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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인의 조건

beautician 2024. 2. 24. 15:07

 

공인의 조건

 

 

 

대학입학 오리엔테이션 당시 교수님들이나 선배님들은 대학 합격통지만 받아 놓고 첫 강의도 듣지 못한 상태였던 우리들에게 "여러분들은 이제 지성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당시에 느끼기에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임엔 틀림없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대학을 밟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비지성인으로 치부하고 대학입학을 지성인 임명장처럼 간주하는 지성인들의 오만함 서려있던 게 아닌가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갓 고등학생이던 나를 이젠 지성인으로 불러주니 기분 나쁠 건 없어도 그렇게도 간단히 하룻밤 사이에 비지성인에서 지성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사실과 전혀 무관한 얘기다.

지성이란 시장바닥에서 돈 주고 티셔츠 하나 사는 것처럼 첫 대학등록금을 냄으로써 그렇게 간단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학을 나오고서도, 아니, 그보다 더욱 화려한 학력을 갖고서도 지성인이라 불리기에 부끄러운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성인이란 학문을 정진하면서 지식뿐 아니라 주관과 포용력을 동시에 길러 자신과 타인, 국가와 세계와 미래에 대한 안목을 정립한 사람이란 뜻이어야 할 것이므로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루 아침 자고 일어나 보니 지성인이 되어 있는 경우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벼락부자 졸부와 지성인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하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 교수님들, 선배님들은 신입생들에게 그렇게 사기를 치며 바람을 불어넣었다. 요즘 대학에서도 신입생들에게 아직 이런 사기를 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음반 한번 내고 TV에 한번 얼굴 비치고 나면 하루 밤 사이에 공인이 되는 우리나라.

그 '공인'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좀 사기가 있는 것 같다.

 

오래 전 오현경씨 사건, 그리고 몇 년 전 백지영씨 비디오 사건이 한국사회를 떠들썩 하게 하던 시절, 그것도 피해자임이 명백한 여자 연예인을 ‘공인’으로서 잘못된 처신을 했다며 닦아 세우며 공중파에서 밀어내고 매장시키는 것을 보았고 요즘도 각종 스캔들과 사건사고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의 얘기가 일간신문의 1면 톱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공인’ 이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던 질문을 인터넷에 띄운 적도 있었다.

 

매 정권마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벌여온 파렴치한 행각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관심과 반발과 악플의 표적이 된다. 도대체 이 ‘공인’ 이라는 지위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사람들을 공인으로 인정해야 하는 걸까?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 재벌회장들을 정말 공인인가?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책 한 권을 내고 대학 강단에 초청연사로 선다고 해서 그도 공인이 되는 것인가? 누가 어느 날 매스컴 한번 탔다고 그 전날까지는 공인이 아니었는데 그 날 부로 공인의 반열에 올라서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않은가?

 

새파란 10대 댄스그룹들이 자기들 노래가 조금 뜬 다음 TV에 얼굴을 내놓으면서 "이젠 공인이 되었으니…” 운운하거나 언젠가 운전면허사건으로 TV에서 사과하던 이승연씨가 "공인으로써 죄송하게 생각…” 운운하던 이야기를 들으면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오현경씨나 백지영씨의 비디오 사건에 대해서 사건의 본질이 명확해진 후에도 "공인으로서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거품을 물고 기염을 토하며 인터넷 공간 구석구석의 게시판을 도배하던 반론들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들이 정말 공인인가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무도한 선상의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명칭을 고안할 필요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을 알고 뉴스를 자주 타고 TV에 자주 나오면 공인인가? 그렇다면 예전의 이근안 경감, 신창원, 막가파나 지존파, 오사마 빈 라덴도 공인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의 행동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면 공인이 되는가? 그렇다면 조양은도 공인인가? 종로시절 김두한은? 오늘도 세확장에 여념이 없는 전국팔도의 내로라하는 조폭 두목들은 공인인가 아닌가?

 

연예인은 모두 공인인가? 백댄서, 작가, 연예인 매니저, 방송국 경음악단원, 방송국 합창단원, 대학로 연극단원들, 음반 한 번 내본 사람들을 그럼 모두 공인인가? 이름 알려진 연예인들만 공인이고 무명 연예인들은 공인 안시켜줘도 불만 없는 건가? TV에 얼굴 안비치는 분장실 직원, 방송국 청소아줌마들은 왜 공인 아닌가? 유승준은 더 이상 공인 아닌가?

 

프로 운동선수들은 모두 공인인가? 후보선수들은? 연습생들은? 현역 시절 이름 한번 날리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들은?

 

미스코리아는 다 공인인가? 뽑힌 여자들만 공인인가? 아니면 떨어진 여자들도 깨평으로 끼워주는가? 이미 기억에 잊혀진 미스코리아도, 어느 양가댁의 현모양처가 되어 있는 미스코리아도, 지금은 백조가 되어 빈둥거리는 미스코리아도 일단은 공인인가? 아니면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사고 치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고 나야 다시 공인신분으로 복귀하는가?

 

언론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다 공인인가? 사주, 편집장, 기자들만 공인이고 언론사 경리실장은 공인 아닌가? 수습기자들은? 썬데이서울 사장은? 대학신문사 직원들은? 웹진 발행인들과 기자들은?

 

책 한 번 낸 사람들은 다 공인인가? 한 10만부 이상 팔려야 그때부터 공인 딱지가 붙고 시집 100권 팔린 시인은 공인 자격이 없는 건가? 책 안내고도 PC통신 게시판에 엄청난 독자를 확보하는 인터넷 작가들은 공인인가 아닌가? 어느 카페 게시판에 글 올려 조회수가 장난 아니게 오르는 사람들은? 각각의 페이지 마빡에 사진 걸어놓고 있는 수십만 불로그의 불러거들은 공인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공인여부를 결정하는 적정 조회수가 최소한 정보통신부 장관령으로라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유명하면 다 공인인가? 유명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떼로 씹히고 인민재판, 언론재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공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유명하기 때문인가?

 

종교인들은 다 공인인가? 목사들은 공인이고 집사는 아닌가? 신도는 택도 없는가? 주지스님쯤 되야 공인의 반열에 들어서는가? 정명석은 공인인가? 박태선 장로는? 통일교주는? 신도수가 한 100명 정도를 커트라인으로 끊어서 목사의 공인 여부를 가늠하는가?

 

정치인들은 가족들도 모두 도매급으로 공인이 되는 건가? 정치인들 아들이 병무비리로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공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공인이기 때문인가?

 

기업인들은 모두 공인인가? 이건희 회장, 최태원 회장 등이 공인이라면 중소기업 사장들도 공인인가? 그럼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은? 10대기업 임원들, 부장, 차장들은? 대기업 신입사원들은? 포장마차 사장은? 동네 분식집 주인은? 회사 망하고 나면 전직 재벌사 회장, 전직 언론사 사장들은 더 이상 공인 아닌가? 뭐 그렇게 쉽게 왔다 갔다 하는 건가?

 

교육자들은 모두 공인인가? 최소한 초등학교 이상에 근무해야지 유아원, 유치원 원장, 선생들은 공인자격이 없는 건가? 아니면 대학총장, 교수쯤 되어야만 공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박사학위 받고도 기업체 연구실에서 일하면 공인자격 없는가?

 

그럼 나는 위에 어디 하나라도 걸리지 않는가? 난 정말 공인 아닌가?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어느 날 운수대통해서 대통령 될 가능성, 아니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최소한 0.000000001% 씩은 있는 사람들은, 지금은 비록 백수 백조라 하더라도 일단 준공인의 마음가짐으로 지금부터라도 몰카조심하고 무조건 애들 군대 보내면서 조신하게 살아야 하는가?

 

사실 이런 질문들은 끝도 없이 많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공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런 모든 질문들에 정답이 있어 개마고원 넓다란 평지 위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모아놓고 O는 왼쪽, X는 오른쪽으로 모이게 해서 이런 질문을 한 천 번쯤 하게 되면 진짜 엑기스 오리지날 공인을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 공인이라 떠드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마지막까지 남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서 현재 일반적인 공인의 개념이란 사기에 가깝다. 어쩌면 위헌일지도 모르지…

 

국민들의 한 표씩을 던져 선출한 높은 분들이 서로의 목에 공인이라는 올가미를 덮어 씌워 숨통을 조이려는 모습을 보면 재들 저게 정말 공인의 모습일까 싶다. 국회 회의장 문을 해머로 때려 갈기는 공인들도 있다. 시정잡배와 공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인이라는 명칭으로 제발 사람 목 좀 조르지 말자.

스스로를 공인이라 칭하며 거기에 자기 목도 좀 매달지 말자.

좀 편하게 사는 세상, 그렇게 살아가는 편한 마음이 되었으면 한다.

 

세상에 절대선(善)이란 있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절대악도 없는 것이고. 51% 정도 선할 것 같으면 그때부터 선으로 간주될 뿐이라는 생각이다. 세상이 모두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세상의 반이 날 좋아하고 나머지 반이 날 싫어하는 게 정상일 테니까.

 

사실은 이 말도 좀 사기다. 세상의 아주 미미한 극소수 일부가 날 좋아하고 그 정도의 미미한 일부가 날 혐오하면서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도 없을 거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 악플에도 기죽지 말자. 특히 연예인들이여. 기죽지 말자!

 

 

 

ps. 오현경과 백지영의 비디오 사건은 1999년, 2000년의 일이다.

오사마 빈라덴 이름의 911 사태는 2001년이다.

그러니 이 글을 쓴 것은 2001년말-2002년 초 쯤이었던 것 같다.

(이런 시간 추정을 하지 않으려면 모든 글에는 반드시 작성일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

 

그러다가 2007-2008년 사이 유니, 최진실 같은 유명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던 시기에 다시 일부 내용들을 수정하고 첨가해 편집본을 썼다. 하지만 내가 다음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게 2010년 경이었으니 이 글은 블로그에 공개하는 것은 이게 처음인 셈이다.

 

예전에 아마 인도웹이나 조선일보 '인도네시아통', 딴지일보 게시판에 올렸을 것 같은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가 내 컴퓨터에 오래된 파일들 모아둔 곳에서 오늘 찾아냈다.

 

이 글을 오늘 다시 읽어 보면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이 여전히 옳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의 그런 상황이 지금도 그리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건 이거다.

연예인들은 공인이 아니다.

유명인이라 해서 다 공인은 아니다.

 

그러니 진짜 공인들인 정치가, 행정가들,

사고치고 나서 연예인 사건 터트려 물타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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