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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41)] 라라먼둣: 담배 피는 정조의 아이콘

beautician 2022. 7. 10. 12:03

라라먼둣: 담배 피는 정조의 아이콘

 

 

라라먼둣 (Roro Mendut)

 

오래 전 자바섬 북쪽 해안, 정확히는 중부자바 빠띠(Pati) 지역의 떨룩찌깔(Teluk Cikal)이란 어촌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Adipati Pragolo II)가 다스리던 곳으로 마타람 술탄국의 영토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마타람의 세 번째 군주 술탄 아궁(Sultan Agung)의 시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는 마타람 시조 스노빠티의 증손자 뻘이었지만 선대의 복잡한 권력투쟁의 역사 속에서 마타람 왕실과는 대체로 척을 지고 있었습니다.

 

떨룩찌깔 마을에는 라라먼둣이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녀는 마치 그림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뿐 아니라 올곧고 강단있는 성품으로 이웃들의 사랑과 감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려고 많은 남자들이 멀리서도 찾아왔고 한번 그녀를 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푹 빠져 꽃과 보석을 바치며 청혼해 왔지만 그녀에겐 이미 깊이 사랑하는 정혼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관대작이나 큰 부자들이 찾아와 청혼해도 그녀는 늘 단칼에 거절했는데 그러한 담백하고 깔끔한 처신 역시 그녀의 미모 못지 않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정혼자 쁘라나찌트라(Pranacitra)은 마을에서 가장 잘 생긴 사내였고 엄청난 부를 일군 거상 냐이 싱아바롱(Nyai Singabarong)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라먼둣이 그의 배경이 아니라 그의 다정다감한 인성과 자신의 여자를 절대 지켜주려는 책임감에 감명받아 쁘라나찌트라라는 인간 자체를 더없이 존경하며 사랑했던 것입니다. 비단 사랑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라라(rara) 또는 로로(roro)라는 말은 자바어로 여인을 의미합니다. 먼둣(mendut)은 찹쌀가루와 코코넛 밀크를 섞어 작은 공 모양으로 만들어 속을 채운 후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스낵을 말하죠. 그러니 라라먼둣이란 실제 이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먼둣을 잘 만드는 (아름다운) 소녀’ 또는 ‘먼둣처럼 작고 달콤한 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름답다’는 묘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유는 라라 종그랑(Rara Djonggrang), 니로로키둘(Ni Rorokidul)처럼 자바 여인의 이름 앞에 ‘라라’ 또는 ‘로로’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자동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이 여인의 본명이 따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라라먼둣을 그녀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인 영주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쁘라골로는 라라먼둣을 자기 첩실로 들이고 싶어 몇 차례 선물을 보내 회유했으나 매번 단호한 거절에 좌절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쁘라골로 2세도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청혼도 거절당하자 그는 일단의 무사들을 시켜 라라먼둣을 강제로 납치하게 했습니다. 영주라면 그 정도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여기던 시대였습니다.

 

라라먼둣이 해변에서 홀로 생선들을 널어 말리고 있을 때 쁘라골로가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순순히 우리를 따라 끄라톤으로 가자”

그들은 라라먼둣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라라먼둣은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이 손을 놓으세요! 난 이미 정혼자가 있는 몸이요. 이미 몇 번이나 거절했던 것처럼 난 아디빠티 쁘라골로님의 첩실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무사들은 그녀를 강제로 마차에 태워 끄라톤으로 끌고 갔습니다. 영주의 끄라톤에 도착한 그녀는 니스망카(Ni Semangka)라는 이름의 지위높은 궁녀가 관리하는 아디빠티 궁의 한 전각에 머물며 영주의 첩에 걸맞는 온갖 몸단장을 강제로 하게 됩니다. 거기서 라라먼둣은 건둑 두쿠(Genduk Duku)라는 나이 어린 궁녀의 도움을 받게 되죠.

 

여기서 니스망카란 ‘수박부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두쿠(duku)란 동그란 노란색 껍질을 가진 열대과일을 말합니다. 건둑(genduk)은 여성, 소녀의 이름 앞에 붙여주는 경칭이므로 건둑 두쿠는 ‘두쿠양’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쁘라골로 2세 후궁들의 전각이 무슨 과일가게도 아닌데 저렇게 궁녀들 이름에 과일 이름이 붙은 것이 여성을 언제라도 먹어 치울 수 있는 맛있는 과일 정도로 보는 당시 쁘라골로 2세의 악취미를 반영한 실화가 아니라면 이 이야기가 정사(正史)가 아니라 비유와 상징을 담은 민화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달콤한 스낵 먼둣(mendut)이 과일가게에 함께 섞여 들어갔다는 점에서 라라먼둣이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이질적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죠.

 

두쿠 열매

 

그런데 라라먼둣이 쁘로골로의 후궁에 감금되어 있을 때 빠티 공국은 역사적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가 마타람 왕국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술탄 아궁이 그를 반역자로 지목하고 자신이 직접 선봉에서 서서 공격해온 것입니다. 영주가 왕실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분명한 반역의 조짐이었습니다. 그 옛날 마타람의 시조 스노빠티, 즉 수타위자야가 빠장왕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에도 처음 한 일은 빠장왕국 술탄 아디위자야의 왕실에 세금을 보내지 않고 중앙에서 온 징세관들을 회유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전장에서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는 금속으로 만든 신비로운 갑옷을 입고 있어 술탄 아궁 측의 군사들은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별로 신비할 것도 없는,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산 서양의 갑옷이었어요. 17세기 초 중부자바의 창칼이 그 갑옷을 뚫지 못했던 것입니다. 술탄의 양산을 받치고 있던 끼 나야다르마(Ki Nayadarma)라는 시종이 멀리서 함께 전황을 살펴보며 분개했습니다. 이름이나 칭호 한 구석에 끼(Ki 또는 Kyi)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그가 무술은 물론 삭티(Sakti)라는 도술에 일가견을 가진 고수나 미지의 영적 능력을 가진 도인의 자질을 가진 지도자급 인사라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끼 나야다르마는 그저 양산이나 받치는 일반 시종이 아니었던 겁니다.

 

“맙소사, 쁘라부 전하, 내가 나가 아디빠티 쁘라골로를 대적하게 허락하소서!”

“허락하마, 이 바루 끌린팅창(tombak Baru Klinting)을 사용하거라!”

술탄은 끼 나야다르마에게 왕국의 성유물 바루끌린팅 창을 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뽀노고로(Ponogoro)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의 이름입니다. 언젠가 따로 소개하게 될 이 마타람의 성유물 바루끌린팅 창은 용의 정수를 담은 신물(神物)이었습니다.

 

똠박 바루끌린팅은 아마도 이런 모습

 

끼 나야다르마는 술탄에게 받은 바루끌린팅 창을 휘두르며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에게 쇄도했으나 여전히 모든 공격이 갑옷에 막혀 그의 몸을 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기세가 오른 쁘라골로가 맹렬히 공격해 조자 찰라의 순간 끼 나야다르마가 갑옷 이음새의 헛점을 발견하여 창을 찔러 넣자 전장을 휘젓던 쁘라골로도 마침내 고꾸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멋지게 등장해 대단한 일을 해낸 끼 나야다르마는, 그러나 이것으로 술탄 아궁과 함께 이 이야기에서도 퇴장하고 다시는 무대 위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라라먼둣의 민화가 저런 대단한 인물들마저 까메오 엑스트라로 사용한 셈입니다.

 

그 대신 이 대목에서 마타람의 정벌군 사령관 뚜먼궁 위라구나(Tumenggung Wiraguna)가 등장합니다. 뚜먼궁은 아디빠티 못지 않은 높은 귀족 영주의 칭호입니다. 그는 군사들과 빠티 영지로 진입해 처절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후궁에 갇혀 있던 라라먼둣도 전리품으로 마타람군 손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본 뚜먼궁 위라구나도 단번에 그 아름다움에 취해 라라먼둣을 마타람으로 데려가 자신의 첩실로 삼고자 했습니다. 여자들에게 있어 남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적군이나 아군이나 어쩌면 다 똑 같은 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라라먼둣이 부지중에 품고 있던 마성의 매력을 탓해야 할지도요.

 

하지만 라라먼둣은 뚜먼궁 위라구나의 회유와 청혼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위라구나에게 불려나간 자리에서 자신은 고향에서 쁘라나찌트라와 이미 정혼한 사이라고 또렷이 밝힌 것입니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뚜먼궁 위라구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권세를 가진 이들일수록 매우 높은 확율로 남들의 피와 눈물보다 자신의 욕망과 체면이 더 중요하고 그 욕구를 풀기 위해서 얼마든지 남들을 희생시킬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죠. 많은 나라들의 다양한 역사가 증명하는 그 사실을 라라먼둣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라라먼둣, 네가 정히 내 첩이 되고 싶지 않다면 죽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를 대신해 그가 그동안 내지 않은 세금을 그의 후궁이었던 네가 낼 것을 명한다. 세금을 마지막 한 푼까지 모두 내기 전엔 절대로 이 궁전을 떠나지 못할 것이야. 아마도 영원히!”

뚜먼궁 위라구나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라라먼둣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뚜먼궁 위라구나의 위협에 굴복해 그의 첩이 되는 것보다 세금을 내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세금을 내기 위해 시장에서 담배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뚜먼궁 위라구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 요청을 승인했습니다. 그 예쁜 얼굴로 고작 생각해 낸 것이 담배장사였냐고 비웃으면서요.

 

그런데 라라먼둣의 담배장사는 너무나 잘되었습니다. 그녀는 담배를 말아 궐련을 만들었습니다. 담배를 말아 끝부분을 붙일 때 접착제 용도로 라라먼둣이 침을 발라 붙였는데 그녀에게 반한 사람들은 그녀의 침이 뭍은 담배에 환장했던 것입니다. 당시 중부자바의 남자들 상당수가 묘한 피티쉬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특히 그녀가 피우던 담배는 더욱 인기가 많아 이를 사려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시장에서 장사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라라먼둣의 담배를 사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담배장사가 대박이 나면서 쁘라골로가 빚진 세금을 대신 완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라라먼둣을 다룬 모든 책과 영화에서 라라먼둣은 한결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느날 라라먼둣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중 멀리서 천신만고 끝에 자신을 찾아온 정혼자 쁘라나찌트라를 만났습니다. 그는 라라먼둣을 구출해 마타람왕국을 탈출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위라구나에게 감시받고 있던 라라먼둣이 감시와 추격을 따돌리고 멀리 달아나기 위해서는 한동안 뚜먼궁의 눈을 붙잡아 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라라먼둣은 영주의 궁전으로 들어가 위라구나가 총애하는 첩실 중 한 명인 뿌뜨리 아루마르디(kepada Putri Arumardi)에게 자신이 정혼자인 쁘라나찌트라를 만난 사실과 그와 함께 궁전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뿌뜨리 아루마르디는 위라구나가 더 이상 첩실을 늘려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자신이 그곳을 나간다고 하면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란 계산이었습니다. 그녀의 예측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뿌뜨리 아루마르디로서는 뚜먼궁 위라구나가 라라먼둣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라라먼둣을 후궁에서 내보내는 것은 만만찮은 경쟁자를 한 명을 줄이는 셈이었습니다. 그녀는 냐이 아젱(Nyai Ajeng)이라는 또 다른 후궁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라라먼둣이 궁에서 빼돌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가 뚜먼궁과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마타람 땅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혼자와 함께 고향 빠띠로 돌아가거나 어딘가에서 숨어 살 수 있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들의 탈출을 알아차린 위라구나가 보낸 병사들에게 금방 따라 잡히고 말았습니다. 위라구나는 라라먼둣을 궁으로 압송하는 한편 쁘라나찌트라를 추방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수하들을 시켜 몰래 죽여버렸습니다. 라라먼둣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다시 헤어지게 된 정혼자를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쁘라나찌트라의 시신은 족자에서 9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간두마을(Desa Gandhu) 쯔뽀란(Ceporan)의 작은 숲 속에 묻혔습니다.

 

쁘라나찌트라를 해치운 뚜먼궁 위라구나는 다시 집요하게 라라먼둣에게 자신의 첩실이 되어 수청을 들도록 회휴했으나 라라먼둣은 여전히 기개가 꺾이지 않은 채 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뚜먼궁님! 저는 뚜먼궁께서 명한 대로 쁘라골로 2세가 내지 않은 세금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계속 잡아 두시려는 겁니까? 저는 의무를 다했으니 뚜먼궁님도 약속을 지켜 주세요!”

라라먼둣의 조리있는 요구에 오히려 격분하여 눈이 뒤집힌 위라구나는 라라먼둣에게 정혼자가 이미 목이 잘려 땅속에서 해골이 되었을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이제라도 돌아가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사람에게 시집가겠다는 건가? 라라먼둣, 네가 날 거절하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라먼둣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직도 못알아들은 게냐? 네가 사랑하는 그 정혼자는 이미 죽었단 말이다.”

 

자신을 구하러 온 정혼자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지만 역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뚜먼궁 위라구나는 정혼자의 시체를 보여주고 그녀의 기개를 꺽으려 했습니다.

“못믿겠다면 그 녀석이 묻힌 곳을 보여주마!”

뚜먼궁 위라구나는 라라먼둣을 마차에 태워 쁘라나찌트라가 묻힌 곳까지 끌고 갔습니다. 파헤친 무덤 속에 아무렇게나 묻혀 있던 쁘라나찌트라의 시신을 확인한 라라먼둣은 북받치는 슬픔과 괴로움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네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느냐?”

라라먼둣은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들고 무서운 얼굴로 뚜먼궁 위라구나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녀는 위라구나의 악행을 마타람의 왕 술탄 아궁에게 고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당신의 악행은 이미 정도를 넘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당신의 왕에게도 죄를 지은 거에요! 난 당신의 악행을 마타람의 술탄에게 알려 당신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요!”

뚜먼궁 위라구나는 그렇게 소리치는 라라먼둣의 손을 잡아 끌고 다시 마차에 태우려 했습니다. 라라먼둣을 뚜먼궁의 저택에 가둬 두면 절대 그녀가 술탄 아궁을 만나게 될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요.

 

하지만 여전히 저항하며 몸부림치던 라라먼둣은 마침내 위라구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서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끄리스 단검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그런 후 곧바로 돌아서 쁘라나찌트라가 묻힌 곳으로 달려 가자 위라구나가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습니다.

“멈춰라! 게 섰거라!”

 

쁘라나찌트라의 무덤에 다다른 라라먼둣은 칼끝을 자신의 목 쇄골 사이의 움푹한 곳에 겨누었습니다. 자결하려는 것이었죠.

“잠깐, 그러지 말거라, 그러지 마!”

뚜먼궁 위라구나가 급히 그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끄리스 칼은 손잡이가 쇄골에 닿도록 그녀의 목을 깊숙히 파고들어 칼끝이 심장을 찔렀습니다. 라라먼둣은 그대로 쓰려져 쁘라나찌트라의 무덤 위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판본은 뚜먼궁 위라구나가 그제서야 자신이 부당한 욕심을 부려 젊은 두 사람을 죽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묘사합니다. 그가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면 라라먼둣은 자결하지 않았을 터이니까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주워담을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에 따라 순결을 지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라라먼둣을, 뚜먼궁 위라구나는 그녀의 정인 쁘라나찌트라의 무덤에 합사하고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권세를 휘두르며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뚜먼궁이 그렇게 간단히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실수 또는 고의로 누군가를 불행한 죽음으로 이끈 사람들이 후회하고 회개하기보다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꽁꽁 숨기고 사람들 입을 막는 것을 우린 수도 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실수로 여백사 부부를 죽인 조조가 사람들 입을 막기 위해 그 집안 사람들을 모두 도륙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이니까요.

 

장담컨데 뚜먼궁 위라구나는 이 민화의 결론과는 달리 절대 후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고서 죽는 날까지 라라먼둣 같은 희생자들을 수없이 만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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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먼둣의 이야기는 암바라와 출신 작가 Y.B 망운위자야(Y.B. Mangunwijaya)가 1982년부터 1987년 사이 일간 꼼빠스에 연재한 3연작 소설 속에 등장하는데 각각의 소설명은 ‘라라먼둣(Rara Mendut)’, ‘건둑 두꾸(Genduk Duku)’, ‘루시 린드리(Lusi Lindri)’였습니다. 이 3연작은 2008년 ‘라라먼둣: 트리올로지’(Rara Mendut: Sebuah Trilogi)라는 제목으로 그라메디아(GPU)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마타람 시대 민화의 원형라기보다는 후대에 작가적 각색이 크게 가미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괴담과는 좀 거리가 멀었지만 뭐, 그 동안에도 동화와 전설, 민화들이 잔뜩 나와 귀신들을 멀리 밀어냈는데 이번엔 조금 더 멀리 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끊임없이 집적거리며 괴롭히는 사회,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당연시하는 권력자들의 사고방식은 어떤 귀신이야기보다 더 소름끼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