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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박물관

오래된 네덜란드 묘지공원 - 따만 쁘라사스티(Taman Prasasti)

beautician 2017. 6. 3. 10:00


모나스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감비르(Gambir)역 뒷쪽엔 오래된 네덜란드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Museum Taman Prasasti 라고 쁘라사스티 공원박물관이라 되어 있지만 별도이 박물관이 있는 게 아니라 공원 자체가 고풍스러운 박물관의 느낌을 풍깁니다. 

1800년대 말 무덤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묘지는 최소 120년은 더 된 곳 같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망자를 떠니보냈는지도 어렴풋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조각상들과 묘지 디자인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마차가 아니라 네덜란드인들이 타던 마차. 고풍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습니다.





공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묘지
















너무 오래된 묘지라서 그럴까요? 묘지 자체는 그럭저럭 잘 보존되어 있지만 묘지에 세워진 조각상들은 세월 탓인지 날개며 팔 부분들이 많이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이 곳엔 수까르노와 모하마드 하타의 관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 시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묻힌 묘지들은 따로 있습니다. 이슬람의 법도에 따라 모든 시신은 잘 씻은 후 Kain Kafan이라는 천으로 둘러 싸서 Pocong(뽀쫑)이라는 형태를 만들며 바로 그런 형태로 매장됩니다. 관을 사용하지 않고요. 그래서 관은 무슬림에게 있어서는 사망한 장소에서 매장하는 곳으로 옮길 때 사용되는 운송수단일 뿐입니다.


모하마드 하타의 관


수까르노의 관




죽은 후에도 이렇게 집을 한 채 가지고 있는 분도 계셨습니다.



관을 나르는 장의마차.





이 묘지의 독특한 것 중 하나는 여기 일본군 30명의 위령비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니이가타현 시바타시에서 온 2사단 16대대 9중대 소속으로 1942년 3월 3일에서 4일 사이 보고르의 리으윌리앙 마을 찌안뚱강에서 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달란드군이 3월 9일 항복했으나 그보다 불과 5일 전의 전투였습니다. 네덜란드군과 싸워 전사한 일본군들의 위령비를 네덜란드인(아마도 귀족)의 묘지에 세운 것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야스 대위의 묘라고 읽히네요











당시 이런 식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죽은 후에도 앉아 쉴 곳이 필요했을까요? 아니면 자신을 찾는 후손들에게 앉아 쉴 곳을 제공하고 싶었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어딘가 마음이 넉넉해 지는 듯 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묘지라기보다는 문화유산이죠.





















위령탑 같은 것일까요? 네덜란드어를 못하는 게 한이 되더군요.





















이런 무덤도 있었습니다. 무덤이 아니고 기념비 같은 것일까요?



이 내용은 언젠가 탁본을 떠서 해독해 보고 싶습니다.














4명이 합장된 무덤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 가족들은 1800년대 중반 출생한 2명과 1899-1900년생 2명 두 집단으로 아마 부부가 늦게 얻은 두 남매와 함께 뭍힌 것 같습니다. 이들은 왜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자카르타에서 합장되는 것을 원했을까요? 아마도 가족의 시신을 당시 본국까지 가져갈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듯 하고 1950년에 사망한 맥시밀리언의 의지가 더욱 크게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는 1949년 12월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는데 4개월 후 사망한 맥시밀리언은 자카르타에서 부모와 비앙카 누나가 누운 이 곳에 함께 뭍히기를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밤엔 기분이 좀 다르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날의 쁘라사스티 묘지는 호젓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소규모 박물관들이 너무나 한산한 것에 비해 이곳은 가족단위로 또는 연인끼리 찾아와 묘역을 돌며 사진도 찍는 등 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2015.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