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직장마다 한 명씩 꼭 있는 사람 본문
드라마 미생에는 막무가내 마부장, 나대는 한상률처럼 어느 대기업 직장에서나 꼭 있을 법한 상사나 후배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엔 ‘성대리’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는 뻔뻔스럽고 후배를 애먹이는 드라마를 통틀어 유일한 악당이었습니다. 그를 보면서 예전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후배들과 고졸직원들을 고달프게 했던 한 인간을 기억해냈습니다.
나는 그의 열등감의 유래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군가산점이 뭔지도 모를 그 당시에 군인들은 명예를 먹고 살았고 남자들의 술자리는 군대 이야기로 도배되던 시절. 과장된 동작으로 술좌석에서 화제를 주도하던 그는 군대얘기만 나오면 고공낙하훈련과 생존훈련 얘기에 열을 내곤 했습니다. 기본적인 인상 자체도 그의 얘기를 상당히 뒷받침해 주면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공수부대 출신 행세를 했었죠. 하지만 회사의 인사서류는 폼으로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시간문제였던 거짓말이 드러나던 순간 그는
사실 동사무소 방위였다고 실토해버렸고 오랜시간 그가
공수 출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팀원들을 허탈하게 했는데 그래도 그동안 재미있지 않았냐며 그는 비굴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애썼습니다. 그는 방위를 마쳤다는 것을 그토록 부끄러워했지만 방위복무를
통해 군복무기간을 크게 줄인 덕택에 포기했던 4년제 대학진학을 다시 시도할 수 있었고 대기업
신입사원모집 연령제한에도 간신히 턱걸이할 수 있었으니 그는 오히려 감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인물들이 실제 얼굴을 가지고 불쑥불쑥 내 곁에 나타나고 스쳐가는 것을 적지 않게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는
요즘 웹툰에도 자주 등장하는 ‘약자에게는 한없이 군림하면서도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의 밑으로도 신입사원들이 들어오자 그는 그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고 예전에 입사동기
들에게도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자기 나이까지 들먹이며 형노릇을 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내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면서부터 서로 본사사무실에 책상 맞대고 앉아 있으면서 그가 적대감으로
날 대한 이유는 입사는 내가 빨랐지만 군복무로 인한 휴직기간 때문에 사실은 반년쯤 그가 더 오래 근무했다는 것, 같은
대학을 나왔지만 나이는 그가 많은 대신 학번은 내가 더 빠르다는 것, 더욱이 내가 장교출신이라는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가 입사동기들에게 흔히 쓰던 나이로 찍어 누르는 방식이
안타깝게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던 이유는 군복무 후 복학해 대학을 마친 대부분의 동기들에 비해 나이보다는
계급이 깡패인 사회를 떠난 것이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복직 후 반년도 채 안되어 결국 그와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김XX씨 담당인데요..."
"야, 김xx씨가 뭐야? 형이 김선배님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버르장머리없이."
고졸출신으로 10년 넘게 근무하면서도 아직 대리도 못단 말년고참이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우리 인도네시아 공장의 창고장이 되어 수많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되지만 당시 우린 그를
‘김선배님’ 이라고 깍듯이 대했습니다. 중국집에서 한잔 걸치다가 나온 팀장질문에 대답하며 그
선배를 언급하던 중이었는데 문제의 그 친구가 끼어 들며 나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선배도 예기치 못한 그의 반응에 화들짝 놀랐고 나는 물론 그 자리에 앉은 모두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부서과장들이 잔뜩 모인 자리에 말단이라곤 그와 나 둘 뿐. 그는
자신의 예의바름과 자신의 위치가 나보다 훨씬 위에 있음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형이 말하면 들어, 임마!! 가뜩이나
나이먹고 말단에서 고생하는 김선배한테 함부로 하는 새끼들은 내가 가만 안둔다고 했잖아!! 넌
예의도 몰라?!”
오히려 김선배가 그의 말에 마음을 다칠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그렇게 말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가 한 말이라곤 저
늙은이, 능력 없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나
같으면 챙피해서 벌써 나갔겠다. 하는 쪽이었죠. 전역한지
얼마 안돼 군대예절에 젖어 있던 그 때, 나 역시 사회예절에 미숙했습니다. 그래서 상급자와 얘기하는 자리에서 차상급자를 언급하면서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는 것을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임들, 과장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꼬투리를 잡고 나를 가르치려 드는 그에게 그 대목에서 나 역시 꼭지가 돌고 말았습니다.
니가 언제부터 내 형이야? 꼴값 떨지 말고 너나 똑바로 해. 뭐 이런 게 당시 내 즉각적인 반응이었으므로 당장 싸움으로 번져 버렸죠. 모두가 말리는 바람에 접시 몇 개 깨지는 선에서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은 채 끝나면서 그와의 관계는 그 후 몹시 냉랭해지고 말았습니다. 상사들 앞에서 술상까지 뒤엎으며 벌인 한판이었고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었지만 그 후 그가 절대 내게는 시비를 걸지 않게 된 이유는 난 더 이상 그에게 ‘입사는 빠르지만 만만한 어린 애’ 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화장실에서 일진들 주먹질로 서열 정하는 것도 아닌데
대기업에서조차 '나 이런 놈이야' 하고 보여줘야만 뭔가 정리가
된다는 게 좀 개탄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회사후배들에 대한 그의 전횡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나중엔 그는 조수와
몇 번씩인가 주먹싸움을 벌이가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고졸사원들에게 심하게 대해 상고 갓 졸업한
남자직원들을 마치 개인사환처럼 부렸고 자못 화기애애한 술좌석에서 이들이 술기운에 용기를 얻고 고충을 토로할라치면 화장실이나 뒷골목으로 끌고가 버릇없다면 귀싸대기를 때리는 봉변을 주기 일쑤였습니다. 스무 살도 안된 앳된 여직원들은 지금 같으면 성희롱으로 고발당하고도 남을 그의 언사와 음달패설적 행동에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훔치며 갱의실로 달려 가곤 했죠.
그는 힘없는 사람들에겐 잔인할 정도로 무모한
공격성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강자의 발바닥을 맛있는 아이스크림처럼 한없이 핥을 수 있는 비굴함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사업부장에게 잘보이기로 마음먹은 그는 사업부장이 시키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켜 놓고 선봉에 나서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막무가내로 몇몇
거래선들을 도산시키고 적잖은 외주 공장 사장들을 빚더미에 앉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선배들에게조차 사업부장의 대변인처럼 행동하며 점차 안하무인이 되어 갈 뿐이었습니다.
“회사가 시킨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무슨 팀장이야!? 똑바로 못할 바에야
후배들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터 줘요!”
복직할 당시의 팀장은 사업부장과 동갑이었지만 진급이 늦어 아직 차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나
선하고 인간적인 사람이 바보취급을 받는 법이죠. 그러나 그는 서울
외곽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봉제의류공장들이 붕괴해 가던 시절 바닥을 기던 우리 실적 때문에 쏟아지던 상사들의 질타를 온 몸으로 받으며 부하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침회의 중간에 튀어나온 이런 하극상에 팀장 성격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겠죠. 팀원들을 모두
내보낸 쌤플실에서 우리 팀장과 까마득한 부하직원인 그는 서로 언성을 높였고 두사람의 고함소리가
밖으로도 새어 나왔습니다.
"말할 기분 아니다. 이렇게 비참한 심정으로 회사를 떠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결국 팀장은 위 아래로부터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미팅 후 일주일쯤 지난 후, 환송회마저 필요 없다며 총총히 회사를 떠나던 팀장이 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그 참담한 마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이
사건이 사내에 회자되면서 그는 신입사원들 사이에서는 물론, 과장, 차장들
사이에도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걔 밑에서 일할때 너무 고달펐어요. 팀장님 같은 지도력도 없고 맨날
부장님 심기나 어지렵혔고. 그래서 회사에 도움
안되면 좀 나가 달라 하니까 금방 나가더라구요."
전임 팀장을 '걔'라고 지칭하며, 신임팀장 환영회를 하던 중 알랑방구를 끼던 그의 웃음소리가
그날따라 추악하게 들렸습니다. 그는 실세가 아닌 사람들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런 식으로
가슴에 비수를 꼽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신봉하던 사업부장이 동경지사로 나가고 그룹회장의
고교동창이 신임 사업부장으로 부임하자 그는 이제 이 진정한 실세 앞에 부복하여 찬양하며 급기야 그가 입사 이후 하늘처럼 떠받들던 전임 사업부장마저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동기나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대부분 지사에 나가게 되었을 때 그는 중국 신장성 신설
지사를 향했습니다. 신장성 우르무치 지사는 내가 부임한 자카르타보다 훨씬 더 척박한 곳이었을
것이고 한국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인도네시아에 비해 한국 사람 달랑 단 둘이 지내야 하는 그곳은 무척이나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그나 나나, 회사 최고의 줄을 탄 사람들이 간다는 동경이나 뉴욕, 유럽지사를 넘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늦은 장가를
간 상태였죠. 그러다가 그가 우르무치에서
지사장을 때려 눕혔다는 얘기는 자카르타까지 들려왔습니다.
지사 사무실에서 주먹다짐하여, 당연한 결과지만 본사에서 고졸사원들을 대상으로 잦은 스파링을 하고 기본적으로 덩치가 두배는 더 큰 그 친구가 지사장 이빨을 부러뜨렸다는 것입니다. 한국인 둘이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 하는 오지의 지사. 하지만 지사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그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서로 도와가며 오손도손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은 한번 크게 싸운 후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는 건 수학공식과도 같습니다. 우르무치 사건의 자세한 배경이야 알 수 없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또 다시 대충의 추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믿던 사업부장에게 온갖 아부를 떨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신장성 오지의 지사로 떠밀린 그는 역시 줄도 없어 보이는 지사장에게 앞으로 5년동안 쥐어 지낼지 아니면 공수부대 주먹 맛을 한번 보이고 앞으로 편하게 지낼지 주판알을 튕겨 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처참하게 체면이 깎인 지사장이 한국본사에 사표와 함께 그 친구의 징계요청서를 보내면서 불거진 사태의 전모는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전 세계에 곳곳에 나가 있는 지사장들의 경악을 자아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뜻밖에도 자카르타에서 이 친구의 전화를
몇 번인가 받았습니다. 자신도 정도를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한 탓인지 나에게까지 하소연하는 그의 전화
속 목소리는 많이 풀이 죽어 있었고 때로는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본사에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앙숙처럼 지냈지만 똑같이 지사생활을 하고 나 역시 ‘지사’라 불리우는 이 일인천하의 제국에서 숨막히고 있는 차에 그의 입장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조용히 수습되기엔 파장이
너무 컸고 누구나 그가 곧 서울로 소환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환이나 파면은커녕 이 사건으로 인해 취해진 후속 인사에서 그가 강력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오히려 중국에서 가장 요지 중 하나라 할 만한 광뚱성 광조우지사로 전임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회장 고교동창인 당시 사업부장의
입김이 닿았기 때문이었을까요? 본사시절 손금이 없어질 정도로 마주 비빈 끝에 애써 결국 움켜 잡고야
만 "줄"의 힘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먼저 회사를 그만 두고 광조우에서 가죽자켓 공장에 오더를 넣던 신심 좋은 박집사가 그를 만난 것은 우르무치 사태가 있은 지 두
달쯤 후였다고 합니다. 박집사도 그의 악명을 모르던 바 아니었지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얼굴을 객지에서 만난 반가움에 그를 극진히 대해 주었죠.
어느날 광조우 소재 한국지사장들과의 골프회동에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것을 이기지 못해 그를 끼워주기로 한 박집사는 당일 이침 그가 불쑥
예정에도 없던 중국사람을 한 명 더 데려와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라운딩은 4명 정원이지만 그 중국사람 때문에 5명이 되어버렸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곤란해 지사장들에게 민망해진 박집사는 그를 따로 불러 나무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쟤요? 쟤 별로 중요한 애 아니에요. 가라구
할까요?”
그의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기가 차고 만 박집사는 결국 중국사람을 끼우고 팀을 둘로 나누어 라운딩을 했지만 골프예절을 철저히 무시하는 그의 행동에 18홀을 진행하는 동안 박집사의 표정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신입사원 시절 당구를 치러 가면 다른 사람이 공을 칠 때마다 공포의
구찌겐세이를 구사해 왔던 그였습니다. 이제 골프에선 알까기나
타수 속이기는 기본에 가장 열을 받은 건 스윙하려고 할 때면 예외없이 그가 바로 옆에서 스윙연습을 하거나 불쑥 말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과장이 되고 해외지사까지 나왔지만 그는 여전히 큣대에 몸을 걸치고 재채기를 하는 척하며 상대방
실수를 유도하던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후 박집사의 고충은 점점 더해갔습니다. 밤이면
심심치 않게 술먹자고 찾아와 한바탕 난장판을 죽이며 곤드레가 되고 나면 갑자기 까불면 죽여버리겠다고 눈에 살기까지 띄다가도 다음 날이면 죄송하다며
아파트 난간에서 내려다 보이는 앞뜰에서 무릎꿇고 용서를 빌곤 했다는데 그런 날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게 그리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98년초 저조한 실적을 보인 수많은 지사들이 통폐합되는 운명을 겪었고 광주지사도 인근의 연락사무소 몇개와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이 친구의
생명력이 또다시 단연 돋보였습니다. 대부분의 지사장과 지사원들도 본사직원들과 매일반으로 한국에
소환되어 한직에 전보발령, 또는 강제휴직 당하거나 퇴직하는 상황에 광조우에서 별다른 임무도 없이 빈둥거리며
두각을 보이지 못했던 이 친구는 놀랍게도 홍콩 옆 샨토우에 일인지사장이 되어 영전하게 된 것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신임 기획실장으로 영전해 있던 회장동창 사업부장에게 평소
충실히 공작을 해놓은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전이 꼭 화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걔 떠날 때도 걔네 마누라 좀 이상하더라… 우리 와이프가 그러던데 여기가 좀…”
몇 년이 흘러 서울에서 술좌석을 만들어 만난 박집사는 그렇게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안됐다는 생각과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 이분해 오던 그가 자신의 아내를 그중 어느
쪽에 분류시켰을 지는 뻔한 일입니다. 그가 신입사원들, 줄
없는 상사들, 외주 공장장들, 중소거래선들을 대하듯
아내를 대했다면 몇 해가 지난 그때 아직 정상이라는 것이 더욱 놀라왔을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사고는 그로부터 2년 후에 터졌습니다. 몇 년 간 일인지사에서 잠잠하게 복지부동하고 있던 그가 어느 날 출장
온 홍콩 지사장을 사무실에서 때려 눕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번엔 수습하기엔 일이 너무 컸습니다. 홍콩지사장은 그전 우르무치 지사장처럼 차장급 정도가 아닌 본사 이사급이였고 뒤를 봐주었던 기획실장은
그 사이 그룹 비계열 회사의 사장이 되어 영전해 간 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잡고 있던
줄은 이미 그 한계효용을 다한 상태였던 것이죠.
단체로 퇴직한 의류팀의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고 잠시 한국에 돌아와 있던 내가
외출 중일 때 동업자들의 서울 회현동 사무실에 그가 찾아왔습니다. 같은 OB였던 우리들 중 그와 무던히도 부딪혔던 박사장도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그가
와있다는 말을 전화로 듣고 추운 겨울길을 일부러 빙빙 돌며 밖에서 시간을 때웠습니다. 사무실에
남아있던 두 친구는 오래 전 전직장에서 그에게 몇 번인가 귀싸대기를 맞았던 고졸사원 출신들이었는데 내가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통쾌함이 번져 있었습니다.
“권대리 왔다 갔는데… 중국에 회사 차리고 총경리가 됐데. 도와 달래 글쎄… 그것도
여전히 그 건방진 태도로 건들거리면서 말야, 참.”
도와 달라고 온 거였다면 그는 분명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도울 리
없는 이유는 그가 언젠가 반드시 우리 등에 또 다시 칼질을 하고 말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여 입사한 후 그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이 두 친구들은 술자리를 할 때마다 마지막 만난 기억조차 까마득한 그를 씹고 또 씹어 왔었습니다. 원한은 그렇게 오래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난 그가 새로 시작한 사업을 쉽게 실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난
이따금 내가 사업에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잔혹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는 그런 면에서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또 누군가 방패가 되고 힘이 되어줄 사람을 찾아 내어 그 엉덩이를 핥으며
비위를 맞출 것이고 자신의 앞길에 떨거지라고 생각되는 자들의 단물을 빨아먹고 나면 결국은 목을 치고 등에 비수를 박는 행위를 되풀이하면서 당분간은
눈부신 성공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그의 아내를 포함하여 그와 관계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파괴해 왔듯이 계속 주변의 인간관계를 파괴해 가면서
언젠가는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래서 가끔은 그가 지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2014. 12. 22 (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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