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적도에 부는 바람

적도에 부는 바람 (1)

beautician 2009. 9. 13. 18:58

 

 

1999년 중반에 세 들었던 코린도 빌딩을 떠나 그 앞 빤쪼란 (Pancoran)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비다까라(bodakara) 콤플렉스에 둘러 쌓여 있는 무스티카 라투 (Mustika Ratu) 빌딩으로 이사한 것이 2002년도의 일입니다.

 

무스티카 라투는 인도네시아 토착 화장품 회사로 미스 인도네시아 선발대회의 주관사였고 그래서 1층에는 화장품 전시장이, 메자닌 플로어(Mezzanine floor)에는 모델 학원도 들어와 있었어요. 우린 5 130 sq.m를 임대해 꽤 큰 사무실을 만들었지요. 릴리와 나는 사무실의 좌우 끝의 3m x 3m 정도 크기의 작은 개인 방을 하나씩 만들었고 그 중간엔 두 개의 상담실과 넓은 직원 사무실, 탕비실, 쌤플실까지 완비된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사무실이었습니다.

 

쌤플실

 

쌤플실 회의탁자와 그 너머로 보이는 내 방

 

릴리 방

 

사무실 홀 

 

사실 임대료가 현격히 싼 끌라빠가딩 지역에 사무실을 내려고 했지만 릴리는 내 생각을 반대했습니다.

 

명함에 찍히는 주소가 중요하단 말이에요. 가똣 수브로토(Gatot Subroto) 지역이면 수디르만(Sudirman)이나 땀린(Thamrin) 거리만은 못해도 누구나 알아 주지만 끌라빠가딩 주소가 명함에 박히면 사람들이 코웃음 친다고요.”

 

그 당시 릴리가 내세웠던 이 논리는 지금은 릴리 본인도 실소를 터뜨리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실속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그렇게도 중요했습니다.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릴리의 치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나 역시 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으니 비록 30대 후반을 지나 40대로 막 접어들려 하던 시기였음에도 난 아직 그렇게 어리고 철이 없었습니다. 사업이 순조롭게 전개되어 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자금상황이 휘청거리면 모아둔 여분의 돈도 충분치 않던 우리로서 당장 월 1천만 루피아 이상의 사무실 임대료가 목을 조여 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런 일이 절대 없으리라 감히 장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해가 지난 지금은 훌륭한 사무실에 대한 환상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멋들어진 인테리어와 비싼 가구들, 뭔가 있어 보이는 시내 중심가의 사무실 주소 같은 것들은 정말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죠.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그 안에서 내실 있게 돌아가는 알맹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것이 나 자신에게뿐 아니라 나와 일을 해보려는 거래 상대방들에게도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요.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짙은 화장과 명품 브랜드의 옷, 가방, 신발들로 치장, 변장하는 것이고 내용도 없는 유령 사업체를 만들어 투자자들을 현혹하려는 사기꾼들이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오히려 빚을 내서 BMW, 메르세데스 같은 고급 승용차를 임대해 타고 다니며 과시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었어요. 통장의 잔액과 인보이스에 찍히는 금액과 시장에서의 평판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세계에서 우린 명함에 찍힌 주소로 인정받으려 했었고 그것은 그만큼 뭔가 캥기고 자신이 없다는 반증인 셈이었습니다.

 

사무실을 그렇게 옮겨 갈 당시 실제로 우리 사업 전반에는 이미 비상등이 곳곳에서 점멸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릴리는 오래 전 떠나온 고향 술라웨시 떵가라 (Sulawesi Tenggara) 주의 주도 끈다리(Kendari)를 중심으로 펼치는 일련의 자원사업들이 가족들과 고향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지만 세상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았습니다. 릴리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보여준 놀라운 영업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던 나 역시 새로운 사업을 밑바닥부터 일구어 적정 궤도에 올려 놓는 사업 능력, 경영 능력은 영업 능력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끈다리에 직접 가보지도 않고 사업성 평가와 진행 전반을 전적으로 릴리에게 맡겨 놓은 채 나는 봉제 사업에서 돈을 벌어 그 일을 지원했습니다.

 

그 해 유수한 목재관련 기업들도 따내지 못하고 있던 벌목허가를 끈다리 북쪽의 아세라(Asera) 지역에서 따내었을 때만 해도 그것이 릴리의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벌목허가라는 것이 사실은 토지의 용도변경을 위해 제한된 면적의 대지 위에 놓인 수목들을 포함한 방해물들을 제거한다는 것이 그 실제 내용이라는 것도 모르고요. 릴리의 일을 해 주던 그녀의 큰 오빠 아미르(Amirudin) Asera 지역의 고위 공무원인 현직 Camat으로서 아무런 증빙자료도 보여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그렇게 진행상황을 포장하고 부풀려 얘기하며 비용을 청구했습니다.

 

게다가 목재 사업은 우리가 원래 가고자 했던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린 고무 나무같이 특정 나무의 수액에서 얻는 다마르(Damar)라는 것을 개발하는 중이었어요. 외관은 돌처럼 생겼지만 불이 붙는 이 돌은 특정 나무의 수액의 굳어진 것으로 그것을 처리해 얻는 검 로진(Gun Rosin)은 페인트, 잉크 같은 것의 원료로 사용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캐슈넛(Cashnut)의 컨테이너 단위 국내 거래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예정에 없던 벌목허가를 받으면서 갑자기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끈다리에서 한 달 반 만에 돌아온 릴리는 아세라에 우리 제재소를 세웠다고 보고해 왔고 그 사이 수라바야의 거래선으로부터 방키라이(Bangkirai) 수목을 이용한 바닥재 2x2 반제품의 오더를 여러 컨테이너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목재, 벌목 사업이라는 것이 대개의 경우 한 개인의 변변치 못한 전 재산을 모두 쳐 넣어도 기반조차 다지기 힘든 것임을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도 들었지만 우린 뭐에 씌었는지 어떻게든 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런 저런 기계만 사들여 제재소에 설치하기만 하면, 이번 목재구매를 제대로 하기만 하면, 드디어 모든 게 풀리기 시작할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미르의 근거도 없는 희망적 보고가 계속 날아 들었고 우리가 봉제 에이전트 사업을 통해 버는 돈은 물론 급기야 한국에서 끌어온 막대한 돈까지 자카르타의 우리들이 근근이 먹고 살 만큼만 남기고 그를 철썩 같이 믿었던 릴리를 통해 아미르에게 모조리 쏟아 넣는 상황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잡아먹은 돈이 대충 한국돈 3억....  이 허접한 것이...

 

 

 

 

 

 

방키라이 수목의 bar-log

 

 

제재소 뒷편 대지. 컨테이너들을 대기시키기 위해 스페이스를 크게 잡았습니다.

 

가끔 멧돼지들이 제재소로 내려와 릴리가 사냥도 했답니다.

 

제재소 설치가 막 끝나던 시점이어서 사진촬영 당시 중장비들을 아직 돌려 보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릴리가 미리 받아 놓은 수십 컨테이너의 원목 바닥재 반제품 오더는 반년이 지나도록 단 한 컨테이너도 선적되지 못했습니다. 아미르는 여전히 이런 기계가 없어서, 또는 저런 비용을 못내서 생산과 선적이 지연된다며 계속 돈을 요구했고 그래서 구매선으로부터 받은 계약금까지 모조리 현장에 투입했는데도 말이죠.

 

이건 아무래도 이상해. 지난 번 출장보고 때 준비가 잘 되어간다고 했잖아? 다음 달까지도 물건이 안 실리면 이젠 더 이상 돌릴 자금도 없어. 도대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미르 오빠가 이번 주 말에는 분명히 실을 수 있다고 했어요. 벌목은 다 해 놨는데 비가 와서 바록(Bar-log)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산에서 가지고 내려올 수가 없었다는 거에요.”

찦차만 있으면 운송은 문제 없다고 해서 두 달 전에 사줬잖아?”

미스터르 배가 산을 안 다녀 봐서 그래요. 비가 많이 오면 찦차로도 안된다고요.”

 

술라웨시 출장에서 에서 막 돌아온 릴리도 어쩌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천수답에서 농사짓는 것도 아닌데 날씨가 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기에 접어든 인도네시아에 비를 내리지 않도록 하는 신통력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었죠. 아무래도 내가 직접 끈다리로 날아가서 확인해 봐야 하는 시간이 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미르는 내가 오면 오히려 일 진행에 방해가 된다며 내 출장을 결사 저지하면서 주말엔 꼭 선적하겠다고 철썩 같은 약속을 해 왔어요. 출장은 또 다시 연기됩니다.

 

약속된 주말.

아침부터 선적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릴리도 아미르와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전날 밤 40’ 컨테이너 2개가 제재소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 날 끈다리 항구에서 수라바야로 출발하는 배에 그 컨테이너들을 정말 싣게 되는지가 문제였지요. 아미르와는 오후 늦게서야 전화통화가 되었습니다.

 

컨테이너들은 둘 다 출발했어요?”

…, 출발했지요.”

반출허가도 다 받은 거죠? 반출허가랑 면장, 인보이스를 바로 보내 줘요.”

그런데 팩스가 고장이라서…”

그럼 시내 사무실에서라도 보내 줘요.”

시내 사무실 팩스도 고장인데…”

 

어쩌면 아미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다시 아무런 증빙자료도 없이 아미르의 말만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왕년의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국가대표 출신 목재 사업가 수라바야의 요한(Johan)씨가 이미 대금의 반 정도를 선불한 상태에서 물건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출발사실을 통지해 주어야 하는데 서류를 팩스로 받을 수 없다면 최소한의 증빙이라도 필요했습니다.

 

그럼 와르텔(Wartel)이라도 찾아 봐요. 설마 끈다리의 모든 팩스가 다 고장이겠어요? 그리고 우리도 선사에 확인해 볼 테니 컨테이너 번호라도 불러 주세요.”

…, 컨테이너 번호는 선적서류에 찍혀 있는데 컨테이너랑 같이 출발해서….”

카피 남겨두지 않았어요?”

복사기가 없어서….”

그럼…., 저녁 때 끈다리에서 보내 주실 팩스를 기다릴께요.”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제재소에서는 모든 서류를 어차피 수기로 작성하고 있었으므로 서률 만들 때 카본 페이퍼를 끼워 사본을 만들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미르와 전화통화가 끝난 후 릴리에게 내 의구심을 피력했지만 릴리는 큰 오빠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내가 자기 가족들을 믿지 못한다며 반격하는 릴리와 대판 말다툼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릴리 역시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사실 확인을 위해 밤늦게까지 아미르와 전화통화를 수십 차례 시도했지만 오전과 마찬가지로 신호가 가도 전화를 받지 않거나 전원이 꺼져 있었습니다. 우린 퇴근을 하지 못했고 드디어 아미르와 전화통화가 된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습니다.

 

오빠, 선적서류 아직 팩스 안 보냈어요?”

, 그게 좀….”

무슨 문제라도…?”

 

릴리의 전화통화를 옆에서 들으며 뭔가 잘못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미르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오후에 내린 비로 길이 질퍽거려 오후에 제재소를 출발한 컨테이너들이 끈다리 항구에 도착한 것이 밤 10시경. 그런데 항구에서 공식적인 선적작업은 밤 8시에 이미 끝났고 항구 직원들이 모두 퇴근해서 항구 철책 담장 밖에 컨테이너들을 세워 두고 아직까지 항구 측과 얘기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결론은 오늘 밤엔 아무래도 안될 것 같으니 내일 새벽 배가 출항하기 전에 컨테이너들을 배에 올리겠다는 것이었고요. 그러나 여전히 선적서류들은 팩스로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 선적이 우리 사업의 성패 여부를 가름 짓는 분수령이었기 때문에 우린 사무실에서 뜬 눈으로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난 아미르의 행동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게 느껴졌고 릴리 역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예전에 다마르(Damar) 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당시에 있었던 일도 기억났습니다. 오지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자원사업은 다 그렇듯 원시적이기 짝이 없던 다마르 사업의 기본 골격은 이런 거였습니다. 릴리의 아버지 소유인 광대한 면적의 산야에서 다마르를 생산하는 나무들에 마치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듯 나무 몸체에 칼집을 낸 꼭지점 부분에 페인트통을 매달아 놓고 일주일쯤을 단위로 수거하는 것이었죠. 수거를 위해 일용직 직원들을 수십명씩 출발시켰고 그들이 출발하는 새벽에 쌀, 담배, 간식, 텐트 등 산에서 2~3일을 지낼 수 있는 식량과 장비를 나누어 주면 그들은 다마르를 수거해 일정 장소에 모아 놓게 되고 그것을 우리가 찦차나 트럭으로 수거해 오는 방식이었습니다.

 

 

ㅏKendari 시 외곽에 만들었던 Damar 창고

 

 

 

 

 

100% 수동식 분류

 

불붙는 돌 : Damar

 

 

 

당시 다마르 오더를 냈던 인디아 거래선이 릴리와 함께 술라웨시 아세라 현장으로 날아 갔던 것은 한 컨테이너 분인 20톤 정도가 이미 처리장에 도착해 분류 중이라는 아미르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도착한 현장에 있던 다마르는 불과 1~2톤도 되지 않는 물량이었고 아미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분명 20톤은 되어 있지만 아직 산에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용직들을 산으로 출발시키기 위한 경비를 달라며 릴리의 지갑을 털었고 이틀이면 준비된다는 말에 인디아 바이어는 자카르타에 돌아 왔다가 사흘 후 다시 현장에 갔지만 추가된 물량은 불과 2톤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미르는 인디아 바이어 앞에서 또 릴리에게 돈을 요구했고 그런 상황에 기가 찬 바이어는 오더를 캔슬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자카르타로 돌아가 버렸죠.

 

아미르는 실제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런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랫배가 땡겨 왔습니다. 어제 밤 도착한 40’ 컨테이너 2개의 금일 오후 항구 출발. 항구 철책 담장 밖에서의 대기, 항구 측과의 줄다리기 타협, 내일 새벽 선적 강행…. 일련의 사항들은 모두 그럴 듯한 순서로 진행되고 있는 듯 했지만 우린 그것을 확인해 줄 아무런 증빙자료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렇다고 하는 아미르의 말만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아미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날 내내 아미르의 전화는 꺼져 있었습니다.끈다리 시내 사무실의 직원을 항구로 보내고 릴리가 선사와 직접 전화통화를 하면서 우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사에서는 컨테이너를 우리 제재소에 보낸 일이 없다는 것을요.

 

아미르가 얘기했던 시나리오는 컨테이너가 전날 밤 도착했다는 부분부터…., 처음부터가 거짓말이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밤을 샌 릴리도 얼굴이 노랗게 변해 있었습니다. 일이 그렇게까지 간 이상 이제 문제는 그 두 컨테이너에 실었다는 바닥재 반제품이었습니다. 컨테이너가 애당초 도착하지 않았다면 거기 실었다는 두 컨테이너 물량의 제품은 제재소에 아직 남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재소에서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릴리가 서둘러 끈다리에 출장을 가려 했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가야만 하는 상황이 틀림없었어요.

 

그날 오후 비행기를 탄 나는 마카사르(Makassar)에서 하루 밤을 묶고 다음 날 첫 비행기로 끈다리에 도착했습니다. 아미르와는 릴리와의 그 마지막 전화통화 이후 그때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어요.

 

[내가 책임도 질 수 없는 일을 벌여 놓고 말았구나…]

 

자카르타를 출발하면서부터 줄곧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도 없는 규모의 사업을 도무지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지역에 벌여 놓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현장 업무를 맡겨 놓은 채 미숙한 경험의 릴리에게 이 신규사업 전반을 책임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일을 그르쳤다면 그것은 분명 아미르의 잘못이지만 그를 컨트롤 했어야만 할 릴리는 그렇게 수십 번 자카르타와 끈다리 사이를 날아 다니며 노력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아미르의 고삐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책임은 내가 져야만 했습니다. 이 사업을 위해 끌어온 자금들, 이제 어쩌면 악성채무가 되어 향후 오랫동안 내 발목을 잡고 내 숨통을 조여올 그 빚들 역시 모두 내 책임이었습니다.

 

 

끈다리 시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릴리가 뽑은 여직원은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대신 지팡이를 짚은 새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사무실 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자네가 우리 딸이랑 일하는 미스터르 배 라는 친구로군. 반갑네.”

 

70이 넘은 연세에 자그마한 체구를 하고 있던 이 할아버지는 릴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이 화사하고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였습니다.

 

우리 아미르가 사고를 친 모양이지…?  그 녀석  자네 혼자서도 어련히 잘 하겠지만 내가 좀 도와 줌세. 아미르 그 녀석, 내 장남이지만 좀 돼먹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거 나도 잘 아네.”

 

나는 자카르타에서 릴리의 가족들 대부분을 만나 보았어요. 끈다리 지역 방언 외에는 인도네시아 표준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포함해 7명의 언니 오빠들 모두, 그리고 심지어 대부분의 조카들과도 안면을 익혔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군수쯤인 부빠띠(Bupati) 후보, 짜맛(Camat) 등 지방정부의 정치가, 고위 관료가 되어 있는 릴리의 형제들은 당시엔 이미 아세라 지역 짜맛(Camat)이 되어 있던 아미르를 제외하고는 아직 전도유망한 중견 공무원들이었고 이제 초임 변호사, 병원 인턴 등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거나 자카르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릴리의 조카들은 아직도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은 릴리의 아버지뿐이었죠. 그를 그렇게 끈다리 시내 사무실 앞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근세기까지도 끈다리 지역을 지배했던 왕가의 후손으로 광대한 산야는 물론 시내에도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10명 전후의 자녀들을 낳는 게 보통이던 당시 사회에서 그는 부모의 외아들이었어요.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겠지만 일찍 부모를 여읜 후 그는 이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것이고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일수록 주변엔 더욱 더 무시무시한 욕심에 눈 먼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며 모여 들기 마련이지요. 아직도 미성년의 나이에 부모를 여읜 그는 몇 차례나 독살의 위험에 처했고 한 번은 거의 죽다 살아나기도 했답니다. 그것은 그가 부모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유일한 상속자였으므로 그 재산에 눈독을 들이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존재가 눈의 가시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랬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운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릴리를 비롯한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낯선 사람들이 내미는 음료수를 절대로 마시지 않습니다.

 

스무 살이 되기 전 그는 아무도 몰래 한 밤 중에 고향을 탈출해 마카사르에서 밑바닥부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해가 흐르죠. 끈다리의 친척들은 그가 죽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의 재산을 찢어 발겨 가로챕니다. 그래서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후 그가 끈다리에 금의환향했을 때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사업에도 크게 성공했고 그 사이 두 번의 결혼을 통해 12명의 자녀를 낳았고 큰 아이들은 이미 장성해 성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어요. 예전엔 그만 죽어 없어지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상속자들을 군대처럼 이끌고 끈다리에 돌아왔고 끈다리의 친척들로서는 그들 모두를 소리소문 없이 죽여 없애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되찾는 전쟁이 시작되었죠.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장남인 아미르였습니다. 나중에 끈다리에서 태어난 릴리와 그녀의 막내 오빠가 흔히 히틀러라고 부르는 아미르의 뒤틀리고 모진 성격은 부패한 공직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도 틀림없지만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그렇게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릴리의 아버지는 이미 인생의 황혼에 깊이 젖어 들어 있었고 끈다리 시내의 많은 땅들도 14명의 자녀 중 열악한 위생, 의료환경 속에서 끝까지 살아 남은 7명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대부분 팔아야 했지만 그의 위상은 그의 고향인 끈다리와 릴리 어머니 고향인 아세라는 물론 인근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곳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조차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그곳 공직사회의 정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던 자녀들의 점점 커져 가는 위상이 릴리의 집안을 현지의 명가(名家)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네 이 노-오옴!!!”

 

나와 릴리가 그렇게 연락을 하려 해도 닿지 않던 아미르도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자 여지없이 불려 와 릴리의 본가에서 아버지의 불호령을 맞았습니다. 함께 불려온 릴리의 다른 형제 자매들도 함께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내심 통쾌했어요.

 

이 일 때문에 릴리가 고향에 돌아온 게 도대체 몇 년 만이냐? 그렇게 몇 해가 지난 후 비로서 릴리가 처음 고향에 돌아와서 나한테, 그리고 너희들한테 뭐라고 했느냐? 이 일은 자기 혼자 먹고 살기 위한 게 아니라 가족들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아미르, 네 이 놈!  막내 동생 제재소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놈이 어떻게 관공서에서 직원들을 부리고 어떻게 이 지역과 이 나라를 발전시킨단 말이냐?? 에잇! 돼 먹지 못한 놈!!”

 

그렇게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던 릴리의 아버지는 화를 낼 때에는 마치 딴 사람 같았습니다. 70대 고령 노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쩌렁쩌렁했고 모든 자녀들, 특히 아미르는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습니다.

 

내 딸들이 자카르타에 간 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너희들 알긴 아느냐? 여기 있는 이 사람이 누구냐? 너희들은 전에 자카르타에서 이미 다 만나 봤다고 했지? 이 사람이 자카르타에서 내 딸들을 보살펴 주지 않았다면 내가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잠잘 수 있었겠느냐? 그런데 이 사람과 릴리가 하는 일을 제대로 도와 주진 못할 망정 속이고, 속이다 못해 릴리 직원까지 맘대로 내 보낸단 말이냐?  아미르, 이 놈!! 네가 나한테도 짜맛이냐? 릴리한테도 짜맛이냔 말이다!!”

 

시내 사무실에 직원이 없었던 이유는 전날 그 직원이 끈다리 항구에 가서 컨테이너가 도착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릴리에게 보고했었고 거짓말이 들통난 아미르는 자기 허락도 없이 행동했다는 이유로 릴리가 뽑았던 사무실 직원을 릴리 동의도 없이 해고시켰던 것입니다.

 

릴리는 당시 한화공장을 인수한 벨기에 섬유업체 시온(SIOEN)사의 재정담당이사 루벤(Ruben)을 내가 소개해 준 후 그간 여러 번 등을 떠밀어 이제 약혼하고 함께 살기 시작한지 1년쯤 된 상태였습니다. 릴리의 막내 언니 띠니(Tini)는 릴리보다 몇 개월 먼저 자카르타에 들어와 어찌어찌 은행 창구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98년도에 불어 닥친 IMF 폭풍으로 100여개의 은행들이 문을 닫고 통폐합될 때 실직하고 방황하고 있던 것을 나와 릴리가 죠니 안드레안(Johnny Andrean) 미용학원에 등록해 주었고 그때엔 블록 엠(Blok M) 멀라웨이 플라자(Melawai Plaza) 3층의 죠니 안드레안 미용실에서 미용사로 근무하고 있었죠.

 

아버지는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가려운 부분을 박박 긁어 주고 있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또 말뿐이냐!!”

아니에요. 아버지. 정말 잘하겠습니다.”

 

결국 아미르는 아버지 앞에서 싹싹 빌며 제대로 하겠다는 맹세를 했고 죄없는 다른 형제들도 덩달아 릴리가 하는 사업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됩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대성공이었어요.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틀간 계속된 끈다리/아세라 출장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아미르는 역시 말뿐이었을 뿐 적극적인 협조를 하지 않았고 경리 문제 등 민감한 부분이 나오면 짜맛 사무실에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결국 제재소와 벌목장을 보고 왔을 뿐 서류는 영수증 한 장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돈도 없어지고 물건도 없어진 상태였고 아미르는 절대로 믿고 일을 시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출장결과의 전부였습니다.

 

끈다리에서 공항을 향하기 전 릴리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자네…, 내 딸들을 잘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어르신.”

특히 릴리…., 걘 내 막내딸이야.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지. 그동안 릴리를 잘 돌봐줘서 내가 뭐라 고맙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네.”

오히려 제가 릴리에게 많이 도움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약혼자 루벤은 비록 서양사람…, 벨기에 사람이지만 제가 본 남자들 중 가장 진실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걱정 안하셔도 될 거에요.”

그래. 내 그 말을 믿지만…, 그 친구 그래도 외국인 아닌가? 자네만 믿겠네. 우리 딸들이 타지에서 어려운 일 겪지 않도록 부탁하네. 자네가 꼭 보살펴 줘.”

어르신…., , 그럴게요.”

 

릴리와 함께 일한 것이 8년차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나 역시 인도네시아에서는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릴리 아버지의 말투나 표정에는 전혀 가식이 없었어요. 그는 어쩌면 나를 릴리의 많은 오빠들 중 하나로,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자카르타를 다녀온 릴리 어머니나 형제 자매들로부터 내 이름을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일까요? 릴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루벤보다 나에게 릴리를 부탁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릴리 아버지는 나에게 딸들을 잘 보살펴 주겠다는 맹세까지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릴리의 아버지가 아미르에게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도저히 통제불능인 저 아미르를 앞으로 어떻게든 컨트롤 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였보였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자카르타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난 여전히 구체적인 통제방안을 생각하려 애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릴리의 아버지에게 사업 전반에 대한 컨트롤을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봉제사업을 내팽개치고 제재소와 벌목장에 가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카르타에서 감독관을 보내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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