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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옥의 여인(Perempuan Tanah Jahanam)>(2019)

beautician 2022. 12. 17. 11:07

[영화리뷰] <지옥의 여인(Perempuan Tanah Jahanam)>(2019)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2016년 해외자본에 시장을 개방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룬 분야는 호러장르의 영화들이었다.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결과가 2017년 조코 안와르 감독의 <사탄의 숭배자> 1편이 로컬영화 흥행수위에 오른 것이다. 예년의 흥행 1위 영화에 비해 관객수가 비교적 적은 420만 명 정도가 들었지만 호러영화가 1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영화기술이 발전했고 단지 깜짝 놀래키는 장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작가들의 역량도 발전해 시나리오와 스토리텔링이 좀 더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확보되었다는 의미인 셈이다.

 

2017년 로컬영화 흥행 상위 영화 15편, <사탄의 숭배자>가 1위

 

호러영화가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17)에서 각광을 받은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탄의 숭배자>는 시각효과상, 아역상, 주제가상, 미술상, 영상상, 음악상, 음향상 등 일곱 개 부문을 휩쓸었다.

 

2003년에 <현 없는 바이올린(Biola Tak Berdawai)>으로 데뷔한 조코 안와르 감독은 2015<내 마음의 복제(A Copy of My Mind)>FFI 감독상을 타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 때까지만 해도 제작한 영화들은 드라마 장르 일색이었다. 2008년에는 모울리 수리야(Mouly Surya)와 함께 <픽션(Fiksi)>로 그해 FFI 각본상을 받으며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실제로 조코 안와르를 포함해 인도네시아 감독들 대부분은 좋은 시나리오 작가들이기도 하다.

 

그는 2017<사탄의 숭배자> 이후 그는 여러 편의 공포영화들을 흥행시켰다. 그는 HBO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에도 참여했는데 2015년 시즌 1을 담당했던 <하프월드(Halfworlds)>도 호러 시리즈였고 2018HBO 시리즈 <포크로어(Falklore)> <어머니의 사랑(A Mother’s Love)> 에피소드도 인도네시아 귀신 중 하나인 웨웨곰벨을 다룬 호러 장르였다.  

 

2022<사탄의 숭배자2: 커뮤니언>1편의 흥행성적을 훌쩍 뛰어넘어 640만 명의 관객이 들었고 2019년에는 <지옥의 여인(Perempuan Tanah Jahanam)>으로 180만 명 가까운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2019년 로컬영화 흥행 상위 영화 15편, <지옥의 여인>은 7위

뿐만 아니라 <지옥의 여인> 2020년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20)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이 역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종류 FFI 2020 수상자/작품명
작품상 <지옥의 여인> 바세엔터테인먼트(Base Entertaiment) 작품
감독상 조코 안와르 감독 <지옥의 여인>
시각효과상 가가 누그라하(Gaga Nugraha) - <흑마술여왕(Ratu Ilmu Hitam)>
영상상 이짤 딴중(Ical Tanjung), I.C.S - <지옥의 여인>
여우조연상 크리스틴 하킴(Christine Hakim) -<지옥의 여인>
음향상 모하마드 익산(Mohamad Ikhsan), 안하르 모하(Anhar Moha) - <지옥의 여인>
촬영상 딘다 아만다(Dinda Amanda) - <지옥의 여인>

 

2022920만 명의 관객을 모은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KKN di Desa Penari)>은 그해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무관에 그쳤는데 소위 영화인 또는 영화전문가라 하는 이들이 호러장르 영화를 살짝 아래도 보고 대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여인>이 흥행과 FFI 2020을 휩쓴 것은 조코 안와르 감독의 명성이나 제작사인 호러영화의 명가 라삐필름(Rapi Film)의 네임밸류가 크게 작용한 것이란 추론이 가능해진다.

 

<지옥의 여인>

<지옥의 여인>은 외국에 <임페티고어(Impetigore)>라는 제목으로 알려졌고 2020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버전에는 한글자막이 없다.

 

 

원제 <Perempuan Tanah Jahanam>를 조금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저주받은 땅에서 온 여인이 되는데 영화 내용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그것을 굳이 농가진이란 피부질환 병명과 피튀기는 영화장르라는 뜻을 가진 고어(gore)를 합성해 <임페티고어(Impetigore)>라는 영문제목(사실 이런 영어단어가 없으니 이걸 영문제목이라 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을 단 것은 영화 속 피부 없이 태어나는 아기들이 받은 저주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영화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창구직원으로 일하는 주인공 마야(타라 바스로)가 어느날 얼굴도 모르는 한 남성 스토커에게 공격을 받아 목숨이 위협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트라우마를 안고 직장을 그만 둔 마야는 절친 디니와 함께 옷장사를 시작하지만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옛날 시골에서 큰 집에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집의 권리를 되찾아 자금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디니와 함께 하르조사리(Harjosari)라는 자바 내지 깊속한 곳의 숲 속 마을을 찾아 들어간 마야는 그곳에 드리운 처참한 저주와, 자신이 마침내 죽을 곳을 찾아 들어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타라 바스로(Tara Basro), 마을 이장이자 와양 그림자극에서 인형들을 다루는 달랑(dalang) 삽따디(Sabtadi) 역의 아리오 바유(Ario Bayu), 삽따디의 어머니이자 흑마술사 역의 크리스틴 하킴(Christine Hakim) 등의 입체적인 인물설정, 안정적인 연기가 몰입감을 더해 준다.

 

왼쪽부터 타라 바스로, 아리오 바유, 크리스틴 하킴

이 글을 읽는 한국인들 중 굳이 이 영화를 이제부터 보러 갈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라 보고 마음놓고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들을 통해 이 영화 이야기를 하려한다.

 

저주

이 마을에 내려진 마을 아이들이 모두 피부가 없는 상태로 마을 이장 삽따디는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또 한편으로는 저주를 없앨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그 저주의 시작에 바로 그 자신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원래 끼도노웡소(Ki Donowongso)라는 부유한 이장집 하인이었는데 이장의 부인 냐이 신타(Nyai Shinta)가 그와 정을 통해 라하유를 임신하지만 끼도노웡소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집안 하녀이자 삽따디의 어머니인 미스니(Misni)는 그 상황을 혐오해 삽따디에겐 냐이 신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게하고 냐이 신타의 아기는 뱃속에서 죽도록 기원하는 비전의 흑마술을 시전한다. 그건 삽따디도 미스니가 집안의 전 주인, 즉 끼도노웡소의 아버지에게 겁탈당해 낳은 사람이란 설정 때문인데 그래서 왜 태아를 죽이려는지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말하자면 삽따디는 현재의 집주인 끼도노웡소의 배다른 형제인 셈인데 주인의 아내를 삽따디가 빼앗아 임신까지 시켰다면 주인 집안에 원한을 가진 미스니가 속으로 통쾌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삽따디는 기억을 잃지만 아기는 죽지 않고 피부가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그 아기가 라하유.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야의 어린 시절 이름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흑마술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경우의 특징 중 하나는 독한 피부병이 발병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다. 그런 장면들이 민화나 전설에 많이 나오는데 빠자자란 왕국의 카티다 공주가 자바 남쪽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로로키둘로 다시 태어나는 전설에서는 의붓어머니인 새 왕비의 저주로 공주의 온몸 피부가 문드러진다. 고대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치유하기 어려운 정도의 피부병 또는 나병, 천연두 같은 것들을 흑마술 산뗏 저주술의 한 갈래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흑마술의 저주로 아기들이 피부가 없이 태어나거나 누군가 저주를 받아 살이 문드러지는 장면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겐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태아를 죽이려 했던 흑마술이 피부를 없애는 저주로 바뀐 것은 흑마술이 과학처럼 정교하지 못하다는 것을 사뭇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 귀신의 힘을 빈다 해도 주술자가 원하는 바가 그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딸을 치료하기 위해 끼도노웡소도 악독한 흑마술로 대응한다. 마을 여자아이들 셋을 납치해 피부를 벗겨 암매장해고 그 피부를 가공해 와양 꿀릿(Wayang Kulit) 즉 가죽 재질의 그림자인형 세 개를 만든 것이다. 화면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그 아이들의 피부를 라하유에게 이식했음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그래서 탄생 이후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라하유가 그제서야 아무 흠없는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림자극 장면. 저 인형을 &lsquo;와양꿀릿&rsquo;이라 부른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세 아이의 원한은 원래의 주술과 엮여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저주를 드리우고 삽따디는 먼저 끼도노웡소를 살해한 후 끼도노웡소로 위장해 와양 그림자극을 하던 중간에 갑자기 정글도를 휘둘러 와양 그림자극 단원들과 냐이 신타까지 모두를 죽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혼비백산하며 달아난 마을 사람들은 그림자극 장막 뒤편에서 벌어진 그 잔인한 살인사건이 끼도노웡소가 미쳐 날뛴 결과라고 오해하게 된다.

 

이후 마을에서는 아기들이 모두 피부가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그 저주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원래 최초로 피부없이 태어난 아기, 그러나 이후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가 와양 그림자극 집단살인이 벌어지면서 끼도노웡소의 가문이 멸문하던 날 한 하녀의 도움으로 그 마을을 빠져나간 라하유, 즉 마야를 죽여 그 피부를 벗겨내는 것뿐이다.

 

조코 안와르 영화의 특징

매년 한 두 편 정도 나오는 조코 안와르 감독의 영화를 기다렸다가 보면 바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OTT 플랫폼들을 통해 최근 영화 여러 편을 몰아서 보면 몇 가지 특징들을 느끼게 된다

 

그중 하나는 한번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복적으로 기용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여주인공 타라 바스로다. 그녀는 조코 안와르 감독의 뮤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최근작 거의 대부분에 등장한다. 그녀는 <사탄의 숭배자> 1, 2, <지옥의 여인>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고 2019년 첫 수퍼히어로 영화 <군달라>에서도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타라 바스로 자신도 2017년 이후 줄곧 조코 안와르 감독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그녀는 2022년 개봉한 두 번째 수퍼히어로 영화 <스리아시(Sri Asih)>에는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게 조코 안와르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하고 그 대신 우삐(Upi) 감독이 현장 메가폰을 잡은 탓도 있지만 조코 안와르 감독은 해당 부미랑잇 세계관의 여러 수퍼히어로 중 머르빠띠(Merpati)’라는 배역에 타라 바스로를 내정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해당 세계관의 다른 영화에 기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보인다. 물론 <군달라>에 이미 등장한 전력이 있지만.

 

키키 나렌드라(왼쪽)와 아스마라 아비가일

 

그렇게 조코 안와르 감독 영화에 반복적으로 기용되는 배우들 중에는 마을주민 밤방(Ratih) 역의 키키 나렌드라(Kiki Narendra)와 마을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라띠(Ratih) 역의 아스마라 아비가일(Asmara Abigail)도 있다. 키키는 <군달라><사탄의 숭배자> 속편, 아스마라는 <사탄의 숭배자> 1, 2편에 모두 등장했다. 특히 키키는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에서도 숲 속 마을 이장으로 등장하는데 2022년에만 총 일곱 편의 개봉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다작배우다.

 

그래서 조코 안와르 감독의 영화들만 보면 인도네시아 영화배우 층이 너무 얇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 완전히 다른 세트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사실 배우들은 넘쳐나는 모양이다. 결국 배역은 감독의 취향과 선택에 달린 것이고 인도네시아 영화계에는 소위 조코 안와르 사단이라 할 만한 배우 등 영화인들의 비공식 집단이 구축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옥의 연인> 전개 도중에 연결이 매끄럽지 않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곳이 몇 군데 발견된다. 결말 부분의 연출이 좀 성급한 것도 옥의 티다. 하지만 영화 전체 스토리는 조코 안와르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을 잘 유지했고 특히 크리스틴 하킴이 연기한 흑마술사 노인 미스니는 그 무게감과 함께 영화의 신뢰감을 높였다.

 

피부를 벗겨 꿀릿 와양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여자아이 세 명의 혼령은 마을에 저주를 퍼부은 원혼이라 하기엔 악의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편인데 <사탄의 숭배자 2: 커뮤니언>에서도 여자아이 세 명의 혼령이 등장한다. 조코 안와르의 호러영화들은 그런  장치들을 통해 영리하고 효과적인 공포의 빌드업을 도모한다. 

 

세 명의 아이들 유령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

2020년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지옥의 여인>이 본상 상당부분을 휩쓸면서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에 큰 획을 그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이 지난 후 2022<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사탄의 숭배자> 속편에 각각 920, 640만 명의 관객이 들면서 호러 장르의 영화들은 더욱 탄탄해지며 기술적으로나 내용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2022년 12월 6일 현재

 

특히 상기 두 편의 영화는 물론 <다누르(Danur)> 연작처럼 각각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확장해 나가는 공포영화들은 그 다음이 기대된다.

 

<지옥의 여인>은 개별영화이고 속편 얘기도 없지만 향후 인도네시아 호러영화들을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언급될 것이기에 차제에 뒷북을 치며 후기를 작성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