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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ATM 사건

beautician 2008. 12. 26. 14:42

 

 

성탄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12월 셋째 주 끌라빠가딩 Mall of Indonesia (MOI 라고 줄여 부르더군요. 닭모이…)의 앞 루꼬에 있는 BCA은행에서 은행문을 나서던 손님이 ATM 현금지급기에서 막 찾은 돈을 날치기에게 털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더운 날씨와 바쁜 일과에 성탄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몰 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그 어수선한 상황에 비로서 연말연시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너무 역설적일까요?

 

그 사건을 보면서 제가 겪었던 몇 년 전 ATM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저 날치기 당한 손님의 억울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지만 당시의 저는 그 몇 배나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때는 바야흐로 2006년 초. 장소는 쯤빠까마스(Cempaka Mas) 아파트 샤넬 미용실 앞에 있는 BCA 은행의 ATM 창구였습니다. 당시 저희 사업은 꽤 자리를 잡으면서 업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2002년도에 겪었던 처참한 파산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아 직원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대부분의 일을 혼자 다 감당하고 있었어요. 은행 일도 그 중 하나였죠. 미칠 듯이 바쁜 일정을 쪼개 ATM 앞에 줄을 서서 다음 일정을 점검하면서 한 손에는 ATM 카드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걸려오는 전화 받기에 바빴고 내 순서가 되어 다음날이면 결재해야 할 구매대금을 남기고 비자 브로커에게 소액 송금을 한 것이 그곳에서의 일이었어요. 송금은 순식간에 끝났고 난 이미 미팅시간에 늦어 버린 거래선에서 또 다시 걸려온 전화에 시간 양해를 구하며 창구를 떠나 급히 차에 올랐지요.

 

ATM 카드가 없어졌다는 걸 안 건 다음날 아침 시내 증권거래소 건물에 있는 BCA 은행에서였어요. 우리은행에서 구매대금을 송금하기 위해 BCA은행에서 현금을 찾으려는데 카드가 없는 거에요. 창구에서 찍어본 통장 잔액의 동그라미가 생각보다 와장창 줄어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벼락이라도 치듯 갑자기 기억이 났어요. 어제 그 ATM 창구에서 송금한 후 ATM 카드를 빼오지 않았다는 것을요. 그날 송금한 것은 불과 수십만 루피아였는데 통장에서는 수천만 루피아가 빠져 나가 있었습니다. 잔액은 달랑 60만 루피아…, 당시의 제 재정상태로서는 전 재산이 날아가 버린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눈 앞이 노래졌지요. 정말로...

 

지금은 시스템이 바뀌어 ATM 거래를 할 때 잔액조회를 포함한 매 거래 시 마다 비밀번호를 다시 쳐야 하고 특히 송금할 때엔 최종 내역확인 후 비밀번호를 다시 한 번 쳐서 확인해 주어야 송금되도록 좀 더 안전해 졌지만 당시에는 거래를 계속하시겠습니까?’ 라는 화면상 질문에 를 클릭해 주면 비밀번호를 다시 칠 필요 없이 곧 바로 다음 거래가 가능했어요. 지금도 몇몇 낡은 몰에 가 보면 예전 시스템을 그대로 쓰고 있는 구식 ATM 기계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날 내가 창구를 급히 떠난 후 들어온 다음 사람이 예기치 않은 횡재를 한 거에요.

 

Halo BCA에 전화해서 비록 늦었지만 ATM 카드를 정지시키고 개설은행과 쯤빠까마스 BCA은행에 가서 사고 경위를 설명하며 대책을 묻는 동안 하루가 다 지났고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BCA 은행 측에서는 비록 다른 사람이 불법적으로 내 카드를 도용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는 당초에 올바른 비밀번호가 입력되었기 때문에 BCA로서는 정상거래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정 해결을 원해 빠져나간 돈이 송금된 송금처와 해당 구좌의 내역, 당시 CCTV 촬영 필름 등을 보고자 한다면 경찰을 통해 정식으로 요청을 해오라는 거였습니다. 한참을 요청한 끝에 간신히 들을 수 있었던 정보는 해당 금액이 깔리만탄 반자르마신에 있는 누군가의 구좌로 이체되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미 사건 발생 후 36시간 가량 지나 이미 송금된 돈을 인출해 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 깝깝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넋놓고 가만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정말로 꼭 필요한 돈이었고 너무나 간절했으므로 경찰서에 신고 접수하기로 마음 먹고 은행을 떠났습니다. 이미 물 건너가 버린 상황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요

 

경찰서를 향한 것은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시간이었습니다.  경찰서를 향하는 제 가슴은 서늘하게 저려오는데 그나마 얘기를 들은 제 동업자 친구가 급히 달려와 내내 제 곁을 지켜준 것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잃어버린 돈의 일부라도 되찾을 있지 않을까기대했던 것은 최소한 범인을 잡는 것만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ATM 창구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은 바로 내 뒤에 들어온 사람. 내 거래명세표에 거래시간이 찍혀 있으니 범행시간은 바로 그 직후 1~2분 사이이고 ATM 창구에는 CCTV가 촬영하고 있었으므로 범인이 찍혔을 것도 분명하고 무엇보다도 현금 인출한 것이 아니라 반자르마신의 모 구좌로 송금했다면 경찰 측의 요청에 의해 은행으로부터 그 받은 구좌내역과 예금주를 쉽게 받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만약 한국에서 발생했다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신고접수 조서를 쓰는 동안 상황은 완전히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신 인도네시아에 와 있는 목적이 뭐요?”

옆에 있는 저 여자, 당신 현지처 맞지?”

허가서류 다 내 봐. SKLD 가 왜 없어? 당신 혹시 불법으로 일하고 있는 거 아냐?”

 

조서를 꾸미는 형사는 오히려 나를 범법자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SKLD KITAS 비자관련으로 경찰청에서 나오는 ID 카드 같은 것인데 신청 후 발급까지 2~3개월 걸리는 게 보통이죠. 경찰은 엉뚱하게도 처음부터 그것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제 파트너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뛴 후에야 겨우 예금도난에 대한 신고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형사는 여전히 엉뚱한 질문을 날리곤 했습니다.

 

당신 애들 학비 한 달에 얼마 내?”

“BCA 구좌 말고 다른 구좌들 또 있지? 그 구좌들에 돈 얼마씩 있어? 여기다 좀 적어 볼래?”

당신 월급, 우리 월급에 한 60배 되지? 그치?”

 

그때마다 제 파트너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말을 끊어 놓지 않았으면 그날의 조서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에요. 그렇게 조서를 끝내고 나니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는 데 6시간 이상을 소비했고 이건 신고접수가 아니라 거의 용의자 심문의 수준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로에 지쳐 녹초가 되어 버렸죠.  형사는 자기들이 수사를 한 후에 결과를 연락해 주겠다고 했지만 이젠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찰서에 온 것 자체를 이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형사는 경찰서 현관을 나서려는 우리를 뒤쫓아 나와 한 마디 더 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깔리만탄에 출장가야 하는데…, 몇 명이 함께 가야 하니 출장비가 천만 루피아 정도 들 텐데…, 돈 찾아 줄 테니 내일쯤 출장비 갖다 줄 수 있지요?”

 

이 친구들은 절대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미 한산해진 경찰서 앞 끄라맛 라야(Kramat Raya) 거리에는 아직도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데 제 뻥 뚫린 가슴을 관통하는 바람은 서릿발처럼 차갑게 느껴집니다. 제 파트너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위로해 줬어요.

 

잃어버린 돈은 잃어버린 거지 뭐. 미스터르가 늘 하던 말 있잖아? 문제가 생기는 건 다 해결되기 위해서라며?  그깟 돈…, 아까워 죽겠지만 그 이상도 하루 밤 사이에 벌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야.

누군가 미스터르보다 더욱 절박하게 돈 필요한 사람에게 줬다고 생각하고 맘 편하게 먹어. 좋을 일 생기려고 그러는 거야. 정 안되면…, 내가 벌어서라도 줄께.”

 

그렇게 말하는 이 친구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토닥거리며 위로해 주어야 했습니다.

 

제 파트너의 말대로 마음을 편하기 먹기 시작한 것은 며칠 지난 후부터였습니다. 경찰서에서 출장비 갖다 달라는 전화가 그 후로도 몇 번 오긴 했지만 갖다 줄 돈도 물론 없었을 뿐더러 경찰에게마저 도움은 받지 못할 망정 사기까지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빨리 미련을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업무집중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죠. 범인을 잡겠다는 경찰이나  ATM에서 돈을 빼간 범인이나 실상 별반 차이가 없는 게 분명했고 굳이 차이를 대라면 국가가 주는 월급을 받는 공인된 도둑과 자가발전하여 검거의 위험을 무릅쓰고 애써 노력하는 도둑 정도이렇게 얘기하니 후자의 경우가 훨씬 나아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직 인도네시아의 경찰은 민중의 편, 약한 자의 편이 아닌, 자기들만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소홀함의 대가를 치를 때 이 나라에서는 도무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좋은 친구의 위로는 생명을 살리는 약과 같다는 것이었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의 이야기이지만 파트너의 말처럼 잃어버린 돈 정도의 금액을 하루 밤사이에 벌 수 있는 날은 실제로 왔고 제 파트너도 정말로 자기가 번 돈으로 내 사무실 2년치 임대료를 선불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ATM 기계 앞에 서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때 일이 떠올라 한번 더 ATM 카드를 챙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어떻게 되었을까도 생각하곤 합니다. 그 후 경찰서로부터는 그 사건과 관련해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은 돈이 아니었고 필요한 모든 정보가 경찰 손에 들어가 있었으니 손만 뻗치면, 그리고 조금만 알아 보면 잡을 수 있는 범인을 경찰이 그냥 놓아 두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몇몇 관련된 경찰관들의 삶이 조금은 더 편해졌겠죠.

 

그리고 또 하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당시 제 구좌에는 달랑 60만 루피아가 남아 있었어요.

다 빼갈 수 있었음에도 범인이 그 돈을 남긴 건 나름대로의 유머였을까요?

 

아니면 개평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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