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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 갱신하기

beautician 2008. 12. 23. 19:31

 

 

 

작년 11월에 운전면허증 갱신하러 다안 모곳(Daan Mogot)에 갔을 때만 해도 면허시험장 상황은 언제나처럼 가관이었습니다. 주차장부터 시험장 건물 안까지는 물론 면허시험장 앞 도로변까지 브로커들이 줄지어 서서 도와 주겠다는 고마운 말씀들을 하고 계셨어요. 건물 안 리셉션 데스크의 여경도, 그 옆에 양복을 차려입은 직원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들고 나오는 청소부까지 우리 곁에 와서 자기가 도와 주겠다고 속삭였지요.

 

정말 압권이었던 것은 면허시험장 입구 바로 앞에 나 있는 골목이었습니다. 마치 경찰소속 직원 내지는 경비원인 듯한 복장을 한 사람들과 몇 명의 여자들까지 길가에 나와 면허 시험장이 그날 문을 닫아서 임시로 그 골목에서 운전면허를 내준다는 거였어요. 벌써 말이 안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진입한 그 골목 사람들 인상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 골목 끝에 런닝셔츠 입고 배 불뚝 나온 남자가 나와 자기가 면허시험장에서 일하는 경찰인데(전혀 경찰 같지 않게 생겼고 그가 경찰임을 증명할만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100만 루피아만 주면 빨리 처리해 주겠다는 말에 잘못 걸려다고 생각한 순간, 그 골목은 차를 돌리기엔 너무 비좁고 이미 우리 차 주변을 여러 명이 둘러 싸고 있었어요.

 

바로 그 집 뒷담 너머가 경찰서(면허시험장)인데 기가 막힌 일이죠. 하지만 온 천지에 널린 부정부패에 좌우 뺨따귀 맞고 뒤통수 맞으면서 꽤 오래 살아온 인도네시아 생활인데 거기서 그 정도에 꼼짝없이 돈 뜯길 짠밥은 아니에요. 무작정 후진해서 나왔죠. 그 골목 길이가 100미터쯤 됩니다. 수틀리면 해꼬지라도 할 듯 얼씬거리던 사람들도 막상 차를 빼는데 가만히 있더군요. 그나마 경찰서 바로 옆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 골목 나와 불과 10미터 가서 좌회전 꺾어 들어간 면허시험장은 방금 전 그 사람들에게 문닫았다는 말 들은 게 무색하게 신청자들과 브로커들로 붐비고 있었어요. 정말 눈뜬 사람 코 베어갈 세상이지요. 그날 리셉션 데스크에 나와 있는 경찰관을 브로커로 하여 갱신은 25만 루피아, 신규는 40만 루피아 들었습니다.

 

10월초에는 가족이 면허증을 새로 냈습니다. 그 다안 모곳 면허시험장에서요. 하지만 이번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규정이 바뀌어서 리셉션 데스크에서는 신체검사부터 실기시험까지 제대로 봐야 한다며 엄포를 놓았고 그날 면허를 갱신한 사람들은 70만 루피아 낸 사람도 있고 심지어 100만 루피아 낸 사람도 있었어요. 높은 분들이 국회에서 만드는 법규정이나 대통령, 장관들이 내리는 법명령이라는 게 세상을 똑바로 세우고 국민들의 권익을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일텐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왜 하나같이 공무원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방향으로 귀결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날 맹활약을 한 우리 여직원의 분투로 직접 각 창구들을 열심히 뛰어 다닌 끝에 두 시간 만에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어요. 15만 루피아도 채 들지 않았습니다. 원래 규정상의 비용은 그 보다 훨씬 밑일 것이구요. 그 덕에 그날 우리 여직원은 면허시험장 창구 직원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게 가능했다는 건 그때부터 이미 다안 모곳 면허시험장에도 모종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신호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다시 11월이 돌아와 내가 면허증을 갱신해야 하는 날이 왔습니다. 비자가 1년짜리다 보니 모든 서류와 허가를 매년 다시 만들고 갱신해야 한다는 것이 꽤 지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법규정이 그러니 아무리 불평을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깜짝 놀랐어요.

신청자들만큼이나 많았던 브로커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 옆골목에서 호객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체검사하는 데에서 접수비 내고 잠깐 시력검사한 후 본건물 안에 들어와 신청서 사서 기재하는 데 조금 시간 걸렸지만 그런 다음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잠시 대기했다가 사진 찍고 지문채취 및 서명했더니 잠시 후 방송으로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갱신면허증이 벌써 나왔답니다.

 

불과 30?  비용은 Rp75,000 들었습니다.

나는 그 전달 맹활약한 예의 여직원과 함께 갔지만 그날 혼자 와서 창구를 돌며 면허를 내는 외국인들도 꽤 보였어요. 도와 주겠다며 달라 붙는 사람들도 없었고 10월 달처럼 제출한 여권이며 서류를 뒤지면서 그 사이에 끼어놓지 않은 돈 때문에 불평하며 눈을 부라리는 공무원들도 없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현직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했지만 부패를 일소하기 위한 모든 법안들과 규정들은 부패를 조장하는 환경과 부패에 찌든 공무원들을 그대로 둔 채였기 때문에 대부분 별다를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지만 기적적으로 부패가 일소되어 있던 면허시험장은 쾌적하기 그지없었고 마치 다른 나라 같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아직도 40만 루피아에서 70만 루피아까지 내면서 브로커를 통해 면허갱신을 하고 리셉션 데스크에서 뭘 물어보다가 걸려 들어 실제 비용의 몇 배를 지불하는 경우가 빈번한 모양이지만 이제 다안 모곳의 면허시험장에서는 혼자서 직접 창구를 돌며 면허갱신을 해도 1시간 이상 걸리지 않고 비용도 Rp75,000 이상은 들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분명히 부정부패타파를 위한 개혁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고 나는 그날 면허시험장에서 이 나라에도 일말의 희망이 엿보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200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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