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일반 칼럼

인용과 표절

beautician 2023. 11. 4. 10:43

인용과 표절

 

출처: 세계일보  https://m.segye.com/view/20210214508923
 

2015-2016년경 인도네시아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파고 들기 시작할 무렵 접한 어려움은 참고할 만한 한글로 된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했던 일은 관련 자료들을 찾아 한글로 옮기는 방대한 번역 작업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내 블로그에 살포시 올려 놓으면 나도 나중에 나 스스로도 다시 찾아보기 쉽고 나처럼 인도네시아 문화와 역사를 조회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수준이 학술적으로 높은 가치는 아니었으므로 논문을 쓰려는 학생들이나 학자들보다는 해당 취미를 가진 사람들, 인도네시아에 처음 오는 출장자나 유학생, 여행자, 교민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랬다.

 

지금도 하루에 결과물 기준 최소 3-4쪽 정도의 번역을 하고 있으니 한달에 대략 100쪽 정도의 번역물이 나오고 있으므로 1년에 대략 1,200쪽 정도. 거기에 이런저런 프로젝트가 붙어서 하게 되는 번역들도 연간 1,000쪽 정도는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쓴 보고서와 컬럼, 기사들이 1년에 100건쯤 된다.

 

특히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출간할 때, 이후 아직 출간하진 않았지만 ‘수하르토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디포네고로와 자바전쟁’을 준비하면서 방대한 자료들을 번역하고 소화했다. 나보다 더 많이 자료를 모아 연구한 학자들이 꽤 있겠지만 대부분 돈 벌러 온 인도네시아, 그래서 문화적으로 척박하기만 한 현지 교민사회에서 나름 문화 부분에 작가, 번역가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게 10년도 채 안된 사이의 일이니 물론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 기간 중 족히 수만 쪽 넘는 인니어 자료들을 번역하고 그걸 토대로 글을 써 기고하거나 블로그에 올려 놓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작업은 무속에 대한 연구였다. 내가 인도네시아 무속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소개한 적 있지만 광산사업을 하던 옛 동업자가 뻴렛주술(Ilmu Pelet) 주술에 걸려 기행을 거듭하던 시기에 그 친구를 도우려고, 하지만 그 수법의 정체를 모르면 돕지 못할 것이므로 주술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공부하다 보니 현지 무속과 귀신들의 세계까지 깊숙이 들어가 보는 경험을 했다.

 

물론 내가 스스로 무당이 되어 귀신을 만나고 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문화와 이론, 토속신앙의 미묘하고도 신비로운, 그리고 한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속성의 본질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지식적으로.

 

이런 자료들이 한글로 나와 있던 것이 이전에 전혀 없진 않았지만 거의 수박 겉핥기 식이었는데 대개의 경우 한국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자바의 어떤 부락/마을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1-2년 살면서 겪고 들은 귀신이야기가 조금 소개되는 것이었다. 학자들인 만큼 거기 응분의 소감과 분석을 담았고 적지 않게 참고되었지만 인도네시아 무속세계를 100으로 보면 거기 포함된 내용은 아마 0,01% 정도 될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99%를 다 안다는 건 아니고 아마 내가 현지 무속에 대해 아는 것도 대략 3-4%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인도네시아라는 큰 땅덩어리엔 수많은 부족들이 사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무속신앙도 수천 수만 가지에 육박할 터다. 그러니 깊이 들어가면 한도 없을 그 세계를 자바의 ‘주류 무속’을 중심으로 한 3cm 정도 파고 든 나로서도 딱히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당당히 명함을 내밀긴 힘들다. 무엇보다도 난 어느 대학에서도 내 지식을 증명할 귀신학 학위를 받은 게 없다.

 

한때 ‘이슬람 수면 밑의 인도네시아 무속세계’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하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퇴고할 때 보니 재미있어야 할 귀신이야기를 너무 학술적으로 딱딱하게 써서 언젠가 다시 쓰기로 하고 서랍에 던져 넣었는데 해당 글들이 물론 내 블로그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그걸 준비하면서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 무속과 귀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하며 구글링을 해보면 대부분 꾼띨아낙(처녀귀신), 뽀쫑(이슬람식으로 염습해 천에 쌓인 시신 모습의 귀신), 뚜율(사람이 부려 이웃의 물건을 훔친다는 아기 귀신), 부토이조(후손들의 부를 훔쳐온다는 재물주술의 대표적 귀신) 정도였고 그 이해도 매우 낮았다.

 

조금 놀랐던 것은 인도네시아 무속과 귀신들은 꽤 생소한 것인데 불구하고 거기 관심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었는지 여러 사람들이 올린 포스팅을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베껴온 것이 거의 분명한 포스팅들의 게시자들 이름은 각각 모두 달랐다. 즉, 그나마 모두 원작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복사해 긁어와서 자기 이름으로 붙여 넣은 것이다. 허접한 내용이라 해도 출처를 밝히는 것이 예의였을 텐데 2015-2016년 당시엔 아마 그런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아직 희박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요즘 구글에 들어가 인도네시아 귀신에 대한 한글자료를 검색해 보면 거의 다 내가 쓴 글들이 검색된다. 그 옛날 계획했던 것처럼 이제 인도네시아 무속과 귀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검색하면 나름 상당한 내용을 담은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 한국 모교회와 태극기 들고 시위하는 분들이 내 블로그의 일부 게시물의 표현을 문제삼아 신고하면서 다음블로그/티스토리와 게시물 블라인드 등으로 다음 측과 부딪혀 계정이 일시 차단되는 일을 겪고 차제에 블로그를 네이버로 이사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게시글이 수천 개가 넘는데 그 중 옮길 필요가 있는 글들도 절반쯤은 되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중이다. 그러면서 늘 구글만 쓰던 내가 네이버로 검색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 검색결과는 구글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네이버에서도 특정 인도네시아 귀신이름을 치면 대부분 내 글이 검색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쓴 포스팅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그런데 그중 귀신이야기를 좀 상세하게 적었다 싶으면 내 글을 인용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엔 루리웹엔 이런 게 있었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6379131

 

괴담잡썰)인도네시아의 돈 버는 주술(뻐수기한) 몇 가지 | 정치유머 게시판 | 루리웹

1)바비응예뻿(도둑돼지) 주술돼지요괴의 힘을 빌려 도둑돼지로 변하는 주술.두꾼(흑마술사)의 힘을 빌려 제물을 바치고 돼지요괴의 침을 얻어서 이걸 2차 성징이 오지 않은 자식에게 바르면자

bbs.ruliweb.com

 

 

이 경우엔 원래의 취지가 잘 반영되었다. 이 글을 올린 이가 원본 글을 그냥 베껴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문장으로 다시 풀어 쓴 후에 친절하게 자신이 참고한 내 블로그 URL 주소를 일일이 표기해 출처를 밝혔으니 말이다. 내 글을 읽어준 것도 고맙지만 출처를 밝혀 원본 글쓴이의 노력과 명예를 인정하고 지켜준 것이 더욱 감격스럽다.

이 블로그의 포스팅은 내가 쓴 니로로키둘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상당부분을 긁어오거나 참고한 것이 분명하다. 어떤 부분은 내가 쓴 문장이 통째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 포함된 에피소드의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그나마 원본의 에피소드들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대충 옮겨간 듯하다. 참고한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물론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니며 이런 걸 색출하는 경찰 짓을 할 마음은 없다. 출처를 밝혔든 밝히지 않았든, 2015-2016년에 처음 생각했던, ‘내가 올린 자료가 사람들에게 참고되길 바란다’던 초심으로 돌아가면 어쨌든 당시에 원했던 바가 지금 실현된 것이니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게 옳다.

 

그렇더라도 출처표시 없는 인용은 표절이라는 사실 역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인식하는 날이 오기를 솔직히 기원한다.

 

 

2023.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