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일반 칼럼

MOI에서 벌어진 FBR 폭동 (2015. 5. 29)

beautician 2015. 5. 31. 02:07



 

 

1998 5월 자카르타폭동 당시 자카르타 북부 짜꿍(Cakung)거리의 따만모데른(Taman Modern)이라는 주택단지가 폭도들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습니다.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던 와중에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던 수하르토 정권이 뜨리삭띠 대학생 반정부시위대에 발포하면서 촉발된 자카르타 폭동은 결과적으로 수하르토의 하야를 불러왔지만 그 와중에서 민주화, 반정부데모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도시빈민들은 폭도가 되어 떼를 지어 당시 인도네시아 최대항만이 위치한 자카르타 북부의 딴중쁘리옥 지역과 서부자카르타의 화교상업지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자카르타 전역을 며칠 동안 무정부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고급주택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당시에는 뿔로가둥(Pulo Gadung)공단에서 나와 위성도시인 버카시(Bekasi) 지역으로 들어가는 수킬로미터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중산층 주택단지였던 따만모데른엔 한국인들도 꽤 살고 있었습니다.

 

군병력이 진출해 시내요지를 점령했음에도 폭도들의 약탈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내곳곳에서 화재와 방화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을 당시 따만모데른 진입로와 맞닿은 길에도 2-3천명의 폭도들이 모여들어 대로를 가로막고 주택단지 안으로 진입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렸고 단지 가장 앞쪽 거대한 저택들에은 트럭을 타고 돌파해 들어온 폭도들에게 이미 약탈당하고 있었습니다. 공포에 떨면서도 그나마 피해를 줄이려던 주민들은 가족과 가용한 중요한 짐들을 차량 가득히 싣고 단지 뒤쪽 풀장 가까이로 모여들었습니다. 폭도들이 놓은 불이 바람을 타고 진입로 200여미터에 늘어선 상가를 집어삼키고서도 계속 단지 안쪽으로 너울거리며 번져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자카르타에서 벌어지리라고는, 순박해 보이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렇게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살인과 방화, 약탈을 저지르리라고는 그 이전엔 아무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국민들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군과 경찰이 이 모든 사태를 수수방관하리란 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그래서 매월 방범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거둬 그 급여와 월급들을 지급해 왔던 주택단지의 사설경비들이 모두 도망쳐버려 치안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고 생각해왔던 주거지역이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폭도들에게 개방되어 버렸던 것 역시 철저히 예상 외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근무지역을 이탈해 도주해 버린 경비원들 일부는 진입로 건너편 폭도인파에 합류해 오히려 단지 주민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비슷한 일이 2015 5 29일 자카르타 북부 끌라빠가딩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날 오후 한인포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속보가 떴습니다.

 

한인포스트 기자들에 의하면 29일 오후 230분 경 북부 자카르타 MOI에서 FBR단원 일부가 MOI경비에게 맞아 보복성 시위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 이에 MOI 경비실에서는 사태진정을 위해 경비를 강화하고 있음. FBR단원들이 추가 보복을 한다는 정보에 상가들이 철시하고 있음. MOI 로비 7번쪽 상가,자동차 유리들이 깨지고 오토바이, 자동차 유리등이 손상. FRB 폭력단원들은 오후 230분쯤 MOI(Mall of Indonesia) A입구에서  경비원들을 공격. 차량,상가 유리를 파괴하고 경비원들은 공포탄 발사.이날 폭력단원 공격은 100명 이상으로 보임. 폭력단원들은 세븐일레븐 편의점과  MOI 정문입구를 부서뜨린 상황. MOI에는 한인 70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어 안전이 우려됨.

 

Forum Betawi Rempug의 준말인 FBR는 포럼(Forum)이라는 멋진 단어도 들어있고 그 수장이나 중앙임원들은 꽤 저명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지만 기본적으론 자카르타 토박이를 뜻하는 브따위(Betawi) 양아치들의 모임이고 엄밀히 따지자면 조직화된 범죄단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곳입니다. 얍또 수조수마르노라는 저명한 정치인을 그 수장으로 내세우며 애국청년자경단을 지향하며 결성되었던 뻐무다빤짜실라(Pemuda Pancasilla)조직이나 순수 이슬람정신을 표방하며 인도네시아 사회를 이슬람표준에 맞추겠다며 기염을 토하던 FPI (Front Pembela Islam – 이슬람방위전선)가 결과적으로 전국구단위 준범죄조직 또는 폭력과격단체가 되어버리고 만 것처럼 FBR는 거의 비슷한 수순을 밟으며 크고 작은 이권에 간여하고 때로는 조직원들을 떼로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카르타에서 가장 많은 조직원을 거느린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매년 5월말-7월초 사이 자카르타페어(PRJ)가 열리는 끄마요란 JIEXPO 전시관 인근에서 군복 비슷한 유니폼을 맞추어 입고서 얼토당토 않은 주차비를 요구하고 가판대와 작은 포장마차들에게 말도 안되는 자리세를 뜯어내는 FBR은 아직도 한국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 중부와 북부 경계 쯤에 있는 쯤빠까마스 아파트 E 1층에 사무실을 열고 아파트와 인근지역 이권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MOI를 공격한 FBR의 오르마스 (Organisasi Masyarakat – 민중조직)는 훨씬 북쪽인 코자(Koja)와 찔린찡(Cilincing)지역에서 동원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이권을 노리는 조폭조직들처럼 FBR 조직 내에서도 끌라빠가딩의 이권에 끼어들기 위해 일종의 세력다툼이 있을 지도 모름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현지 일간지 Kompas에 등재된 일련의 기사들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이랬습니다.

 

사건의 단초는 5 28일 목요일 저녁에 시작됩니다.

끌라빠가딩의 MOI를 차를 타고 지나던 FBR 조직원들은 몰 앞 길가에 설치된 현수막과 깃발들을 보고 몰 경비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물론 FBR 자카르타 북부지부장 하지하디(HJ. Hadi)에 따르면 다른 뜻 없이 그냥 물어보기만 했다고 하는데 깡패들이 퍽이나 공손히 물어봤겠습니다. 그들은 끌라빠가딩 길가에 광고물을 설치하려면 FBR에 그에 상당하는 비용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는데 옥외광고물에 대한 세금을 낼 정부기관의 창구는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대담하게도 MOI 관리사무소를 대상으로, 아니면 최소한 MOI의 경비개인을 상대로 삥을 뜯으려 했던 것입니다.

 

"Jadi, dia minta jatah ke sekuriti terkait pemasangan spanduk dan umbul-umbul di depan," kata Komandan Satuan Sekuriti MoI, Syamsudin, di Kelapa Gading, Jakarta Utara, Jumat (경비회사측 사령 샴수딘에 따르면 그들(FBR) 길가 현수막과 깃발들에 대해 자기들 몫의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 Kompas에서 발췌.

 

인도네시아의 경비원들은 예전엔 삿빰(Satpam)이라 불렀죠. 요즘은 그리 부르면 별로 기분 좋은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씨큐리티(Security)라고 불러줘야 뭔가 좀 있어 보이죠. 물론 최선을 다해 자기 직무에 충실한 경비원들도 어딘가에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비원들은 겉멋이 살짝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찰 소속이라도 믿습니다. 엄연히 자기에게 월급 주는 고용회사가 있음에도 불구, 그들은 경찰관들이 자기 상관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 왼쪽 어깨에 경찰마크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만약 경비회사에 채용된 경비원들이라면 그 회사의 마크를 오른쪽 어깨에 다는 게 보통이지만 개인주택이나 루꼬, 주택단지 등이 직접 채용한 경비원들의 오른쪽 어깨엔 자카르타 주정부마크가 달려 있는 게 보통입니다. 스스로 준공무원이 되는 것이죠. 그 두 개의 마크는 경비원들의 자부심이기도 하거니와 대개의 경우 그들이 빠져있는 착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몰이나 아파트에 고용된 경비원들은 경비회사에서 파견된 직원들로 경비원이 되기 위해 소정의 교육(논산훈련소 훈련의 100분의 1정도 강도의 간단한 훈련을 해병대 극기유격훈련이라도 받는 것 같은 심정으로 견뎌냅니다)도 받고 현장에 배치된 후에도 자기들끼리 점호도 하고 아침구보도 하는 등 제법 군인들 흉내를 내며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유불급. 그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변하는 순간 경비원들의 제복과 허리탄띠에 찬 곤봉이며 유격조교 같은 검정 전투모는 꽉 틀어 막힌 고집과 독선이 되기도 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고압적 위세를 부리는 갑질의 무기가 되곤 합니다.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에게 삥을 뜯으려 시도하는 FBR 조직원들에게 경비원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경비회사 측에서는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안봐도 비디오인 이 상황에 대해 FBR 측에선 이렇게 얘기합니다.

 

"Kan kami cuman nanya. Kagak malak sama sekali," kata Hadi. I kemudian turun dan bertanya ke salah satu sekuriti MOI. Salah satu sekuriti pun tampak tak senang dengan aksi I. "Mereka pada ngobrol. Enggak tahu kenapa, ujung-berujung ribut dah tuh. Nah ni sekuriti lain ngehubungin teman lainnya. Turun dah tuh delapan sekuriti bawa balok," ucapnya. I, kata Hadi, kemudian langsung dikeroyok. Melihat aksi tersebut, teman-teman I pun merasa tidak terima. "Akhirnya, I dibawa ke rumah di Jalan Kampung Mangga, Plumpang," kata dia.

(우린 그냥 물어봤을 뿐이에요. 공손하게요. 차에서 내려 MOI 경비원 한명에게 물어봤는데 벌써 인상이 구겨지더라구. 그놈들 뭐라뭐라 하다가 나중엔 이유없이 개난리를 치더라구. 그러다가 다른 놈들한테 연락하더니 갑자기 여덟 놈이 각목을 들고 나타났지 뭐야? 졸라 두들겨 맞았지 . 친구들도 그놈들 행동을 도저히 받아들일 없었지만 일단 들고 뿔룸빵 집으로 돌아갔던 거야…..라고 하디는 말하고 있었다) - Kompas에서 발췌.

 

안믿어지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 흥미로는 부분이 몇 가지 보입니다. 우선 이 인터뷰를 한 친구는 뿔룸빵(Plumpang)이 집입니다. 끌라빠가딩과 딴중쁘리옥 사이 중간쯤 되는 곳이고 코자(Koja)지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코자지역은 예전에도 공동묘지 이전문제로 주민들과 경비원들간에 대규모 싸움이 붙여 경비원 두 명이 죽었던 곳입니다. 경비원들은 자기들이 준경찰이라 생각한다고 했죠? 누구보다도 더욱 그리 생각하는 경비원들이 있는데 POL PP라고 쓰인 트럭을 타고 다니는 카키색 비슷한 제복의 인간들입니다. 끈질기게 총기지급을 요청하고 있는 이들은 경찰처럼 보이기 위해 POL PP라고 쓰고 다니긴 하지만 실제로는 SATPOL PP, 경찰관련 경비원, 즉 경찰의 보조인력으로 주로 환경미화를 위한 현수막 등 미허가 옥외광고물 철거, 노점상 단속 등을 주로 하는 인간들입니다. 민간인들을 향한 이들의 위세를 가히 경찰 이상입니다. 이 인터뷰의 하디란 인간은 그런 SATPOL PP를 두 명씩이나 살해했던 동네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는 Ketua Koordinator Wilayah Forum Betawi Rempug (FBR 지역조정위원장)이라는 직함에, 이름 앞에는 메카를 다녀온 순례자에게 주는 하지(Haji)라는 호칭도 붙어 있는데 말투는 영 양아치입니다.

 

이들이 차를 타고 끌라빠가딩에 들어왔다고 하니 하디의 일행은 모두 3-4명 정도였겠죠. 그런 친구들이 10여명의 MOI 경비들과 싸움을 벌였던 것인데 MOI 경비들이 비록 제복과 장비에 한껏 고양된 풋내기들이었다 해도 조폭도 아닌 바에 그렇게 한 곳에 몰려들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하디 일행이 28일 밤 모이 앞에서 뭔가 심각한 위기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디 일행이 무모했던 거죠. 아니면 그들은 거기 그렇게 맞을 목적으로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를 모아 쳐들어올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끌라빠가딩 지역은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당시에도 아무 피해없이 무사했던 지역입니다. 전통적으로 신흥부자들과 저력있는 중산층 상당수가 살고 있는 끌라빠가딩 지역은 자카르타 북부와 동부를 통틀어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건설관련 대기업인 수마레콘(Sumarecon)사가 대부분의 개발권을 쥐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폭동 당시에도 수마레콘사에서 사온 군대가 끌라빠가딩을 철통같이 지켜냈던 것입니다. 당시 끌라빠가딩의 남쪽 외곽에서 쁘린티스(jl. Perintis)거리와 만나는 사거리에 거점을 확보한 일련의 중화기부대가 쁠로마스 지역에서 집결해 북상하던 폭도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얘기도 그 인근에 살던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건은 신문이나 방송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고 그 어디에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사실확인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근 쁠로마스나 코자, 딴중쁘리옥, 순터르 등지에 비해 끌라빠가딩은 고속성장을 통해 몰라보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적으로 공권력을 제외한 제 3의 세력, 예컨대 주민조합이나 조폭들이 본격적으로 이권에 간여하거나 괴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FBR에게는 끌라빠가딩이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젖과 꿀이 흐르는 희망의 땅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첫 진출통로를 MOI에서 열려고 했던 것일지도요.

 

목요일 밤 MOI 경비원들에게 맞고 돌아간 하디는 그 지역 FBR 조직원들을 모아 약 300여명을 이끌고 다음날 이른 오후에 모이를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5 29일 끌라빠가딩 모이에서 벌어진 사태의 배경입니다.




 

FBR 조직원들은 MOI 몰의 주차료정산소를 공격하고(그런데 사실 주차료정산소는 경비원과는 아무 관련없는 곳입니다) 돌을 던져 MOI 내의 가게들의 유리창들과 차량들 일부를 파손했습니다. 동원된 FBR 조직원들 중에는 날카로운 도검류를 소지하고 나타난 자들도 있었습니다. MOI 몰을 방문하던 손님들은 혼비백산하여 급히 피신하면서 일부 부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출동한 경찰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이었습니다. 더욱이 공격을 당하는 MOI 몰쪽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는 FBR이 경찰력을 등에 업는 것처럼 비친 것도 사실입니다. FBR은 전날 하디 일행이 폭행당했음을 경찰에 신고해 가해자 색출과 처벌을 요구한 상태에서 MOI에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Saat itu, kata Simbolon, ormas langsung menyerang pihak sekuriti MOI. Mereka menyerang dengan senjata tajam dan batu. Simbolon dan rekan sekuriti lainnya mengaku berusaha untuk tidak terpancing. Polisi di tempat kejadian perkara (TKP) juga mengimbau agar sekuriti tidak melawan. "Kami cuma menahan, pakai tongkat rotan, enggak mukul," kata Simbolon.
(심볼론(경비원)에 따르면 FBR는 도검류와 돌을 이용해 MOI의 경비원들을 공격해왔다고 한다. 심볼론과 다른 동료경비원들은 FBR의 낚시질에 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경비원 측이 맞대응 하지 않을 것을 촉구했다. ‘그래서 우린 그들을 막는 데에 로탄방망이, 야구방망이 정도 밖에 쓰질 않았어요라고 심볼론은 말했다.) – Kompas 기사 발췌

 

"Polisi harus cari tahu siapa pelakunya. Kalau kagak, kami serang balik MOI. Harus ada itu pelakunya," ucap Hadi. (“경찰이 가해자를 잡아 내야 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이 몰에 다시 쳐들어갈 겁니다라고 하디는 말했다.) – Kompas 기사 발췌

 

사건 다음 날인 5 30일 아침 경찰은 총 30여명을 체포했고 이중 FBR 조직원 9명과 경비원 3명을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외에도 29일 폭력사태의 적극가담자와 실제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FBR 측 용의자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경비원들의 프로답지 못한 대응과 그로 인해 MOI 몰의 고객들과 역내 아파트 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등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경찰이 경비원을 입건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찰이 FBR을 적극적으로 수사해 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일정부분 받아들여 타협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찰이나 경비원들이 결코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특히 경찰의 경우엔 우리의 안전을 오히려 위협하기 쉽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을 잘 알고 있지만 원칙을 지키고 주민들과 고객들을 지키려 한 쪽을, 그것도 압도적인 수적 수세에서도 나름대로 할 일을 하려 했던 경비원들을 벌하는 것은 앞으로 MOI는 물론 자카르타 어디에서든 FBR이나 암본깡패들이나 FPI, 마두라 조폭들이 우리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왔을 때 경비원들이 몸을 던져 잡디스크립션에 따른 자기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 , 우리가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인터뷰에 응한 경비원들은 저렇게 얘기를 했지만 그들은 그날, 정말 자기 책무를 다했을까요?

29일날 저녁 무렵 MOI 아파트의 한국인들 사이에선 이런 멘션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학교 행사 있어서 지금막 모이 게이트C로 들어왔는데 삿밤 한명도 없더군요.

완전 개방되어 있었어요. 경찰도 못봤구요.
퇴근하는 기사 말로는 지하에도 삿밤 아무도 없다고 다들 퇴근했다고 하더라고 ...

그들의 안전 역시 중요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입주민으로선 살짝 좀 당황스러웠어요.

 

게이트A 앞에 경찰.경찰차 바리게이트 치고 대기 중입니다.

지금 막 들어오다 확인했어요.

모이 로비1.2 경비 한명도 안보입니다.

그 경비들 다 어디로갔는지?

 

실상 MOI의 경비들을 1998년 따만모데른의 경비들처럼 그날 밤 모두 도망쳤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무리 인지상정이라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이 닥쳐왔을 때 똑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보면서 인도네시아란 나라, 또 인도네시아 사람들에 대한 회의가 또다시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5. 5. 30.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카르타의 일반적 교통정체 대응방식  (0) 2015.09.19
금식월과 이슬람수호전선 FPI  (0) 2015.06.30
비정규직 4년의 의미  (0) 2015.01.14
빨갱이 만드는 사회  (0) 2015.01.12
[영화리뷰]인터뷰   (0) 201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