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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적도에 부는 바람

적도에 부는 바람 (3)

beautician 2009. 9. 29. 14:40

 

 

나는 릴리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릴리와,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과 매일 전화통화를 했어요. 그리고 2 3일의 일정으로 끈다리를 다녀온 루벤과는 그가 자카르타에 귀임한 날 저녁에 만나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장례식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연이 그렇듯 오래 전 루벤을 처음 만났던 것도 우연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한 길이 없습니다. 릴리와 루벤의 얘기를 하려면 이 에피소드는 삼천포로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저 바다 건너 섬까지 다녀와야 하겠지만 그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그간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술라웨시 출신의 톰보이 릴리와 앞으로도 여러 에피소드에 계속 등장하게 될 날카로운 콧날을 지닌 벨기에 미남 루벤이 서로 만나게 된 사연은 내가 다니던 북부 자카르타 짜꿍 KBN 공단의 한화공장이 매각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래 전 지사에서 생긴 일 편에서 소개했던 자카르타의 PT. Hanwha Indonesia가 벨기에에 본사를 둔 유럽 굴지의 섬유 회사 시온(SIOEN)에 매각된 것은 운도 좋았고 여러 관계 당사자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공장장 입장에서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마이너스 28만불에 달하는 비자금 문제를 본사에 숨기고 있던 차였고 그가 본사에 귀임한다면 후임자에게 그 비자금 문제 역시 인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지요. 당시 후임 공장장 내정자로서 자카르타에 도착했던 나를 죽을 힘을 다해 지사 부적격자로 몰고 본사로 축출하려 했던 것도, 심지어 내 자동차 바퀴에 칼집을 내어 고속도로 어딘가에서 고속으로 달리다가 바퀴가 터지는 사고로 죽기를 바랬던 이유도 그 비자금을 비밀리에 인계해 달라는 그의 부탁을 내가 거절했기 때문이었어요. 공장장이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월급쟁이 입장은 변함이 없는데 당시 월급을 기준해 근 1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비자금을 내가 감수하고 깔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를 본사로 쫓아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서 공장장으로서는 그 비자금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그를 짓누르는 말도 못할 스트레스였을 것이고 누적적자가 산더미 같은 공장을 본사에서 폐쇄하는 방침을 검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만약 폐쇄하게 될 경우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본사 재경부 감사팀의 감사에서 그 비자금 부분이 드러나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벨기에 시온 사의 공장인수 제의는 공장 회생방안을 찾지 못했던 한화 본사는 물론 공장장 입장에서는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겠죠. 공장장은 공장을 헐값에 넘기는 조건으로 비자금 은폐에 대해 시온 측과 딜을 했고 여러 사람을 이러 저런 모양으로 망가뜨렸던 비자금 문제는 그렇게 묻혀 버리게 됩니다.

 

시온의 소유주인 시온 여사가 직접 인수를 진행했다면 그 분의 대쪽같이 깐깐한 성격에 공장장의 비자금 문제는 여지없이 한화 본사에도 통지되어 공장의 가격을 그만큼 더 깎아 내렸겠지만 시온의 현지 대리인으로 훗날 시온의 현지 법인장이 되는 프레드릭(Frederik)은 수완도 좋은 만큼 어느 정도의 비정상적인 부분도 적당히 처리할 줄도 아는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장장의 비자금 문제를 숨겨 주는 대신 그것을 빌미로 공장의 가격을 후려쳤고 공장장은 오히려 시온의 편에 서서 본사가 말도 안되는 시온의 인수가격을 받아 들이도록 손을 썼어요. 그래서 1987년에 설립되어 대지 6sq.m, 건평 3sq.m에 한때 종업원 800명 규모에 연 1~2천만불 수출물량을 생산했던 한화 인도네시아 봉제공장은 당시 공장장이 전임자로부터 공장을 물려 받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1996년도에 결국 10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시온에 매각됩니다

 

그 당시 매각 가격이라고 알려졌던 300만불은 공장 건물과 설비, 각종 기계와 제품 및 원부자재 재고 등만 따져도 차량으로 치면 폐차가격이나 다름 없었으므로 시온은 처음부터 큰 이익을 보면서 인도네시아 사업을 시작했고 당시 현지공장이 본사에 치르지 못한 D/A 자재대금 수백만불의 채무도 시온이 인수하여 2년인가의 거치기간 후부터 상환하는 것으로 본사에 보고되었다고 하나 시온은 결국 해당 채무를 단 1불도 지불하지 않은 채 나중엔 흐지부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프레드릭에게 들은 바로는 그것이 공장장과 했던 딜의 핵심 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공장이 매각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고 본사로 귀임한 공장장은 금융위기로 인한 기업구조조정이 한창이던 당시 명예퇴직을 신청해 퇴직장려금을 잔뜩 받고 퇴직해 버립니다. 결국 공중으로 증발해 버린 D/A 대금 수백만불의 문제가 정작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그 문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이미 회사를 떠난 후였던 거에요. 생각해 보면 공장장의 비자금 마이너스 28만불은 한화가 그 수십배의 손해를 보게 하는 폭탄의 뇌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취급하던 레인웨어는 당시만 해도 영원무역 등 투습원단 관련 전문업체가 아니면 일반적이지 않았던 씸테이핑(Seam Taping) 공정을 거쳐야 했고 해당 기계를 갖춘 회사나 기계가 있다 하더라도 요구되는 내수압을 낼 수 있도록 생산 가능한 공장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는 기도자야(PT. Kido Jaya)나 일본인 친구 히데키의 카지산교(PT. Kaji Sangyo) 정도를 빼면 아직 전무하던 시절이라 시온이 인수한 한화공장에 당장 오더를 넣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닥쳐 내가 본사에 귀임한 직후 동반 퇴사한 의류팀 직원들이 만든 신진무역의 인도네시아 지점장 자격으로 그 프레드릭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했던 것이 1996년 말 경이었습니다. 그 미팅이 매우 껄끄러웠던 이유는 프레드릭 본인 역시 워낙 까탈스러운 인물이기도 했지만 당시 한화와의 인수인계의 마지막 단계인 공동근무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나와 그토록 반목하며 급기야 목숨까지 노렸던 공장장이 아직 그 공장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내가 직접 공장에 들어선다면 공장장은 뒤집어질 듯 놀랐겠지만 나 역시 도저히 미팅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고 공장장은 어떻게 해서든 내가 프레드릭과 딜을 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았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민 카드가 릴리였습니다.

 

내가 릴리를 처음 만난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전쯤이어요.

 

여비서 채용면접 편에서 소개했던 공장장 비서를 채용할 당시 나는 나대로 공장장 내정자로서 공장을 인수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경리과에 내 사람을 하나 만들어 심는 것이었어요. 당시 경리과장은 전임 공장장 시절에 어떤 문제로 퇴직했다가 당시 공장장이 다시 불러 들였던 20대 중반의 이인(IIN)이라는 이름의 짝달막한 여자였는데 공장장을 아빠라 부르며 현지직원들에게는 물론 나나 다른 한국인 직원들에게도 공장장을 믿고 위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세무서나 관세청 등에 준다며 뭉치돈을 007 가방에 우겨 넣고 나가곤 하던 공장장은 마이너스 비자금 문제가 불거진 후 경리업무는 이인하고만 속삭이며 내게는 꽁꽁 숨기고 있었고 매주 본사에 경리보고를 해야 했던 내가 자료를 요청하면 공장장에게 직접 물어 보라는 쪽지를 보내오거나 억지로 내 책상 앞에 불러 세우면 턱을 치켜 올린 자세로 당신 함부로 하면 우리 아빠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라는 표정으로 나를 도도하게 내려다 보곤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록 수많은 문제가 불거져 있었지만 이듬해 상반기가 되면 어쨌든 적정 해외근무 임기를 채우고도 3년 이상을 넘긴 공장장은 본사로 귀임할 것이고 그때까지 공장장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내가 힘닿는 데까지 스스로 찾아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정작 이듬해 7월에 오히려 내가 짐을 싸고 불명예스럽게 본사에 돌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은 상상치도 못하고서요. 그런 외중에 내가 공장장이 되면 이인 같은 싸가지를 믿고 경리 일을 맡겨 놓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인을 당장 내보내거나 직위 해제하면 경리업무는 전혀 인수인계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 상황이었죠. 그래서 이인을 경리과장으로 그대로 놔두더라도 경리업무를 파악할 내 사람을 경리과 사무실에 넣어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신문광고를 내거나 다른 한국인 공장에 인원수배를 부탁하면 틀림없이 공장장 귀에 들어가 견제와 훼방이 들어올 것이 뻔한 일이었으므로 몇몇 지인들을 통해 소리소문없이 경력사원을 수배하는 한편 시내 몇몇 유명 대학의 해당 학과장들을 만나 졸업예정자 중 유능한 학생들의 추천을 부탁했어요. 그러다가 UNAS 대학(Universitas Nasional)에서 소개받은 사람이 릴리였습니다.

 

릴리는 당시 D-3, 한국으로 치면 3년차 수료를 앞두고 있던 학생이었어요. 다른 학생들보다 두 살쯤 나이가 많았고 호주 시드니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오기도 했었죠. 나중에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해 4년제 학사학위와 같은 S-1 학위를 받고 뜨리삭티(Tri Sakti) 대학에도 편입해 공부를 계속하게 되지만 당시엔 돈을 벌기 위해 휴학을 반복하면서도 훌륭한 성적을 유지했고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키에 당찬 성격을 가진 이 아가씨는 주말마다 공장 밖에서 면접을 보았던 여러 경리 후보자들에 비해 월등히 나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릴리의 채용은 내가 한국으로 쫓겨 가면서 무산되고 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이 훨씬 나은 일이었어요. 만약 릴리를 채용한 후 내가 한국에 귀임했다면 내가 뽑은 직원이라는 꼬리표때문에 공장장과 이인에게 몹시도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공장장 비서로 채용했던 에피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채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국에 가서도 늘 마음에 걸렸어요.

 

그 후 2개월 동안 본사에서 대기발령을 받고 무척이나 번민한 끝에 9년 가까이 몸담았던 한화에 사표를 제출했을 때 릴리와의 약속을 기억해 냈습니다. 당시 한화는 인도네시아의 공장만 매각한 것이 아니라 차제에 의류팀을 통째로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의류팀 동료들은 회사 내 각부서로 흩어지는 대신 대부분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가 의류팀을 버리면서 동시에 포기해 버린 많은 해외거래선들을 추스려 우리들의 회사를 세웠습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의 생산관리를 맡기로 했고 현지에 내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릴리에게 전화를 했고 그녀는 흔쾌히 우리의 신진무역이라는 배에 올라 탔습니다.

 

릴리를 그때 한국까지 불러 들인 것은 좀 지나친 조치였는지 모릅니다. 함께 퇴사한 의류팀 동료들은 릴리를 창업 멤버로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고 나 역시 이제 막 입사한 셈이 되는 릴리에게 내 지분을 나누어 줄 생각은 없었어요. 

 

당시 동료들은 한화 시절 자재를 공급했던 김부장이라는 분의 남산 사무실을 무상으로 함께 쓰기로 해 나름대로 제대로 갖추어진 업무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한화의 공장매각과 함께 상당수의 해외거래선들이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 갔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또 다른 상당수의 거래선들이 계속 거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당장 일을 시작하는 데엔 별로 문제가 없었지요. 실제로 노르웨이의 헬리 한센(Helly Hansen) 같은 거래선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오더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카르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맨바닥에서부터 맨손으로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화시절 받았던 회사의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주택, 비자, 차량 같은 큼직한 비용들은 물론 사무실 임대료와 운영경비까지 직접 마련해야 했고 우리들의 회사는 그런 비용들을 보조해 주기는커녕 당장의 운영자금조차 각자의 주머니에서 갹출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자카르타에서의 모든 비용은 우선 내 퇴직금에서 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을 함께 할 사람이 릴리였고 내가 자카르타에 돌아가자마자 당장 일을 시작해야 했으므로 릴리를 불러 들여 사전 업무교육을 한국에서 하면서 준비시간을 줄여 보기로 한 것이죠.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릴리는 김부장의 어머니 댁인 한강변 아파트에서 지내며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명동역까지 출퇴근했는데 그때 그녀가 한국에서 좌충우돌했던 에피소드들은 언제가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자카르타에 돌아온 것이 대략 그 해 8월말 경이었고 자카르타 북부의 뿔로가둥(Pulo Gadung)에서 버카시(Bekasi)로 연결되는 도로에서 KBN이 있는 찔린찡(Jl. Raya Cilincing) 도로 한 블록 앞인 띠빠르 짜꿍(Jl. Tipar Cakung)에 있던 우리 PVC 우의 주계약공장 2층 방에 우리 사무실을 설치하고 곧 이어 공장장 비서로 채용되었다가 내가 귀국한지 얼마 후 사직한 에피(Evi)가 합류하면서 릴리가 마케팅을 맡고 에피가 내부업무를 보는 식으로 업무분장도 대충 이루어졌지요. 원래 경리학과 출신인 릴리가 내부업무도 함께 보는 게 맞았겠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거의 숫자치에 가까웠어요. 물론 릴리가 이 글을 읽으면 노발대발 화를 낼 것이 뻔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누구 못지 않게 계산 확실하고 제반 세무 문제까지 꿰뚫고 있지만 D-3 수료증을 받았던 당시의 릴리가 만드는 경리서류는 내 고협압을 유발하곤 했어요.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 않고 시켜 본 마케팅, QC 등에서 릴리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닥쳐서 한번 해보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릴리를 나 대신 시온 공장에 혼자 들여 보낸 후 공장 밖에 차를 대고 기다리면서 나는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차 훌륭한 마케터가 될 재목이 분명했지만 릴리는 그 때 스무살을 갓 넘은 애기였고 함께 일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더욱이 그녀는 우리가 오더를 주어야 할 레인웨어 쌤플을 들고 들어가긴 했지만 그 옷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나름대로 충분히 상황설명을 했고 프레드릭과 상담할 방식을 여러 차례 얘기해 주었지만 그렇게 릴리를 들여 보낸 것은 사실 나로서는 못먹는 감 최소한 찔러는 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하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할 시온과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는 적대적인 공장장 앞에서 대망신을 당하는 것이나 아닐까 우려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릴리는 거기서 놀라운 수완을 발휘합니다. 20~30분이면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릴리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나왔고 차에 올라 타면서 내 코 앞에 계약서를 들이 밀었어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서 초안도 만들어 주지 않았었는데 릴리는 그 날 프레드릭과의 첫 미팅에서 노르웨이 물량에 대한 계약서를 제대로 만들어 프레드릭의 서명까지 받아 온 것입니다. 프레드릭의 서명 옆에는 신진무역의 마케팅 매니저의 자격으로 휘날려 쓴 멋들어진 자기 사인까지 곁들여서 말이죠. 그러고는 헤헤 웃고 있는 릴리의 얼굴을 보며 나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시온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던 것도 크게 작용했어요. 예상했던 대로 공장장의 견제가 들어왔지만 인도네시아 공장을 막 인수한 시온 입장에서는 자신들로서는 아직 스스로의 생산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자기들 오더를 함부로 넣을 수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 전에 테스트가 필요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릴리가 노르웨이 오더를 들고 들어왔고 프레드릭으로서는 그 공장에서 지난 수년간 줄곧 해왔던 유럽 오더라는 점, 그것도 유럽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는 헬리 한센의 오더라는 점에서 크게 반색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오더가 시온의 실험용 모르못이 된 것입니다.

 

루벤(Ruben)이 시온에 합류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시온과의 거래가 시작한 지 한 달 반쯤 후였습니다. 중부 자와의 스마랑 (Semarang) 지역에서 2년간 일했던 루벤은 어느 날부터인가 시온 현지공장의 재무담당 이사로서 내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는 생산담당 벨기에 직원들을 채용하기 이전이었고 루벤 스스로도 비록 업무는 재무, 경리 쪽이었지만 생산공정과 문제점들을 파악해야 하는 단계여서 우리가 공장을 방문하면 한 두 시간 씩 함께 제품검사를 하곤 했습니다.

 

한화 공장장은 그때 이미 한국으로 귀임한 상태였고 프레드릭은 인수인계가 미진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만 보면 자기 방에 앉혀 놓고 커피를 마시며 종업원 근무조건부터 시작해 야간 경비운용 등에 이르는 공장운영 전반에 대한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해오곤 했으므로 루벤은 그 때 릴리와 함께 제품검사를 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미스터 배. 요즘 왜 그 아가씨 안 보여요? 릴리, 그 아가씨요?”

릴리는 요즘 몸이 좀 아파요.”

 

릴리가 한동안 공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루벤은 넌지시 그렇게 내게 물어오곤 했습니다. 그땐 그냥 예의상 묻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루벤은 자꾸 릴리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해왔고 심지어는 내게 자주 전화를 걸어 릴리의 안부를 묻곤 했어요. 릴리는 쭈삣거리는 모습이었고 시온에 제품검사하러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했습니다.

 

루벤, 그렇게 릴리가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릴리 명함 못받았어요? 핸드폰 번호 거기 있는데.”

그게 말이죠. 릴리가 전화를 잘 안받아서요. 내 전화 받기 싫은가…?”

 

살짝 감이 왔습니다.

 

이번 주말에 대사관 주최로 물리아 호텔에서 벨기에 사업가들 만찬이 있어요. 시온에서도 나랑 프레드릭이 가는데 부부동반이라...., 릴리가 내 파트너로 같이 가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화해도, SMS 보내도 답장이 없네요.”

…, 그럼 내가 한번 물어 볼게요. 가능하면 릴리가 적접 전화로 대답하게 할게요.”

 

루벤은 그때 정말 숫기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용기를 내어 릴리를 찾는 것을 보면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사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면서 루벤 만큼 신변이 깨끗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비단 여자관계뿐 아니라 업무에서도 생활에서도 나는 그에게서 단 한 점의 구김살도 보지 못했거든요. 그는 좋은 남자였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마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그에게서 나와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 것도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루벤이 프레드릭과 늘 티격태격한다는 점이었어요.

프레드릭은 원래 카페트 공장을 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집안은 벨기에에서 산악용 자전거를 만드는 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사람들을 부리며 자랐고 자기 사업을 하는 동안 시냇가의 자갈처럼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뺀질뺀질한 인간이 되어 있었어요, 사실 프레드릭은 누구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담 시온에게만 쩔쩔 매는 시늉을 할 뿐 우리 공장장 이상으로 공장에서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했고 우리 오더를 진행하면서도 이런 저런 문제로 거의 매일 나와 서로 열을 내며 말다툼을 하곤 했어요. 나중의 일이지만 시온이 한화공장을 인수한 지 10년 차쯤 되었을 때 프레드릭은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훌륭한 집을 발리 해변가에 사지만 오랫동안 업계에 나돌던 소문대로 그가 자재업체들에게 뇌물을 받고 공급계약을 수의로 해주었다는 사실이 마담 시온에게 들통나면서 하루 아침에 회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 프레드릭도 루벤에게 몹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몇 번 함께 끄망(kemang) 지역의 The BEAT 라는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 루벤은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처럼 공장에서 벌어지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깐깐하게 자기 할 말을 다 하며 때로는 자기 상관인 현지 법인장 프레드릭의 잘못까지 지적하며 자못 격앙되기도 했지만 프레드릭은 꼼짝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루벤의 말을 모두 수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루벤이 하는 말에 틀린 점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나라가 다른 만큼 기업문화도 그만큼 다른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군 경력이었어요. 나는 ROTC 과정을 거쳐 군생활을 하고 중위로 제대했어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첫 빠따로 나찌 독일의 군화발에 짓밟혔던 벨기에는 그래서 한국이나 대만, 싱가폴 등과 마찬가지로 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였던 모양이고 루벤도 장교과정을 거쳐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별로 꺼내지 않는 군 시절 얘기를 루벤과는 밤이 깊도록 얘기하곤 했어요. 늘 조목조목 따지며 조리있게 얘기하던 루벤도 군 얘기만 나오면 모션이 커지면서 자기 경험담을 풀어 놓았는데 그는 보병인데도 낙하산을 네 번인가 탔다고 하며 한번은 연대 단위의 침투 및 탈출 모의훈련을 할 때 애당초 계획에도 없던 헬리콥터를 무전으로 불러 소대원 모두를 태워 호기롭게 탈출했다는 에피소드를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한국군 같으면 연대장에게 쪼인트 맞을 일이었죠.

 

회사 관리부문 우두머리로서의 루벤은 결벽증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와 릴리가 파산할 당시 관할 세무서는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잡아 100만불의 추징금과 함께 천문학적인 벌금을 시온에 때리고서 형사고발까지 운운하며 감경 조건으로 막대한 뒷돈을 요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일반 한국 기업 같으면 적당히 뒷돈을 주면서 후려쳐 벌금을 줄였을 그 상황에서 루벤은 세무서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이미 기가 꺾인 프레드릭은 릴리를 통해 지금은 술탄 호텔로 이름이 바뀐 스망기 인터체인지(Semanggi Interchange) 힐튼 호텔의 1층 로비에서 이런 저런 이권에 관련된 로비청탁을 받으며 엄청난 돈을 챙기던 당시 와히드 대통령 정권의 유숩 상공부 장관 아들들에게까지 선을 대면서 절충을 종용했었죠.

 

유숩 장관은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세간에는 청렴하다고 인식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당시 자기들에게 50만불을 주면 추징금을 20만불까지 깎아 주고 벌금도 내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제의를 루벤에게 해 왔고 루벤은 그들과 대판 말다툼을 벌입니다. 세무 자료에 전혀 잘못이 없는데 시온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인정하고 얼마가 되었든 추징금을 낸다는 것을 루벤은 받아 들일 수 없었고 그 오류를 당연히 바로 잡아 주어야 할 사람이 상공부 장관인데 그 아들들이 터무니없는 뒷돈을 요구하는 것이 가증스러웠던 것이죠.

 

그 후 루벤은 반둥의 세무서 본청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2년여를 싸웠고 회사를 부패시키려는 정부관청이 있는 나라에서는 공장을 철수하겠다는 시온 본사와 벨기에 대사관의 지원사격을 받아 결국 한 푼의 추징금도 내지 않고 그 사건을 성공적으로 종결시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007 가방에 돈뭉치를 넣고 세무서 직원을 만나러 가던 우리 공장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지요.

 

그 일이 해결된 지 불과 1년쯤 후 프레드릭이 앞서 기술한 수의계약과 뇌물문제로 해고 당했을 때 마담 시온이 루벤에게 현지 법인장 자리를 제의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루벤도 사랑 문제에 있어서는 엉성하기 그지없었어요.

게다가 이 문제는 시온 본사나 벨기에 대사관이 지원사격을 해줄 만한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내가 결혼 선배라는 입장에서 지원사격을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릴리가 국적과 문화가 다른 루벤과 사랑을 하게 되고 나중에 궁극적으로 결혼하게 되는 것이 과연 릴리나 루벤에게 좋은 일인지는 그 당시 알 수 없었습니다. 국제결혼을 한 커플들, 특히 부인들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극심한 고생을 한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런 심각한 관계까지 가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유능하고 깨끗한 남자 루벤과 용감하고 전도양양한 릴리가 서로 사귀게 된다는 것이 왠지 너무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 지원사격 역시 너무나 엉성했던 탓에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직도 많은 시간이 더 걸리게 됩니다. 더욱이 릴리는 계속 루벤을 피하는 중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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