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제3땅굴 6

체력은 국력

산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했는데 고3때 체력장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대학시절 ROTC 입단을 앞두고서도 달리기 연습을 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릎이었어요. 연골인지 인대의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며칠씩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아팠습니다. 땅을 짚으면 무릎 슬개골 안쪽에서 통증이 엄청났어요. 당시 아버지는 어디서 야메 의사를 몇 차례 불러와 바늘이 길다란 주사기에 담긴 정체불명의 약물을 슬개골 밑으로 주사했는데 그 덕인지 아닌지 ROTC 생활 시작한 후 군시절엔 무릎이 잘 버텨주었습니다. 자대에서는 살이 조금씩 찌기 시작하는 걸 느끼게면서 저녁 5시 일과가 끝나면 내 숙소가 있는 멸공관에서 제3땅굴까지 왕복 8킬로를 매일 뛰었습니다. 5시에 출발해 땅굴..

군대에서 배운 일본어

동반성장 내가 근무했던 멸공관의 정식명칭은 ‘안보통제부’라는 곳이었는데 이름만 봐서는 무슨 정보부서 같은 이 부대가 하는 일은 임진각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 GOP 지역으로 들어오는 안보관광객들을 안내해 멸공관에서는 안보전시관과 10분짜리 반공영화를 보여준 후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을 견학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JSA에서 연락장교가 나와 우리 관광팀을 인수해 판문점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고 순서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특히 국군의 날 전후엔 수행 보좌관들을 거느린 각국 장군들과 국방장관들로 브리핑룸이 가득 찼고 평소에도 훈련함을 타고 온 각국 해군사관생도들, 각국 장차관들도 적잖게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전두환의 5공에서 노태우의 6공으로 넘어가던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