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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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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나쁜 소대장 법칙

beautician 2023. 3. 9. 11:57

 

호의가 반복되면 그걸 권리라고 생각한다.

 

 

....는 말이 사실이란 걸 늘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호의를 베풀고 힘이 되어주려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건 아마도 누군가 말한 내가 '좋은 사람 증후군'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고.....

 

그런 매뉴얼 같은 인생을 살아온 셈인데 이제 이 나이가 되면 그걸 고치기도 힘들다.

 

돌이켜보면 군시절에 그 문제를 가장 크게 느꼈던 것같다.

 

병사들은 늘 친근하게 대하고 존중해주는 소대장보다 무식하게 밀어붙이고 소리치고 가끔은 때리기도 하는 소대장 말을 더 잘 들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권위의식에 쩔어 공감능력 하나 없이 욕설만 퍼대던 소대장이 어느날 아무 생각없이 자기 옷 다리미질 해온 당번병에게 '고맙다' 한 마디 한 것으로 그 얘기를 보고 들은 병사들이 '사실은 우리 소대장이 훌륭한 인간성을 숨기고 있던 멋진 남자야.' 이 따위 생각을 하게 되고, 

 

평소에 윽박지르지 않고 존중하던 소대장이 어느날 흐트러진 기강을 잡으려고 큰 소리 지르며 얼차려를 하려 들면 병사들은 툴툴거리며 소대장 뒤통수에 '미친 새끼'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게 당시엔 논리적으로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논리적, 심리적으로 너무 당연한 일이다.

 

윽박지르기만 하고 공감능력 없는 소대장에겐 애당초 기대할 게 없으니 기대수준이 매우 낮은데 그걸 넘어서는 모습을 한 두번 보이면 그게 생각지도 않은 호감을 불러일으키며 찬사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80-9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겪어 보았을 또라이 폭력교사가 어느날 이성적인 모습을 잠깐 보이기라도 하면 비록 단기적으로나마 그 교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곤 했다. 기대감 없던 인물이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기대감이 낮은 개차반 인간일 수록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니 영화 속 멋진 조폭들이 찬사를 받는 것이다. 어차피 깡패일 뿐인데.

 

반면 이성적이고 상식을 가진 소대장에게는 소대원들은 자연스럽게 매우 높은 수준의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그 기대수준의 행동을 보게 되면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건, 심지어 그런 상황을 유발한 게 자기 자신일지라도 소대장에게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라는 뒷담화를 동료들과 서슴없이 나누며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악명높은 정치인들이 개판을 치다가 어느 날, 예를 들면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다스뵈이다 같은 곳에 나와 민중의 염원과 같은 방향의 이야기를 하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끌게 되는데 요즘은 변희재가 좀 그런 상황인 것같다. 심지어 나도 그 친구가 좋아졌다.

 

 

반면 반듯한 언행과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에 대한 나쁜 뉴스가 터지면 그놈이 천하의 몹쓸 놈이라며 조림돌림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노무현, 노회찬, 조국, 문재인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요즘은 유아인이 그렇다.

 

유아인이 아무리 잘못했다 한들 늘상 사고치며 사회적 물의를 만드는 래퍼 아들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탄핵 정국에 다스뵈이다 나와 입을 털다가 지금은 윤핵관 핵심이 되어 온갖 유세를 떠는 모 정치인에 비하면 악인 축에도 끼지 못한다. 

 

여러 모로 사정을 봐주었는데 그런 상황이 1년 쯤 되니 내가 사정 봐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간단한 일 하나 하는 데 1주일씩 걸리는 직원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렀다.

 

뭐, 내가 원래 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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