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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 본문

베트남 박물관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

beautician 2017. 5. 9. 10:00

(본문은 엔하위키미러에서 퍼옴)


Trần Hưng Đạo (陳興道, 진흥도) ?~ 1300
쩔고 흥한다오
베트남 쩐(陳) 왕조의 명장. 베트남 구국의 영웅으로 한국사로 치면 충무공 이순신에 비견할 만한 인물.
본명은 쩐꾸옥뚜언(陳國峻)이지만, 황제 쩐 태종(陳太宗, 1225∼1258)의 조카로 작위가 흥다오브엉(興道王, 흥도왕)이었기 때문에 쩐 흥다오라고 불린다. 1257년 몽골 제국()의 제1차 침입 때 베트남의 북방을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1284∼1285년과 1287∼1288년의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제2차, 제3차 침입 때 그의 역할은 훨씬 더 결정적이었다. 이후 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제2차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 탕롱(昇龍:하노이)이 함락되고 황제 쩐 인종(陳仁宗)까지 항복을 고려하자, 그는 《격장사(檄將士)》라는 유명한 글을 써 장수와 병졸들에게 왕조의 위급을 호소하여 무려 25만에 달하는 장정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명하게도 이 병력으로 전면전을 시도하기보다는 청야전술게릴라전으로 일관하여 몽골군을 괴롭혔고[1],[2] 몽골군은 결국 풍토병[3]과 식량 부족으로 철수한다. 그 뒤 몽골이 세 번째로 침입하자, 그는 강폭은 매우 넓지만 도처에 얕은 여울이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함선의 운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인 바익당 강(白藤江, 현재의 송코이 강 혹은 홍하)을 전장으로 삼아, 강바닥에 말뚝을 박은 후 만조(滿潮) 때 몽골의 수군을 상류로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간조(干潮) 때 말뚝에 걸려 움직임이 멈춰버린 원의 군선들을 공격하여 피해를 크게 입혀 물러가게 하였다.



당시 모습을 묘사한 오스프리 삽화.


이후, 쿠빌라이 칸의 사망으로 원은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베트남 정벌을 포기하게 되었고 베트남은 역사상 몽골군을 격퇴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세계적인 슈퍼 파워하고 싸워서 이기는게 특기인가 보다.[4] 물론 그 당시 베트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의 한족 왕조로부터 독립 투쟁을 펼치고 또한 참파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대립을 했기 때문에 군사력이 강했다는 점이 있지만 상대가 이미 베트남보다 더 강력했던 금, 호라즘 등을 멸망시킨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몽골 제국과 맞서 세 차례나 물리친 것은 놀라운 업적이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왕에 봉해졌으며, 성종 이후로 인종과 영종을 보좌하다가 1300년 사망. 죽기 직전 영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군대는 부모자식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
사후에는 흥다오 대왕(興道大王)으로 신격화되어 기일에는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저서에 《병서요략(兵書要略)》, 《만겁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 등이 있는데, 모두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늘날까지 베트남에선 그를 기리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시기에는 남북 베트남 가릴것 없이 쩐흥다오를 자신들의 이미지로 삼으려 했다. 북베트남 입장에선 미군을 몽골과 같은 오랑캐로 규정해 그를 본받아 그들을 몽땅 까부수자는 목적이었고, 남베트남 입장에서도 월맹, 베트콩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식. 남베트남에선 자국 화폐의 디자인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남베트남 500동짜리 화폐의 모습 (1966년 유통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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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베트남도 군마가 부족해서 고려랑 송나라처럼 보병 중심이다. 그래서 기병중심의 몽골군과 싸우면 전면전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이런 전술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 [2] 이때 그는 베트남 지리에 맞는 함정 설치법,유인책,게릴라전법을 정리한 "병서요략"이란 책을 집필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베트남인들이 자체적으로 적과 싸울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책은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월맹과 베트콩에게 기본전략서로 활용되었다
  • [3] 베트남은 정글이 국토의 대부분이라서 병이 걸리기 쉽다. 프랑스군이랑 중국군, 미군도 베트남의 풍토병 때문에 골머리를 않았다.
  • [4] 특히 이집트의 경우는 소규모 부대가 격멸된 뒤에 재침공이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은 때맞춰 불어닥친 태풍 덕에 기사회생한 반면에, 베트남의 경우 대군을 보내기 쉬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서 이겼기에 더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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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쩐흥다오 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베트남 호치민 1군 한복판, 사이공강을 바라보는 다섯갈래길 로터리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쩐장군님이 이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사이공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도도히...


베트남에서의 이분 위상은 우리 이순신장군 수준이라지만 동상의 높이는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았습니다. 그대신 예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어요.

주변엔 이런 빌딩들이 높이높이 솟아


쩐장군님은 빌딩들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나마 사이공강 쪽이 탁 트여 있는 게 다행입니다.



동상 바로 앞엔 이런 향로가 놓여 있었습니다.

저렇게 쓴 것을 쩐흥다오로 읽는답니다.

동상 하단의 세 면 중 사이공강을 바라보는 두 면에 이런 부조가 붙어 있었어요.

칼과 향로에 얽힌 무슨 기사가 있었던 것도 같고

기본적으로는 몽골과의 항쟁이 그 주된 스토리인 듯 합니다.


이 철제화분도 1천년쯤 지나면 후세들이 골동품으로 취급하며 고가에 거래되겠죠.

동상 뒷면의 분수대

쩐흥다오 장군 동상공원 정면의 길을 건너서 바라보니 옆면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박력이 흘러넘칩니다.

몽골!! 네 이 노~~~~옴!!!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2014.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