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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술라웨시의 멧돼지 사냥꾼 이야기

beautician 2022. 6. 17. 23:19

라웡고(Lawongo)와 나뽐발루 섬(Pulau Napombalu) 이야기

 

 

술라웨시 전통 피리

 

북부 술라웨시 까바루안 섬(Pulau Kabaruan)에 라웡고(Lawongo)라는 잘 생긴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멧돼지 사냥꾼이었는데 피리를 부는 데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냥보다 피리부는 재주가 더욱 유명할 정도였고 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관심과 호감을 표하곤 했습니다. 예술가들이 사냥꾼보다 사랑받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지 못한 그는 종종 섬을 순회하면서 피리실력을 선보이며 그곳 여성들을 만나보려 했습니다.

 

어느날 그가 다마우 마을(Desa Damau)에 도착하자 그의 소문을 익히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피리연주를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거기엔 젊은 여인들도 많이 있었는데 연주가 한참 진행되던 중 라원도의 시선이 군중 속에 있던 한 여인에게 머물렀습니다. 한눈에 반하는 순간이었죠. 그는 그 처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피리연주를 했고 그녀 역시 라원도에게 호감 가득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 마을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처녀만은 그곳에 남아 라원도를 응시했으므로 라원도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예쁜 아가씨! 내 피리연주 괜찮았나요?” 그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무척요. 피리연주 너무 좋았어요.”

처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답했습니다.

 

그녀의 기꺼운 대답을 들은 라원도는 주저없이 자신의 감정을 운율에 담아 표현했습니다.

 

어디로 가려 하시나요?

일본을 떠나 중국의 항구로 향하시나요?
만약 물어봐도 된다면

막 피어난 이 꽃봉오리는 누구 것인가요?

일본을 떠나 중국의 항구로 향하시나요?
싱가포르엔 잠시 들르시나요?
막 피어난 이 꽃봉오리는 누구 것인가요?

내가 따가고 될까요?

 

그러나 처녀도 운율로 답했습니다.

 

갈대를 잘라 천에 붙인 듯
자수 선명한 소매 끝단

사람들 위해 내놓은 음식

이미 준비되었으면 이젠 가약을 맺을 때

자수 선명한 소매 끝단
긴 창 위에 매단 후
이미 준비되었으면 이젠 가약을 맺을 때
신이 그의 의지를 알려주겠지.

 

분명한 수준차이가 보일 정도로 여인의 운율이 더욱 심오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가약을 맺었습니다.

 

자스민 꽃을 집 앞에 묻으리
우린 나란히 헤엄치는 두 마리 해파리
만약 한날 한시 함께 죽으면
한 무덤 속 우리 둘 함께 묻히리

우린 나란히 헤엄치는 두 마리 해파리

자스민 꽃 두 송이 줄기 채 눕히듯
우리 두 사람 서로 나란히
한 무덤 속 우리 둘 함께 묻히리

 

라웡고는 그 처녀와 혼인하고 다마우 마을에 눌러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멧돼지 사냥을 했습니다. 그의 사냥실력은 매우 뛰어나 거의 매일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아오곤 했습니다. 마을사람들도 그동안 산에서 내려와 농작물을 망치는 멧돼지들 때문에 골머리를 썪었는데 라웡고가 온 이후 멧돼지 피해가 크게 줄어 기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밤에는 온 마을사람들이 라웡고가 연주하는 감미로운 피리소리를 즐겼습니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그의 연주를 칭찬했고 젊은 여자들이 호감을 표해오기도 했지만 라웡고는 그들에게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결혼 후 늘 함께 하기로 맹세한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하고도 평온한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에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라웡고는 어느날 밤 꿈 속에서 숲 속을 달리며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쫓고 있던 멧돼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놈이었습니다. 그는 있는 힘껏 창을 던졌지만 등에 창이 꽃히고서도 멧돼지는 쓰러지긴커녕 더욱 맹렬히 날뛰었습니다. 멧돼지가 오히려 방향을 바꾸어 라웡고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목숨에 위협을 느낀 그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고 멧돼지의 오른쪽 배를 깊숙이 찔렀습니다. 멧돼지는 그제서야 쓰러져 목숨이 끊어졌습니다. 한숨을 돌린 그가 칼을 칼집에 도로 넣고 멧돼지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보여주려는데 막 꿈에서 깨고 말았습니다. 아직 깊은 밤이었으므로 그는 아내 곁에서 다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라웡고는 사냥준비를 마치고 창과 칼로 무장하고 출발했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굳이 아내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숲 속에서 반나절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멧돼지는 물론 다른 동물들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라웡고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목이 마른 그는 야자열매를 하나 땄습니다. 그걸 열려고 칼을 꺼내는데 칼집에서 잘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라웡고가 힘을 줘서 간신히 칼을 뽑자 칼엔 얼룩진 피가 굳어 있었습니다. 칼집 안에서 피가 굳어 칼이 잘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불현듯 밤에 꾸었던 꿈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자고 있던 아내도 떠올렸습니다. 그의 등뼈를 따라 차가운 소름이 스쳐갔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급히 집으로 내달렸습니다. 집 앞엔 마을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라웡고, 미안하네. 우리가 왔을 때 자네 아내의 몸은 차디차게 식어 있었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라웡고는 자신이 지난 밤 잠을 자며 잠꼬대를 하다가 아내를 칼로 찌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아내의 시신은 광목 천에 덮여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아내의 시신 앞에 선 라웡고가 천을 살며시 들어올려 들여다보니 아내의 배에서 솟아나온 다량의 피가 옷에 뭉쳐 굳어 있었습니다.

 

라웡고는 절규하며 자신이 간밤에 아내를 죽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맹세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무덤에 눕는 것이었죠.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관 두 개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는 아내의 것, 다른 하나는 라웡고 자신의 것이었죠.

 

“라웡고, 그러지 말게. 아내와 함께 죽겠다니. 자넨 아직 젊어. 그리고 말을 사람들은 자네의 피리연주를 언제까지나 듣고 싶어 한다네. 그러니 죽지 말고 살아주게.” 마을의 장로가 그렇게 얘기했지만 라웡고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습니다. 그는 아내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을사람들에게 빨리 무덤을 파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죽어서라도 무덤 속에서 피리를 불어드릴게요.”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무덤과 관이 준비되고 라웡고는 아내와 함께 묻힐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는 관에 들어가면서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무덤 속에서 내 피리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더 이상 무덤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해변가로 나가 이상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평선에 뭔가 기이한 것이 보인다면 그건 내가 변한 화신일 거에요. 기억하세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말고 비명을 지를 필요도 없어요. 해변에서 조용히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세요.”

 

그렇게 라웡고가 아내와 함께 무덤에 묻힌 후 첫 날과 둘째 날에는 아직 그의 피리소리가 크고 분명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셋째 날부터 점점 작아지더니 넷째, 다섯째 날에는 귀를 쫑긋 기울여야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가 일곱째 날이 되자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라웡고가 관에 들어가기 전 한 말을 기억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라웡고의 가족, 지인들은 물론 다마우 마을 사람 모두가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해변에 둘러 앉아 라웡고가 말했던 이상한 물체가 수평선에 나타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하나둘 라웡고가 남긴 말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어쩌면 라웡고가 죽기 전 헛소리를 한 걸 거야.”

“그래, 그 놈이 우리 모두를 속인 걸지도 몰라.”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마을 사람들이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라웡고 아내의 가족들이 그들을 달랬습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평선에 거뭇거뭇한 물체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검은 그림자는 점점 다마우 마을 해변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놀라 입을 떡 벌렸지만 라웡고가 말한 대로 비명을 지르거나 손가락을 가리키지도 않고서 그저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 검은 물체가 점점 더 해안에 다가오자 그들은 그 물체가 자기 마을과 충돌해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해변에서 내륙으로 달려 도망가려 할 때 그 물체도 바다 한 가운데에서 더 이상 다가오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 물체를 유심히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그 거대한 물체에 접근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산호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섬을 나뽐발루(Napombalu)라고 이름지었는데 나뽀(napo)는 산호섬이란 뜻이고 나왈루(nawalu)는 이상한 물체라는 뜻으로 이상한 물체가 산호섬이 되었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나뽐발루 섬은 대만조기에는 완전히 바다물 속에 잠겼다가 간조기에 그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냅니다.

 

나뽐발루 섬의 출현 아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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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에 피리 연주자, 사랑꾼, 그리고 아내를 죽인 죄책감으로 함께 무덤에 묻힌 남자……, 이 스토리가 왜 뜬금없이 산호섬의 출현으로 끝나는지 그 전개가 좀 아쉽습니다. 관에 들어가기 직전 라웡고가 산호섬의 출현을 예언하는 능력을 발현한 것 역시 밑도끝도 없고요. 이 민화가 전해 내려오던 그 긴 시간 동안 스토리를 적당히 주물러 줄 작가적 역량을 지닌 이야기꾼이 없었던 것이 대참사를 부른 모양새가 되었습니다.(끝)

 

 

출처:

https://histori.id/kisah-lawongo-dan-asal-mula-pulau-napombalu/