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처음 맛본 자카르타의 커피 본문
잊을 수 없는 첫 커피
자카르타에 부임해 오기 몇 해 전 딱 한 번 인도네시아에 출장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990년대 초의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난 인도네시아에 대한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리의 낭만적인 백사장을 사진으로만 몇 번 보았는데 상상 속에서는 그런 평화로운 낙원이 뜬금없이 자바섬 남부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고 늘씬한 서양 미녀들이 손바닥만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듯 안입은 듯 해변에서 선탠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입가의 침까지 훔치며 출장출발을 손꼽아 기다렸더랬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오래된 영화에서처럼 행상들과 거지들이 활주로까지 몰려나와 트랩에서 내리는 여행객들을 에워싸는 자카르타 공항을 상상하기도 했고 자카르타 주민들은 아침마다 타잔처럼 치타와 함께 줄타고 출근하고 나는 인디아나존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우거진 열대우림에서 정글도로 수풀을 내려치며 공장에 검품하러 가야 할 거라고 생각했었죠.
당연한 일이지만 그 상상들은 도착 당일 모두 깨져 버렸습니다. 손바닥만 그로테스크하게 커 보이는 차창 밖 도심곳곳의 동상들과 나름 세련된 디자인의 고층빌딩들 모습에 급기야 압도당하다가 다음날 아침 공장에 도착했을 때 인천 간석동, 오창 공단 등지에서 20명, 60명 짜리 소규모 봉제공장들만 보아 왔던 내 눈에 자카르타 북부 짜꿍(Cakung) 보세공단의 종업원 800명 규모의 우리 봉제공장은 실로 거대해 보였습니다. 잘 찾아보면 그 당시에도 인도네시아엔 수천 명, 수만 명짜리 공장들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 공장을 내가 받은 오더로 돌리고 있다는 생각에 치기 어린 자부심마저 북받쳐 올랐습니다.
호텔에서 나를 픽업한 공장장이 자기 사무실에서 밤새 들어온 팩스서류 정리하는 것을 기다리며 혼자 앉아 있던 상담실에 암본 출신 대머리 인사부장 아리스가 싱글거리며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수까르노 정권과 대립하다가 급기야 남말루꾸 공화국을 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던 암본 사람들은 훗날 수하르토 정권의 이주정책에 적극 부응해 인도네시아 전역에 뿌리 내렸는데 거리에서는 대체로 머리보다 몸 쓰는 일을 많이 했고 때로는 그들 특유의 결집력으로 과격한 실력행사마저 서슴지 않아 실제로 마피아 같은 단체활동이나 채무해결사 같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리스(Aris)는 그의 원래 이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줄임말이었습니다. 그의 외관은 전혀 철학적이지 않았으므로 사람과 이름이 따로 노는 모습에 웃어야 할지 당혹해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그의 아들 이름이 소크라테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며칠 동안 아리스의 얼굴만 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처음 보았던 그 날, 파푸아 식인종을 연상케 하는 그의 얼굴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놀랐고 싱글거리는 미소는 살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감히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상담실 문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던 순간 내 마음은 반사적으로 이렇게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저리 갓!! 가까이 오지 말란 말얏!!
당시 내가 배워온 인도네시아말은 달랑 세 마디였습니다.
(1) 이니 살라 (Ini Salah – 이거 틀렸어)
(2) 뻐르바이끼 이니 (Perbaiki ini - 이거 고쳐 줘)
(3) 바구스! (Bagus! - 조~아요).
제품 검사하러 왔으니 잘된 건 특별히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잘못된 게 발견되면 (1)번 이니 살라와 (2)번 뻐르바이끼 이니를 연이어 말하고 제대로 고쳐졌으면 (3)번 바구스로, 아니면 (1)번부터 다시 반복할 요량이었죠. 어휘력이 고작 그 정도였으니 하물며 아리스의 얼굴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인데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동작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잔을 들고 홀짝홀짝 마시는 시늉을 하며 “꼬삐? 꼬삐?” 하고 묻는 저 말이 ‘너 코피 한 번 터져 볼래?’ 하며 시비 거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누가 봐도 커피 마시겠냐는 뜻이죠. 난 아까의 당황함을 황망히 갈무리하고 아리스에게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네 번 째 인도네시아어 단어를 급히 암기했어요. 꼬삐…
잠시 후 커피를 들고 들어온 사람은 또 아리스입니다.
물론 난 그의 선의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모처럼 본사에서 온 출장자에게 손수 최선을 다해 커피를 타주려는 성의를 말입니다. 하지만 사무실에는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많고 소위 오피스걸이라고 부르는 야들야들한 여자 사환도 있는데 왜 정상적 크기의 찻잔이 아이들 소꿉장난감처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그 크고 우락부락한 손으로 내 커피를 받침접시도 없이 들고 와야 하는 것이며 차력시범을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아구까지 따른 뜨거운 커피물에 왜 엄지손톱을 반쯤 담그고 오는 것이냐 말입니다. 출렁거리다가 테이블에 약간 쏟아지면서 알갱이 가득한 잔해를 남기는 새까만 커피는 이제 단백질마저 풍부해 보였습니다.
나갈 줄 알았던 아리스는 미팅 테이블 건너편에 털썩 앉아 예의 그 식인종 같은 미소를 띤 채 날 계속 쳐다보는 중이고 난 잡아 먹히지 않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주는데 억지로 잡아 늘린 얼굴근육에 자꾸 경련이 일어납니다. 아리스가 뭔가 또 얘기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 그 얘기가 순식간에 내 머리 속에서 동시통역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말이지, 미스터르를 위해 특별히 직접 타서 만든 커핀데 크림이 좀 모자라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내 손톱에 낀 기름이라도 짜내서…. 나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모양입니다.
“실라깐 미눔, 실라깐.”
뭐 동시통역까지 되는데 이게 마시라는 얘기라는 건 동작만 봐도 알겠습니다.
군시절 회식 때 재떨이, 전투화에 소주 부어 마신 전력도 있고 그때도 아무 탈 나지 않았으니 이 커피도 못마실 건 없다고 결심은 서는데 왜 하필 이 대목에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휴지 대신 맨손을 수동식 비데의 일부로 사용한다는 얘기가 불현듯 떠오를까요? 그게 오른손이라던가 아니면 왼손…? 실라깐을 연신 열정적으로 되풀이하는 아리스의 부릅뜬 두 눈에 핏발이 섭니다. 빨리 안마시면 생명이 위태로울 판입니다.
첫 모금…!
갑자기 머리끝까지 열이 확 오릅니다. 이런 혁명적인 맛의 커피는 난생 처음입니다. 첫 모금이 목구멍을 채 흘러 내리기도 전, 혀가 얼얼하게 마비될 만큼 강렬한 단맛은 물엿보다 최소한 열 배는 더 달고 당시 우리 서울본사 앞 학다방 커피보다 체감당도가 백배는 더 단 것 같았습니다. 본사 출장자를 위해 탕비실의 설탕을 아낌없이 몽땅 투하한 것이 분명했어요. 삼키는 순간 곧바로 당뇨가 생길 것 같은 예감마저 스치는데 이 커피엔 뭔가 씹히는 것도 있었습니다. 모종의 분말들이 내 치아와 혀 위에 무수히 내려 앉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인간적으로 이게 아리스 손톱에서 나온 건 아니겠죠? 커피 한 잔 마시는데 부흥회 일주일쯤 다녀온 것마냥 신앙심마저 두터워집니다.
살려면 뱉어야 한다는 갈등이 후두부를 연타하고 있었지만 코앞에서 싱글거리며 내 표정을 들여다 보는 아리스의 커다란 얼굴은 무엇보다도 강한 무언의 압력입니다. 간신히 커피를 목구멍에 넘기고 억지로 눌러 내리자 식도까지 얼얼해 지면서 등에선 식은 땀이 솟아납니다. 커피잔을 내려다 보니 내 입이 닿았던 자리에 짙은 갈색 분말들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황당합니다. 저 분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순간 테이블 너머에서 고개를 갸우뚱 45도로 눕히고 나를 들여다 보는 아리스의 표정은 별식을 만들어온 주방장처럼 내 시식소감을 기대하는 겁니다. 텔레파시까지 막 되는데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사히 이 시련에서 벗어나려면 뭐라도 말하긴 해야 합니다. 물론 진심을 들켜서는 절대 안되죠. 그 절체절명의 순간,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인도네시아어 어휘 중 마침 딱 들어맞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난 뺨 힘줄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다시 억지웃음을 웃어 보이며 엄지손가락 치켜 들었습니다.
(3) 바구~스!.
이니 살라 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살인적인 단맛의 커피는 인도네시아 교민들이라면 이제 누구나 알고 있을 꼬삐 스르북(Kopi Serbuk)이라는 분말커피입니다. 그 커피는 몇 년 후 내가 정식 발령받아 자카르타 공장에 부임했을 때에도 여전히 제공되었지만 이번엔 상시 경계경보를 발령, 사환들에게 탕비실을 철통 사수하도록 한 것은 물론입니다. 아리스의 손톱을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번 설탕을 좀 덜 넣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입술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늘 엄청나게 달았습니다. 스타벅스와 커피빈이 들어오기 훨씬 오래 전, 인도네시아는 커피에 관한 한 정말 일관성 있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내가 다니는 회사도, 커피를 타주는 사람도 무수히 바뀌었지만 정도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 커피의 강렬한 당도는 여전히 변함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나 역시 이젠 커피가 충분히 달지 않으면 마실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은 인도네시아의 현실에서 매일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나와, 또 이곳 사람들에겐 그런 강한 단맛이 어쩌면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잔에 남은 꼬삐 스르북의 알갱이를 볼 때마다 그때 아리스가 타주었던 첫 커피를 기억하곤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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