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그의 본심

beautician 2017. 10. 3. 09:00


어떤 사람이 숨기려 하던, 아니 굳이 내비치지 않으려 하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게 드러나면 자신의 악의나 약점을 들키게 되거나 상대방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성을 작동시켜 전력을 다해 마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은 이성이 멈추거나 마비될 때입니다. 깜짝 놀랐을 때. 공포에 질렸을 때. 그리고 술 취했을 때처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명가면옥에서 하회장님이,


"이제 와서 말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그림 받고서 가만 있는 게 좀 그러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얼마 전에 그려드린 초상화를 말하는 겁니다. 물론 난 올해 한 해 동안은 최대한 많은 초상화를 무상으로 그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년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아, 인도네시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지인들, 친구들, 어르신들에게 따로 일일이 인사하거나 식사를 사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질 터여서 그 대신 초상화를 작별선물이라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 소위 계급장을 달고 상무대에 기본훈련을 받으러 떠나기 직전 지난 2년간 함께 학군단 생활을 했던 절친 몇 명에게 작별선물로 초상화를 그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회장님이 아셨을 리 없습니다.





"그거 아니에요. 그러면 안되요"

갑자기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사무국장 이시인이 그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럴 가치가 없는 거에요. 그 정도 그림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러세요!"

그는 시인이었고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더욱이 한인사회의 높은 사람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살갑게 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 술에 만취하면 내게 적의를 보이곤 했습니다. 명가면옥에서의 그 일이 처음이 아니었어요. 2주 전 살라띠가의 한 호텔의 라운지에서도  자정 가까이 된 시간에 만취한 그는,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태클을 걸었습니다.

물론 그건 주사입니다. 더 심한 주사를 부리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봤으니 이시인이 그런 주사를 부린다 해서 굳이 새삼스러울 일도, 기분나빠야 할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만취해도 다른 사람에겐 깎듯이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내게만 내리 두 번씩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속마음을 내비친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속마음을 뭐라 읽어야 할까요? 

그는 내 어느 하나 시기할 이유없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는 더이상 잃을 것 하나 없는 나와 달리 새로 살라띠가에 연구원도 열었고 한인회 거물들과 쟁쟁한 인맥을 맺고 있는데 말이죠. 그냥 내 그림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냉철한 견해였을까요?

"배작가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 그림 나부랭이들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고요?"

하지만 이런 말은 확실히 좀 아픕니다. 악의 하나 없이 단지 주사때문이라 해도 심신미약 상태에서 찔러댄 칼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을 리 없는 겁니다.

물론 이 분은 절대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기억하더라도 절대 기억나지 못하는 척 하겠죠. 나라도 그러겠습니다.

최소한 난 술에 취했다고 해서 그걸 기화로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다른 사람을 모욕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훈련받았고 그게 옳은 일이라 생각하니까요. 더욱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한테는 감히 그러지 않습니다. 난 어차피 아마추어 초상화가인 셈이고 누구에게도 그 댓가를 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 역시 내가 그려준 초상화를 받고 무척 좋아 했었는데 왜 만취하고 나면 나를 폄하하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일까요?

뭐, 업보일까요?^^ 


2017.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