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적도에 부는 바람

적도에 부는 바람 (2)

beautician 2009. 9. 14. 18:18

 

 

끈다리에 감독관을 보내고자 했던 이유는 비단 현장 감독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끈다리 출장 중 아미르(Amirudin)와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고 그래서 자카르타와 끈다리 사이에서 객관적으로 현장상황을 보고해 주고 우리 지시를 이행해 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죠. 사실 아미르의 역할이 원래 그런 것이어야 했지만 그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출장 중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아미르가 소설을 썼던 그 가공의 두 컨테이너에 실렸어야 할 목재가 제재소에도 없다는 것이었어요. 생산에 필요한 경비는 그 몇 배로 지급되었는데 말이죠.

 

아미르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말끝을 흐리며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출장기간 내내 제대로 된 해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재소에 우리가 사용하는 방키라이 나무 대신에 우리 사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티(Jati – 티크 나무) 원목들이 몇 트럭 분 정도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아마도 아미르가 우리가 보낸 돈으로 우리 등 뒤에서 자티 나무 장사를 하려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도 직경 2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나무들이었기 때문에 적정 수율을 기대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벌목 등 자원과 관련된 이런 저런 허가를 내 주는 입장에 있던 아미르였지만 실제 현장경험, 사업경험이 없었던 그로서는 자티가 비싸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그런 허접스러운 원목을 속아 샀던 것이고 그래서 원래 자기 주머니를 몰래 채우겠다는 소기의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욱 정나미가 떨어졌던 이유는 자카르타로 돌아오기 전날 밤 내가 묶던 릴리 아버지 집에 찾아온 아미르와 밤늦게 나누었던 대화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준 4륜구동 찦차를 타고 왔어요. 비록 중고를 헐값에 산 것이었지만 제재소와 벌목장 사이를 오가며 목재 운송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어야 할 그 차를 아미르는 밤낮으로 자기 자가용처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뭐 보고하라는 게 그리 많소? 내가 이 지역 짜맛인데 당신이 요구하는 서류 다 만들어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자금 사용처 내역을 요청하는 내게 그는 정말 대책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어요.

 

돈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야 예산도 미리미리 짤 것 아니겠어요? 당신이 짜맛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이제 와서 그걸 나한테 강조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보내달라는 돈 다 보내 줬는데 어디다 썼는지 얘기해 줄 수 없다는 게 말이 되요? 짜맛 할아버지라도 그럴 수 없는 거에요. 돈이 예정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야 필요한 다음 자금도 보내 줄 수 있다고요.”

 

마치 콘크리트 벽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나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돈 몇 푼 보내 주면서 요구하는 게 너무 많지 않소? 그럼 내가 서류 다 만들어 줄 테니 한꺼번에 20억 루피아 정도 보내 주겠소? 어차피 앞으로 들어갈 돈인데 미리 보내줘도 상관없는 거 아니요?”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억 루피아면 20만불, 한국돈으로도 2억원이 훌쩍 넘는 큰 돈입니다.

 

이미 들어간 돈이 30억 루피아가 넘어요. 초창기에 릴리가 가져온 사무실 임대료나 집기들 영수증 말고는 그간 비용에 대해 당신한테 영수증 한 장 받은 게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돈은 계속 요구하면서 영수증은 한 장도 줄 수 없단 말인가요?”

그렇소!”

 

이젠 막 가자는 것입니다. 이미 돈을 그만큼 집어 넣었으니 그 돈이 아까워서라도 돈을 추가로 보내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계산을 아미르는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보내 주지 않으면 영수증은 한 장도 줄 수 없어요. 어차피 내 돈 든 것도 아니니 돈 안보내 주면 저 제재소에 불을 확 질러 버리든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바로 전날 자기 아버지에게 호된 꾸중을 듣고서도 전혀 약발이 먹히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그 정도로 자기가 기죽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Jangan belai kepala sambil tarik ekornya. 알겠소?”
뭐라고요?”

 

장안 블라이 끄팔라 삼빌 따릭 에꼬르냐머리 쓰다듬으며 꼬리 잡아 당기지 말라이 얘기는 보내라는 돈이나 제 때 보내고 이런 저런 영수증 같은 거 요구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머리에 증기가 나도록 열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 인간의 두뇌 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었기에 저렇게 철면피일 수 있는 걸까요? 그 당시 이미 대충은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고위 공무원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위세를 과시하며 주변 사람들의 돈을 뜯어 먹는 데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고 아미르도 그런 인간들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난 이런 인간에게 제재소를 맡기기로 결정했던 릴리가 미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이 일은 나랑 릴리가 하는 거요. 당신은 돈만 대고 나중에 내가 이익 내주면 되는 거 아니요?”

 

인도네시안 드림 편에 등장하는 최사장도 똑 같은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아미르는 공무원이 되지 않았다면 사기꾼이나 마피아가 되었을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일에 대한 그의 인식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애당초 이 사업은 그와 릴리가 하면서 내가 옆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나와 릴리가 이 사업을 벌이고 아미르가 필요한 부분을 협조해 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고서 주인행세를 하려 들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내주는 돈을 뒤로 빼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 지금 꿈꾸고 있는 거요. 당신 입장이 그렇고 짜맛이라 바빠 죽겠다면 제재소 맡을 사람을 내가 자카르타에서 보내겠소. 어차피 이젠 당신 아버님도 개입된 셈이니 우선 당신이 지금 내게 한 이 얘기들부터 내일 아침에 당신 아버님이랑 얘기해 보는 게 낫겠어요.”

 

그는 금방 안색이 변합니다.

 

이런, 이런…, 미스터르 배, 사람이 농담도 못 받아 들이나? 농담이라니까 농담.”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여전히 교활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출장기간 동안 그의 진심을 충분히 읽었습니다. 그는 공무원으로서도 썩을 데로 썩어 있었고 사업 파트너, 조력자로서는 만약 내가 초창기에 와서 세팅을 했다면 애당초 이 사업에 손끝 하나 대도록 허용했을 리 없는 최악의 인간이었어요.

 

“20억 루피아가 곤란하면…, 그럼 10억 루피아라도 먼저 보내 주면 안되시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릴리 아버지 집을 나서면서 그는 그렇게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이 그렇듯 돈냄새가 나는 곳에서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끈질김을 보입니다. 아미르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내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어? 내 생각은 네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거야. 아미르, 그 인간은, 네 오빠라 미안하지만 우리랑 이 사업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우린 지금까지 밑빠진 독에 돈을 퍼부어 버렸고 내가 보기엔 대부분 회수 불능이야. 아미르가 다 먹어버린 거라구. 이젠 결정을 해야 돼. 여기서 멈출 건지, 아니면 아미르 대신 제제소 맡을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울 건지 말이야.”

 

출장에서 돌아온 날 저녁, 릴리와의 미팅은 아미르의 성토대회로 변해 있었습니다. 릴리는 내 등등한 기세와 격앙된 어조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고요.

 

여기서 멈추면 지금까지 들어간 돈을 모두 잃고 마는 거야. 제재소에 있는 기계랑 재고 바록들 다 팔아도 10분의 1도 못 건져. 아니, 기껏 20분의 1?  더 간다면 더 잃을 수도 있고 손해를 만회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만 아미르가 맡고 있다면 추가로 넣는 돈마저 다 잃게 될 거야. 그건 분명한 사실이라구.  상황 얘기는 이제 다 했어. 도대체 넌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 거야?”

 

늘 패기만만하던 릴리도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릴리라고 내가 출장 가서 보고 느꼈던 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르가 큰 오빠라는 이유로, 그래서 막내 동생에게 절대 사기를 처먹을 리 없다고 확신했던 것인데 모든 증거와 정황은 아미르가 우리 사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가리키고 있었고 그것은 릴리 스스로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었죠.

 

그렇다고 릴리에게만 모든 책임을 지라고 밀어 붙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릴리는 내가 선택한 동업자였고 릴리의 실수는 내 실수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세라 지역의 모든 허가권을 쥐고 있는 아미르를 우리 사업에서 완전히 제외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임은 분명했어요. 그가 앙심을 품으면 앞으로 우리가 받으려는 모든 허가에 비토를 놓을 것이고 그럼 우린 벌목도, 반출도, 선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미르가 정직하고 건강한 사업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우리들의 합작은 큰 시너지 효과를 얻었을 것이고 아세라 제재소는 쌩쌩 돌아가며 우리들의 캐쉬카우(Cash cow)가 되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닳을 대로 닳은 부패한 고위 공무원의 빨아 먹을 수 있는 최대한도까지 빨아 먹고야 말겠다는 본능은 이제 타인들에게는 물론 가족, 친지, 형제들에게마저 가동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의 그런 방향성은 앞으로 우리가 마련할 모든 대책의 전제조건으로 취급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내가 끈다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던 감독관 파견이었어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미르 곁에 붙어 그가 딴 짓을 못하도록 감독하고 모든 구매와 지출을 통제하는 것이었죠. 아미르가 절대 좋아할 리 없는 조치였지만 우린 이 사업을 여유자금으로 취미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실패하면 우리 목을 조여올 올가미가 이미 우리 목에 걸려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고,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아미르의 기분을 맞추어 주어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마침 우리 얘기를 들은 수라바야 거래선 요한(Johan)이 감독관을 소개해 주었어요. 그는 한때 자기 목재사업을 한 적도 있고 한동안 요한의 일을 봐주며 주로 깔리만탄 지역에서 일했던 30대 중반의 화교였습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지식이나 경력도 충분했고 무엇보다도 요한이 보증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믿을 수 있었어요. 요한은 이미 상당한 액수의 다운 페이먼트를 해 놓고도 물건은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그로서도 자신이 기지불한 돈과 이익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 직원으로 정식 채용하고 내가 끈다리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릴리가 그 화교 감독관과 함께 끈다리행 비행기를 탑니다.

 

비록 함께 가지는 않았지만 끈다리 상황은 훤히 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아미르는 우리 조치에 크게 반발했지만 릴리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우리에게 대놓고 반대를 표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 옛날 인디아의 마하트마 간디가 했던 것처럼 비폭력 비협조…, 말하자면 짜맛 일이 바쁘다며 제재소나 벌목장엔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제재소의 심복에게 몰래 지시해 감독관에게 가능한한 아무런 자료도 보여 주거나 넘겨주지 말라고 하는 것, 결국 소극적인 사보타주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우리 일의 속도는 훨씬 빨라졌겠지만 결국 우리 감독관이 제재소와 벌목장을 오가며 일일이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체크해야만 했으므로 당초 3 4일로 예정했던 그의 첫 출장은 2주 이상으로 엿가락처럼 늘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린 마침내 제재소의 구제척인 내역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도 아미르가 그동안 너무도 방만하게 제재소를 운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아직 한 컨테이너도 선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우리가 그 떄까지 받아 놓은 20여 컨테이너분의 오더가 모두 선적되면 받게 될 약속받은 자기 커미션의 몇 배 이상을 이미 착복한 상태였고 우리에겐 보고도 없이 벌목장과 제재소에서 인근 제재소나 업자들에게 몰래 팔아 버린 목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가 철로 침목 용도의 바록을 수십톤이나 몰래 팔아 먹었다는 증거도 입수했어요.

 

그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아미르도 어차피 릴리의 가족이니 그 금액이 얼마가 되었든 릴리의 가족들을 위해 썼다고 치부하고 애써 잊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목재도 돈도 모두 남의 것이었던 아미르는 자기 몫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현장관리를 너무나 소홀히 했고 우리 돈과 물건들은 길바닥에 줄줄 세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빼돌린 것은 아미르 자신 만이 아니라 벌목장의 십장과 제재소의 아미르 심복 역시 아미르 몰래 원목과 바록들을 팔아 먹고 있었던 거에요. 결과적으로 벌목한 나무의 양은 20 컨테이너 분을 훨씬 넘었는데 우린 단 한 컨테이너도 선적하지 못한 상황에서 제재소에는 반 컨테이너의 물량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양어장이나 옥수수 플랜테이션 같은 곳에서도 많이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사료용으로 수십 헥타르의 옥수수 농장을 조성해 놓으면 추수, 탈곡, 건조 등의 후속 절차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수십명의 경비원들을 동원해 농장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추수하려 할 때엔 농장 외곽은 인근 주민들의 손을 타서 옥수수 씨가 말라 있고 들어가기 힘든 농장 중심부분에서 몇 줌 안되는 옥수수가 남아 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새우농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껏 치어를 풀어 놓았다가 몇 개월 후 판매하기 위해 건져 내려 하면 기대했던 물량의 반은커녕 고작 10분의 1, 그것도 아니면 새우가 완전히 멸종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키라고 고용해 배치해 놓은 경비원이 제멋대로 마구 건져 팔아 먹었기 때문이죠.

 

그런 일이 우리 제재소에서도 벌어졌던 것입니다.

수억원의 돈이 그렇게 날아가 버렸고 그 보고를 듣는 나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가까스로 제재소를 제대로 돌리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증발해 버린 돈을 매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고 십중팔구 그 전에 빌린 돈들의 상환만기일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죠. 적잖은 손해가 났다는 것은 릴리도 예측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들어간 돈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전부가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 역시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있었습니다. 액면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사업을 위해 릴리도 자신의 경로를 통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왔었기 때문이었죠. 이 사업이 이렇게 망가져 버린다면 나도 릴리도 엄청난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였습니다.

 

감독관의 술라웨시 출장은 점점 잦아지다가 결국은 아예 끈다리에 상주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미르가 그렇게 태업을 하면서 더 나아가 공공연히 악랄한 방해를 놓는 상황에서 릴리나 감독관이 현장에 나가 있지 않으면 일은 전혀 진척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미르의 작태를 매번 릴리 아버지에게 일러 바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나로서는 릴리 아버지가 거기 그렇게 버티고 계시기 때문에 아미르가 지금 하는 짓거리 이상의 악랄한 위해를 가해 올 수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감독관을 채용한 지 두 달 만에 드디어 바닥재 반제품의 첫 선적이 이루어집니다. 감개무량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금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대금의 상당부분을 이미 다운페이먼트로 받아 놓은 상태여서 선적을 해도 입금되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일단 사업은 자기 궤도를 찾기 시작했으므로 이 어려운 시기를 조금만 더 버텨내면 사업은 정상화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문제는 운영자금의 조달이었죠. 그래서 다시 돈을 빌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서 멈췄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하다 못해 수라바야의 요한에게 사업권을 넘기고 우린 일정 커미션을 받으며 다른, 좀 더 건강하고 통제 가능한 사업을 모색했어야 했다고 이제 와서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은 마치 침몰하고 있는 선박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암초를 들이받아 생긴 배 밑창의 커다란 구멍에서는 마구 물이 차오르는데 작은 망치 하나 들고서 그 구멍을 재빨리 막아 더 이상 침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그 전에 배가 완전히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먼저인지 아슬아슬한 상황. 운이 좋아 구멍을 먼저 막아 배의 침몰을 막는다 하더라도 배에 가득 찬 바닷물을 퍼내기 위해 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그 사이 또 다른 큰 파도가 덮치면 여지없이 침몰해 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우린 줄줄이 뻑이 난 패들이 널려 있는 고스톱판에서 간신히 피 3점 내고서 ‘못먹어도 !’를 부르는 풋내기 도박사처럼 그 몇 번의 선적에서 희망을 보고 사업을 강행했습니다. 선적은 진행되었지만 그래서 우리들의 빚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만큼 아미르가 삼켜 버린 금액이 컸던 것이죠. 릴리도 지인들은 물론 형부 등 끈다리의 유력자들에게 돈을 빌리는 한편 나도 리나같은 오랜 친구나 고교동문 선배 등을 비롯해 백방으로 돈을 구했습니다. 이혼파티 편에서 기술했던 것과 같이 해골같이 삐쩍 마른 일본인 친구 히데키가 5천불이 든 봉투를 들고 내 사무실을 찾아온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돈들은 내 손에서 단 몇 시간도 머물지 못하고 모두 끈다리에 송금되었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지금은 역시 공무원이 되어 있지만 당시 오토바이 정비소를 하다가 별 재미를 못보던 릴리의 막내 오빠 리리(Riri)가 시내 사무실을 맡아 업무연락과 감독관 보조 업무를 하고 있었어요.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리리는 오히려 그런 점에서 우리 일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비록 속 터지는 일일지라도 그는 전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미르는 여전히 걸치적거렸지만 감독관과 리리의 약진으로 업무 일선에서 실권을 뺏긴 그는 우리 사업에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제 우리의 목재사업은 좀 더 실질적인 이익을 낼 수 있는 상태로 호전될 수도 있다고 나는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릴리의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뭔가 !’ 하며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화들짝 놀란 나는 날 듯이 릴리의 방으로 달려 갔습니다. 반 실신한 릴리는 의자와 함께 책상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한 손엔 여전히 전화 수화기가 들려 있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고 초점 없는 시선을 한 채 호흡이 불가능할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릴리!!  도대체 왜 그래?  정신 차려 봐. 너 장난하는 거지?  왜 그래? 정신차려 봐!!”

 

릴리는 급기야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나는 릴리가 정말 미쳐 버린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아직도 릴리의 손에 들려 있던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는 리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리리. 무슨 일이에요? 사고라도 났어요?”

.., 미스터르 배….”

 

리리도 울고 있었어요. 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릴리는 지금 전화 받을 수 없는 상태 같아요. 무슨 일인지 나한테 얘기해 봐요!!”

아버님이…, 오늘 돌아가셨어요.”

 

그 순간 내 머리 속에 벼락이 내리 친 듯 멍해졌습니다.

두 달 반 전에 끈다리의 시내 사무실 앞에서 만났던 릴리의 아버지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정했고 그렇게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리리의 울먹이는 목소리도, 막내 딸로서 더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을 릴리의 혼절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난 뭐라 더 말할 수 없었어요. 직원들도 모두 릴리 방 안으로 몰려 와 웅성거렸고 난 혼절한 릴리를 안아 일으켜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도…, 그 날 많이 괜찮아지셨는데…, 그래서 자카르타로 돌아온 거였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린 릴리는 이성을 되찾았지만 흐느낌은 그날 내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끈다리 출장에서 릴리는 노환으로 위독한 상태까지 갔던 아버지 때문에 자카르타 귀임을 나흘씩이나 늦추었다가 차도를 보고 돌아온 지 이틀째였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녀의 마음을 몹시 송곳처럼 찌르고 있었습니다.

 

사무실의 현금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지만 릴리의 끈다리 출발은 최우선의 과제였어요.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은 사망한 사람을 당일 매장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물론 가족들이 멀리 있으면 그날 밤을 넘겨 기다리기도 합니다. 릴리는 지금 출발하더라도 마카사르에서 연결편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 날 도착하기 쉬웠습니다. 난 사무실의 돈을 박박 긁어 릴리의 티켓을 샀어요.

 

약혼자 루벤에게도 연락을 넣어 두었습니다. 루벤은 다음 날 출발한다고 했어요. 그것이 루벤의 첫 끈다리행이 되었고 거기서 릴리의 가족들을 모두 만나게 되지요. 나도 출발해야 했지만 릴리의 티켓을 사는 것만으로 사무실의 돈은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무리해서 감독관의 자카르타 귀임 티켓도 사놓은 상태였어요. 어차피 이 상황에서는 일이 진행될 수 없는데 감독관은 내일 장례식 후 자카르타에 돌아 왔다가 모든 절차가 끝나고 상황이 정상화되면 그때 다시 술라웨시에 날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자카르타에 있는 내 가족들에게 생활비도 제대로 남겨 놓지 못한 상태로 끈다리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나 혼자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끈다리의 사업을 누군가 감독하지 않으면 전혀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자카르타 사무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업은 이제 간신히 궤도에 오르고 있었는데 끈다리와 자카르타 양쪽의 고삐를 모두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릴리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루벤이 날아간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그리고 릴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면서 나도 나름대로 자카르타에서 릴리의 아버지를 추모했어요. 그러나 릴리를 떠나 보낸 후 난 이제 릴리의 앞길이, 그리고 우리의 사업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갈 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미르는 언제라도 상대방의 목줄에 송곳니를 박아 넣으려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인물이었고 그런 포식자를 꼼짝 못하도록 붙들어 매는 단단한 쇠사슬 같은 존재가 릴리의 아버지였어요. 릴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이제 하이에나는 사슬을 풀고 나와 자유로워진 셈이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분명 애도하고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활한 웃음과 번득이는 송곳니를 애써 감추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릴리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 항로가 바뀌고 있었지만 우린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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