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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박물관

호치민 박물관 (호치민소재)

beautician 2017. 5. 10. 10:00


호치민 [胡志明(호지명), Ho Chi Minh, 1890.5.19~1969.9.3]  

베트남의 혁명가·정치가, 구(舊)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재임 1946∼1969).

본명  Nguyen Tat Thanh
국적  베트남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베트남 게친주(州)


본명은 Nguyen Tat Thanh.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州)에서 농민출신 문인학자(文人學者)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프랑스선(船)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구엔아이 퀙[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1920년 프랑스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고,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르 파리아》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방부(東方部) 상임위원이 되었고, 이어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어, 조국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이듬해 홍콩의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일단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 독립 총봉기(總蜂起)를 목표로 세력을 키웠다.

1942∼1943년 중국국민당에 체포·투옥당한 무렵부터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지도하여, 구엔[阮]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8월혁명),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 1954년 디엔비엔푸의 승리로써 독립을 지켰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주석(대통령)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이상은 백과사전님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퍼온 자료임)




호치민에 소재한 호치민박물관은 쩐흥다오장군 동상을 기준점으로 똔득탕 부주석 기념관의 대척점에 있는데 규모는 하노이의 호치민 박물관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그곳에서 보는 호치민 시내와 사이공강의 전경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니까 이분, Nguyen Tat Thanh 동상은 호치민의 청년시절 본명을 쓴 것이네요.


박물관 바로 옆엔 이런 해상식당이 있었습니다.

이런 걸 우상화라 해야 할까요? 박물관 초입엔 이렇게 호치민의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똔득탕 부주석 기념관 입구에도 그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죠. 우상화라기보다는 베트남의 전통과 존경의 표시라 보는 게 합당할 듯 합니다.

젊은 시절의 호치민은 nguyen Ai Quok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다음은 인터넷의 Vietnam Tourism이라는 웹사이트에 기재된 당시의 내용들을 퍼온 것입니다.


세력을 확장해가던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쇠퇴기에 있던 봉건 군주국을 공격하였다. 엄청난 반발을 억누르고 왕위를 차지했던 응웬왕조(Nguyen Dynasty)는 봉건제를 재건하고 압력을 행사하던 강력한 기관들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소작농들의 반란은 계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마을 지주계급의 신분으로 태어나 매우 보수적이며 의례를 중시하는 유교사상 교육을 받은 고위관리들로 구성된 행정조직들은 곤란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기본적인 제반 시설만으로 남북으로 2,000킬로미터가 넘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고, 결국 중앙의 관리가 가장 취약했던 남부 지역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프랑스군이 침략하자,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파와 저항을 고수하는 파로 나누어졌다. 왕과 고위관리들은 프랑스군의 현대식 무기를 두려워하는가 하면, 베트남인들은 먼 곳에서 찾아온 프랑스의 방문 목적이 자신들의 땅을 지배하는 데 있기보다는 교역에 있다고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응웬의 군주는 내부적 혼란을 충분히 겪고 있었기에 외세의 공격에 대항할 의지도, 여력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결국 왕과 관리들은 '화의(hoa nghi)'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프랑스정부는 1857년 베트남 점령을 개시하였으나,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프랑스군이 베트남 전체를 점령하기까지는 30년이 걸렸다.
1887년 프랑스왕의 칙령에 따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로 구성된 인도차이나반도가 탄생하였다. 이 시기 프랑스의 사회, 경제 정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시행되었지만 20세기 초부터 식민지 정책은 대대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여러 방법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개발을 촉진시켰다. 광산업을 포함하여 여러 산업을 개발하기 위한 집중적 투자를 했으며, 벼농사 이외의 작물 재배를 위한 대규모 농장과 차, 커피, 고무와 같은 경제성 높은 작물들이 경작되었다. 농작물은 원자재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 구조의 변화는 베트남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간의 분리를 가져왔다.
교육제도 또한 변모했다. 유아, 초등, 중등의 세 단계 교육을 거치는 제도가 마련되었고, 이전의 시험제도는 1915년에 폐지되었으며, 1917년에는 프랑스식 행정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4년, 인도차이나반도 총독은 마을관리 체계를 재정비한다는 발표를 하는데, 이는 새로운 프랑스식 지주제를 확립하려던 프랑스 정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특히 경작자와 같은 노동계층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고, 농부들에게는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서 반계몽주의 정책을 펼쳤다.
한편, 다른 이념을 주장하던 베트남의 애국주의자들은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판보이쩌우(Phan Boi Chau)가 이끌었던 동유(Dong Du) 운동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이러한 운동에 참여했던 대표적 주체로는 '판쭈찐(Phan Chu Trinh)'과 '동경의숙 단체(Dong Kinh Nghia Thuc Group)' 등이 있다. 응웬 타이 혹(Nguyen Thai Hoc)과 그 지지자들은 저항운동을 하다가 결국 처형되었다. 호찌민(Nguyen Ai Quoc)은 1930년에 베트남 공산당 Vietnam’s Communist Party(당시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명명)을 창립하였고, 그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베트남 독립투쟁을 주도하였다.

프랑스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인도차이나의 자원과 노동력의 활용을 극대화하면서 베트남 내부의 모든 저항운동을 엄격히 단속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특히, 베트남에서 5만의 군사와 4만9천의 노동자들을 강제로 축출하여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한 대출이라는 명목으로 1,840만 피아스터에 달하는 자금과 336천 톤의 식량을 확보해갔고, 당시의 이러한 착취는 1914년-1917년 인도차이나에 자연재해가 닥쳐 농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됨에 따라 더더욱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베트남 독립운동은 격렬하기는 했지만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된 단체가 부족하였기에, 당시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저항운동을 제압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프랑스군의 상황을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다. 학자들의 움직임은 약화되어갔고 새롭게 등장한 사회적 세력들도 대규모의 운동으로 한 단계 나아가기에는 아직 미숙한 상태였다.

베트남의 광복(Quang Phuc)운동은 베트남 내의 민족주의자들과 해외에서 훈련된 혁명군의 합동 작전을 통해 하노이를 구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작전이 누설됨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남은 조직원들은 다른 단체에 합류하여 미개한 무기로 무장을 한채, 지방에서 대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6일 150명의 무장한 독립운동가들은 푸토(Phu Tho)의 수비대를 공격했고, 닌빈의 뇨꽌(Nho Quan)이나 중국 국경 인근의 몽까이(Mong Cai) 지방에 배치되어 있던 적들을 포위했지만 급습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광복(Quang Phuc) 운동의 일환으로 통낑(Tonkin)의 군사적?행정적 요지들을 공격할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1917년 8월 31일, 통낑(Tonkin)에서는 한 때 게릴라 운동(Hoang Hoa Tham)의 당원이었던 찐 반 깐(Trinh Van Can)과 광복(Quang Phuc) 운동의 일원이었던 르엉 응옥 꾸옌(Luong Ngoc Quyen) 의 지휘 하에 타이응웬(Thai Nguyen) 주둔지의 군사들이 반란을 시도했다. 많은 군사들이 참가하여 프랑스 장군을 죽이고,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확보했다. 또한 많은 정치수용범을 풀어주는데, 이들은 전투 부대에 합세하게 된다. 마침내 타이응웬(Thai Nguyen)은 적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이후 독립군들은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기 보다는 타이응웬에 있으면서 힘을 기르기로 결정하지만, 9월 4일 프랑스군은 다시 이 지역을 빼앗고 반란군들을 모두 내쫓았다. 타이응웬 근처의 산으로 흩어져 은신하던 운동군은 6개월 동안 2천의 프랑스군에 대항해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안남(Annam)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타이피엔(Thai Phien)과 쩐 까오 반(Tran Cao Van) 등 여러 학자들과 관리들의 지지를 받고 7살의 나이로 1907년 즉위한 주이떤(Duy Tan) 왕에 의한 반란이었다. 왕이 기반으로 삼았던 세력은 프랑스로 출발하기 위해 후에(Hue)에 모인 수천의 군사들이었다. 이들의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1916년 5월 3일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비밀이 누설되어 이들은 출발 직전 프랑스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다. 왕은 수도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붙잡혀 ‘결합의 섬(Island of Reunion)’으로 유배를 떠났다.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군대들도 순식간에 프랑스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타이피엔(Thai Phien)과 쩐 까오 반(Tran Cao Van)은 처형당했다.

코친차이나(Cochinchina)에서는 비밀조직의 결성으로 20세기 초부터 활발한 독립활동이 진행되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조직은 티엔 지아 호이(Thien Dia Hoi, 천지회)였는데 이와 관련된 운동이 사이공(Saigon) 주변 여러 지역에까지 퍼져있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대게 겉으로는 정치?종교 단체의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주요 활동은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밀조직 활동의 일환으로 스님 출신의 판씩롱(Phan Xich Long)이 1913년 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얀 의복과 터번을 착용하고, 미개한 무기로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주도자였던 판씩롱(Phan Xich Long)은 결국 프랑스군에 잡혀 처형당했다. 1916년 코친차이나의 비밀 조직들은 프랑스 지방총독의 처소와 사이공(Saigon)의 감옥 등 많은 행정적 요지들을 공격하였다. 1916년 2월 14일 밤, 수천의 사람들은 부적을 지닌 채 칼을 들고 사이공으로 돌격하여 프랑스 경찰 및 군대와 싸웠지만 결국 패하고 만다.


프랑스 식민통치부는 모든 독립운동을 철저히 제압하면서도, 전쟁 후의 좀 더 관대한 "자유주의" 통치를 약속하면서 몇몇 허울뿐인 정책들을 제시함으로써 베트남의 지식인 계층을 달래려고 하였지만, 이러한 제안들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사실상 프랑스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내내 베트남을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베트남 독립 운동의 결속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독립운동을 펼치는 애국자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신생 사회 세력들은 여전히 미숙한 상태로 이러한 저항운동에 필요한 활력과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사회 세력들이 충분히 발달되고 나서야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게 된다. 



호치민이 외국정상들, 외국사절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의 일부. 하노이의 호치민 박물관에는 이런 선물들이 전시실 몇개를 채우고 있었지만 호치민에 소재한 이 박물관엔 아주 일부만 전시되어 있는 듯 했습니다.



호치민주석과 똔득탕 부주석이 팔을 맞잡고 있는 사진이나 동상은 인도네시아에서 수카르노 초대대통령이 하타부통령과 함께 서 있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곳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호치민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 많습니다. 인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촌로의 이미지.




아마 이렇게 수배전단도 뿌려졌던 모양이고....(그냥 초상화였을까요...?)


천으로 된 발 같은 것에 그려진 호치민 초상

호치민 박물관에서 보이는 사이공강변의 전경은 그간 베트남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1969년에 돌아가신 호치민 할아버지가 흐믓해 하고 계시겠죠.








1951년이면 한국에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호치민은 프랑스와 맞서 싸우고 있었어요.




























돌아가신 지 반세기도 훌쩍 넘어 2014년 현재 이미 65년 전에 돌아가신 이 분이 아직도 모든 베트남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은 어떤 부분 때문이었을까요?



2014.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