 인해 내가 받아야 마땅한 그 결과물들, 예컨대 손가락질 받는 불명예와 절망과 열등감을 아무 죄도 없는 가족 모두가 함께 겪도록 강요하는 것…. 그게 죽도록 싫지만 아무런 대안도 찾을 수 없는 것말입니다..

 

베란다에서도 아들 방의 조금 열린 창문을 통해 아직도 끊이지 않은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난 머리를 감싸 안았어요.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 혼자 이 모든 짐을 지고 이 베란다에서 뛰어 내려 버린다면, 그렇게 해서 가족들이 앞으로 다가올 더욱 큰 고통과 절망에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세상에 그 무엇도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불요불급했던 시내 무스티카 라투 건물에 넓은 사무실을 얻고, 남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릴리가 만들어 온 술라웨시 사업에 그 타당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털어 넣어 버리고, 감독관을 살리겠다고, 릴리의 체면을 지켜 주겠다고 전 재산이나 다름 없었던 그 사업을 호기 있게 포기해 버렸던 그 결정들이 모두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우리 가족들 머리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는데 내 한 몸 그 회살에 맞아 고슴도치가 되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꿰 뚫리게 될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양쪽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이제 홍수처럼 쏟아졌고 간신히 참고 있던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얼마 동안이었는지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난 베란다에서 목을 놓고 울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건…, 내가 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내가 독하지 못해 내 가족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그 때 내 머리 속을 천둥처럼 울리며 맴돌던 독백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재소를 시작하던 날부터 난 제재소 먼지구덩이 속에 온 몸을 던져 철저히 관리했어야만 했고 단돈 1원 한푼 지출되는 것도 자초지종과 이유를 물어 결재했어야만 했고 감독관이 죽건 말건 내 사업의 내 지분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고 릴리의 입장이 어찌 되든 아미르의 짜맛 사무실까지 찾아 가서라도 웃통을 벗고 아미르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그를 꾸짖었어야만 했습니다. 하다못해 현장에 투입되는 사업자금에서 일부를 남겨 내 아이들의 한국행 티켓을 사주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난 내 품위를 지키려 그런 일을 하지 않았고 내 자존심을 지키려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 가족, 내 아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그 때묻지 않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만 것입니다.

 

증권이 휴지조각이 되고 거창하게 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나고 나면 왜 사람들이 고층건물에서 투신하고 왜 목을 매어 자살하곤 하는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베란다 저 밑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리 내려 와. 베란다를 넘어 뛰어 내려 와. 그러면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거야. 어서 내려 와…..

.

.

.

그래. 여기서 끝내자!

난 할 만큼 했다. 더 해 봐야 이젠 민폐다.

그 빚은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 가족들에게 더 이상 민폐 끼치지 말고 빚을 다 떠 안고 나 혼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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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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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내의 손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도 내 무릎 앞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 보며 내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었고요. 아빠가 그렇게 우는 것을 딸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요.

 

아빠.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니까. 한국에 안가도 돼. 그러니까, 아빠 울지 마.”

 

얘가 아빠를 더 울립니다.

 

자기 노력 많이 한 거 나도 알아. 그러니까 됐어요…., 이제 들어 와요.”

 

아내의 목소리는 가슴 속으로 녹아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 아세요?  깨진 유리창 파편이 수도 없이 꽂히고 사금파리 범벅이 되어 바람만 스쳐도 피가 철철 흘러 나올 것 같은 상처에 요정이 손가락 하나 갖다 대는 것만으로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내가 빙긋 미소를 짓자 딸은 내 품을 파고 들며 안겨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WBC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 권투시합에서 1회에서 15회까지 상대에게 연신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여전히 머리가 멍한 상태였습니다. 소독하고 치료한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 붕대를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정신을 놓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어깨를 누가 툭툭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빠.”

 

아들입니다.

 

어른이 그렇게 울고…, 쪽팔린다.”

 

그렇게까지 얘기 안해도 이미 쪽팔리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나 한국 안가기로 했으니까 제발 울지 좀 마요. 창피해.”

나도 창피해…, 이 놈아.”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던 아들도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난 그 애를 꼭 껴안았어요.

 

창피하다니까. !. 아빠!!”

못 놔!”

 

버둥거리는 아들을 끌어 안고서…, 그 날 밤은 그렇게 깊어 갔습니다.

 

그날로부터 시작된 우리 가족들의 시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우린 서서히 모든 것을 함께 극복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그 날 이후 다시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오히려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요.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 아들은 호주의 멜번(Melbourn) 모나쉬 대학(Monash University)에서 IT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있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한 딸은 싱가폴의 래플스 디자인 스쿨(Raffles Design Institutue)에 다니고 있습니다. 파산했던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 비용을 대는 것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아이들 학비로 적지 않은 돈이 통장에서 뭉텅뭉텅 빠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게 힘겹고 아까운 느낌이 아니라 너무 대견스럽고 흐뭇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2003년도 중반의 자카르타에서 나는 이미 모든 사업이 망가져 버린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천금 같은 아들, 너무나 소중한 딸을 위해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 짜며 연구하는 중이었고 그럼에도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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