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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까르노의 몰락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Soekarno) (23)
역사 속으로
수하르토가 쿠데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육군 고위장교들은 수하르토가 전권을 쥐는 것을 허용하기보다 나수티온이 계속 지휘권을 유지하며 보다 단호하게 상황을 통제해 주기를 기대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나수티온이 하필 그 민감한 시기에 빠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그를 지지하던 세력들도 하나둘 떠나 수하르토에게 옮겨타기 시작했습니다. 10월 2일 수하르토의 정부군은 반란군 진압승리의 환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국방장관 겸 전군사령관 나수티온 장군 본인은 쿠데타 당일 새벽 척추를 피격당한 후 10월 6일 병원에서 숨을 거둔 막내딸 이르마를 잃은 슬픔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며칠 사이에 수하르토 장군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인도네시아의 권력 대부분을 손아귀에 틀어쥘 수 있었습니다.
1965년 10월 1일 수까르노는 쁘라노토 렉소사무드로(Pranoto Reksosamudro) 장군을 피살된 아흐맛 야니 장군을 대신해 육군사령관에 임명했으나 2주 후 그 직위는 수하르토에게 넘어갑니다. 9월 30일 사태 후 나수티온은 이주일동안 수하르토를 육군사령관에 앉히도록 수까르노를 줄곧 종용했던 결과였습니다. 수까르노는 여전히 쁘라노토를 마음에 두었으므로 수하르토에겐 신설 사령부인 법질서회복본부(Kopkamtib) 사령관 정도를 주려 했으나 나수티온의 강권에 떠밀려 결국 이미 임명장까지 발행한 쁘라노토를 밀어내고 1965년 10월 14일 수하르토를 육군사령관에 앉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수까르노는 9월 30일 사태 당시의 수상한 행적으로 군과 정계의 불신을 키우면서도 좀처럼 정국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9월 30일 쿠데타 직후 자카르타의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대학생 행동연맹’(KAMI)을 조직하고 PKI 공산당의 해체를 요구하며 데모를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유사한 조직들을 규합하더니 곧 고등학생, 회사원, 예술가, 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까지 결집시켰습니다. 이 데모데는 PKI 해체 외에도 치솟는 물가와 비효율적인 정부에 대한 이슈에 목청을 돋웠습니다. 그들은 수까르노 정권의 2인자이며 외무장관이자 인도네시아 정보기관 BPI의 수장이었던 수반드리오도 격렬히 비난했습니다.
- PKI 공산당 해산
- 내각에서 9월 30일 쿠데타 및 PKI 관련자 축출
- 물가인하와 경제개선
이것은 1966년 1월 10일 KAMI를 비롯한 데모대들이 국회앞에서 데모를 하며 발표한 뜨리뚜라(Tritura)라 부르는 ‘국민의 3대 요구’였습니다. 1966년 2월에도 반공시위가 줄을 이었고 수까르노는 수하르토를 달래려는 듯 그의 어깨에 별을 더해 주었지만 2월 21일 새 내각을 발표하면서 여전히 정국을 마음대로 농단하려는 그의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내각엔 전공군사령관 오마르 다니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쿠데타 당일 할림공군기지에 모여있던 소극적 공모자 그룹에 포함되어 있던 그는 그날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낸 바도 있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내각에서 나수티온 장군을 해임하며 군과 각을 세웠습니다. 국민들은 즉시 이 내각을 게스따뿌(Gestapu)내각이라 이름붙였는데 이는 9월 30일 쿠데타(GErakan September TigAPlU)에서 차용해 온 신조어였습니다.
사족이지만 사실 나수티온에겐 1965년 12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었습니다. 모하마드 하타가 물러난 후 공석으로 있던 부통령직 제의를 받았던 것입니다. 수까르노는 이미 힘을 잃고 추락하는 중이었고 수하르토의 입지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시절이었으므로 그가 부통령이 되어 일정 역할을 해낸다면 수까르노의 뒤를 이어 인도네시아의 두번째 대통령에 등극할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휘하의 많은 장성들과 부관 뗀데안 중위,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 이르마를 쿠데타로 잃은 나수티온은 동력을 잃은 듯 결정을 못내리고 딱히 어떤 반응도 내지 않는 동안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권력을 거머쥔 수하르토가 1966년 초 부통령 공석을 채울 필요가 없다는 성명을 내면서 나수티온이 정권의 정점으로 나아갈 천금 같은 기회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개각으로 수까르노가 그를 국방장관직에서 실각시키고 전군참모총장이라는 그의 직위조차 폐지하려 하자 나수티온은 사임을 거부하며 항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물론 그 배경엔 그를 정적으로 인식한 수하르토의 입김이 서려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각 이틀 후 대규모 시위대가 대통령궁에 몰려 들었고 다음 날 새 내각이 임명장을 받고 있는 동안 군인들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목숨을 잃은 아립 라흐맛 하킴(Arief Rahmat Hakim)이라는 학생은 순식간에 정치적 순교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3월 8일 학생들은 외무성에 쳐들어가가 다섯시간 동안 점거농성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쿠데타로 장군들을 살해한 원흉으로 수반드리오를 지목하며 외무성 벽에 그를 베이징의 주구 또는 교수대에 매달린 모습의 낙서를 그려놓기도 했습니다. 이에 수까르노는 그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3일간의 마라톤 회합을 기획하고 그 첫날인 3월 10일 각 정당 지도자들을 설득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학생시위대에 대한 경고선언문에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다음날인 1966년 3월 11일 통일궁에서 전체각료회의가 열렸는데 학생들에 의한 반정부시위가 계속되던 가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대들이 통일궁 외곽에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수까르노와 수반드리오, 그리고 다른 장관들은 즉시 회의장에서 빠져나가 헬리콥터를 타고 보고르궁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바수키 라흐맛(Basuki Rahmat). 아미르마흐뭇(Amirmachmud), 모하마드 유숩(Mohammad Jusuf) 등 수하르토를 지지하는 장성들이 나타나 수까르노로부터 수퍼스마르(Supersemar)라고 불리는 대통령의 명령서를 받아냈습니다.
이 문서는 수까르노가 수하르토에게 ‘치안과 안녕, 정부와 혁명의 지속적 안정을 담보하고 (수까르노 개인의) 안전과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를 실제로 누가 작성했는지, 당시 장안에 파다하던 소문처럼 정말 장성들이 수까르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서명을 강요했는지의 여부 등은 아직도 역사적 논란거리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 명령서를 받아 든 수하르토는 3월 12일 즉시 PKI를 불법정당으로 규정하고 금지, 해체시켰고 동시에 군의 위력시범을 보이기 위해 벌인 자카르타 시내 퍼레이드에 시민들은 열렬한 지지의 갈채를 보냈습니다. 3월 18일에는 수반드리오 외상과 차이룰 살레(Chairul Saleh) 부총리를포함한 다른 14명의 각료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체포했습니다. 훗날 수하르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 자신이 학생시위대와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수까르노가 자주 시위중단을 요청하곤 했다고 밝힌 바도 있습니다. 이렇게 수까르노에게 충성을 바치는 수많은 고위장성들을 PKI의 회원 또는 옹호자라는 혐의를 걸어 체포하면서 결과적으로 수까르노의 정치권력과 영향력은 크게 제한되고 말았습니다. 수까르노가 수하르토에서 써주었다는 그 수퍼스마르 문서는 수까르노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3월 27일 수하르토와 수까르노가 함께 조율한 새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여기 포함된 세 명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수하르토도 내각에 자기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는 국방치안담당 부총리로서 공산주의의 발호를 방지하는 일을 맡았고 족자의 술탄 스리 술탄 하맹꾸부워도 9세는 경제, 재정 개발담당 부총리로 국가의 경제문제해결을, 아담말릭(Adam Malik)은 사회정치담당 부총리로서 외교부분을 맡았습니다.
4월 24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민족당 (Partai Nasional Indonesia)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이 군과 힘을 합쳐 고쳐나가야 할 ‘세 가지 일탈행위’에 대해 언급했는데
- PKI 공산당의 극좌 극단주의와 인도네시아 국민들 간의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행위
- 수반드리오 외상이 실권을 쥐고 있던 시절 인도네시아 중앙정부국(BPI)의 ‘인형사’들이주도하고 그 이익을 독점하던 정치적 기회주의
- 의도적으로 경제적 혼란을 불러온 경제모험주의
이상이 그 세가지 였습니다.
새 내각은 수까르노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중국에 등을 돌리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의 종식을 고했습니다. 또한 수하르토는 수까르노의 충복들을 정권에서 몰아냈는데 그 일환으로 9월 30일 쿠데타에서 장군납치살해임무를 수행했던 짜끄라비라와 대통령궁경호단을 해산했고 고똥로용국회에서 수까르노 충성파나 친공산주의자들이 축출되었으며 대통령 간접투표기구인 국민대표부(MPRS)에는 친수하르토 인사들이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새 MPRS는 5월 12일 개원하기로 했다가 연기되어 6월 20일부터 7월 5일의 기간에 열렸고 여기서 결의된 첫번째 사안은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장군을 그 의장으로 추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전 게스따뿌 내각이 출범하면서 실각했던 나수티온이 화려하게 정계에 컴백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MPRS에는 수까르노가 자기 주변에 세워놓은 성벽들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MPRS는 수퍼스마르 문건을 공식적으로 인준했는데 이 결정를 절대 번복할 수 없다는 조례까지 통과시키는 용의주도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PKI 공산당과 마르크스 이념교육을 금지했고 수하르토가 다시 개각을 단행하면서 작금의 국가적 정치, 경제상황에 대한 수까르노에게 책임을 묻는 청문회의 개최, 수까르노의 ‘종신대통령’직 철회,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수퍼스마르 문건의 소유자가 대통령직을 인계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매우 노골적 의도를 엿보이는 결정들도 통과시켰습니다.
수하르토는 이 MPRS 결의를 통해 단숨에 수까르노를 하야시키는 것까지는 좀 주저했습니다. 일부 국민들은 물론 해병대와 해군, 일부 지역사단들이 아직도 수까르노에게 적잖은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MPRS의 결의대로 6월 20일 개각을 단행해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5명 집단지도체제의 상임통치기구를 설치하고 아담말릭과 스리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도 위원으로 포함시켜 두었습니다.
8월 11일 말레이시아와의 평화협정이 서명되면서 마침내 대결정책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수까르노의 반대의사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수하르토는 연이어 국제은행, IMF, UN에 재가입을 신청하며 인도네시아를 국제사회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결정을 빠르게 내렸습니다. 새 내각은 정치범들을 석방했고 수까르노 시절 데모대에 의해 대사관 건물에 물리적 피해를 입은 미국과 영국정부에게도 필요한 배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해 8월 17일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를 인정하거나 UN에 재가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난 군중들의 격렬한 시위를 불러올 뿐이었습니다. 사실 시위가 일어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수까르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매번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조직한다는 것은 어딘가 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인도네시아는 9월 28일 UN 총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UN 재가입을 기정사실화 했지만 그 사이 시위대의 비판은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수까르노 개인을 향해 날을 세우는 방향으로 진행되다가 급기야 그를 재판정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릅니다.
1967년 1월 10일 수까르노는 나왁사라(Nawaksara)라고 알려진 서한을 MPRS에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9월 30일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장군들을 납치하고 살해한 사건은 자신으로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경악스러운 일이었으며 자신은 인도네시아가 겪고 있는 도덕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격분한 시위대들은 수까르노의 교수형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월 21일 소집된 MPRS 지도자들은 수까르노가 헌법상 규정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2월 9일 고똥로용국회는 나왁사라 서한을 각하하는 결정을 내리고 곧 MPRS의 특별소집을 요구했습니다.
1967년 3월 12일 시작된 MPRS의 특별회기에서 수까르노에 대한 탄핵이 결정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탄핵사유는 이랬습니다.
- 9월 30일 사태를 방조하고 PKI의 국제공산주의 의제를 지지함으로서 헌법을 위반함.
- 경제문제를 도외시함.
- 수까르노의 무분별한 여성편력으로 국가적 ‘도덕성 타락’을 야기함.
수까르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르에서 임시 가택연금상태에 들어갔고 대통령대행으로는 수하르토가 임명됩니다. 수하르노는 그 이듬해인 1968년 3월 27일 인도네시아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각한 수까르노는 군에게 린치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수까르노에 대한 군의 감정을 가늠해 보려면 9월 30일 쿠데타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9월 30일 쿠데타는 수까르노에게 유고가 발생할 경우 확고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PKI 당수 아이딧이 군대 안의 공산주의 옹호자들을 움직여 여섯 명의 반공주의 장성들을 살해했다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었고 그래서 쿠데타가 실패한 후 학살수준의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이 인도네시아 전역을 휩쓸었던 것입니다. 당시 수까르노는 1965년 8월 4일 약한 심장마비를 경험했는데 이것이 아이딧에게 필요이상의 경계심을 주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인 1998년 수하르토가 실각한 후 일각에서는 정적 제거차원에서 수하르토가 자신의 보신과 정권욕을 위해 역쿠데타를 도모하고 수까르노에 대한 정치적, 물리적 암살을 총지휘했다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오랜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당시 쿠데타의 주역중 한명인 라티에프 대령은 당시 수하르토가 처음부터 쿠데타에 깊숙히 연루되어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일각에서는 길크라이스트 문건에 언급된 서방의 지원을 업은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수까르노와 PKI가 공조해 장군들을 납치, 살해했다고도 주장합니다. 이는 수까르노가 10월 1일 할림공군기지에서 아이딧를 비롯한 사건주모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을 당시 인도네시아 독립을 대한 그의 기여를 감안해 이 사태에 대한 수까르노의 연루사실을 용의주도하게 은폐하고 그 모든 책임을 PKI에게 뒤집어 씌워 국가영웅의 업적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9월 30일 사태에 대해 당시 군이 가지고 있던 가장 일반적인 이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정황은 수까르노가 실각한 이후, 그래도 가장 저명한 독립유공자이자 독립전쟁승리와 수많은 반란진압, 서부파푸아 합병 등으로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 그러나 이젠 모든 실권을 잃고 만 노인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군과 장성들이 그를 과도한 야박함으로 윽박지르고 타박하기만 했던 태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이 이런 시각에서 9월 30일 쿠데타를 바라보았다면 그들 입장에선 수까르노가 전우들을 납치 살해한 반역자일 뿐이었으니까요
대통령 불신임안이 국회에서 처리된 후 48시간 내에 대통령궁에서 퇴거하라는 통지를 받고서 수까르노는 개인 물품들을 제대로 챙길 여유조차 없이 군인들에게 등떠밀려 대통령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군장성들은 더 이상 그에게 일말의 호의도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퇴거명령을 받았을 때 아이들 대부분은 모친인 파트마와띠의 집에 가 있었고 수까르노는 부관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린 후 이틀간 짐을 쌌습니다. 그러나 둘째날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이닥친 군인들은 수까르노를 밀어내다시피 했습니다. 수까르노는 런닝셔츠 위에 옷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채 마지막 남은 작은 폭스바겐 승용차에 허겁지겁 올라타 끄바요란바루에 있는 파트마와티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여인들과 수없이 새장가를 들면서 멀어져버린 본처 파트마와티의 집에서 처음엔 참으로 뻘쭘했을 그는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고 기껏 화단식물들의 입을 쳐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폐에도 문제가 있었고 특히 신부전으로 인해 늘 약을 먹어왔지만 대통령궁을 떠난 후엔 약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통령궁에 남아 있던 그의 약품들은 군인들에 의해 모두 폐기처분된 상태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군것질할 돈도 없을 정도로 수까르노나 그를 모시는 남은 사환들도 극도로 궁핍했습니다. 그나마도 그가 자주 외출하며 주민들 앞에 얼굴을 보인다는 소식을 접한 수하르토측 장교들은 이를 불쾌히 여겨 어느날 파트마와티의 집에 트럭을 몰고와 수까르노를 태워 보고르로 옮겨갔습니다. 한때 그와 연대를 맺었던 나수티온이 의장으로 있는 MPRS에서 그의 보고르궁 연금을 결정한 것입니다. 연금기간 동안 적절한 진료나 약품은 여전히 공급되지 않았고 심지어 수의사가 수까르노의 진료를 맡았으므로 수까르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 딸 라크마와띠의 방문을 받은 수까르노는 더욱 병이 깊어 자신을 자카르타로 보내달라고 수하르토에게 부탁하는 친필편지를 써 라크마와티 편으로 수하르토의 쯘다나(Cendana) 자택에 보냅니다. 오래 숙고한 수하르토는 수까르노의 자카르타행을 허락하지만 파트마와티의 집 대신 위스마야소(지금의 사뜨리아만달라 군사박물관)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자카르타로 돌아온 후 그는 오히려 군인들의 더욱 가혹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방에서 나오는 것부터 아예 금지되었고 그가 무엇을 하든 군인들은 큰소리를 치며 닥달을 했습니다. 음식포장에 사용된 신문조각을 읽는 것조차 군인들은 문제 삼았고 수까르노는 매우 더럽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며 고작 비타민과 수면제 외에는 정작 그의 망가진 신장이나 그 합병증을 치료할 약품을 전혀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위스마야소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그를 구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실제로 그의 숙소까지 뚫고 들어가 그를 빼내려는 일단의 부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자신이 도망가면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탈출을 거부했다고 전해집니다.
1970년 초 수까르노는 라크마와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트마와티의 집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도착한 것을 알고 많은 인파들이 몰려 그의 이름을 연호했지만 손을 들어 화답하려는 그를 군인들이 제지해 급히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정치적 포로의 신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군인들은 이 일로 인해 더욱 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2월에 접어들면서 수까르노의 병은 더욱 깊어져 그는 잠도 못들 고통에 못이겨 비명을 지르곤 했지만 경비병들은 이를 모를 채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명령받았던 거였죠.
그의 소식을 접한 모하마드 하타도 수하르토에게 인본주의적 관용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수까르노의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였으므로 비록 서로의 방향과 견해의 차이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수까르노가 고통받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수까르노를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서한을 수하르토에게 보냈는데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가 육군중앙병원을 방문했을 때 수까르노는 사람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위중했습니다. 하타를 알아본 수까르노는 흐느껴 울었다고 하며 하타 역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의 선봉에서 함께 싸웠던 수까르노가 그렇게 군인들에 의해 뒷방으로 내쳐져 죽어가도록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가슴아파 했습니다. 하타가 돌아간 지 얼마되지 않아 수까르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1945년 독립선언 당시 그는 도착이 늦어지는 하타를 기다려 그가 온 후에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러 나섰던 것처럼 죽을 때에도 하타를 먼저 만난 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까르노는 1970년 6월 20일 토요일 20시30분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다음날 새벽 03시50분 혼수상태에 들어간 후 아침 07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은 당시 진료팀이 마지막 순간까지 수까르노를 회생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하늘만이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실 수까르노의 건강은 1965년 8월부터 이미 쇄락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부전증을 앓아 1961년과 1964년에 스위스 빈에서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현지 담당의사들은 왼쪽 신장절제가 필요함을 진단했으나 수까르노는 전통방식의 치료법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그는 5년 후 가똣수브로또 군중앙병원(RSPAD)에서 이로 인해 결국 숨을 거두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병원에서 위스마 야소로 옮겨졌고 그의 진료팀 주치의로 지정된 마하르 마르죠노 박사(Prof. Dr. Mahar Mardjono)와 부주치의 육군소장 루비오노 꺼르또빠띠 박사(Mayor Jendral Dr. (TNI AD) Rubiono Kertopati)가 수까르노의 시신을 검사한 후 사망을 선언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생전에 보고르의 바뚜뚤리스 궁전에 묻히길 희망했으나 수하르토 정부는 동부자바의 도시 블리따르(Blitar)를 장지로 선택했습니다. 인구가 밀집한 자카르타에서 수까르노의 장례식이 열려 수백만의 인파가 조문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은 당시 수하르토 정권에 큰 위협이 될 것이란 생각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 결정은 1970년 제 44호 대통령령으로 규정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수까르노의 시신은 사망한 다음 날 장지로 옮겨져 그 다음날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수까르노의 장례식은 M. 빵가베안 장군이 집전했고 정부는 7일간의 애도기간을 지정했습니다. 수하르토 정권은 국민들이 수까르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그의 시신을 보려고 사람들은 5km씩 줄을 섰고 해산을 강요하는 군인들과 맞서거나 해산된 후 다시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수까르노를 가열차게 비난하던 신문들도 1970년 6월 21일 모두 찬양일색으로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한 아홉명의 선구자 왈리상아(wali sanga)의 무덤 못지 않게 지금도 수많은 자바인들의 중요한 순례지가 되어 있습니다.
수까르노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1945년 8월 18일부터 1967년 3월 12일까지의 23년간이었고 그 기간 중 제 12대 외무장관 겸 종신대통령을 역임한 것은 1959년 7월 9일부터 1966년 7월 25일까지의 약 7년간이었습니다. 그가 재임하던 기간 중 수딴 샤리르, 아미르 샤리푸딘, 모하마드 하타, 압둘 할림, 무하마드 낙시르, 수끼만 위르요산죠요, 윌로뽀, 알리 사스뜨로아미죠요, 부르하누딘 하라빤 등의 총리들이 있었고 모하마드 하타 그리고 하야 직전 수하르토가 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이슬람 수니파였던 그가 모든 공과를 떠나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의 장녀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가 오래동안 수하르토 정권에 맞서 강력한 야당인 민주투쟁당을 이끌어 오늘에 이르면서 수까르노는 사망한 후 오히려 더욱 꾸준하고도 긍정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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