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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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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은이 이야기

beautician 2018. 6. 9. 10:29



동숭동 9평짜리 서민아파트에 살던 은이를 처음 만난 건 중3때였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오빠와 살던 은이는 얼굴이 희고 눈매가 똘망똘망한 작고 귀여운 아이였지요. 어느 날 한 TV 연속극에서 김혜자씨가 화상을 입는 장면이 있었는데 다음날 내내 그 앤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김혜자씨를 보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난다는 거였어요.

 

, 깜빡 잊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곳은 동국대학교 후문입구에 대리석 성벽 같은 담쟁이 덩굴 우거진 높은 축대를 가진 교회에서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교회에서는 늘 얼굴을 마주쳤지만 난 말도 잘 걸지 못했습니다. 대학생들과 주로 어울리던 은이는 아마 나보다 훨씬 조숙했던 것 같습니다. 청년회와 중고등부가 함께 산행을 가는 날이면 그 애가 눈 덮힌 북한산 좁은 등산로를 어느 대학생 오빠의 손을 잡고 그 일행들과 어울려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난 가슴이 섬뜩하게 아파오곤 했습니다. 은이는 내 심장에 그리 좋은 애가 아니었어요.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면서 북가좌동 집과 방배동 학교 사이를 오가면서 지금은 대학로가 되어버린 동숭동을 일주일에 몇 번씩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애 아파트 앞 멀찍이 떨어진 축대 난간에 기대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쓰레기를 버리거나 아빠 담배 심부름을 나가는 은이 모습을 본 다음에야 집에 돌아가곤 했지요. 그렇게 해야만 마음 한 편에 늘 머물고 있던 아릿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무모하도록 시간이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짓을 대학 진학할 때까지 2년 동안이나 계속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내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늦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일종의 스토킹이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난 해악도 없고 절대 상대방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투명한 스토커였습니다.

 

그런 특수한 방과후 활동에도 불구하고 난 이문동에 있던 한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고 은이는 인천에 있는 교대로 진학했지만 교회에서 여전히 매주 얼굴을 마주쳤습니다. 급기야 대학 1학년 시절 몇 번 용기를 내 데이트를 청해 봤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곤 했습니다. 퇴짜를 놓던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당시 은이는 대학생활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 틈만 나면 미팅을 하고 와 내가 마음 썩일 걸 뻔히 알면서도 미팅한 남자들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풀어 놓곤 했습니다심장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앤 좀 가학적인 성격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군단에 입단하고 첫 병영훈련을 한 달 간 갔다 오니 스스로도 꽤 제대로 된 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번만은 은이가 퇴짜를 놓더라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군인정신의 힘을 빌어 뭔가 역사를 만들어 낼 것 같은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겼습니다. 훈련 갔다 온 약발이 떨어지면 다 허사라고 생각한 나는 은이를 서둘러 만나러 갔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그 애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환한 미소로 날 반겨 주었죠. 봄날 온 산을 하얗게 불태우듯 흐드러지는 벚꽃 같은... 은이는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ROTC 행색은 그 모습을 처음 보는 은이에겐 무척이나 이상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은이는 내 베레모를 자꾸 벗기려 들었지만 학군단 1년차가 감히 시내에서 베레모 벗고 다니나 선배들에게 걸리면 나중에 단단히 사단이 날 일이었으므로 난 몸을 사렸습니다. 그런 게 은이 눈에 촌티가 나는 것으로 비쳤을 것은 분명했죠. 주말의 대학로는 사람들로 붐볐고 은이는 내 뒤에서 자꾸 내 걸음걸이를 흉내내면서 킥킥거렸습니다.



 

은이는 그 당시 운동권 학생이 되어 있었어요. 호프집에서 생전 처음으로 2cc째 맥주잔을 앞에 놓고 긴장하고 있던 내게 그 앤 자본론에서 12.12사태까지를 망라하며 그녀가 운동권에서 배운 모든 이론을 내게 전수하는 데에 열정을 쏟았죠. 오래 전 어느 날 은이가 처음으로 나를 따로 불러 냈을 때 그 애가 무슨 말을 할지 잔뜩 기대했던 나에게 '우리 오빠한테 과외 배우지 않을래?' 라고 물으며 핑크빛 기대에 찬 물을 끼얹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흔쾌히 데이트에 응한 은이는 나를 장차 운동권 선봉에 선 육군장교로 만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떤 일에 푹 빠져 있는 열정 넘치는 모습의 은이가 참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죠.

 

그 앤 내가 2 5cc 째 잔을 30분째 비우지 못하자 이미 바닥까지 비운 지 오래된 자기 잔에 전부 붓고 원샷으로 들이켜 버렸어요. 그런 다음 꺼억~ 트림을 하며 활짝 웃는 것도 잊지 않았죠. 하지만 내가 다시 화장실을 갔다 오자 상황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난 그 동안 마신 술이 깨고 있는데 은이는 이제 술이 제대로 취해오기 시작했던 거에요.

 

은이가 조금이라도 취한 모습은 그 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완전히 만취한 모습은 처음 보았고 그녀는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하는 혀로 내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자신의 얘기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집과 엄마와 가족, 그리고 새엄마에 대한 얘기들을 말입니다. 7년 동안 은이와 가까이 지내면서도 내가 정말 그 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혀가 꼬인 다음에도 은이는 그 호프집 2층 구석 테이블에서 뭔가 계속 내게 말을 하려 했고 이내 처연히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야 할 지도 모르면서 난 자꾸 그렇게 말하며 은이의 등을 토닥거렸지만 은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어요. 그 크고 예쁜 눈에 여전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 말이죠그때 그 애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그 애는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 역시 그날 밤의 일을 그 후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으니까요. 은이는 자기가 학군단복을 입은 누군가에 의해 집까지 업혀 왔다는 사실만 그날 아파트 문 앞에서 우리를 맞았던 큰오빠에게 들어 알게 되었겠죠.

 

함께 술 먹던 상대 여자가 곯아 떨어졌으니 보통의 경우였다면 난 그 호프집에서 상당히 곤란한 상황을 맞은 것이었지만 그게 전혀 싫지 않았습니다. 그 애를 업고 도로와 동숭동 비탈길을 2km 정도 걸어 올라가는 일은 훗날 상무대 동복 유격장에서 람보에게나 어울릴 엄청나게 무거운M-60 기관총을 들고 산길을 달렸던 것만큼이나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 순간 나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항상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은이가 그때 내 등에 업혀 있었거든요. 자세를 여러 번 바꾸면서 그 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이 보면 은이가 나중에 창피해질까봐 가게 앞을 지날 때는 방범등이 비치지 않는 쪽으로 조심조심 지났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은이의 허벅지와 엉덩이, 등에 와 닿는 그 애 가슴의 감촉, 그런 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자세였는데 당시 너무나 순진했던 나는 그날 밤 그렇게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한 은이가 이제 내 여자가 된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앞으로 은이는 내가 책임지고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라며 그 비탈길을 오르며 여러 번 다짐했습니다. 아직도 무더웠던 여름날, 달동네의 밤공기가 그날따라 상쾌하게 느껴졌어요.

 

그 후 며칠 동안 전화에서 은이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 그 비탈길을 오르던 밤을 기억하며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을 함께 가기로 약속한 날이 왔습니다대학로에서 그날 호프를 마신 것도 데이트라고 치면 이제 두 번 째 정식 데이트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산행이나 수련회를 은이와 함께 가긴 했지만 전날 호프집 사건 전까지는 단 둘이서 어딘가에 함께 가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린 대학로에서 만나 1호선을 타려고 종로3가까지 걸어갔어요. 그날은 새로운 날이었고 은이가 나의 마음을 받아주는 날이었죠.  최소한…, 그랬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종로 3가역 지하철 플랫폼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주말이라 사람들이 꽤 많았고 지하철 한번 타보겠다고 아직도 주말을 이용해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던 때였죠. 전철이 진입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은이의 허리에 내 팔을 감았습니다. 그건 내 여자를 붐비는 인파에서 보호하고자 한 아주 당연한 동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이는 등 뒤로 갑자기, 매우 사납게 내 팔을 쳐내 버렸습니다.

 

그건 아주 작은 사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은이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 앤 어쩌면 누군가 자기 몸에 손 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는지도 모릅니다. 꼭 그것이 내 손이 아니었더라도 말이죠. 그런 다음에도 은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전철에 올라타고는 아직도 플랫폼에 멍하니 서있는 나를 바라보며 빨리 타라고 눈짓했지요. 그러나 그 떄 내 마음 속에선 격렬한 폭풍우가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널 업고 집에 데려다 준 게 나란 말야! 네 허벅지와 엉덩이에 손을 두르고 네 가슴을 느끼면서 그날 밤 비탈길을 오른 게 바로 나였단 말야! 넌 그때부터 이미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여자가 된 거라구! 그게 바로 지난 주 일이었어. 지금 널 팔로 감싼 건 널 보호해 주려고 했던 거라구!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내 책임인데! , 그래서 그렇게 내 팔을 쳐내어서는 안되는 거였단 말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해 하는 은이를 태운 전철의 문이 닫히고 난 무너지는 가슴을 안은 채 여전히 플랫폼에 남아 역을 빠져나가는 전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장면은 부대 BOQ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을 때에도 종종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습니다. 난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어야 했어...너무 내가 어렸던 거야. 그렇게 이제는 어른이 다 되었다고 자부하며 그때 일을 회상하곤 했습니다. 자존심 강한 은이는 그 후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고 나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마 전화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 주, 두 주가 지나가자 결국 영영 전화하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은이는 다른 지역으로 교회를 옮기고 말았습니다.

 

서부전선에 짙은 안개가 드리웠던 어느 날 . 비무장지대에 들어가던 매복조 1개 분대가 길을 잘못 들었다가 지뢰를 밟아 좌초하고 새벽녘에 구조하러 들어간 다른 분대도 선두가 지뢰에 날아가 버려 아직도 붙어있던 병사들의 목숨이 해가 떠서야 들어온 다른 구조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꺼져갔던 날. 지원 보냈던 우리 부대 엠블런스가 돌아와 청소할 때 핏물과 살점이 물에 씻겨 내리던 것을 본 날이었습니다. 땅굴에 다녀온 내게 상황병은 어떤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전해 왔습니다.

 

군용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에 그 인내심 많은 여자가 누구인지 자못 궁금했지요사단 본부까지는 일반전화를 걸 수 있었겠지만 대대를 거쳐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일제시대 전화기처럼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돌려 거는 일명 딸딸이 전화를 통해 일일이 교환수를 거쳐 우리부대 상황실까지 연결해와야 했으므로 민간인 여성으로서는 어지간한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날 밤 은이가 다시 전화해 왔고 난 실로 4년 만에 그 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촌이라는 전방지역 국민학교에 부임한 은이는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문산으로 나갔다가 다시 금촌까지 가서 내촌행 버스를 올라타고서도 난 은이를 다시 만난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어요. 그날, 그 늦은 여름날, 종로 3가 지하철에서 헤어진 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헌병초소 검문을 두 번 받은 끝에 내촌에 도착했습니다. 은이는 약속한 대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 주고 있었습니다. 옷이며 머리모양에서 이제는 성숙한 여인의 내음이 나는 은이가 거짓말처럼 정말 거기 있었습니다. 벚꽃축제가 연상되는 예의 환한 미소를 짓고서요.

 

긴 치마에 털실로 짠 카디건을 입은 그 애의 모습은 조금은 예전보다 나이 들어 보였지만 은이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왠지 자꾸 자신 없이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그 애에게도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죠. 운동권의 투사였던 은이가 전교조가 무더기로 잘린 그때에 아직도 교직에 서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내촌이라는 깡촌까지 밀려온 것도 그랬습니다. 아릿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변절의 냄새... 하지만 물어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푸른 군복을 입고 전투모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 안의 나는 그날 은이가 탄 전철을 떠나 보내던 학군단 1년차의 모습에서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허름한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서 은이는 나를 자기 자취방으로 안내해 갔습니다.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죠. 계속 겉도는 얘기만 하다가 그 애 집에서 어색해진 나는 뜬금없이 "난 이제 커피에 인이 백였어" 하고 마음에도 없던 말을 지껄였고 은이는 빙긋이 웃으며 물을 올리고 작은 난장이 탁자에 커피며 크림병을 올려 놓았습니다.

 

"..., 그땐 미안했어..."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마치 금기인 것처럼 서로 입에 담지 않았던 전철역에서의 일을 내가 먼저 꺼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은이는 여전히 빙긋이 웃을 뿐이었죠.

 

"군대생활은 좀 어때?"

  

우리 대화는 여전히 서로 초점이 맞지 않았습니다. 은이는 그때 아마도 내게서 당황함과 초조함을 읽었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애의 흰 목덜미와 가끔 내쉬는 낮은 한숨에서 세상이 그 애를 여기까지 흘러오게 했고 이제 또 어디론가 흘려 보내고야 말 거라는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애의 인생이 나의 인생에 자꾸 다가서곤 하지만 결국은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빗겨 나갈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시계를 본 은이는 뭔가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여긴 여덟 시 반이면 차가 끊겨."

 

호텔은커녕 여관도 없는 내촌에 도착한 지 겨우 한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우린 얘기다운 얘기를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십 분 후면 차가 끊긴다는 것입니다.

 

"카드놀이 할 줄 알아?"

 

당연히 할 줄 아는 카드놀이가 몇 개 있었죠. 그러나 그 말은 남은 20분 동안 카드놀이를 하자는 의미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은이가 나를 보내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었지요. 마치 세상의 끝인 것 같은 오지 내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누구도 모르는데 내 앞엔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맘을 태우게 하던 은이가 나와 함께 밤을 지내고 싶어합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앞에서 난장이 탁자에 카드를 꺼내 섞는 은이의 손이 떨리며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맙니다. 왼쪽 뺨, 그리고 이어서 오른쪽 뺨. 그 앤 카드를 섞으며 그렇게 애써 소리 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내촌을 빠져 나오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서 난 무엇이 은이를 그렇게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은이에게 생겼던 것일까요? 왜 그 애는 그곳까지 흘러와야 했을까요? 그 대답은 아직까지도 모릅니다. 난 울고 있는 은이의 흔들리는 어깨를 토닥거려주지도 못한 채 멍청히 앉아 있었을 뿐이었고 얼마 후 어정쩡하게 일어나 문간에서 군화끈을 매기 시작했죠.

 

그 많은 해가 지난 후 그 애가 그런 절박함으로 무언의 애원을 해왔을 때, 아니, 최소한, 내가 그렇게 느꼈을 때, 난 어째서 그 자리를 그렇게 총총히 떠나야 했을까요? 그 애에게 변절과 위선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런 식으로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은이와 밤을 지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어쩌면, 늘 내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내 속을 태우던 은이가 그날 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숨결이 느껴질 거리까지, 그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와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의 간절함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난 그 애가 영원히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져 버리고 말았음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논리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은이는 버스정류장까지 다시 나를 데려다 주었어요. 그리고 비록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도 언젠가 날 그토록 철저히 매혹시켰던 그 화사한 웃음을 띄우며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87년도의 일이었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 내촌에서의 이별, 떠나가던 전철의 모습은 이젠 자주 떠오르지 않습니다. 단지 늦은 밤 혼자 깨어 있을 때 오래된 사진첩에서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진을 찾아 낸 것처럼 가끔 생각날 뿐이죠. 난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고 둘 다 한 살 터울로, 어쩌면 은이가 어느 교단에선가 아직 가르치고 있을지 모를 초등학교 학생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그 당시의 친구들을 실로 오랜만에 만난 적이 있어 은이의 근황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애도 이제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낳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하지만 왠지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내촌에서 보았던 그 애의 진한 절망과 절박함이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어서겠지만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항상 은이를 마음속에 품어 왔지만 한번도 사랑한다든가 좋아한다는 식의 말을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도 참 쑥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널 많이 사랑했었어.

 

 

매혹적인 미소를 가진 내 첫사랑의 행복을 빕니다.

 

2012. 10. 28 (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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