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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적도에 부는 바람

적도에 부는 바람 (6)

beautician 2009. 10. 19. 18:43

 

 

감독관은 수라바야로 돌아간 후 연락 한 통 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끈다리에 날아 갔다가 평생 잊지 못할 무시무시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죠. 그에게 직접 듣지 못했지만 수라바야에서 그를 만난 요한이 전해 준 바로는 감독관은 끈다리에 도착한 다음 날 제재소를 거쳐 벌목장에 들어갔다가 아미르의 지시를 받은 것이 틀림없는인부들에게 붙잡혀 거기서부터 또 한참을 들어간 정글 속의 한 돼지우리 같은 캠프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거친 부기스(Bugis) 종족인 벌목장 인부들이 화교인 그를 잘 대접했을 리 없었으므로 그가 겪었을 위협과 모멸감, 그리고 불쾌함은 풀려난 후에도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불쾌함은 자카르타 사무실에 찾아온 요한에게서도 아우라처럼 발산되고 있었습니다. 한없는 참을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요한도 그날만큼은 간혹 욕설을 섞어가며 언성을 높였는데 나나 릴리는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린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날리고 망해버린 바보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요한 역시 이 사건을 사법처리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경찰이 개입하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선수금으로 넣었던 막대한 돈을 다 날리게 될 것이 뻔했고 끈다리 현지 경찰의 처사가 수라바야 외지인이자 화교인 그에게 결코 호의롭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끈다리에서 아미르는 더욱 야비한 방법으로 릴리를 압박해 왔고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미끼에 걸린 릴리의 형제들은 누구도 릴리를 돕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린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업이냐 감독관의 목숨이냐그런 양자택일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가 아미르의 협박을 무시하고 위임장을 써주지 않았다고 해도 정말 아미르가 그가 무척이나 돌려가며 암시했던 대로 정말 감독관을 죽였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관의 안위를 무시하고 우리가 사업권을 지켰다 하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자금이 아미르의 주머니 속으로 빼돌려져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고 있던 벌목장과 제재소를 우리가 회생시킬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벌목장과 제재소는 아미르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세라(Asera) 지역에 있었으므로 그는 우리가 가는 곳곳에 덫을 놓고 발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때의 결정은 이미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되는 사업을 버리는 대신 사망할 지도 모를 감독관을 구해낸다는 것이었죠. 그때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래서 후회도 없고 당시엔 오히려 홀가분함마저 느꼈습니다. 우린 감독관이 우리가 자기를 구해 줬다고 고마워 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자기에게 부여된 우리 일을 하기 위해 끈다리에 갔었던 것이고 거기서 업무내역에도 없던 인질이 되어 나름대로 목숨의 위협까지 느끼며 고생했던 것이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로 풀려난 그가 수라바야에 돌아가 우리와 연락을 끊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전혀 속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감독관을 구해냔 결정은 그 대신 우리 자신과 내 가족들을 고통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여 급기야 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게 될 것이라고, 아미르에게 보란 듯 조만간 반드시 재기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었어요.  참담한 마음으로 끈다리에서 돌아온 릴리도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지만 곧 기운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우린 다시 백방으로 노력하기 시작했지요.

 

훨씬 뒤에 벌어지게 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납치, 협박을 통해 아세라에서 우리 사업을 낼름 삼켜 버린 아미르의 앞길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교활하고 위세를 부리는 부패 공무원이었을 뿐 사업을 경영할 능력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사람들을 쥐어 짜 집을 사고 아이들을 자카르타에서 공부시킬 만큼 많은 돈을 벌었지만 실제로 뭔가 사업을 통해 이익을 내서 돈을 번 적이 없는 사람이었죠. 이제 그는 제재소 운영에 있어 더 이상 누군가의 돈을 쥐어 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사업에서 이익을 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삼켜 버린 돈을 다시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라는 사실조차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관에서 빠져 버린 릴리와 맺은 계약이 미심쩍어 아미르와 새로 계약을 채결한 수라바야의 요한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가 릴리에게 그랬듯 아미르에게 납기와 제품 품질을 따지며 밀어 붙이기 시작하자 아미르는 짜맛 업무가 바쁘다며 또 잠적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요한이 직접 끈다리에 날아와 한 두 컨테이너를 선적하지만 바이어가 공급자의 공장까지 관리하며 선적을 진행해 주는 예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아미르의 지시를 받은 제재소 직원들은 보란 듯이 태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지쳐 버린 요한은 공장에서 생산된 완제품과 반제품, 심지어 바록과 원목까지 몽땅 컨테이너에 실어 수라바야로 보내고 그리고 나서도 정산되지 않은 아직도 막대한 금액의 DP 잔액을 아미르에게 청구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아미르는 무반응으로 일관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요한은 급기야 다시 릴리에게 청구해 오지요. 릴리는 제재소를 뺏긴 상태인 그 때 그것을 거절했어야만 하는데 그 책임마저 뒤집어 쓰며 더욱 빚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미르의 심복 중 한 명이 제재소에서 항구로 가는 도로 상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또 다른 교통사고에서 아미르 역시 무릎 뼈가 박살나는 중상을 입습니다. 그때 박살 나 철심을 박아 고정시킨 아미르의 슬개골은 정상 위치에서 허벅지쪽으로 많이 옮겨진 상태에서 굳어 버려 평생 다리를 절게 됩니다. 그는 또 자티(티크)나무를 손대 벌목허가도 받지 않은 원목을 트럭으로 실어 나르다 산림부 감독관에게 적발되어 2주일 가량 유치장 신세도 집니다. 파면되어야 마땅했던 현직 짜맛의 그러한 부패와 독직행위는 역시 그 정도 같은 수준으로 부패해 있던 현지 공직사회에서 대충 돈으로 때워져 아미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나와 짜맛으로 복귀하지요.

 

그러나 그 즈음 그 역시 자신이 도저히 벌목장과 제재소를 꾸려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겠지요. 그가 제재소를 하는 이상, 제대로 관리하여 선적을 진행하지 못하는 한 벌어 들이는 돈은 한 푼도 없이 계속 경비만 들어가는 상태였으니까요. 선적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요한이 이미 선수금을 지급한 부분을 상계하는 것이었어요. 아미르는 이제 싫증이 났고 어차피 그는 벌목장과 제재소에 돈 한 푼 투자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는 헐값에 기계들을 팔아 버리고 제재소의 문을 닫아 바리고 맙니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말이죠. 그 소식을 들은 우린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사주었던 사륜구동 토요타 찝차는 아직도 그가 타고 다닙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릴리는 끈다리의 가족과의 연을 거의 끊다시피 했습니다. 끈다리에서도 릴리를 경원시 했고요. 릴리가 영국증시에 상장된 회사의 바이오디젤 관련 작물 플랜테이션을 위해 다시 끈다리에 돌아간 것은 그 사건 후 많은 시간이 흐른 6년 후의 일입니다. 우리가 일생일대의 실패를 겪었던 그 곳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릴리는 권토중래(捲土重來)하고야 말겠다는 내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아 차리고 있었던 것처럼 미용사업을 하던 나를 뜬금없이 바이오디젤 사업조직에 포함시켰고 자카르타 리츠칼튼 호텔(Ritz Carton Hotel)에서 가졌던 현지 군수 부빠띠(Bupati)와 영국회사와의 미팅에서 나 역시 아미르를 6년 만에 만나게 되지요.

 

그는 이미 짜맛 임기를 마치고 차기 부빠띠 직의 영순위인 부빠띠의 수석 비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SBY 대통령 시대에 접어 들어 부빠띠는 더 이상 정부의 지정을 받는 직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야 하는 선출직이 되었고 그는 2010년 부빠띠 선거를 준비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미르의 건들거리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미팅 내내 나와 눈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피했었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끈다리와 아세라에서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후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벌어지게 될 일이고 당시의 우리는 나락의 밑바닥을 향해 끝없는 추락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무스티카 라투 건물 5층의 우리 사무실에는 두 집 살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지문인식기 수입을 중심으로 건설업 언저리의 사업을 포함 몇 가지 사업들을 검토하고 실험하고 있던 ROTC 선배와 고교 동문 후배에게 우리 사무실의 3분의 1을 무상으로 빌려 주고 있었지요. 나는 내 방과 내 방 앞의 썜플실 등 약 40sq.m, 그리고 전화선 두 개를 내어주고 나는 직원들이 있는 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습니다. 쌍용 출신의 이 선후배는 스나얀 플라자(Senayan Plaza) 몰 가까이 항르끼르(Hang Lekir)라는 좁은 골목 허름한 주택 2층을 사무실 겸 숙소로 쓰고 있었는데 그들이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은 역시 같은 어려움을 겪어 보았고 무너져 가는 사업 때문에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더욱 민감하게 다가왔습니다. 오히려 내가 몇 번을 청한 끝에 그들은 우리 사무실 안쪽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제 외관상으로도 완연히 침몰해 가는 내 사업의 운명은 분명 그들마저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아직 사무실의 임대계약기간은 3개월 정도 남아 있었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임대연장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나는 물론 그들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어쩌면 내가 어렵게 청해 오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항르끼르의 후줄근한 사무실에서라도 좀 더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3개월 후면 우리 임대계약이 끝나면서 그들도 또 한번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죠.  학군 4년 위인 김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고교 4년 밑인 후배는 내내 뭔가 심사가 뒤틀린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끈다리에서의 사업이 그렇게 망가진 후 우리가 해야 했던 일 중 하나는 우리에게 돈을 빌려 주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시간적 말미와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빌린 돈을 언제 갚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말미를 구한다는 것은 사실 무기한 기다려 달라는 요청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상황에 떠밀려 상환을 독촉 받지 않으려고 연락을 끊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득달같이 달려 올 사람들을, 피하기 보다는 우리가 먼저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과정을 통해 우린 쫓기는 빚쟁이가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누구나 다 우리를 격려하고 이해하며 위로해 주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눈을 치켜 뜨며 온갖 욕설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죠. 한국에서 8천만원을 투자하고 매월 월급조로 2천불씩을 받아갔던 형의 친구는 우리 사정을 설명하자 그건 투자한 게 아니라 빌려 준 것이며 형제가 짜고서 자기 돈을 말아 먹었다며 아무 죄도 없는 우리 형까지 싸잡아 매도했습니다.

 

, 나한테 사기 친 거야. 맞지? 이런 게 사기라구! 넌 입이 열 개라도 아무 말 못해!!”

 

내가 나왔던 코린도 5층 사무실에 자기 회사를 낸 고교 선배는 우리 사업이 망가지던 막판에 2만불을 빌려 주었죠. 그 분이 언성을 높이며 이렇게 말하는데도 꼭 갚겠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도, 언제 갚겠다고 날짜를 못박아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 선배의 말대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선배의 서릿발 같은 호통을 들으며 온 몸, 온 마음이 마비되는 것처럼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난 절대로 사기꾼이 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며 책임을 회피하거나 헛된 약속을 남발하면 그땐 정말로 사기꾼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들끓었죠.

 

그렇게 모든 채무자들을 만났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욕설을 하며 모멸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오랜 친구들은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하며 위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우린 파김치, 녹초가 되어 버렸어요. 악마 같은 아미르와 싸우는 것보다 채무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선처를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죠. 나와 릴리의 자존심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릴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 만났던 사람이 이번엔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의 이름은 안디 루디(Andi Rudy)라고 하는데 한국말로 하자면 철수 영호처럼 흔하고 친근한 이름을 반복하는 느낌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사롭지 않은 인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당당한 체구에 고수머리 짧은 머리칼을 한 큰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쯤 감은 듯한 눈꺼풀과 긴 인중은 단번에 고릴라를 연상케 했고 한국이라면 겨울에나 입는 두꺼운 멜란지 반코트를 더운 인도네시아에서 항상 입고 다닌다는 것도 특이했어요. 가끔은 머플러도 두르고 왔는데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있어 긴 팔 니트 스웨터나 두꺼운 코듀로이 바지 같은 겨울옷이란 방한용이 아닌 개성을 드러내는 맵시용이었으므로 안디 루디는 분명 꽤 멋을 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은행 론을 받아 주겠다고 했을 때 난 우선 의구심부터 들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카카오 가공공장에 투자를 해 달라는 입장이었어요. 그 당시 우린 끈다리에서의 목재사업 말고도 캐슈넛, 카카오 같은 농산물도 일부 손대 원산지에서 구매하여 마카사르로 보내는 국내 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업을 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찾아 와 땅거랑 어딘가에 있는 카카오 가공공장에 현물을 공급하거나 현금을 투자해 달라고 했었죠. 결국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셈인데 그런 그가 이번엔 우리에게 돈을 구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은 필요했지요. 목재사업이 망가진 이상 농산물을 통해서라도 재기하려면 물건을 구매할 돈이 필요했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지고 있던 빚들은 대개 사채나 같은 성격이었으므로 이자가 싼 은행대출로 전환할 수 있다면 그나마 어깨의 짐은 한결 가벼워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린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을만한 담보도 없었고 만에 하나 대출을 받더라도 원리금을 상환할 방법이 당장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갚을 수 없는 돈을 또 빌리는 셈이 되는 것이었죠.

 

그런데 안디 루디는 갚지 않아도 되는 대출이라고 설명해 왔지요. 세상에 그런 은행대출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 눈먼 돈은 없어. 은행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돈 달라던 사람이 이번엔 돈을 빌려 준다니….,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난다.”

 

릴리에게 그렇게 얘기하긴 했지만 당시 우리는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분별하여 판단하고 처리할 상황에 처해 있지 못했습니다. 모든 채무자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결코 양해해 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우린 집과 사무실에서 팔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은 팔아 돈을 마련해 급한 빚들을 정산하고 있었습니다. 직원들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내보내면서 월급과 퇴직금을 정산해 주었지요. 그 과정도 간단치 않았습니다. 퇴직금 정산을 위해 우린 회사 명의로 산 오토바이를 팔아야 했어요. 그런데 그간 그 오토바이를 사용하고 있던 운전사 수하르디(Suhardi)가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하지 않았고 오토바이도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화만 한 통 걸어왔을 뿐입니다.

 

나도 꽤 오래 일했는데…, 오토바이, 나한테 기념으로 줘요.”

 

오래 일한 대가로 퇴직금을 주겠다는데 수하르디는 그 열 배가 넘는 가격의 오토바이를 자기가 가져 가겠다는 것이었죠. 사무실로 불러 얘기하자 이번엔 오토바이를 족자(Jogya)에 보냈다는 둥 오토바이를 맡기고 돈을 빌렸으므로 오토바이를 회수하려면 500만 루피아를 달라는 둥 말을 바꾸며 가뜩이나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우리들을 더욱 몰아 붙였습니다. 수하르디는 1995년 내가 자카르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썼던 운전사였죠. 한화그룹을 나와 자카르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던 시절 운전사를 쓸 형편이 되지 못해 잠시 떨어져 있다가 코린도에 사무실을 얻으면서 다시 불러 왔던 친구였으므로 서로를 잘 알고 정말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지요. 한번은 그가 티푸스에 걸려 1주일 이상 결근했을 때 그의 집까지 찾아가 지갑에 있던 돈을 몽땅 털어 병원비와 약값을 주고 그가 나아 다시 출근할 때까지 기다려 준 일이 있는데 그 후로 그는 더욱 충성을 다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 그렇게 믿었던 수하르디마저 우리 등에 비수를 박으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 오토바이가 월급과 퇴직금을 정산할 유일한 재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압력을 넣고 경찰을 부르겠다는 얘기까지 나오면서 결국 수하르디는 어쩔 수 없이 그 오토바이를 사무실에 반납했고 직원들 퇴직금을 간신히 정산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 선의에 보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등 뒤에서 칼을 겨누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물어 뜯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우린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려 있었으므로 비록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서도 안디 루디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안디는 당시 유숩 상공부 장관의 아들들과 가까운 관계였는데 스망기 인터체인지의 힐튼 호텔 로비에서 사업가들의 여러가지 청탁을 들어주고 있던 그들의 일에도 간여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시온 공장에 세무문제가 생겨 우리가 유숩 장관 아들들을 소개해 주게 된 것도 이 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디의 제안의 골자는 유숩 장관 아들들을 통해 아르타 그라하 은행(Bank Artha Graha)에 압력을 넣어 200만불 정도의 론을 받아 주겠다는 것이었고 담보는 자기가 준비할 테니 우리 회사 명의로 론을 받아 받은 론의 40%를 성공부 조건으로 자기에게 떼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변제 책임은 우리가 지고 진행 경비도 우리가 내는 조건이었어요. 그런 론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긴 힘들었지만 만약 정말 우리가 200만불을 대출받아 120만불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급한 빚들을 청산하고 나서도 아직도 충분한 자금으로 농산물 사업을 대규모로 돌려 어떻게 해서든 몇 년 내에 대출금을 모두 갚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힐튼 호텔에서 만나 본 유숩 장관의 아들들은 정말 대대적으로 로비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우리 앞 뒤로 그들을 만나 뭔가 청탁하려고 찾아 온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었기 때문에 약속시간을 잡고 왔음에도 우린 두 시간 정도를 기다린 끝에야 비로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족관계 증명서를 꺼내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정말 유숩장관의 아들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안디 루디의 말과 힐튼 호텔 로비의 광경은 그것이 사실임을 강변하고 있었어요. 우리를 만난 그들은 그런 은행대출을 받아 주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했고 안디 루디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불가능이란 전혀 없는 전지전능한 수퍼맨들이었고 우주의 지배자들이었습니다. 단지 론을 받기까지의 과정에서 얼마간의 시간과 약간의 진행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우린 그 시간과 진행비조차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공부 조건으로 자신들의 지분 25%를 요구해 옵니다.

 

이렇게 해서 안디에게 40%, 유숩장관 아들들에게 25%, 남는 것은 35% . 200만불을 받더라도 우리 손에 쥐는 것은 고작 70만불이 되는 것이죠. 당초에 생각했던 금액에서 갑자기 산수가 복잡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디가 약속했던 담보물건도 유숩장관의 아들들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장소는 자카르타 남부를 벗어나 한참을 달린 끝에 도착한 찌간주르(Ciganjur). 그곳에 작은 집이 세워져 있는 3 sq.m 정도의 정글처럼 수풀이 우거진 그림 같은 대지가 황량한 좁은 도로의 높은 담장 안쪽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떤 세무 공무원으로 정년을 마친 사람이 오래 전 구입했던 것으로 이제 당사자는 고인이 되었고 네 명의 자녀가 공동명의로 소유하고 있던 땅이었어요. 그 땅 말고도 그들은 발리와 바탐섬 등에도 막대한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인도네시아 세무 공무원의 월급이 얼마이기에 어떻게 당대에 그런 거부가 될 수 있었는지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안디가 땅 소유주 형제들의 대표와 맺은 약속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이 땅을 빌려 주는 대신 우린 대출이 성사되면 그 땅 값의 2배 정도를 쳐서 구매해 준다는 것이었죠. 그들이 땅문서와 함께 보여준 정부 발행 공시가격 증명서인 N.J.O.P 상의 가격은 Sq.m 3만 루피아. 대출이 성사되면 sq.m 6만 루피아로 쳐서 총 18억 루피아, 20만불 정도를 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액면가 10만불도 안되는 땅으로 어떻게 200만불을 대출받겠다는 것인지 난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안디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대대적인 금융업 전반의 구조조정과 통폐합에서 살아 남은 은행들은 98년을 정점으로 무더기 도산한 회사들의 압류 부동산들이 아직 넘쳐 나던 중이었죠. 그 총액이 수십조 루피아를 상회하고 있었으므로 개별 은행에서 몇백만불 정도의 추가 부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대출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요건만 갖추어 준다면 말이죠.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담보였습니다.

 

그레서 담보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담보를 공급해 줄 사람을 연계해서 인맥을 가진 사람, 그리고 대출에 명의를 댈 사람들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담보 제공자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명의를 넘겨 줄 리 없으므로 일단은 담보 제공자와 부동산 매매의 가계약만 맺어 공증을 받습니다. 그 다음 순서가 공시지가를 담당하는 부처에서 N.J.O.P를 떼어 오는 것인데 여기서 장난을 치게 되지요. 공무원이라고 해서 공시지가를 임의로 수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뒷돈을 받은 공무원은 해당 부동산의 N.J.O.P.를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고 명의와 금액 등을 요청한 대로 수정합니다. 수정한 내용을 저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랬다가는 흔적이 남게 되니까요. 수정은 했으나 저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N.J.O.P.를 정부 양식에 프린트 해서 직인 날인, 서명까지 해주므로 서류는 완벽한 오리지날처럼 보이게 되지만 프린트 한 후 컴퓨터 상의 수정자료는 저장하지 않고 수정한 내용을 취소합니다. 그런 절차를 거쳐 정부 자료의 내용은 예전과 변동 없는 상태가 되지만 우리는 원하는 금액이 찍힌 정부 공식양식의 N.J.O.P를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는 그런 방식을 통해 원래 Sq.m 3만 루피아로 총 9억 루피아, 10만불이 채 되지 않는 대지와 건물을 Sq.m 80만 루피아, 240억 루피아, 280만불 짜리로 둔갑시킨 N.J.O.P를 손에 쥐게 됩니다.

 

이건 범죄야…”

하지만 우린 대출금을 갚을 거잖아요? 뻥튀기한 금액으로 대출받더라도 대출금을 전부 갚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린 그럴 생각이었죠. 그러나 그렇게 해서 받게 될 대출금으로 땅값을 치르고 안디와 유숩 장관 아들들에게 그들 몫을 나누어 주고 나면 남은 돈으로 과연 대출금을 갚을 수 있는 규모의 사업을 꾸려 나갈 수 있을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출의 주체이고 나중에 상환책임을 질 우리들의 몫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것이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런 우려를 하면서도 우린 그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런 식의 대출 사기는 당시 무척이나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립서비스’, 일상 다반사 편에 등장했던 Tiki의 황사장도 자카르타 생활 말년이었던 2000년대 초반에는 현지인들과 팀을 만들어 이런 대출사기를 전문적으로 시도했지요. 적당한 대지를 찾아 땅주인과 계약을 맺고 값을 올리기 위해 그 땅 위에 가건물을 하나 지은 후 N.J.O.P. 수정을 통해 땅값을 뻥튀기하여 대출을 받는 것이었죠. 대출이 나오면 그 돈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어 각자 자기 몫을 나누어 갖고 대출에 명의를 댄 바지사장만 남기고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바지사장은 돈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명의를 빌려 주는 대신 1~2억 루피아 정도를 받고 그 대가로 나중에 은행이 대출금 회수에 나서면 배째라고 자빠지면서 필요하다면 몇 년 감방에 갈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안디가 제시한 구도에서 우리 회사 명의로 대출을 받는 것이었으므로 우리가 그 바지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회사의 대차대조표 등을 포함한 대출신청 서류를 은행에 접수시키고 몇 차례 보완하는 것은 신속하게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회사 서류들 조차 은행의 대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안디는 그 모든 서류들을 위조했지요. 접수한 다음의 일들은 이제 유숩 장관 아들들이 책임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서류를 그럴 듯 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은행이 아무런 조사도 없이 그렇게 만만하게 돈을 내줄 리는 없는 것이죠. 그 조사를 막거나 조사결과가 왜곡되도록 하는 것, 또는 조사결과 대출 불가로 결정이 나더라도 행장이 대출승인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지요.

 

금액이 줄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은행에서 80만불만 대출해 주겠다는군요.”

 

3개월이 훌쩍 지나 무스티카 라투 건물 사무실의 임대계약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안디는 그런 은행의 결정을 받아 우리들을 만났습니다. 산수가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80만불에서 땅값 20만불, 안디의 몫 32만불, 유숩장관 아들들의 몫 20만불을 빼면 나와 릴리 몫으로 남는 것은 불과 8만불 뿐입니다. 8만불을 받아 80만불을 갚아 나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어요.

 

우리…, 그 돈이라도 필요한 거 아니에요?”

 

안디도 돌아가고 직원들도 모두 퇴직한 지 오래인 사무실에 밤 늦게 떵그러니 단 둘이 남았을 때 릴리는 처연히 울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그 돈이라도 필요했지요. 그러나 8만불을 손에 쥐기 위해 80만불의 빚을 지고 그 중 72만불은 우리 손에 쥐어 보지도 못한 채 공중에 날려 보내야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대출을 받아도 대출을 받지 않아도 우리가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대출금은 그 추락에서 다시 날아 오를 수 있는 날개여야만 했는데 실제로는 그 낭떠러지를 더욱 깊고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이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손을 떼어야 하는 순간에 우린, 그러나 아직도 절박함에 떠 밀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 봅시다. 우선 40만불을 대출하시고 상환이 잘 되면 6개월쯤 후에 나머지 40만불을 추가로 대출하는 식으로요. 그게 피차간의 리스크를 줄이는 게 될 겁니다.”

 

아르타 그라하 은행장이 조용조용 꺼냈던 이 말은 우리 귀를 벼락처럼 때렸습니다.

대출심사의 최종단계인 행장과의 미팅에서였습니다. 40만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돈은 불과 4만불. 끈다리에서 수십만불의 돈을 날린 후 재기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금액이었고 그 돈을 받는다면 우리의 빚만 40만불 더 늘어나는 것이 될 판이었지요. 행장 앞에서 웃고 있는 내 얼굴도 자꾸 경직되고 사람들과 만날 때면 늘 당당하던 릴리조차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자꾸 목소리가 갈라졌습니다.

 

다음 약속은 1주일 후로 잡아 그때 대출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며칠 내에 돈을 내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행장과의 미팅을 끝내고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안디는 자신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영웅인 것처럼 생색을 냈습니다. 그가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서류와 우리 땅도 아닌 담보를 가지고 40만불이라는 거금을 은행이 내주도록 했다는 것이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유숩 장관 아들들의 위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목을 더욱 조여올 올가미 같은 것이었고 이제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 유리판 같은 발밑의 지반이 무너져 내리면 우린 꼼짝없이 혀를 빼물고 공중에 매달려야 하는 교수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몫은 그들이 그런 대출사기를 하는 조직이 나중에 책임을 지고 옥살이를 하게 될 바지사장에게 던져 주는 몫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나도 릴리도 40만불에 대한 대출 사기죄를 지고 감옥에 갈 수는 없었습니다.

 

생색을 내던 안디 역시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겠지요. 계획상 200만불이었던 대출금은 그 20% 40만불로 줄었고 120만불이어야 했을 우리의 몫은 줄고 줄어 3% 선인 4만불이 되었는데 수십만불의 빚을 갚고 농산물 사업을 크게 일으키려 했던 애당초의 계획은 그 돈으로는 전혀 이룰 수 없는 백일몽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저 돈을 받는 순간…., 우린 평생 사기꾼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거야. 차라리 그 돈을 받아 하와이든 남미든 아무도 찿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 버리면 모를까  이건 안디가 우리에게 40만불을 받아 준 게 아니라 우리 미래를 담보로 안디와 유숩장관 아들들, 땅 주인 형제들에게 36만불을 받아 주는 거야. 우리 코가 석 잔데 말이지…!”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든 것일까요?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우린 마치 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난 듯, 안개 자욱한 밤길 불빛 하나 없는 긴 터널을 지나 빠져 나온 듯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되찾은 이성으로 추론하고 회복된 시력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절망이라는 커다란 바위에 묶여 끝도 없는 나락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날개, 날개 할아버지를 달더라도 곧 벌어질 바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달은 것이죠. 지금까지 안디에게 놀아나 천금 같은 시간을 축냈다는 사실도요.

 

우린 그 날 밤 각자의 집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첫 번째로 했던 일은 아르타 그라하 은행에 공문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청했던 대출을 포기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대출을 추진하던 당시 안디는 우리 회사의 지분도 요청했었고 대안이 없었던 우리는 안디의 요청대로 30%의 지분을 넘겨 주고서 그를 정관상 이사로 등재했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대목은 안디가 우리 회사의 이사 자격으로 은행을 찾아가 대출 서류에 서명하고 돈을 받아갈 지도 모른다는 부분이었어요.

 

그 서류를 은행에 접수시킨 후 안디에게 연락을 내고 유숩 장관의 아들들에게도 통지해 달라고 얘기했지요. 안디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의 의도를 뒤늦게나마 간파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 정관에는 그가 여전히 이사로 남아 있었으므로 몇 년 후 간신히 사태를 수습한 릴리가 그 회사 이름으로 인디아 회사들과 JV계약을 맺으려 할 때 안디의 이름을 빼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몇 년 후 우리가 재기하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파산의 심연으로 속절없이 빠져 들 뿐이었고 이제 남은 일은 계약이 끝난 무스티카 라투 건물에서 무용지물이 되어 어디에도 갇다 놓을 수 없게 된 우리의 적지 않은 짐들을 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 비용조차 없었고요.

 

우린 완전히 파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우린 다시 온 몸으로 이 세상의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정점에 섰을 때 우리에게 손을 벌리고 자기 간이라도 꺼내 줄 것 같던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의를 배풀었던 사람들이, 우리가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짓밟고 파묻으려 하게 된다는 것을요.

 

파산은 고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고생의 시작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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