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9월 30일 쿠데타 - 광기의 새벽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22)
9월 30일
사태
1965년 10월 1일 새벽 여섯명의 최고위 육군장성들이 납치, 살해되는 ‘9월 30일 사태’가 벌어집니다.
10월 1일 새벽 200여명의 군인들이 멘뗑 소재 아흐맛 야니 장군의 집을 포위했습니다. 야니장군의 집엔 보통 11명의 군인들이 경호원으로서 상주하고 있었는데 일주일 전 6명이 충원되었음을 야니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 충원병들은 라티에프 대령의 부대에서 보내온 사람들이었는데 라티에프는 9월 30일 사태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여섯명은 9월 30일 밤 야간경비조로 근무에 투입되었습니다.그날 밤 야니의 부인은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외부에서 파티를 즐겼는데 그녀가 집에서 나서던 밤 11시경 길 건너편에서 야니의 집을 감시하는 것 같은 어떤 사람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집엔 무장경비원들이 잔뜩 있었으니 말입니다. 야니 부인이 나중에 생각해 보니 9월 30일 밤 9시경부터도 경비조에게 뭔가를 묻던 전화가 일정 간격으로 걸려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쿠데타의 전조였지만 아무도 눈치재지 못했습니다.
야니 장군은 9월 30일 저녁 7시경, 최고작전사령부(KOTI)에서 온 한 대령과 동부자바 사단장 바수끼 라흐맛 장군 등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바수끼가 자카르타에 온 이유는 동부자바에서 점점 수위를 높이고 있는 공산당 활동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야니 장군은 다음 날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바수끼와 함께 들어가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잠든 야니장군 자택에 밀어닥친 반란군은 그를 대통령에게 급히 데려가야 한다며 현관문 앞에서 야니를 독촉했습니다. 이른 새벽이어서 뭔가 수상함을 느꼈지만 야니는 일단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우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는데 병사들은 이를 제지하며 당시 복장 그대로 따라나서라며 강경하게 밀어붙었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는 일개 병사의 위협에 겁먹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독립전쟁 당시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네덜란드군과 싸웠고 수마트라 미낭까바우의 RRRI 반란에서는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반란군을 철저히 격멸했던 화려한 야전경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격노한 그가 병사의 뺨을 갈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이들이 반란군이란 사실을 야니는 깨닫지 못했던 같습니다. 그런 후 그가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돌아섰을 때 반란군 병사 한 명이 그의 등 뒤 현관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그의 소총이 여러 번 불을 뿜자 현관유리를 관통한 총탄들은 현관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멀어지고 있던 야니의 등에 깊숙히 박혔습니다. 피격된 야니는 그 자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 바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거목이 쓰러지는 것은 그렇게 한 순간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살아남았다면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고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는 일도 없었겠죠. 반란군 병사들은 야니의 시신을 트럭에 태워 뽄독거데 루방부아야의 반란군 본부로 향했습니다.
10월 1월 새벽 수쁘랍또 소장은 즐겨 그리던 그림도 그리지 못할 정도로 치통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반란군들이 그의 멘뗑 자택을 급습했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군이 아직 국민치안군(TKR)이던 시절 합류하여 1946-1947년엔 수디르만 장군의 경호원으로 근무했고 1949년 9월 중부자바 디포네고로 사단 참모장으로 취임, 1960년엔 수마트라 육군 부사령관에, 1962년 7월엔 인도네시아 육군 부사령관에 오르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던 인물입니다.
반란군들은 대통령 경호부대인 짜끄라비라와 부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까르노의 급한 소환이 있다며 수쁘랍또의 동행을 요구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었으므로 곧 옷을 갈아 입고 나오겠다고 했는데 병사들이 이를 허락치 않자 그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마치 범죄자처럼 반란군들에게 체포되어 루방부아야 지역으로 끌려갔고 반란군들이 집의 전화선을 모두 끊어버려 그의 아내는 빠르만 장군에게 편지로 상황을 알리려 했지만 그때 빠르만 역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쁘랍또 소장은 루방부아야로 붙잡혀 온 다른 장성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은 폐우물 안으로 버려졌습니다.
빤자이딴 준장은 1945년 11월 대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하여 1948년 3월 서부 수마트라 부낏띵기 지역 반뗑사단의 조직 및 교육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네덜란드의 제2 경찰행동으로 족자의 수까르노 정부가 통째로 나포되자 부낏띵기 긴급임시정부의 보급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7년 서독 본에서 무관생활을 했고 인도네시아에 돌아온 후 군수뇌부에서 주요보직을 맡기도 하고 미국 국방대학 장성급 참모과정을 수료한 후 육군참모부의 제4차관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루방부아야에서 출발한 반란군이 10월 1일 새벽 하사누딘 거리에 있던 빤자이딴 준장의 자택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 과정에서 1층에 있던 상주사환들과 격투를 벌여 그 중 한 명을 사살했습니다. 빤자이딴은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란군이 가족들을 인질로 삼자 빤자이딴은 결기를 다지고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말끔한 정복차림으로 2층에서 내려와 반란군과 대치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스스로 수의를 차려 입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설득과 타협의 여지가 남지 않자 그는 반란군에게 권총을 뽑아 들었지만 병사들의 총격이 먼저였습니다. 반란군의 총탄이 그의 머리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반란군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빤자이딴에게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이미 숨이 끊어진 그의 시신에 수차례 더 총질을 한 후에야 트럭에 실어 루방부아야로 옮겨 갔습니다. 빤자이딴은 10월 1일 새벽에 벌어졌던 일련의 납치살인사건 속에서 가장 군인다운 죽음의 모범을 보였던 남자였습니다.
수또요 준장은 인도네시아 헌병대장을 역임한 가똣 수브로또 장군의 부관을 역임했고 헌병장교로서 착실히 경력을 키워온 결과 헌병대 본부참모장, 런던 무관, 반둥 장성/사령관대학을 거쳐 1961년부터 군검사장 및 법제처장의 지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의 자택도 멘뗑소재의 수머넵 거리(Jalan Sumenep)에 있었는데 10월 1일 새벽 반란군은 차고를 통해 들어와 상주가정부에게 집열쇠를 확보한 후 집안에 들어와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대통령이 부르니 따라나서라며 수또요를 강권했습니다. 별다른 저항없이 반란군 병사들을 따라 차에 오른 수또요 준장은 루방부아야로 가는 동안 거친 병사들의 행동과 강압적인 분위기에 분명 수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겠지만 당시 혼란스럽게 돌아가던 군 내부상황과 정세에 비추어 어쩌면 이런 급한 호출을 받을 만한 상황이 정말 벌어졌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루방부아야엔 납치된 다른 장성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과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빠르만 소장은 수쁘랍또 소장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군의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족자에서 헌병장교로도 근무했고 자카르타 군정시장의 참모장이 되었다가 당시 정보분석을 통해 레이먼드 베스털링의 APRA 반란군이 국방장관과 군고위장성들을 살해하려던 음모를 막아낸 정보통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헌병학교에서 공부한 후 자카르타 헌병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헌병대와 국방부의 요직을 거친 후 런던 무관으로 발령됩니다. 그는 1965년 6월 28일 소장으로 진급하며 육군사령관인 아흐맛 야니 중장을 보좌하는 정보담당 제1차관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이상행동발생에 대한 경고를 접하고 있었지만 정작 9월 30일 사태가 벌어지던 10월 1일 새벽 그의 자택을 지키는 경비원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빠르만 소장 부부는 그날 새벽 4시 10분경에 집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었습니다. 빠르만이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 나갔을 때 24명의 짜끄라비라와 부대원들이 응접실로 돌입해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으니 대통령을 만나러 가자며 그를 강권했습니다. 그가 정복을 갖추는 동안 병사들은 응접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안방까지 들어와 그를 감시했으므로 의아하게 여긴 그의 아내는 병사들에게 명령서를 보여달라 하자 한 병사가 명령서를 가져왔다며 자기 주머니를 툭툭 두드려 보였을 뿐 끝내 명령서를 꺼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빠르만은 그의 상관인 야니에게 이날 새벽 벌어진 일을 보고하라고 아내에게 당부했으나 반란군이 전화선을 끊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끌려간 빠르만 소장은 루방부아야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의 시신도 폐우물에 유기되었습니다.
M.T. 하리요노 소장 역시 TKR에서 소령계급을 달고 군생활을 시작해 독립전쟁 당시 여러 보직을 거쳤고 헤이그 원탁회의에도 인도네시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자택에도 짜끄라비라와 부대원들이 10월 1일 새벽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문앞에 나온 부인에게 대통령이 남편을 찾는다는 전언을 넣습니다. 그러나 이를 들은 하리요노 소장은 아침 8시에 다시 찾아오라는 말을 전달합니다. 일개 장군이 대통령 지시를 그렇게 임의로 연기시킬 리 없으니 하리요노는 이때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것 같습니다. 하리요노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반란군들은 동요하며 급기야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리요노는 그런 상황을 예상한 듯 아내와 아이들을 다른 방으로 피신시킨 후 방의 불을 끄고 문 밖의 반란군들과 대치했습니다. 하지만 권총 한 자루 없이 소총으로 무장한 20여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초조함을 참지 못한 반란군이 급기야 방문 자물쇠를 쏴 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하리요노는 어둠 속에서 신문지에 불을 붙이려던 한 병사에게 달려들어 소총을 뺏으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어깨를 대검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항을 중지했다면 그는 잠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급히 몸을 피해 정원 쪽으로 달아나려 했고 반란군들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반란군의 일제사격을 받은 하리요노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체포과정에서 살해된 야니 중장이나 빤자이딴 소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란군들은 하리요노 소장의 시체를 트럭에 싣고 루방부아야의 반란군본부로 달려갔습니다.
짜끄라비라와 부대원들의 공격을 받고도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한 사람은 나수티온 장군뿐이었습니다. 아립(Arief)중위의 지휘 아래 반란군의 나수티온 체포조가 트럭 네 대와 찝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뜨꾸 우마르 거리(Jalan Teuku Umar) 소재 나수티온 장군 자택에 도착한 것은 10월 1일 새벽 4시경이었습니다. 나수티온은 평범한 단층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20명 가까이 되는 경비병들은 군용트럭의 접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부관 삐에르 뗀데안 중위와 함단 만슈르 경위는 마침 모두 잠들어 있던 시각이었습니다. 그 군용트럭이 호의적인 병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립중위의 부대는 이미 담장을 넘어 안에 있던 경비병들을 제압했고 반란군 15명 정도가 집안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 시각 나수티온 부부는 모기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부인이 문밖을 내다 보았을 때 이미 짜끄라비라와 부대 병사들이 당장이라도 발포할 기세로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급히 문을 닫으면서 남편에게 급박한 위험이 닥쳤음을 알렸고 나수티온이 직접 상항을 확인하려 문을 열자 반란군은 총격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급히 문을 닫자 부인이 자물쇠를 잠갔지만 반대쪽에서 들어온 병사들이 침실을 향해 총격을 가해왔습니다. 쿠데타가 발생했음을 직감한 나수티온은 뒤쪽 정원으로 나가 이라크 대사관저와 접한 담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가 가족들을 반란군의 손아귀에 남겨둔 채 혼자 몸을 피한 것에 대해 일각에선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그때 그가 용맹스럽게 반란군과 맞선다 해도 이미 경비병들과 부관들이 제압된 상황에서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전군사령관인 그가 사살되거나 생포된다면 인도네시아는 반란군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갈 확률이 훨씬 높아질 터였습니다..
그를 발견한 반란군들이 퍼부운 총알세례를 피해 그가 간신히 담을 넘은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였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반란군은 이라크 대사관저까지 추격해 오진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반란군들은 도주하는 자가 있어 총을 쏜 것이지 그가 나수티온인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한 집에 살던 나수티온의 가족들은 총소리에 놀라 모두 일어났는데 나수티온의 어머니와 여동생 마르디아는 나수티온의 침실로 달려가 다섯살 난 나수티온의 막내딸 이르마를 안고 피신하려 했으나 반란군의 총격이 문을 뚫고 날아와 마르디아의 손을 관통했고 어린 이르마의 척추도 세 발의 총탄으로 완전히 부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이르마는 나중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닷새 후 숨지고 말았습니다.
나수티온의 큰 딸 얀띠와 유모 알피아는 부관들이 쓰는 별채의 침대 밑에 숨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뗀데안 중위는 총에 장전을 하고 별채에서 뛰어나왔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해 반란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반란군은 그를 나수티온 장군이라 착각했습니다. 그것이 나수티온에겐 행운이었고 젊은 뗀데안에겐 가혹한 사형선고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집밖으로 피신시킨 부인은 뒤뜰에서 돌아와 피투성이가 된 막내딸을 안아들고 전화로 앰뷸런스를 부르려 했지만 아립 중위가 그녀를 저지하며 나수티온의 행방을 집요하게 물었으므로 그녀는 격정적인 언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호루라기 신호가 울리자 그들은 신속히 철수하면서 체포한 뗀데안 중위만을 트럭에 태웠습니다. 그렇게 나수티온 장군 대신 생포된 뗀데안 중위는 루방부아야에 끌려가 잡혀온 다른 장성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습니다.
나수티온의 이웃이었던 요하네스 레이메나(당시 세명의 부총리 중 한 명)의 집을 지키던 경비단장 까렐 삿쭈잇 뚜분이 나수티온의 집에서 벌어지던 소동을 목격하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다가오다가 사살되었는데 이 일로 레이메나 역시 숙청 대상에 올라있었다는 얘기가 나돌았으나 이것은 혼란 속에서 일어난 의도치 않은 사고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9분간 벌어졌으며 나수티온 부인이 이르마를 군병원으로 데려간 후에야 경비병들은 알람을 울렸고 자카르타 경비대장 우마르 위라하디꾸수마 (Umar Wirahadikusumah)가 헐레벌떡 나수티온의 집으로 달려와 상황을 파악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미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G30S사태는 대통령 경호실장 운뚱 빈 샴수리 (Untung bin Sjamsuri) 중령을 위시한 반란군 수뇌부가 브라위자야 사단, 디포네고로 사단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 경호부대 짜끄라비라와 부대를 움직여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운뚱 중령은 잘 알려진 공산주의 옹호자였고 1948년 PKI 반란에도 가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반란군이 루방부아야의 본부로 생포해 간 수쁘랍또 소장, S.빠르만 소장, 수또요 준장과 뗀데안 중위는 모진 고문과 조롱을 받은 후 차례차례 처형되었고 체포과정에서 사망한 야니 장군 등 다른 장성들과 함께 폐우물에 버려졌습니다. 당시의 처참함을 그대로 담은 그들의 시신이 수습된 것은 사흘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들은 라디오 방송국과 통일광장을 점령한 후 이 날의 사태가 CIA의 영향을 받은 장성들의 쿠데타 시도로부터 수까르노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성명을 라디오를 통해 방송했습니다. 뒤이어 이 방송은 수까르노의 내각이 해산되고 ‘혁명위원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을 공표했습니다. 중부자바에서도 족자와 솔로에서 10월 1일과 2일 사이 이 사태에 가담한 군인들이 통제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고위장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한편 나수티온은 이라크 대사관 화단에 숨어있다가 10월 1일 아침 6시에야 부러진 발목을 한 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보다 안전한 국방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부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수티온은 차 바닥에 바짝 엎드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반란군의 시선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는 전략예비사령부의 수하르토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수하르토가 군 통제권을 손에 넣었음을 확인한 나수티온은 수하르토에게 대통령의 행방을 찾아 내도록 명령했고 해군사령관 RE 마르타디나타과 해병대 사령관 하르토노, 경찰총창 수찝또 유도디하르요에게 연락을 취해 자카르타로 들어오는 모든 육로와 해로를 봉쇄하도록 했습니다.
공군이 이 명령을 받지 못한 이유는 공군사령관 오마르 다니 장군이 9월 30일 사태의 동조자로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하르토는 즉시 이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10월 1일 오후 2시경 반란군 측이 혁명위원회의 발족을 공표한 후 나수티온은 수까르노가 반란군에게 납치되어 할림의 반란군 본부에 잡혀 있는 것으로 간주했으므로 수하르토, 마르타디나타, 유도디하르요에게 대통령 구출, 자카르타 치안회복을 추진하며 이를 위해 수하르토를 이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나수티온은 수하르토가 대권을 향해 나아갈 문을 여기서 활짝 열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수하르토가 작전에 착수하던 순간 할림의 수까르노로부터 전문이 날아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충성파로 알려진 쁘라노토 렉소사무드라 소장을 육군사령관에 임명하기로 결정했으니 당장 자신이 있는 할림공군기지로 출두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수하르토는 결코 쁘라노토의 할림행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수까르노가 자신의 결정을 절대 철회하지 않으리란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수하르토는 자신의 말에 힘을 싣기 위해 나수티온 장군에게 전략예비사령부 본부로 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수티온이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경이었고 그때 수하르토는 마침 사르워 에디 위보워의 부대를 반란군의 대항마로 배치하던 참이었습니다. 나수티온은 거기서 그의 부러진 발목을 위한 첫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카르타의 치안이 확보되자 마르타디나타는 쁘라노토를 육군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대통령 명령서를 가지고 전략예비사령부에 들어왔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 본 수하르토는 마르타디나타와 나수티온을 방 안으로 초청해 상황을 협의했습니다.
수까르노 대통령이 쁘라노토를 임명하게 된 경위를 나수티온이 묻자 마르타디나타는 그와 유도디하르요, 다니 등이 할림에서 수까르노와 회합을 갖고 야니 장군이 타계한 지금 누가 차기 육군사령관이 되어야 할지를 협의한 끝에 쁘라노토를 선정한 것이라 답했습니다. 수하르토는 납치 감금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할림 반란군들 틈에서 어떤 특정한 위협도 받지 않고 자의에 따라 대통령 직무를 계속 하고 있다는 공식적인 증언이 나온 것입니다. 대통령이 명백히 반란군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은 나수티온이나 수하르토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수티온은 수하르토가 이미 진압작전을 시작한 현재 시점에서 수까르노의 그러한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쁘라노토를 할림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수하르토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이에 나수티온과 수하르토는 쁘라노토를 불러 들여 수하르토가 이 쿠데타 시도를 완전히 진압할 때까지 육군사령관 임명에 대한 수락을 늦추어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이날 수까르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일까요?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9월 30일 쿠데타는 그가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를 이용해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으킨 친위쿠데타였을까요? 아니면 수까르노도, 인도네시아 공산당도 군의 쿠데타세력에게 이용당한 희생자들이었을까요?
‘수까르노의 마지막 경호원’(Penjaga Terakhir Soekarno)이라는 서적에서 당시 수까르노의 움직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궁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육군부대에 의해 포위된 후 수까르노는 부인 하르야띠의 집을 들렀다가 할림공군기지를 향했습니다. 당시 시간은 아침 9시반이었고 푸른색 승용차가 수까르노의 관용차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할림공군기지는 별다른 훈련도 없는 한산한 분위기였고 수까르노는 검찰총장 수나리오(Sunario)와 함께 공군작전사령부 건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마르 다니 공군사령관, 레오 와띠메나 장군 등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수까르노에게 상황브리핑을 했습니다.
이 회합이 진행될 때 세 명의 육군장교가 도착했는데 그들은 비상 만달라 전투사령관 수빠르죠(Suparjo) 준장과 밤방 수뻐노 소장, 그리고 그때 통일궁을 포위하고 있던 육군전략사령부 소속 다르마 뿌뜨라 대대(Batalyon Dharma Putra)의 지휘관인 수끼모 소령이었습니다. 수빠르죠 준장이 안에 들어가 수까르노를 만나는 동안 다른 두 명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수까르노는 수빠르죠에게서 총격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수빠르죠는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승인을 요구했고 수까르노는 이를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수빠르죠 준장을 숙군작업의 주역으로 여겼고 9월 30일 사태가 터졌을 때 수빠르죠 준장이 그 배후일 것이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습니다. 그래서 수까르노의 태도는 의외일 수 밖에 없었고 수빠르죠는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할림공군기지를 떠났습니다.
일각에서는 9월 29일 밤 수빠르죠는 오마르 다니 공군사령관을 통해 수까르노에게 불충한 장성들의 명단을 전달하고 육군부대들을 자신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고했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9월 30일 사태가 수까르노의 의지를 담을 친위쿠데타라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할림공군기지에서 수까르노와 수빠르죠의 만남은 그날 새벽 진행한 육군장성 숙청내용에 대한 보고였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한편 수까르노는 수빠르죠의 보고를 통해 공산당 PKI 당수 DN 아이딧도 그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까르노는 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육군사령관, 해군사령관 RD 마드타디나타, 경찰총장 수찝또 유도디하르죠, 자카르타 수배대장인 제5사단 우마르 위라하디꾸수마 소장등의 최고위급 회의를 소집합니다. 이 회의는 대통령 전용기 조종사인 수산또 공군대령의 자택에서 이루어졌고 당시 쿠데타 습격사건이 벌어진 나수티온 장군 저택에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육군전략사령부에 가 있던 자카르타 수비대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참석의사를 보내왔습니다. 육군전략사령관은 수하르토 소장이었습니다. 수하르토는 회합소집에 대해 현재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중장이 유고상태이니 육군의 모든 명령은 자신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하르토의 전언을 들은 수까르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고 결국 그가 소집한 회합은 자카르타 수비대장이 참석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회의장 밖을 지키던 병사들도 불안감에 귓속말을 나누거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고위 장성들이 달려와 비상회의를 열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병사들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날 12시 정오 운뚱 중령이 내각해산과 혁명대표부 수립을 발표하는 라디오 방송을 수까르노도 들었고 그날 오후 수까르노의 자녀들은 헬리콥터 편으로 반둥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수산또 대령의 집에서 열린 회합에서 수까르노는 쁘라노토 렉소사무드라 장군을 육군사령관장관에 임명했고 밤방 위자나르코(Bambang Widjanarko)등은 쁘라노또를 데리러 갔습니다. 쁘라노토의 위치를 파악한 밤방은 육군전략사령부에 들러 수하르토를 만났는데 수까르노 대통령의 위치를 묻던 수하르토는 아흐맛 야니 육군사령관이 없는 현재 육군에 대한 지휘권은 수하르토 자신에게 있으며 쁘라노토가 수까르노에게 가는 것을 허락치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날 오후 6시, 쿠데타를 지지하며 대통령궁을 포위했던 육군부대들이 할림공군기지에 도착했으나 기지 안에 들어가는 허가를 받지 못해 로변에 늘어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수까르노는 그들에게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반란군본부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그는 명백히 반란군측 병력이 분명한 그 부대들을 두려워 했던 걸까요? 측근들은 보고르궁으로 장소를 옮겨 자카르타의 사태추이를 지켜볼 것을 권했으나 수까르노는 우선 쁘라노토 육군사령관 내정자의 도착을 기다려 보자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오후 8시경 돌아온 밤방이 쁘라노토가 육군전략사령부에 있지만 할림기지로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과 육군의 대한 모든 실권을 이제 수하르토가 쥐고 있다는 전언을 전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역정을 내기 시작했으나 밤방은 우선 보고를 마쳐야만 했습니다. 수하르토의 육군전략사령부 소속 부대들이 아무리 늦어도 다음 날 아침에 할림공군기지를 공격해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뻐노 소장과 수끼모 소령의 부대들도 수하르토로부터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수까르노는 반란군들과 함께 진압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수까르노는 여섯번째 일본인 부인 랏나 데위가 수까르노가 보낸 자가용편으로 공군기지에 도착하자 밤 10시 30분 경 소리소문없이 할림공군기지를 떠나 보고르로 향했습니다. 그 사실은 곧 수하르토에게도 보고되었고 자정이 넘은 시각에 수까르노 일행은 보고르궁에 도착했습니다. 진압작전 개시를 앞두고 수까르노도 수하르토도 일단 부담 하나를 덜은 것입니다.
한편 사르워 에디 위보워의 부대는 인도네시아 공화국 라디오방송국(RRI)와 통일광장을 탈환하는 등 자카르타의 치안을 신속하게 확보했고 수하르토는 할림에 그의 역량을 집중하여 할림공군기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나수티온은 9월 30일 사태의 반란군들을 격퇴하기 위해 해군과 경찰군이 수하르토에게 협조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공군에게는 그들이 다니 사령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해도 명령불복종으로 다스리지 않을 것임을 공표하는 명령문을 냈습니다. 수하르토는 쿠데타 수뇌부들과 수까르노, 공군소장 오마르 다니(Omar Dani)와 PKI 당수 아이딧이 모여 있던 할림공군기지에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수까르노와 아이딧이 이곳에 함께 있었던 이유는 아직도 불분명해 요즘도 인도네시아의 호사가들 사이에선 수까르노와 PKI의 쿠데타 연루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합니다. 일각에서는 수까르노와 PKI의 사무총장 아이딧이 혁명대표부의 구성을 ‘반란군’에 의한 것이라 보고 안전한 곳을 찾아 1965년 10월 1일 할림공군기지에 들어갔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충분한 조율없이 시작되었던 이 쿠데타는 수까르노는 보고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오마르 다니는 캄보디아로, 아이딧은 중부자바로 피신하면서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일 오후 6시를 기해 할림공군기지는 수하르토의 손에 떨어졌고 9월 30일 사태의 쿠데타는 공식적으로 진압되었습니다. 대대적인 총격전을 예상했던 수하르토의 병력은 비교적 가벼운 교전 끝에 반란군 본부를 간단히 점령한 것입니다. 수하르토가 10월 1일 보낸 최후통첩에 따라 수까르노가 할림공군기지를 떠난 것이 쿠데타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셈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자기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쿠데타군은 한순간에 버림받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렸고 교도민주주의 체제를 받치고 있던 기반이 균형이 마침내 붕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태로 희생당한 육군장교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아흐맛 야니 중장 (Ahmad Yani -육군사령관장관 / 최고작전사령부 참모장)
- 라덴 수쁘랍또 소장 (Raden Suprapto - 육군사령관장관 행정담당 제2차관)
- 마스 띠르또다르모 하리요노 소장 (Mas Tirtodarmo Haryono - 군사령관장관 기획 및 개발담당 제3차관)
- 시스원도 빠르만 소장 (Siswondo Parman - 육군사령관장관 정보담당 제1차관보)
- 도날드 이삭 빤자이딴 준장 (Donald Isaac Panjaitan - 육군사령관장관 병참담당 제4차관보)
- 수또요 시스워미하르요 준장 (Sutoyo Siswomiharjo - 육군장성 실사 및 법무처장)
- 삐에르 안드레아스 뗀데안 중위 (Pierre Andreas Tendean – 나수티온 장군 부관)
- 경비단장 까렐 삿쭈잇 뚜분 (Karel Satsuit Tubun - 부총리 J.레이마나 박사의 공관경비단장)
- 까땀소 다르모꾸수모 대령(Katamso Darmokusumo - 족자 빠뭉까스 072군휴양소장)
- 수기요노 망운위요또 중령(Sugiyono Mangunwiyoto - 족자 빠뭉까스 072군휴양소 참모장)
족자에서는 072 군휴양소장 까땀소 대령과 참모장 수기요노 중령을 PKI가 10월 1일 오후 납치되었는데 혁명대표부에 가입하라고 위협받았으나 완강히 거부했으므로 살해당했습니다. 이들 역시 자카르타의 장성들과 나란히 9월 30일 쿠데타의 피해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납치된 장성들의 시신들은 10월 3일 할림공군기지 인근에서 수습되어 10월 5일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피해자 전원에겐 일계급 특진이 추서되었습니다.
이 사태는 공산쿠데타였고 인도네시아 독립영웅들이었던 고위 장성들을 살해한 것은 비겁한 적대행위였다는 군의 선전공세가 1965년 10월초 인도네시아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국민들과 국제사회는 별다른 의심없이 이 내용을 사실로서 받아 들였습니다.
사실 공산당 당수 DN 아이딧이 할림공군기지에 와 있었고 9월 30일 사태 이전 제5의 군대창설 문제로 군과 공산당 사이에 갈등이 첨예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날 쿠데타가 과연 공산당이 저지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쿠데타에 동원된 것은 공산당 노농적위대가 아니라 짜끄라비라와 대통령 경호부대와 밤방 수뻐노 소장, 수빠르죠 준장 등이 지휘하던 인도네시아 육군 정규군들이었으며 대통령 경호부대장 운뚱 중령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한 혁명대표부 역시 공산주위적 색체가 매우 옅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실 DN 아이딧 공산당 당수와 PKI 공산당을 제외하고 본다면 국가권력을 놓고 군내 대통령파와 강경파가 충돌한 것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석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PKI는 자신들이 쿠데타 연루를 부인했으나 이미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이미 이 모든 것을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고 가버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후원국이라 여겨지던 중국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고 공산당원들은 물론 일반 중국계 화교들까지 막무가내로 전국적인 사냥을 당해 학살당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10월 5일 장성들의 시신이 수습되어 장례를 치른 후 군은 물론 양대 이슬람 조직인 무하마디야(Muhamamdiyah)와 나들라툴 울라마 (Nadhlatul Ulama : NU)는 합동공세를 펼쳐 인도네시아의 정부와 군, 그리고 사회에서 공산당과 좌익세력들을 척결하기 시작했습니다. PKI의 지도자들은 즉시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아이딧도 1965년 11월 같은 운명을 걸었습니다. 이 공산당 척결운동은 무자비한 학살의 형태로 자바와 발리를 휩쓸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군이 민간조직과 민병대들을 조직해 움직였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군이 움직이기도 전에 민간자경단들이 먼저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가장 믿을만한 통계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약 50만명 정도가 PKI의 당원이나 동조자로 몰려 살해당했고 150만명이 투옥되었다고 전합니다.
이 척결운동의 결과로서 수까르노 정권을 지원하던 세 개의 배경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다른 두 개의 세력인 군과 이슬람 정치권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수까르노 자신도 측근들의 죽음과 얄팍한 ‘혁명’실패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납치되어 살해된 장군들에 대해 ‘혁명의 바다에 일었던 작은 파도’라고 일축하며 마지막까지도 PKI를 두둔하려 했으나 이는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그는 1966년 1월 방송을 통해 국가가 자신을 따라 줄 것을 촉구하는 연설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별도의 수까르노 전위대(Barisan Sukarno)를 창설하려 했던 수반드리오의 시도도 무위에 그쳤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까르노의 앞길엔 이제 나락으로의 끝없는 추락만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매우 음습하고도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016. 5. 28.
'인도네시아 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게 정말 될까? (0) | 2017.12.03 |
---|---|
수까르노의 몰락 (0) | 2016.06.03 |
쿠데타 전야 - PKI 공산당 득세 (0) | 2016.05.29 |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 인도네시아군 vs 영연방군 (0) | 2016.05.22 |
서부뉴기니 합병 또는 침략 (0) | 2016.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